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특강] 후기

스프링
2024-03-05 19:38
927

이게 웬일입니까? 자율과 절제를 말하는 일리치 강의에 넘치는 것 투성이라니. 줌 화면을 세 페이지나 채우는 수강생들. 자그만치 65명이나 들어왔답니다. 한 시간 반 예정을 훌쩍 넘겨 두 시간을 꽉꽉 채운 안희곤 샘의 조곤조곤 잔잔한 열정. 희곤샘은 성장의 도구로서의 제도, 경제 원리로서의 젠더, 반성장주의 맥락에서의 생태를 키워드로 일리치의 생애와 저작을 균형 있게 훑어 주었습니다. 어느 하나 풍성하지 않은 게 없었네요. 일리치가 멕시코의 대안대학 CDIDOC(문화간 문헌자료센터)에서 동료들과 함께 했던 공부가 이런 분위기였을까요? 학교 제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율적 선택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고, 지식을 나누는 가운데 기쁨이 넘쳐나는.

 

 

1. 성장의 도구로서의 제도

지속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현대 산업사회는 끊임없이 필요를 발명하고 상품을 독점하고 전문가와 제도를 독점합니다. 필요를 발명하기 위해 욕구를 잘게 나누어 세분하기도 하고, 상품을 패키지화하기도 합니다. 자동차를 산다는 것은 연료, 도로 유지 세금, 보험 등 자동차와 관련된 패키지 상품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 성장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고속도로가 뚫리고 철도가 놓인 결과 버스와 기차가 정차하지 않는 지역은 더 낙후되었습니다. 성장이 보편적 복지를 가져오긴 커녕 부익부 빈익빈이 더 심화되었습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빈민들과 함께 살면서 현대 산업사회의 이러한 폐해를 목격한 일리치는 로마 교황청의 남미 선교 정책과 미국의 남미 원조 계획을 비판했습니다. 학교, 병원, 자동차 등 성장의 도구로서의 제도에 대해서도 비판했습니다. “Corruptio Optimi Pessima" 최상의 것이 부패하면 최악의 것이 된다. 교회가 타락한 결과가 근대의 제도라는 것입니다. 신이 죽고 인간이 주체로 등장한 것이 근대라고 흔히들 말하지만, 일리치는 교회의 단절이 아닌 교회제도의 세속적 확대가 근대라고 말합니다. 학교, 자동차, 병원 등 그의 제도 비판은 교회 비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기독교의 초기 이념이 타락한 것처럼, 배움과 건강과 이동에 대한 인간의 자율적 능력이, 강제된 학교(학교화), 병원, 자동차에 의해 무력화됐다는 비판입니다.

 

교회권력의 세속화를 비판하던 일리치는 43세(1968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소환을 당하고, 이듬해 사제직을 사임합니다. 1976년에는 CIDOC를 폐쇄하고 더욱 깊은 근원을 탐구하기 위해 근대가 형성된 12세기 연구에 몰두합니다.

 

2. 경제 원리로서의 젠더

교황청으로부터의 소환만큼이나 그의 인생에 크나큰 배신은 진보진영으로부터의 축출(?)이었습니다. 1982년 버클리대학교에서 한 젠더 관련 강연으로 인해 좌파, 페미니즘 등 범 진보 진영에서 일리치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여전히 일리치의 젠더는 논쟁적입니다. 당시 실비아 페데리치를 필두로 한 페미니스트들은 경제적 평등과 가사노동에 대한 유급 보상을 주장했습니다. 일리치는 그림자노동에 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 노동 자체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은 페미니즘의 갈래도 다양해져서 일리치의 이런 주장에 대해 찬반이 다 있습니다.

 

저는 생물학적 성인 sex는 고정적인 것이고 gender가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일리치는 sex가 만들어진 것이라며 트랜스젠더를 예시로 듭니다. 남성과 여성의 특성, 남성과 여성의 일 등 젠더는 정해져 있는 것이지만, 모든 사회에서 똑같이 나타나진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젠더는 개인이 가진 특성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부여된 여성과 남성의 집단적 특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낫을 든 남성, 호미를 든 여성처럼 젠더는 도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합니다. 일리치는 젠더를 상호보완적인 집단으로 봅니다. 들으면서 알 듯 모를 듯 상당히 헷갈렸는데요, 올해 「젠더」를 읽으면서 다시 살펴보고 싶네요.

 

 

 

 

3. 반성장주의 맥락에서의 생태주의

일리치는 성장 이데올로기와 생태 위기의 관계를 최초로 지적한 사상가입니다. 성장 이데올로기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체계를 만들고, 생산자원과 금융, 사회관계를 독점하여 불평등을 심화하고 결국은 생태계를 파괴합니다. 성장 이데올로기를 폐기하지 않는 한 생산량은 줄지 않을 것이고 오염 방지 대책은 미봉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폐기물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아닌 미래, 내가 없는 다른 어딘가에 버려질 것이고, 그곳에서 몇 배의 피해를 낳을 수 있는 장치나 재료나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오염 방지 대책의 의무화는 생산물의 단가만 높일 뿐입니다.

 

생태 전체주의와 생명 우상화에 대한 경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일리치의 탁월한 통찰력에 감탄했습니다. 생명을 숭배하고 우상화하는 것은 고통과 죽음을 나쁘고 제거해야 하는 것으로 만드는 태도와 동전의 양면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생명, 건강, 활력을 노동의 생산성과 연관시켜 나치즘으로 빠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100세 시대를 외치는 현대 사회에서 수명은 늘어났지만, 아픈 상태로 사는 기간 역시 늘었습니다. 이제 오래 사는 것은 기정사실이고, 어떻게 건강한 상태로 오래 살 것인가를 고민합니다. ‘쾌’의 상태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욕망이 일리치가 비판하는 ‘성장’의 동력입니다.

 

생겨난 것은 사라져야 새로운 생(生)으로 이어집니다. 죽지 않으면 부패합니다. 일리치는 기존의 가치나 제도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의 순응을 말합니다.(? 이 부분은 기억이 정확하지 않네요.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것이 자율적인 삶이 아닌가 싶네요. 유한한 삶은 우리의 조건입니다. 다만 누리고 감사할 뿐이라는 일리치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삶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타인을 환대하고 우정을 나누며 나를 가능하게 한 존재들에게 감사하는 삶을 노래한 일리치에 대한 이야기로 훈훈하게 마무리 했습니다. 영성 충만한 시간이었네요.

 

 

 

폭넓은 지식과 탁월한 언어 능력으로 가톨릭계에서 촉망받는 인재였던 그는 ‘교회왕자’, ‘몬시뇰’이라고도 불렸다고 합니다. 25세에 사제 서품을 받고 30세에 푸에르토리코 가톨릭대 부총장을 역임합니다. 35세부터 멕시코에서 대안대학 CIDOC(Center for Intercultural Documentation 문화간 문헌자료센터)를 설립·운영합니다. 이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많은 지식인들과 교류한 결과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그의 책들입니다.

 

안희곤 샘은 일리치 책을 두 권이나 번역하셨고, 10권의 전집을 근 10년에 걸쳐 만들고 있는 출판사(사월의 책)의 대표입니다. 일리치에 대한 애정이 깊으셔서 우리에게 짧은 시간 동안 일리치 사상의 핵심을 하나라도 더 전달하려는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일리치는 어떤 하나의 이론체계를 가진 철학자가 아닙니다. 그의 사상은 패치워크와 같아서 한 책에서 완결된 사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어떤 책에서 말한 내용의 실마리가 다른 책에서 발견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안희곤 샘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권의 책만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책들을 같이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올해 문탁에서는 일리치의 책 다섯 권을 함께 읽어보려 합니다. 관심있는 분들의 자발적 표현을 상상해봅니다. 헤벌쭉.

댓글 14
  • 2024-03-05 20:33

    일리치는 처음이었는데, 안희곤 선생님 덕분에 큰 맥락은 잡을 수 있었던 재미있는 강의였어요. 열정적으로 수업해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일리치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졌어요~
    재미있는 후기 써주신 스프링쌤께도 감사드려요❤️

  • 2024-03-05 20:49

    안희곤샘 강의도 놀라웠는데, 스프링님 후기도 놀랍네요. 경아로움과 감사, 기쁨, 이런 키워드로 올해 일리치를 읽게 될 것 같아요~

    • 2024-03-05 23:14

      경아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 표현인가요? 경아로움은 경아스러움인가요? 그렇다면 경아는 누구? 무엇? 경아라는 실체는 없는 걸까요?
      여러 번 놀란 겸목샘의 마음이 손가락의 미끄러짐으로 표현된건가요?

      • 2024-03-05 23:43

        오타요! 아이폰 쓴 다음부터 오타 오집니다~~

        • 2024-03-06 08:24

          혹 경아는 저....?
          ㅋㅋㅋ

          • 2024-03-06 10:44

            경아가 쏘아올린 작은 공! 댓글 엄청 늘었네!!

  • 2024-03-05 21:59

    안희곤 샘의 강의와 스프링 샘의 후기를 길잡이 삼아 세미나 시작하네요!
    체계적 글쓰기를 추구하지 않은 일리치의 사상을 이해하려면... 거의 모든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니!^^
    일단 올해 다섯 권의 책을 읽고 어떤 사상적 지도를 그릴 수 있을지 기대해봅니다.
    꼼꼼한 후기 감사해요!! (헤벌쭉)

    • 2024-03-05 23:44

      체계적이지 않다! 요점도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체계 없는 인간으로서...... 며칠 전 문탁샘과 우리 공부는 '자연표류'의 결과다. 어떤 길을 가야 할까? 헷갈린다는 이야기를 했던 참이라, 더 생각나네요.

  • 2024-03-06 06:00

    전 후기에서 '희곤샘'이라고 쓰신 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네요. ㅋㅋㅋㅋ
    안희곤샘이 아니라 희곤샘이라.... 갑자기 뭔가 넘 정답네요^^
    이렇게 일리치샘이 우리를 또 새로운 인연으로 데려가주는 듯.

    안희곤샘 고맙습니다. 강의 정말 잘 들었습니다^^

  • 2024-03-06 08:40

    스프링샘~ 정말 후기 짱! ㅎㅎㅎ 그런데 강의 들어온 총 인원 수 66명이었어요~ ㅋㅋㅋ 제가 계속 체크했었거든요.
    문탁샘과는 또 다른 결의 강의를 들으니 종합되는 게 좋더라고요. 젠더 부분은 역시나 확 받아들여지지 않고 맘 속에 저항심이 생긴달까? 젠더를 아직 안읽었기 때문인 것 같아여. 꼭 읽어보리라 맘 먹었네요!

  • 2024-03-06 10:14

    올해 <일리치약국에서 일리치 읽기>를 같이 진행하는 반장의 한 사람으로서 경덕샘과 스프링샘은 참 든든합니다.
    셋이 합을 맞추어 이런 세미나를 진행해보는 경험 좋아요.
    저 올해 자꾸자꾸 쑥쑥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경아롭게'?! ㅋㅋㅋㅋㅋ

  • 2024-03-06 11:03

    순전히 고마운 마음 전하기 위해 댓글 씁니다^^

    두 시간 넘게, 쉬지도 않고 열강해주신 안희곤 선생님~
    너무 고맙습니다 (목은 괜찮으신지....)
    그리고 눈에 확(!) 들어오는 후기ㅡ 스프링님 덕분에
    강의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습니다.
    올해 제가 복이 많아서.....
    그동안 혼자, 떠듬떠듬 읽은 일리치 선생님의 책들을
    <일리치 읽기>모임에서 함께 읽는 행운도 만났네요.
    기쁜 마음으로 동행요~~~^^

  • 2024-03-06 20:36

    강의 들으면서 든 생각 하나. 그림자 노동과 임노동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쌍이구나.
    둘. 성장을 멈춰라(자율적 공생의 도구)를 넘어서 일리치의 생태주의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구나.
    스프링님의 후기는 안희곤샘 강의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서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고맙습니다!!

  • 2024-03-06 21:00

    꼼꼼한 후기 감사합니다. 저도 강의를 통해 일리치의 생태주의에 대한 부분이 궁금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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