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의 똥 연대기

모로
2024-04-25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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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자는 정말, 정말정말정말 오줌, 똥을 못 가렸다. 만 3살이 지나, 한국 나이로 5살이 되었는데도, 기저귀를 못 뗐으니 말 다 했지. (네이버에 쳐보니 ‘기저귀를 떼는 시기는 18개월에서 24개월이 적당하다.’라고 쓰여있다) 발육이 남다른 감자에게 맞는 기저귀 사이즈가 더 이상 없어서, 더 큰 기저귀를 찾으려면 성인용으로 가야 할 판이였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어린이집을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일단 벗기고 팬티를 입혀 놓으면 자신도 축축한 것을 알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떼게 된다나? 그 말을 믿고 덜컥 어린이집 적응과 배변 훈련을 동시에 해버리자는 안일한 생각을 해버렸다. 어린이집 적응도 힘든 마당에 배변 훈련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나도 울고, 감자도 울고,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마도) 울었다.

 

 

  기저귀 벗기 강제집행을 시행한 후, 어린이집에서 하루 평균 2~3번 오줌을 쌌다. 여벌 바지와 팬티를 수도 없이 챙기고, 심지어 바지가 모자라는 날은 친구 것을 빌려 입고 오는 일도 허다했다. 외출 시에는 무조건 화장실만 보이면 억지로 오줌을 뉘었다. 내가 신경 써서 화장실을 보내면 괜찮지만, 조금만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내가 집안일이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실수했다. 외출도 불안하고, 늘 둘 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도 늘상 실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줌은 나았는데, 똥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갈수록 똥 누는 걸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나중에 가서는 변을 5일에서 일주일 정도에 한 번 눴다. 똥은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져서 더 누기 힘든 악순환.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그럴수록 둘의 관계는 악화되어서, 나중에는 한 번에 싸지 못하고 똥을 하루에 10번씩 찔끔찔끔 나눠 싸는 불상사가 발생하기까지 했다. 맙소사! 하루에 팬티 10장을 빨아야 한다니. 진짜 진절머리나게 힘든 나날들이었다. 혼내도 보고, 달래도 보고, 책도 읽어주고, 영상을 보여주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써도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살펴보는 똥 누는 것에 대한 깊은 고찰, 감자는 왜 배변을 어려워 했는가. 단순히 먹고 싼다고 생각하는 것에도 이런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1. 배가 아픔을 느낀다.
  2. 어느 정도에 화장실에 가야 하는지 판단한다.
  3. 화장실에 바지를 내리고 앉는다.
  4. 힘을 준다.
  5. 힘을 주면서 동시에 항문을 느슨하게 만들어서 똥을 밀어낸다.
  6. 똥을 닦고 뒤처리한다.

 

  서로 연계된 이 일들은 긴밀하고 신속하게 이루어져야 하고, 이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 선택과 집중의 여러 단계가 감자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문제였다.

 

  특히나 맨 첫 번째 관문, 어느 정도에 화장실을 가야 하는지 판단하는 문제부터 걸렸다. 감자 생각에 정말 똥이 나올 확률 99% 정도는 되어야, 정말 폭발 직전에 이르러서야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미 99%일 때는 배가 너무 아파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화장실에 가는 도중에 실수하기도 했다. 집에 있다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변의는 어디에서나 온다. 밖에서 실수한다면 아찔하다. 그리고 우리는 알지 않는가. 똥이 끝까지 차오르고, 급격한 변의가 생겨서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다가도, 그 시기를 살짝 벗어나면 다시 평온기가 찾아온다는 것을. 그러니까 다시 찾아온 평온기의 똥들이 쌓이고 쌓여서 딱딱해지는 거지. 정말 심할 때는 배가 남산만 하고, 안색까지 시커멓게 변할 정도였다. 배는 계속 꾸륵거리고…. 정말 울면서 똥을 쌌다.

 

 

 

 

  그사이에 좋다는 유산균, 한약, 마사지 오만가지 민간요법(?)을 시행했다. 그것과 동시에 나는 감자에게 이야기할 때 아픔을 수치화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배가 조금 아프고 많이 아프고의 정도는 개인적인 수치라 감자가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감자는 고통에 둔감한 편이었다) 배 아픈 정도를 퍼센트로 나누어서 주기적으로 상기시켰다. 이 정도면 50%, 이 정도면 80%, 이 정도면 90%인데, 적어도 85% 정도가 되면 화장실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90% 넘어가면 늦다고 끊임없이 아픔을 쪼개어서 이해시켰다.

 

 

  그리고 동시에 힘을 주면서 빼기 연습을 시켰다. 엄마가 힘을 주라고 하니까 아이는 정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힘을 줬다. 하지만 똥구멍은 닫혀있는 상태. 이걸 정말 어떻게 설명해주어야 할까. 밀어내면서 동시에 느슨하게 풀어야 하는 이 미묘한 진리를 이해시키는 것이 두 번째 관문이었다. 길고도 지난한 과정..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정말 느리지만 감자는 자기의 속도대로 배변 훈련을 진행해 갔다. 그러고는 어느 순간! 감자는 삶의 위대한 진리를 이해했다. “엄마! 드디어 똥구멍에 힘을 주면서 힘을 빼는 걸 알 거 같아요!” 그 이후로 더 울지 않고 화장실을 다녀왔으며, 똥을 싸는 텀도 점점 줄어들었다. 지금은 배가 아프지 않아도 이틀에 한 번 (강제적이지만) 화장실을 가서 밀어내고, 혼자 씻고 나오는 패턴을 유지 중이다. 진짜 다시 생각하니 마음이 뭉클하네. 만세!!

 

 

  배변과의 전쟁이 4살 무렵에 시작해서 9살에 마무리되었으니, 장작 5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처음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미래의 내가 살짝 “야, 너 그거 알아? 지금 이거 5년 뒤에나 해결돼!”라고 귀띔이라고 해주었다면 달랐을까. 혹시 내가 마음이 준비가 덜 된 감자에게 억지로 강요를 해서 더 오래 걸린 건 아닐까. 이렇게 오래 계속될 것을 그때 알았다면, 일 이년 기저귀를 더 채우는 것이, 하다못해 어른 기저귀를 채우는 것이 무엇이 대수였을까 싶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은 일을 반복하겠지. 사람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니까.

 

 

 

 

  다행인 것은, 나는 감자와 함께 아직도 성장 중이다. 지독하게 길고 길었던 똥과의 전쟁을 치르다 보니, 다른 것들도 조금은 감자의 속도에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감자의 가장 큰 화두는 사회성이다. 아스퍼거 아이들이 그렇듯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었다. 특히나 어른들은 자기에게 다 맞춰주니 어느 정도 대화가 되는데, 또래 친구들은 그렇지 못하니 어려워 했다. 더 어릴 때는 내가 나서서 엄마들 모임도 만들었다. 몇몇 또래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고, 다른 집에 놀러 가기도 하면서 친구를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그래도 저학년 때는 어느 정도 엄마의 노력이 가능했지만, 이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그런 것도 어려워졌다. 이제 더이상 아이들은 엄마들을 끼고 놀지 않고, 서로 메신저나 게임 등으로 연락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내 마음이 편해졌다. 이젠 정말 내 손을 떠난 문제구나 싶어서.

 

 

  언젠가 아이의 사회성 때문에 고민을 토로했을 때, 한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아이마다 부모에게 받고 싶은 사랑의 크기가 서로 달라요. 어떤 아이는 그 그릇이 작아서 금방 엄마의 품을 떠나지만, 어떤 아이는 부모에게 받고 싶은 사랑의 크기가 커서 늦게 떠나는 아이도 있지요. 하지만 충분히 사랑을 주다 보면 언젠가는 그 그릇이 가득 차서 넘치고, 그렇게 타인에게로 흘러갈 겁니다. 이 아이는 엄마를 통해서만 세상과 접촉할 수 있을 거예요.”

 

 

 

 

  찰랑찰랑. 드디어 물이 넘칠랑 말랑 하는 소리가 들린다. 5학년이 되자, 가끔 친구에게서 웃긴 짤로 가득 찬 이상한 개그의 문자도 오고, 같은 아파트 친구와 집에 같이 오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친구들이 오며가며 인사를 해주고, 놔두고온 신발 주머니를 챙겨주고, 말을 걸어준다. 서툴지만 감자도 거기에 답하며 인사를 해주는 변화된 모습이 보인다. 너무나 늦은 한 발. 그리고 너무 소중한 한 발을 내딛는 감자. 아직도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겉도는 감자의 모습은 보는 건 어렵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 척해도,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확연하게 다른 아이의 모습을 마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시작을 하기만 한다면, 가기만 한다면 언젠가 성인이 되었을 때 비슷하게 근처에라도 서 있을 수 있겠지. 늘 생각하는 거지만 다행인 건, 우리 감자는 결코 뒤로 가는 법이 없다. 언제나 어떠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자신의 속도대로.

 

 

 

 

 

 

 

 

 

모로

올해부터 일리치 약국에서 일하고 있다.

열심히 쌍화탕을 달이며, 공부와 삶이 연결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귀여운 것을 좋아하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재미있게 살 수 있을까 항상 궁리중.

 

 

댓글 11
  • 2024-04-25 11:15

    "감자는 결코 뒤로 가는 법이 없다!" 감자뿐 아니라 우리도 그러리라 생각해보니 힘이 납니다!! 자기 속도대로 가봅시다~

  • 2024-04-25 14:47

    혹시 위에 나오는 '한 선생님'이 저는 아니죠?
    근데 내가 맨날 하는 이야기하고 너무 비슷해서...ㅋㅋㅋㅋ

    이번에도 아주 자~알 읽었습니다.

  • 2024-04-25 15:29

    행간의 지난함이 어찌 다 알 수 있을까요. 애쓰셨어요. 삶의 속도를 알아차리는 일은 결코 남일 같지가 않네요. 고맙습니다. 잘 읽었어요 ^^

  • 2024-04-25 21:04

    뒤로 가는 법이 없는 감자, 그런 감자 곁에서 함께 성장 중인 모로~ 똥의 연대기가 이렇게 심오하고 감동적이라니... ㅎ
    자신의 속도로 살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고마워요^^

  • 2024-04-26 08:03

    모로의 성장기이기도 하네! ^^
    똥땜에 고생 정말 많았수! 수고혔어~~~

  • 2024-04-26 09:38

    인간적이고 문명적인 똥누기의 어려움과 고단함을 새삼 느낍니다.
    글 읽는 동안 가슴 찡했고, 글 읽고 나서는 인간적 삶에 대한 모순적인 생각이 몰려와요.

  • 2024-04-26 13:45

    찰랑찰랑 넘치는 사랑..
    엄마에게 받은 사랑 남들과 나누는 감자로~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가는 길을 함께 나눠주어 감사합니다 ~

  • 2024-04-28 10:43

    똥이 참 쉽지가 않아요.
    어른이 됐어도 아직도 어려운데ㅋ
    그걸 자신의 속도로 해낸 감자도, 애태운 모로님도 기특하당^^

  • 2024-05-02 15:50

    과민한 대장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감자의 똥이 남일 같지 않네요...
    감자와 엄마의 속도대로 같이 성장해가는 모습 계속 나눠주세요^^

  • 2024-05-02 23:48

    만성 변비로 한평생 살고 있는 저도 감자의 똥이 참 남일 같지 않습니다. (경덕쌤 찌찌뽕!)
    캠핑의자에 앉아있는 뒷모습이 사랑스러운 모자의 사진이군요.
    예쁜 모습 글로 사진으로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4-05-04 08:20

    감자도 모로샘도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가는 넘 멋진 것..

아스퍼거는 귀여워
  그 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감자가 한 50일쯤이었을까.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뽀시래기 시절,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감자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 앉아 다리 위에 아이를 끼워놓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른 아이는 나른하게 누워있고,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 그때 감자는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등줄기부터 짜르르 행복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감자를 낳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회복이 늦어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었고,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처음 눈이 서로 딱 마주친 그때. 나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그날부터 감자 입덕기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생각한다. “호옥시... 우리 아이가 천재?” 누구나 에겐 판단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아이만 보이는 시절이 있었더랬다. 첫 뒤집기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다 싶다. 태어나서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꼬물거리고, 울고, 웃었다. 그때는 손가락만 쥐었다 펴도 대단해 보인다. 그런 아이가 뒤집기라니!! 혼자서 뒤집다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아이가 뒤집었어요.” 동네방네 플래카드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1~2개월이 뭐라고, 인터넷에는 질문들이 가득하다. ‘6개월이 지났는데…. 우리 아이 왜 뒤집기를 안 할까요’부터 ‘6개월인데 벌써 일어나 앉았어요’까지....
  그 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감자가 한 50일쯤이었을까.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뽀시래기 시절,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감자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 앉아 다리 위에 아이를 끼워놓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른 아이는 나른하게 누워있고,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 그때 감자는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등줄기부터 짜르르 행복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감자를 낳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회복이 늦어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었고,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처음 눈이 서로 딱 마주친 그때. 나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그날부터 감자 입덕기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생각한다. “호옥시... 우리 아이가 천재?” 누구나 에겐 판단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아이만 보이는 시절이 있었더랬다. 첫 뒤집기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다 싶다. 태어나서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꼬물거리고, 울고, 웃었다. 그때는 손가락만 쥐었다 펴도 대단해 보인다. 그런 아이가 뒤집기라니!! 혼자서 뒤집다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아이가 뒤집었어요.” 동네방네 플래카드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1~2개월이 뭐라고, 인터넷에는 질문들이 가득하다. ‘6개월이 지났는데…. 우리 아이 왜 뒤집기를 안 할까요’부터 ‘6개월인데 벌써 일어나 앉았어요’까지....
모로
10:45 | 조회 11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동창회 모임은 딱 한군데 나간다. 고등학교 3학년 반모임이다. 사회에 첫발을 디딜 즈음에 시작한 모임이니 얼추 한 사십년은 되었다. 모이면 하등 의미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학교 다닐 때 성적, 물론 충격적인 점수를 받았던 수학점수 등으로 이야기를 출발해서 세계 평화를 논하고 손주들 자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마무리 시간이 된다. 요즘은 내게 은퇴후 생활에 대해서 묻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10여년 전 고기리 우리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내가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고 또 평창 집을 가꾸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두었거나 은퇴한 지 서너 해가 되었는데, 미리 생각했던 전원주택 혹은 텃밭정도 가꾸는 시골살이를 이런 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고 꿈만 꾸고 있는 녀석들이다. 한 녀석이 대뜸 목소리 톤을 높인다. “니들, 농사 지어봤냐? 니들처럼 시골 출신이면서 공부 잘 해서 손에 흙 묻히지 않은 놈들이 꼭 귀농한다고 설치더라. 난 농사라면 징글징글해서 때려 죽여도 안한다. 그 돈으로 그냥 사먹는 게 훨씬 싸다!” 녀석 참, 성질 급한 것은 여전하다. 내가 겪은 경험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회사 대리 시절에 직속 과장이었던 선배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당시 사장은 좀 괴팍한 사람이었는데, 학벌도 좋고 인품도 바른 그 선배를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심하게 대했다. 임원회의 때마다 업무 성과를 핑계로 그 선배에게 이야기하는 톤은 옆자리의 우리들도 견디기 어려운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 내곤 하였다. 급기야 그 선배가 원형 탈모 증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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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00:06 | 조회 63
현민의 독국유학기
    WG투어 터키편       인터네셔널 WG(독일에서는 셰어하우스를 WG라고 부른다. Wohngemeinschaft의 줄임말.)에 살다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WG 투어를 하자. 취지는 각자의 나라에 여행을 가자는 것이다. 우리 집은 12명이 함께 사는 특이한 경우라, 대화 때마다 등장하는 각 나라의 정치, 문화, 경제 상황을 다양하게 들을 수 있다. 독일, 터키, 인도, 헝가리, 코스타리카, 이탈리아, 미국 그리고 한국. 가봐야 할 곳이 많은데, 첫 번째로 우리는 터키에 가기로 했다.   독일 사람들은 새벽까지 파티를 한 후 해장 음식으로 되너를 먹는다. 터키 케밥은 독일 길거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그만큼 터키 사람들은 80년대 이후 독일에 넘어와 독일 경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터키는 유일하게 아시아와 유럽 동시에 면이 맞닿아 있는 국가다. 종교나 역사, 문화 면에서 유럽의 국가들과는 다른 갈래를 가지고 있지만, 유럽 곳곳에 퍼져있는 터키계 노동자들로 인해 굉장히 익숙하다. 2시간 비행이면 도착하고, 독일보다는 싼 물가이기 때문에 비교적 여행하기 만만하다. 나의 플랫 메이트 베이자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 출신으로 독일의 은행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 애의 주도로 우리는 이스탄불로 향했다.   첫날 밤 공항에서는 호주인 아셔가 여행 비자가 없는 걸 입국장에서 알아버려 그 애를 한참 기다려야 했다. 한국에서 온 나, EU시민권이 있는 니키와 T 그리고 터키인인 베이자는 특별한 비자가 없이도 통과할 수 있었다. 아샤는 공항에서 50유로를 내 비자를 받고 한참 뒤에야 나왔다. 그게 모자랐는지 공항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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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2024.05.24 | 조회 57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지난 4월 13일과 14일 낮 최고 기온이 27.3℃와 29.4℃였다. 아직은 이른 봄인데, 기온은 한여름이다. 작년보다도 더 빠르게 더워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햇빛의 강도가 작년과 또 다르게 더 강렬했다. (올해는 새로운 패턴이 생긴 것도 같다. 너무 일찍 더워졌다가 또 급하게 온도가 내려가 평년보다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그런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지구가 불타오르는 것 아닐까 해서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엄청 더워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괜스레 미안해지고 안쓰러웠다. 기후변화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이제 기후위기라고 한다. 이런 지구를 물려주는 어른으로서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어린이날 행사에 참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하며 또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친구야 노~올자     2024년 5월 5일 제102회 어린이날, 우리 동네에서는 제17회 금천어린이큰잔치 ‘친구야 노~올자’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시작된 마을 행사이다. 우리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후 ‘금천구’라는 정체성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날 행사도 한동안 없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은 신도림 가로공원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까지 다녀와야 했단다. 그런 상황을 보고 ‘나서는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도 우리 동네에서 놀게 하자고. 그런 어른들의 제안으로 2007년 처음 금천구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생긴 것이다. 전교조, 노동조합, 청년회, 진보정당 등 지역의 여러 단체가 첫 행사를 준비했다. 처음 열린 행사에서는 이주노동자와...
      지난 4월 13일과 14일 낮 최고 기온이 27.3℃와 29.4℃였다. 아직은 이른 봄인데, 기온은 한여름이다. 작년보다도 더 빠르게 더워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햇빛의 강도가 작년과 또 다르게 더 강렬했다. (올해는 새로운 패턴이 생긴 것도 같다. 너무 일찍 더워졌다가 또 급하게 온도가 내려가 평년보다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그런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지구가 불타오르는 것 아닐까 해서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엄청 더워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괜스레 미안해지고 안쓰러웠다. 기후변화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이제 기후위기라고 한다. 이런 지구를 물려주는 어른으로서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어린이날 행사에 참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하며 또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친구야 노~올자     2024년 5월 5일 제102회 어린이날, 우리 동네에서는 제17회 금천어린이큰잔치 ‘친구야 노~올자’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시작된 마을 행사이다. 우리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후 ‘금천구’라는 정체성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날 행사도 한동안 없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은 신도림 가로공원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까지 다녀와야 했단다. 그런 상황을 보고 ‘나서는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도 우리 동네에서 놀게 하자고. 그런 어른들의 제안으로 2007년 처음 금천구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생긴 것이다. 전교조, 노동조합, 청년회, 진보정당 등 지역의 여러 단체가 첫 행사를 준비했다. 처음 열린 행사에서는 이주노동자와...
김윤경~단순삶
2024.05.20 | 조회 224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남어진
2024.05.10 | 조회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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