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3-5주차 후기] 과거. 현재. 미래를 동시에 알 수 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다는 거지?

바람
2023-10-23 11:40
266

  몸이 힘드신 문탁샘이 과묵함을 선택하시며 미정샘이 갑자기 진행을 맡게 되었는데 매우 여유 있고 안정적으로 『당신 인생의 이야기』 중 <바빌론의 탑> <영으로 나누면> <이해> < 네 인생의 이야기>의 발제와 메모를 읽으며 세미나가 시작됐다. 소설이니 재미있게 읽고 즐겁게 수다로 풀어보자던 문탁샘의 말씀이 무색하게 사유의 깊이나 넘나듦 폭이 넓어서 따라가기엔 벅차고 어려웠다. 과학적 지식에 바탕을 둔 sf소설, 요즘 대세라는 sf소설과 친해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다.

 

<바빌론의 탑>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는 앙코르 석공님이 처음을 열어 주셨는데 바빌론 탑을 만드는 과정의 리얼리티가 돋보였던 점을 꼽으셨다. 신화적인 발상으로 만들어진 탑이 아니라 벽돌을 쌓는 과정 등을 보며 그 시대 현장에 일했던 사람처럼 느껴지는 재미가 있었다고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하늘의 바닥을 뚫고 올라갔더니 결국은 땅이 나오더라는 공간에 관한 이야기는 우주 팽창 이론과 연결되면서 양자역학과 물리학에 관한 공부한 사람다운 결말을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지난번 읽은 부분과 전체와도 연결되어 재미있었다고 하였다.

 

문탁샘은 테드창의 창작노트에서 성경에 있는 신의 징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리네 마그리트가 그린 <피레네 성>, 공중에 뜬 환상적인 도시의 모습에 주목하였다는 것을 언급하셨다. 바빌론의 탑이 가진 신학적인 이야기가 sf로 변환하면서 공중도시에 관한 세밀한 묘사, 상상력 넘치는 전개는 인간의 경외심이 신을 향한 기도보다는 마지막 곡괭이로 하늘을 깨는 공학적인 기술 방식에 의존함을 보여준다고 환기해주셨다.

 

힐라룸은 세계가 처음과 끝이 맞닿은 원통형 인장 같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시작도 끝도 구별이 안 되는 원통형 세계는 야훼의 자연 질서에 대한 경외감과 인간 자신의 위치를 알게 하는 절묘함으로 건설되었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시작과 끝이 같다는 인식은 최소의 거리든 최대의 거리든, 환희의 극치든, 고통의 극치든 상반돼 보이는 것이 두 얼굴이 아니라 한 얼굴임을 알게 한다.

 

<영으로 나누면>은 더 난해하고 어려워하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미정샘이 발제한 마지막 부분, 감정 공감을 매우 잘하는 칼이 르네에게 공감하지 않은 선택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나누었다. 미정샘 해석은 만약에 칼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말했다면, 그것은 1과2는 동일한 거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아 보였고 그 문제로 괴로워하는 르네 때문이라고 하셨다. 문탁샘과 평강샘이 각자 생각을 펼쳐주셨지만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때 지영샘이 ‘전체적으로 모든 것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다’란 관점으로 읽었어요’라는 해맑은 말이 어찌나 반갑던지.

 

테드창의 창작노트를 들여다보면 소설에서 우리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요소 중 하나에는 놀랍지만 불가피한 결말이라는 게 있는데 그것은 정말로 필연의 산물은 아니지만 그것들을 일시적으로라도 그렇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인간의 창의력이라는 사실에 관해 말한다. 여기 불가피하다는 말에 주목하면 영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모순인데 나누어야 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불가피함을 만든 건 르네의 창의력이 발휘된 것이다. 그러면 결국 자신이 밝힌 놀랍고 아름다운 세계가 어쩌면 필연이 아니라 일시적인 환영에 불과하다는 증거와 직면하게 되고 그 사실 앞에 르네는 충분히 괴로웠을 것 같다. 테드창은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경험이 될 것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칼의 태도가 조금 이해되기도 한다. 최악의 경험 앞에 미쳐가고 있는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칼만의 공감의 방식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탁샘은 소설의 이야기는 따라가겠는데 왜 소설의 제목이  <영으로 나누면>인지 이해가 안 됐다고 하시며 떠오르는 의견을 물으셨지만 개인적으로 도대체 알 수 없는 세계였다.

 

 

이해에 관한 이야기 나눔은 다음 시간으로 넘기로 하고 너무나 유명한 작품이고 (나는 몰랐지만) 메모한 분들이 몰빵한 <네 인생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정샘처럼 진행해 보라고 하셨지만 아무나 되는 건 아닌 듯)

 

 

<네 인생의 이야기>를 발제하며 물리학과 언어학의 세계로 헵타포드의 목적론적 언어관과 관련해서 풀어나가는 이야기의 힘에 무척 놀라웠다. 테드창의 상상력과 이야기를 쌓아가는 방식은 그동안 접하지 못한 세계를 마주한 것 같았다. 물리학과 언어학에 턱없이 모자란 앎의 용량으로 내 생각을 풀어나갈 저력이 부족함을 느꼈지만 말한다는 것의 중요성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중심처럼 생각됐다. 그것은 언어의 수행성이고 말과 행동은 등가라는 것으로 내 삶이 말하게 하라는 명제를 생각나게 했다.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질문은 ’도대체 한꺼번에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과거. 현재, 미래가 한꺼번에 존재한다는 게 무척 멋있는 이야기 같은데 직관적으로 이해가 안 되고 실감도 안 난다는 질문으로 수렴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이 다른 두 세계관이 충돌하고 있다. 인과론적 세계관과 목적론적인 세계관, 혹은 선형적 세계관과 비선형적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의 차이도 생각하는 방식을 다르게 하지만 다른 언어를 습득할 때도 마찬가지라는 걸 말하고 있다. 루이즈가 겪는 경험도 햅타포드와 접속하고 그들의 언어를 배우게 되면서다. 노을샘이 메모하신 시각장애인이 예를 보더라도 언어를 인식하는 체계가 다른 건 다른 세계관과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과거. 현재 미래가 한 장에, 한꺼번에 다 담겨있다는 헵타포드B의 언어가 쓰이고 실행되는 방식을 어떻게 설명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문탁샘은 여기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가? 공부를 하면서 우리가 아는 언어로,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텍스트의 양을 늘린다고 해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올까? 우린 낯선 것, 이질적인 마주침을 통해 내 사유에 대한 점검을 강요당해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질문을 하셨다. 지금까지 내가 해오던 습관들, 인식들과 쉽게 굿바이를 하지 못하니까 공부라도 하는 건 아닐까 하고 속으로 소심하게 대답해 본다.

 

그럼에도 루이즈가 햅타포드의 목적론적인 인식체계를 알게 되어 내린 결정에 개인의 자유의지가 없는 운명론적인 세계관에 갇히는 건 아닐까? 루이즈의 자유의지가 훼손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했다는 걸 어떻게 알까? 목적론적 세계관과 인과론적 세계관이 양립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하는 부분이 쟁점이 되었다.

 

문탁샘은 그래서 언어의 수행문이 나오는 것 같다고 하셨다. 현대 철학에서 언어는 수행적 성격을 인정하는 ’화용론‘이 대세라고 하셨다, 생각해 보면 범인의 자백을 받아 내는 것, 검사가 판결문을 읽는 것도 모두 수행문으로서 말하는 순간에 사실이 작동되는 것이다. 헵타포드의 모든 언어도 수행문이라고 했다. 정보 전달 대신 현실화를 위해 언어를 이용했다고 말이다. 루이즈가 햅타포드의 언어를 습득하고 이해했다면 햅타포드 언어의 수행성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아기를 낳고 싶어’ 라는 물음에 ‘응’이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짐작해 본다.

 

개인적으로는 지독하게 호기심도 없는, 자유롭지도 않지만 속박당한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지만, 무력한 자동인형인 것도 아닌 햅타포드들의 태도(?)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대한 이치를 모두 파악한 자들의 여유 있는 모습이라고 할까? 공부를 한다는 건 저런 태도로 세상을 관찰하고 바라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댓글 4
  • 2023-10-23 14:40

    방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바람샘 후기에 잘 정리해 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
    주말에 "컨택트" 영화 다시 봤는데 확실히 책 읽고 이야기 나눈 다음에 보니 다른 것들이 보이더군요.전체를 바라보는 시선 앞에서 눈 앞의 정복과 전쟁, 승리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참 초라해 보였습니다...

  • 2023-10-23 22:37

    출근해야 해서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군요.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람샘. 저는 디스토피아적이거나 우울하거나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이야기를 싫어해서 SF와는 담을 쌓고 삽니다. 장르가 낯설기도 하고 배경지식이 필요한 이야기들인 것 같아 사실 테드 창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저자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다 보니 그가 언어학을 상당 기간 동안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수업에서 수행성이론, 화용론, 목적론적 세계관, 비트겐슈타인까지 얘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어렵네요. 저는 필연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통찰력을 갖추어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그럼으로써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이 어떤 경지일까? 등.

  • 2023-10-23 22:46

    바람샘 후기 정리하시느라 진짜 고생 많으셨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제가 한 아무말이 그렇게 해맑은 줄 미처 몰랐습니다. 읽다가 빵 터졌ㅋㅋㅋㅋㅋㅋ
    양자역학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책 또한 열심히 관련 지식을 찾아보며 읽었다면 좀더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이해란 무엇인가...?) 목차는 읽어가야 할 페이지 확인하는데만 써서 창작노트가 있는 줄도 문탁샘이 말씀하셔서 알았네요.

    [바빌론의 탑] 자신이 살던 곳보다 앞선 문명을 경험하면서 힐라룸이 깨닫는 사실들을 서술하는 문장들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밤의 정체'를 알게 된 부분(27쪽)은 참 재밌는 표현이라 생각됐고, "우리가 더할 나위없이 순수한 목적을 위해 일해온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현명하게 판단했다는 보장이 있을까?..."(39쪽)라는 대화는 <부분과 전체>의 과학자들의 대화보다 마음에 훨씬 콕 와 닿았습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여행을 해도 인간은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51쪽) 어쩌면 이 문장이 포함된 마지막 서술은 '필연성의 인식'이 아닐까요? 힐라룸은 자유인!
    [영으로 나누면] 술술 읽었는데 뭔말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 한 것이었음을 세미나 하면서 알게 됐습니다(저런). 그래도 나중에 문탁샘이 공유해주신 김범준 교수 글들과 '0'에 관한 영상을 보면서 공부 많이 한 느낌이라 기분이 좋습니다. 미정샘이 말씀하시고 문탁샘이 동의하신 칼의 마지막 심정이 저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데, 그건 좀 슬픈 일 ㅠ
    [네 인생의 이야기] 노을 샘의 메모가 좋았습니다.^^ 책을 다 읽고 영화 봤는데 영화는 별로였습니다(노트북으로 봐서 그랬을까...). 여하간,
    저는 그냥 삶과 죽음에 빗대어 생각하면서 읽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마지막이 죽음(정해진 결론)이라는 것을 알지만 살아가듯이, 심지어 열심히. 그리고 그 죽음까지 자신의 삶의 경로를 선택하며 사는 것. 그렇게 그려진 경로(또는 궤적)가, 빛이 그리는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처럼 각자 인생의 최적의 경로가 되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개인적으로 담주 감이당 수업 숙제 때문에 책을 읽다가 '언어의 수행문'이 떠오르는 대목을 만났습니다. "아리아인은 입으로 한 말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다른 모든 현상과 마찬가지로 말도 신, 즉 데바였다. ... 그들은 듣는 행위를 통하여 신에게 다가간다고 생각했다.... 맹세도 일단 입밖으로 나오면 영원한 구속력이 생겼다. 거짓말은 입으로 한 말에 내재한 성스러운 힘을 왜곡하기 때문에 절대적인 악이었다. 아리아인은 절대적 진실을 향한 이런 열정을 결코 잃지 않았다."(축의 시대, 카렌 암스토롱, 26쪽) 이런 글을 만나 반가웠는데, 이것이 인과적 사고와 목적적 사고와는 어떻게 연결될지, 그것은 또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보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인지 등등은 깜깜이입니다(좌절). 더 생각하기 싫은 건 모두 코로나 때문인 걸로 하고... 이만..

  • 2023-10-25 15:32

    바람쌤의 후기를 보니 지난 주 세미나에서 많은 얘기를 나눴었구나, 다시 한번 복기할 수 있었습니다. 정리하느라 힘드셨을텐데 후기 작성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진행을 맡긴 했었나 싶을 정도로 별로 역할을 한 게 없었는데, 좋은 말씀 주셔서 또 한번 감사드립니다. ㅎㅎ

    매번 세미나하면서 느끼고 깨닫지만, 다른 분들의 말씀 들으면서 저와는 다른 시각과 관점을 접할 수 있다는 게 참 좋습니다. 아무리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머리 싸매고 끙끙 거려봐도 뜬구름 잡는 것 같을 때가 많은데, 같이 얘기 나누면서 다른 선생님들의 생각을 듣다 보면 새로 알게 되고 깨우치게 되는 게 더 많은 거 같습니다. 이번에도 앙코르석공님, 평강님 등등 다른 분들의 생각을 전해듣고 나서 텍스트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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