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지리적 사실

현민
2024-04-17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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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지리적 사실

 

네덜란드는 독일의 북쪽에 맞닿아있다. 세 명의 친구가 살고 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었다. 지난 겨울 니키가 운전해서 네덜란드에 간다고 하길래, 그럼 가는 길에 친구가 사는 도시에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서경은 독일과 국경이 맞닿아있는 아른헴에서 공부한다. 모부님께 네덜란드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성매매와 마약 합법 때문에 꼭 그곳이어야겠냐고 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네덜란드에서는 정치적 혼란시기였던 19세기 마땅한 보수정당이 없어 동성결혼, 성매매와 마약 합법 등을 실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The History of Dutch Cannabis Coffeeshops | LeaflyWhy Amsterdam's oldest cannabis 'coffeeshop' has been forced to close

네덜란드의 흔한 커피샵

커피도 파는데 대마초도 판다. 일상적으로 사람들이 와서 대마초를 피우는 곳이다.

 

서경은 영어권 국가 중 네덜란드가 가장 물가가 싼 편이라 네덜란드 대학에 지원했다. 네덜란드에는 더치Dutch라고 불리는 고유어가 있음에도 영어권 국가라고 불릴 만큼 국민 90%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 독일인들은 네덜란드어가 독일어에서 파생한 괴상한 사투리라고 말하는데, 네덜란드에 와보니 더치는 생각보다 더 고유했다. 영국과 미국에 비교하면 굉장히 싼 유학비지만, 독일과 비교했을 땐 비싼 생활비 그리고 주거난 때문에 아직도 에어비엔비에서 산다는 서경의 학교 동기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 나라에 이주민 비율이 큰 이유가 궁금해졌다. 헤이그에서 공부하는 지연은 현재 네덜란드가 보수집권이지만 여성·퀴어 인권은 너무 당연해서 보수당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그 대신 보수당은 이주민을 규제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일 년 만에 만난 서경과 새벽까지 조잘대며 회포를 풀고, 아침에 일어나 밥을 짓기 시작했다. 서경은 내 음식을 좋아한다. 그래서 집에서 마른 미역과 들깻가루, 된장과 코인육수를 챙겨왔다. 독립생활의 적적함을 OTT(스트리밍 플랫폼 총칭)로 달래는 서경은 내가 요리를 하는 동안 밥 먹으면서 볼 영화를 골랐다. 너 파친코 봤어? 아니, 근데 그거 보고 싶었어. 그럼 보자. 우리는 파친코를 보기 시작했다.

 

파친코와 재일 조선인

 

파친코는 소설 원작의 드라마로 주인공 선자를 통해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이주한 재일조선인의 삶, 그리고 주인공 선자의 손자인 솔로몬의 삶을 통해 미국 이주민, 일본의 버블 경제 시대를 다룬다. 정확히는 1910년부터 1989년까지 선자의 부모, 선자, 선자의 아들과 손자까지 4세대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파친코 독일판 표지

'Ein einfaches Leben' 가장 보통의  삶 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선자(왼쪽), 젊은 선자(중간), 늙은 선자(오른쪽 끝)을 통해 시대의 흐름을 볼 수 있다.

 

드라마를 보며 나는 은은하게 젖어 들었다. 역사 책에는 가장 잔인한 폭력의 희생자나 가장 영웅적인 서사가 기록되기 마련이지만, 사연 없는 사람이 없는 시절이었다.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시대의 불행함을 보았다. 숨이 약간 막힌 채로 물 안에서 숨을 쉬는 기분이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집과 먹을 것을 빼앗기고, 언어와 이름을 빼앗기고, 존엄을 빼앗겼다. 그들에게는 가족을 지키고 배를 채우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살아남으려면 가족애와 애국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종종 한국인의 가족애와 공동체적 특성, 애국심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역사 속에 그 기원이 있었다.

 

재일조선인(재일한국인, 재일교포, 재일동포)은 역사의 이 틈에 있다. 한국전쟁 시기, 나라가 찢어지게 가난할 시절, 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 이주했다가 해방 후 한반도의 어지러운 정치 상황과 경제 혼란 등의 이유로 돌아가지 못한 혹은 않은 사람들이다. 아직까지도 일본에는 30만명의 재일조선인이 있으며, 특별 영주권자로 분류된다. 그마저도 어느 일본인들은 특혜라고 그들의 생존권을 박해한다. 그들이 한국에 입국하려면, 대사관에서 매번 임시 비자를 발급받아야 한다. 일본에서는 한국인이라고 멸시 받고, 한국에서는 일본인이라고 욕 먹는 존재. 어느 나라도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알고 난 후 나는 세상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우리나라에 재일조선인 작가로 알려진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의 눈>에 이렇게 썼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은 요즘 한국에서도 꽤 일반적으로 쓰고 있는 듯하다. 원래 이산 유대인을 가리키는 이 말은 현대에는 좀 더 폭넓게, 어떤 외부의 힘에 의해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흩어져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나와 같은 재일 조선인도 식민 지배와 민족 분단이라는 외적인 힘에 의해 이산당한 백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그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언제나 마이너리티(소수·비주류)이다. 당연히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건 즐겁지 않다. 하지만 디아스포라에겐 이점도 있다. 그것은 머조리티(다수·주류)에겐 잘 보지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바꿔 말하면 국민 국가 시대의 머조리티란 ‘국민’이기 때문에, 디아스포라는 ‘국민’에게 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재일조선인은 역사에서 지워져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들어보면 그들의 존재가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이저리티의 눈으로 세상을 감각해보면 세상은 얼마나 부당한가. 그들이 느끼는 부당함은 세상의 어떤 면을 보여주는가. 서경식은 많은 사람들이 국가 단위로 세상을 인식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고 말한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고 북쪽은 막혀있어 고립되기 쉬운 지리적 요건을 가지고 있다. 나는 한국이 외국인 친화적이라거나, 문화적 다양성을 성숙하게 받아들이는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독일만 예를 들어도, 덴마크, 폴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와 붙어있다.  적어도 이곳에서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유난하지 않다. 독일에서는 외국인을 뜻하는 단어 아우스랜더Ausländer를 누군가를 차별할 때 쓰는 말이라는 인식 때문에 잘 쓰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한국적인 것, 두루뭉술한 혈연 공동체인 ‘우리’를 강조할 때 더 힘을 부여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사회가 국민성과 애국심을 강조할 때, 누가 배제되었는가. 나와 당신은 어떤 이점을 누렸는가. 마이너리티의 시선으로 내가 속한 사회를 볼 때마다, 우리가 이미 도태됐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싶을 때가 잦다.

 

여러개의 고향

 

<파친코>의 원작 소설 작가 이민진의 아버지는 북한, 어머니는 남한 출신으로 한국전쟁 후 그가 3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녀의 다큐멘터리에서 그녀는 ‘당신은 재미교포인데 왜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대학 시절 어느 나라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재일교포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어떤 한국인도 그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 갖지 않을 때, 그녀는 일본인인 남편을 따라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의 삶을 연구하며 11년 동안 책을 썼다. 한국인이냐 미국인이냐 따지면 미국인에 가까운 사람이, 한국어를 완벽히 구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쓰는 한국 이야기. 나는 글을 쓸 때 내가 이 글을 쓸 자격이 있는 지에 대해 자주 의심하는데,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후 이야기할 자격이란 이러한 끈질김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다큐멘터리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지리적 사실이 저를 만들었고, 저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어딘가 딱 들어맞지 않는 비정상적 존재, 경계의 사람들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우는가. <디아스포라의 눈>에서 서경식은 또 이런 문장을 남긴다. '나는 타자로서의 ’조국‘, 그리고 ’조국’의 타자로서의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슬퍼하거나 한탄할 일은 아니었다. 그 지점에서 나는 다수의 ‘국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듯한 애매한 혈연공동체적 정서의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공공적인 연계로서의 ‘조국’이라는 가능성에 대해 사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대화를 계속해감으로 새로 만들어가는 사회, 그것이 나에게는 바람직한 ‘조국’이다.'

 

독일에서 사는 게 막막할 때마다 독일이냐 한국이냐를 고민한다. 한국에 돌아가는 나를 상상하면 숨이 막히지만, 타지에서 지독하게 살아남는 모습을 상상해봐도 기쁘지 않다. 그러다 보면 독일이나 한국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만이 내 삶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든 삶을 이어간다면 아주 먼 미래에는 내게 여러 고향이 생길 것이다. 이주민의 삶을 살면서 내 정체성이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이민진과 서경석 같이 먼저 세대의, 다정한 어른들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나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오래 붙잡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결코 어느 한 이름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인도에서는 요맘때 쯤 봄이 오는 것을 축하하며 홀리Holi 페스티벌을 한다.

인도인 플랫메이트 쿠쉬가 다양한 사람들을 불러모아 우리집 마당에서 홀리 페스티벌을 진행했다.

홀리에서는 네가 누구든지 간에 상관없이, 색 가루와 물 풍선을 서로에게 던지며 논다.

쿠쉬는 그것이 서로를 축복해주는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댓글 4
  • 2024-04-18 08:24

    너의 글을 읽을때마다 생각하지
    나의 20대와 참 다르구나...(라는 지당한 것을.)

    나는 이제야 "이 모든 지리적 사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너희 세대는 삶 자체가 "이 모든 지리적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도 들고.

    언젠가, 내가, 니가 있는 곳, 그 때 그곳이 어디든, 그곳에 가서 같이 걷고 밥 먹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 2024-04-18 08:27

    <파친코> 못 봤는데, 이주민의 정체성으로 이 영화를 본 현민의 소감이 담담히 읽히는 걸 보니, 영화가 좋았나봐요. 언젠가 나도 봐야쥐~~

  • 2024-04-18 09:22

    앞으로 여러 개의 고향이 생길 현민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나의 집은 어디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 2024-05-02 16:01

    한국이 여러 개의 고향 중 하나가 되었을 때 또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지 기대되어요. 그 과정 계속 써주세요^^

아스퍼거는 귀여워
  그 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감자가 한 50일쯤이었을까.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뽀시래기 시절,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감자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 앉아 다리 위에 아이를 끼워놓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른 아이는 나른하게 누워있고,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 그때 감자는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등줄기부터 짜르르 행복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감자를 낳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회복이 늦어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었고,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처음 눈이 서로 딱 마주친 그때. 나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그날부터 감자 입덕기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생각한다. “호옥시... 우리 아이가 천재?” 누구나 에겐 판단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아이만 보이는 시절이 있었더랬다. 첫 뒤집기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다 싶다. 태어나서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꼬물거리고, 울고, 웃었다. 그때는 손가락만 쥐었다 펴도 대단해 보인다. 그런 아이가 뒤집기라니!! 혼자서 뒤집다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아이가 뒤집었어요.” 동네방네 플래카드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1~2개월이 뭐라고, 인터넷에는 질문들이 가득하다. ‘6개월이 지났는데…. 우리 아이 왜 뒤집기를 안 할까요’부터 ‘6개월인데 벌써 일어나 앉았어요’까지....
  그 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감자가 한 50일쯤이었을까.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뽀시래기 시절,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감자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 앉아 다리 위에 아이를 끼워놓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른 아이는 나른하게 누워있고,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 그때 감자는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등줄기부터 짜르르 행복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감자를 낳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회복이 늦어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었고,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처음 눈이 서로 딱 마주친 그때. 나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그날부터 감자 입덕기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생각한다. “호옥시... 우리 아이가 천재?” 누구나 에겐 판단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아이만 보이는 시절이 있었더랬다. 첫 뒤집기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다 싶다. 태어나서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꼬물거리고, 울고, 웃었다. 그때는 손가락만 쥐었다 펴도 대단해 보인다. 그런 아이가 뒤집기라니!! 혼자서 뒤집다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아이가 뒤집었어요.” 동네방네 플래카드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1~2개월이 뭐라고, 인터넷에는 질문들이 가득하다. ‘6개월이 지났는데…. 우리 아이 왜 뒤집기를 안 할까요’부터 ‘6개월인데 벌써 일어나 앉았어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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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5 | 조회 24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동창회 모임은 딱 한군데 나간다. 고등학교 3학년 반모임이다. 사회에 첫발을 디딜 즈음에 시작한 모임이니 얼추 한 사십년은 되었다. 모이면 하등 의미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학교 다닐 때 성적, 물론 충격적인 점수를 받았던 수학점수 등으로 이야기를 출발해서 세계 평화를 논하고 손주들 자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마무리 시간이 된다. 요즘은 내게 은퇴후 생활에 대해서 묻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10여년 전 고기리 우리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내가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고 또 평창 집을 가꾸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두었거나 은퇴한 지 서너 해가 되었는데, 미리 생각했던 전원주택 혹은 텃밭정도 가꾸는 시골살이를 이런 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고 꿈만 꾸고 있는 녀석들이다. 한 녀석이 대뜸 목소리 톤을 높인다. “니들, 농사 지어봤냐? 니들처럼 시골 출신이면서 공부 잘 해서 손에 흙 묻히지 않은 놈들이 꼭 귀농한다고 설치더라. 난 농사라면 징글징글해서 때려 죽여도 안한다. 그 돈으로 그냥 사먹는 게 훨씬 싸다!” 녀석 참, 성질 급한 것은 여전하다. 내가 겪은 경험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회사 대리 시절에 직속 과장이었던 선배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당시 사장은 좀 괴팍한 사람이었는데, 학벌도 좋고 인품도 바른 그 선배를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심하게 대했다. 임원회의 때마다 업무 성과를 핑계로 그 선배에게 이야기하는 톤은 옆자리의 우리들도 견디기 어려운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 내곤 하였다. 급기야 그 선배가 원형 탈모 증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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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솥
2024.05.25 | 조회 81
현민의 독국유학기
    WG투어 터키편       인터네셔널 WG(독일에서는 셰어하우스를 WG라고 부른다. Wohngemeinschaft의 줄임말.)에 살다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WG 투어를 하자. 취지는 각자의 나라에 여행을 가자는 것이다. 우리 집은 12명이 함께 사는 특이한 경우라, 대화 때마다 등장하는 각 나라의 정치, 문화, 경제 상황을 다양하게 들을 수 있다. 독일, 터키, 인도, 헝가리, 코스타리카, 이탈리아, 미국 그리고 한국. 가봐야 할 곳이 많은데, 첫 번째로 우리는 터키에 가기로 했다.   독일 사람들은 새벽까지 파티를 한 후 해장 음식으로 되너를 먹는다. 터키 케밥은 독일 길거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데, 그만큼 터키 사람들은 80년대 이후 독일에 넘어와 독일 경제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터키는 유일하게 아시아와 유럽 동시에 면이 맞닿아 있는 국가다. 종교나 역사, 문화 면에서 유럽의 국가들과는 다른 갈래를 가지고 있지만, 유럽 곳곳에 퍼져있는 터키계 노동자들로 인해 굉장히 익숙하다. 2시간 비행이면 도착하고, 독일보다는 싼 물가이기 때문에 비교적 여행하기 만만하다. 나의 플랫 메이트 베이자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 출신으로 독일의 은행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그 애의 주도로 우리는 이스탄불로 향했다.   첫날 밤 공항에서는 호주인 아셔가 여행 비자가 없는 걸 입국장에서 알아버려 그 애를 한참 기다려야 했다. 한국에서 온 나, EU시민권이 있는 니키와 T 그리고 터키인인 베이자는 특별한 비자가 없이도 통과할 수 있었다. 아샤는 공항에서 50유로를 내 비자를 받고 한참 뒤에야 나왔다. 그게 모자랐는지 공항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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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민
2024.05.24 | 조회 74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지난 4월 13일과 14일 낮 최고 기온이 27.3℃와 29.4℃였다. 아직은 이른 봄인데, 기온은 한여름이다. 작년보다도 더 빠르게 더워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햇빛의 강도가 작년과 또 다르게 더 강렬했다. (올해는 새로운 패턴이 생긴 것도 같다. 너무 일찍 더워졌다가 또 급하게 온도가 내려가 평년보다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그런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지구가 불타오르는 것 아닐까 해서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엄청 더워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괜스레 미안해지고 안쓰러웠다. 기후변화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이제 기후위기라고 한다. 이런 지구를 물려주는 어른으로서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어린이날 행사에 참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하며 또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친구야 노~올자     2024년 5월 5일 제102회 어린이날, 우리 동네에서는 제17회 금천어린이큰잔치 ‘친구야 노~올자’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시작된 마을 행사이다. 우리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후 ‘금천구’라는 정체성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날 행사도 한동안 없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은 신도림 가로공원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까지 다녀와야 했단다. 그런 상황을 보고 ‘나서는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도 우리 동네에서 놀게 하자고. 그런 어른들의 제안으로 2007년 처음 금천구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생긴 것이다. 전교조, 노동조합, 청년회, 진보정당 등 지역의 여러 단체가 첫 행사를 준비했다. 처음 열린 행사에서는 이주노동자와...
      지난 4월 13일과 14일 낮 최고 기온이 27.3℃와 29.4℃였다. 아직은 이른 봄인데, 기온은 한여름이다. 작년보다도 더 빠르게 더워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햇빛의 강도가 작년과 또 다르게 더 강렬했다. (올해는 새로운 패턴이 생긴 것도 같다. 너무 일찍 더워졌다가 또 급하게 온도가 내려가 평년보다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그런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지구가 불타오르는 것 아닐까 해서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엄청 더워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괜스레 미안해지고 안쓰러웠다. 기후변화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이제 기후위기라고 한다. 이런 지구를 물려주는 어른으로서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어린이날 행사에 참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하며 또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친구야 노~올자     2024년 5월 5일 제102회 어린이날, 우리 동네에서는 제17회 금천어린이큰잔치 ‘친구야 노~올자’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시작된 마을 행사이다. 우리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후 ‘금천구’라는 정체성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날 행사도 한동안 없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은 신도림 가로공원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까지 다녀와야 했단다. 그런 상황을 보고 ‘나서는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도 우리 동네에서 놀게 하자고. 그런 어른들의 제안으로 2007년 처음 금천구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생긴 것이다. 전교조, 노동조합, 청년회, 진보정당 등 지역의 여러 단체가 첫 행사를 준비했다. 처음 열린 행사에서는 이주노동자와...
김윤경~단순삶
2024.05.20 | 조회 224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남어진
2024.05.10 | 조회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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