<기린의 미리덕질>-르귄의 말들(1)

기린
2024-02-19 15:12
130

1.지킬앤 하이드의 추억

 

나의 십대는 책에 ‘고팠던’ 시절이기도 했다. 동네에 책 있는 집도 거의 없었고, 학교 도서관은 너무 빈약했다. 그 와중에 누구네 집에 있는 전집(동아 무슨 시리즈였던가)이 부럽기도 했다. 그런데! 중2 무렵 큰오라버니께서 공고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첫 월급을 받아서 나에게 전집 한 질을 선물해 주었다. 어쩌다 이런 기억이 떠오르는지 쩝. 여튼 남의 집 책 안 부러워하고 내 책꽂이에서 야곰야곰 꺼내 읽던 세계 문학 전집(두껍지 않은 요약본에 가까웠지만)의 기억. 그 중에서 『제인 에어』나 『작은 아씨들』 등은 거듭 읽기도 했다. 그 중에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가 있었다. 첫 기억은 음산했던, 두 사람이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과학기술로 그게 가능하다고 상상하는 것이 신기했던 정도로 기억에 남았다.

 

 

 

 다 잊었던 기억이 이렇게 다시 떠오른 건 SF세미나를 시작하기 전, 르귄의 에세이집 『밤의 언어』를 읽었는데 거기서 하이드 씨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인간 정신의 이면에 존재하는, 인간 의식의 그늘 속 형제라고 할 수 있다. 카인이며, 칼리반이며,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며, 하이드 씨다.”(121) 르귄이 이 문장을 아이들에게 판타지 작품을 읽히는 것은 해롭다는 주장에 반박하는 내용의 맥락에서 썼다. 즉 판타지에 내재한 현실 도피적 요소를 지적하면서 현실에 충실한 책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이다. 르귄은 아이들에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법을 가르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 방법으로 사실적인 소설은 적합한 매체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집합의식의 피상적인 외면에, 진부한 도덕주의에, 다양한 부류의 현실 투사에 발목을 잡히기 일쑤며, 결국 악당과 선인의 구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133) 덧붙여 르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악을 직시하지 않고 ‘문제’로 여기는 이런 태도야말로 현실도피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평생 고통과 고뇌와 낭비와 상실과 불의를 겪게 될 것이며, 직시하고 꾸준히 극복하고 또 극복하며 인정하고 함께 사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그래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133)

 

SF 소설과 판타지 소설의 경계를 흐리는 작품들을 써 온 르귄은 상상력에 기반한 판타지야말로 “영적인 여정과 영혼 속에서 벌어지는 선과 악의 사투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언어”로 써진 작품이라고 주장한다. 십대에 읽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는 나에게 악당과 선인의 이분법을 헷갈리게 하는 음산한 기운이 뿜뿜했었다. 르귄의 상상력으로 그려내는 ‘인간다운 삶’이 궁금해졌다. 바야흐로 르귄의 소설을 향한 덕질에 불씨가 당겨졌다.

 

2024 인문약방의 덕질 세미나는 SF소설로 '변화'를 사유하는 르귄과 버틀러를 읽습니다~~
올 한해 그들과 함께 '새로운' 덕질의 경험을 함께 할 친구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미나는 3월 21일에 시작합니다~~

댓글 1
  • 2024-02-20 09:12

    와.... <지킬박사와 하이드> , the classic!!

    저도 덕질하는 신체로 빠르게 변신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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