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비글]4차시 3월 31일 <나는 왜 쓰는가> 공지

겸목
2024-03-2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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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엔 <오웰의 장미>를 읽고 글쓰기 했습니다. 토요일 게시판으로 올라오는 과제글을 읽으며 단풍님 얘기처럼 넘 재미있었어요~ 각자에게 <오웰의 장미>는 다른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구나!! 같이 읽은 내용이 누군가에게는 이런 기억을 떠올리고, 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 화학작용을 일이키는 것도 신기하구요. 지난 시간엔 글쓰기에 대한 합평보다,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어요. 글쓰기와 무관해 보이지만, 이런 이야기들이야말로 글쓰기의 거름이 되는 것들이에요. 뭘 쓸까? 막막해질 때, 내 생각의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 함께 주고받는 이야기, 그때 내가 한 말, 내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하나의 표지판처럼 느껴질 거예요. 이런 표지판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쓸 수 있는 것들도 많아질 거예요. 암튼, 다음 글쓰기가 많이 기대됩니다. 그리고 우리도 단풍님처럼 합평을 하지 못한 5편의 글에 대해 게시판에서 댓글로 의견을 주고받아봅시다. 

 

다음 시간에는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 출판, 2010년) 세미나합니다. 소설만큼이나 에세이를 잘 썼다는 정평이 나 있는 오웰의 문장을 직접 읽어보겠습니다. 

 

스파이크, 교수형, 코끼리를 쏘다, 서점의 추억,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 마라케시, 좌든 우든 나의 조국, 웰스, 히틀러 그리고 세계국가,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나 좋을 대로, 문학 예방, 정치와 영어, 두꺼비 단상, 어느 서평자의 고백, 나는 왜 쓰는가, 정치 대 문학, 가난한 자들은 어떻게 죽는가, 정말 정말 좋았지 18편만 우선 읽겠습니다. 

 

3월 30일 토요일 오후 10시까지 이 공지글의 댓글로 각자 좋았던 부분, 모르겠는 부분, 반대하는 부분 등 각자에게 인상적이거나 의미있는 내용 2~3개씩 골라서 그 이유와 함께 올려주세요. 세미나에서는 그걸 위주로 이야기 나눠보겠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또 진달래꽃을 보자마자 쌍화탕 사진을 찍어서, 또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 생각을 하게 된 건 좋은 일 같습니다.

 

 

댓글 9
  • 2024-03-30 10:48

    <스페인 내전을 돌이켜 본다> 158쪽
    “어느 정도는 사실이기도 하지만, ‘마음의 변화’가 따르지 않는 사회 재건은 무가치하다는 식의 얘기들도 마찬가지다. 교황에서부터 캘리포니아의 요가 수행자들에 이르기까지, 경건한 자들은 ‘마음의 변화’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경제 시스템을 바꾸는 것보다 마음을 바꾸는 게 훨씬 더 안심할 만한 방법인 것이다. 페탱은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게 서민들의 ‘쾌락 애호’ 탓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프랑스의 평범한 농민이나 노동자의 삶이 페탱 자신의 것에 비해 얼마나 쾌락적인가를 잠시만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노동계급 사회주의자에게 ‘물질주의’가 어떠니 설교하는 이런 정치인, 성직자, 문인 같은 이들의 파렴치함이란! 노동계급이 요구하는 것들은 모두, 그런 파렴치한들 입장에선 없으면 인간적인 삶이 불가능하다 싶을 최소한의 불가결한 것들이다. 충분한 식량, 지긋지긋한 실업의 공포로부터의 자유, 자기 자식들은 공평한 기회를 누릴 것이라는 안심, 하루 한 번의 목욕, 적당히 자주 세탁된 깨끗한 시트, 새지 않는 지붕, 일과가 끝나고 나서도 약간의 에너지가 남을 정도의 짧은 노동시간인 것이다.”

    ⇒ 자본주의가 고도화되어 국경도 없이 복잡해지고, 집단에서 개인으로 파편화되고 있다. 지금은 20세기 초반이 노동자들보다야 상황이 좋아지기는 하지만, 노동계급은 먹고 살 걱정을 늘 한다. 그런데 많은 지식인들이 개인이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자구책으로 마음챙김이나 명상을 추천한다. 조지 오웰의 말대로 일부 맞는 말이긴 하지만 개인의 마음가짐에 집중하는 것이 옳은가? 이 시대의 빅부라더가 개인을 고립시키고, 각자 명상이나 하게 만드는 전략을 취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앞으로 우리가 집단행동에 나서는 것이 가능이나 할까?

    <두꺼비 단상> 281쪽
    “확실히 우리는 불만족스러워 할 필요가 있으며, 잘못된 현실을 최대한 잘 견디는 방법을 찾는 데 그쳐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실생활의 모든 즐거움을 다 죽여버린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 준비해야 할 미래는 과연 어떤 식일까? 사람이 봄이 돌아오는 것을 즐길 수 없다면, 노동력을 줄여주는 유토피아에선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 봄, 햇살, 초록의 나무들, 꽃, 단풍, 매일의 날씨 등을 즐기지 못하면 뭘 즐길까? 삶이 자신의 뜻대로 살아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잘못된 현실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하겠지만,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 또한 누려야 그런대로 살만하지 않겠는가?

  • 2024-03-30 19:53

    -코끼리를 쏘다-38쪽
    나는 겉보기에 작품의 주연이 었지만 실은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바보같은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백인이 폭군이되면 폭력을 휘두르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지만, 백인 나리라는 상투적 이미지 들어맞는 가식적인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 언제나 '원주민'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안달하고, 그래서 위기가 닥칠때마다 '원주민'이 예상하는 바대로 행동해야 하는게 그의 지배조건이기 때문이다 -중략-나는 법적으로 정당할 수 있었고, 코끼리를 쏠 핑계가 충분했던 것이다.
    -살다보면 내의지와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들이 있다. 타인의 시선에 나를 맞추어서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줄때. 비록 그것이 조지오웰처럼 큰 일이 아니지만 소소한 일상속에서 나를 억압 할때가 있다. 이 문장을 읽으며 조지오웰은 어떻게 그런 찌질한 감정들을 이렇게 잘 표현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조지 오웰이 총을 안쏘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순간 내가 타인의 의지에 끌려가지 않는다면 하는 생각도

    -두꺼비의 단상-279쪽
    중요한 건 봄이 주는 즐거움은 누구나 접할수 있으며 공짜라는 점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사슬에 묶여 우리모두 신음하고 있는데, 아니면 아무튼 신음하고 있어야 하는데 찌르레기 지저귀는 소리 때문에, 10월의 잎 노랗게 물든 느릅나무 때문에, 혹은 돈도 안들고 좌파 신문 편집자들이 계급관이라 부르는 것도 필요하지 않는 다른 어떤 자연현상 때문에 더 살만할 때가 제법 있다고 말한다면 그게 정치적으로 비난 받을 일인가?
    =두꺼비하면 3월1일 일리치 약국 산행이 떠오른다. 처음 문탁에 와서 산행에 참석하게 되었고 산행중에 개구리 서식지에서 잠시멈추었다. 개구리 알을 보며 신기해하면서 한참을 쳐다보던 분들과 관심이 없으나 어쩔수 없이 어정쩡하게 서있던 나의 모습이 생각나 잠깐 웃음이 나왔다.
    나는 오웰을 비난하는 독자처럼 생각할때가 종종있다. 바쁜 3월 일상을 접고 일에만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의 일상은 멈추어 놓고 일만하는 것이다. 그런 나의 생각을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강요하는 분위기를 풍긴다. 지금 중요한일이 생겼는데 꽃구경(예를 들어) 할때냐고. 심각한 표정으로 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두꺼비 단상을 읽으며 오웰의 애기가 (정말로)맞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나의 일상은 왜 그렇게 꾸려가지 못할까 하는 불편한 마음이 일었다.

  • 2024-03-30 21:30

    1) p39<코끼리를 쏘다>
    “ ...그러니 코끼리가 덤벼들고 내가 맞히지 못하면, 나는 스팀룰러 밑에 깔린 두꺼비 신세가 될 가능성이 다분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내 목숨 걱정을 하는게 아니라 내 뒤에서 주의 깊에 지켜보는 노란 얼굴들만 의식하고 있었다. 그 많은 군중이 날 지켜보고 있는 그 순간, 혼자 있었다면 느꼈을 법한 일반적인 의미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백인은 원주민 앞에서 두려움을 보여선 안 되기에 대개 두려움을 느낄 수 없게 된다. 그때 나한테 든 유일한 생각은 일이 잘못되면 2000명의 버마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내가 쫓기다 붙들려 짓밟혀서, 비탈 위에 있는 인도인처럼 이를 싱긋 드러낸 송장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웃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터였다. 절대 그럴순 없었다. 대안이 하나 있었다. 나는 탄약통을 탄창에 밀어넣고 길에 바로 엎드려 정조준을 하는 쪽을 택했다.

    --> 오웰은 제국주의 영국 국민 자격으로 버마경찰을 수행하는 동안 제국주의의 민낯을 제대로 느꼈던 것 같다. 부끄러움, 죄책감 등의 감정이 그를 지배했고, 반면 식민지 국민인 버마인들 앞에서는 그들을 지배하는 사람답게 굴어야 된다는 이중적인 압박에 시달렸던 것 같다. 코끼리를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군중의 욕망에 이끌려 총을 들고 조준하고 그 큰 생명체를 사살하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오웰 자신이 겪은 심리를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아마도 오웰은 제국주의의 민낯은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그 바탕에 깔려 있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 같다.

    2) p300<나는 왜 쓰는가>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글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러운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다. 거역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어떤 귀신에게 끌려다니지 않는 한 절대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아마 그 귀신은 아기가 관심을 가져달라고 마구 울어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본능일 것이다. 그런가하면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데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 위의 인용문 문장 하나 하나가 암기하여 머릿속에 저장해 두고 싶을 만큼 좋았다. 그 중에서도 ”자기만의 개별성을 지우려는 노력을 부단히 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글을 절대 쓸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라는 문장에 가슴이 ‘쿵’ 했다. 글을 쓰는 태도로써 뿐만 아니라 ‘나’를 드러내면서 ‘나’를 지우는 일이 얼마나 한 개인을 훌륭하게 만드는 일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아서이다. 자기 확신을 가지되, 자기 확신에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라는 말 같기도 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되, 타인에 대한 배려를 놓치지 말라는 같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충실하되 세상의 불의에 눈감지 말라는 것 같기도 하다.

  • 2024-03-30 21:52

    <스파이크>
    5월이 시작된 터라, 계절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당국에서 스팀을 차단했던 것이다. (12)
    감금을 견딜 수 있는 건, 자기 안에 위안거리가 있는 배운 사람들뿐이다. ... ... 그들에겐 무위의 끔찍스러움을 견딜 자산이 없는 것이다. (15-16)
    <교수형>
    절대 무릅을 펴지 않고 까닥까닥 걷는 인도인 특유의 걸음이었다. 걸을 때마다 근육이 매끈하게 제자리로 미끄러졌고, 두피에 바싹 붙어있는 짧은 머리털이 아래위로 춤을 추었고, 젖은 자갈땅엔 맨발 자국이 절로 생겨나듯 찍혔다. 그리고 한 번, 어깨를 한쪽씩 붙든 사람들이 있는데도, 그는 도중에 있는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껴갔다. (26)

    =====
    오웰이 유머스러운 표현, 날카로운 통찰력을 볼 수 있는 표현. 굉장히 사실적인 생생한 묘사.
    이 정도의 글쓰기 내공은 일상을 늘 주의깊게 관찰하고 사물이나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며 다시 한번 감탄한 대목이다.

    <정치와 영어>
    우리 문명이 퇴폐적인 만큼 우리 언어도 어쩔 수 없이 전반적으로 함께 몰락하게 된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255)
    오늘날 최악의 글쓰기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고, 의미를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알맞은 이미지를 창조해내는 데 있는게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가 이미 정해놓은 긴 어군들을 이어붙이고 순전한 속임수로 그것을 받아 들여질 만하게 만드는데 있다. 이런 식의 글쓰기가 매력적인 건 그렇게 하기가 쉽다는데 있다. (267)
    우리 시대에 정치적인 말과 글은 주로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데 쓰인다. (270)
    그런데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271)
    ======
    최근 총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의 말과 그 속에 담긴 그들의 의식의 바닥을 보면 진저리가 처질 때가 자주 있는데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 것'인지, '언어가 생각을 타락시킨 것'인지 헷깔리기도 한다. 오웰의 희망대로 언어의 개선을 생각의 타락을 개선할 수 있을 건가? 별로 기대감이 없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두꺼비 단상>
    실생활의 모든 즐거움을 다 죽여버린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 준비해야 할 미래는 과연 어떤 식일까? 사람이 봄이 돌아오는 것을 즐길 수 없다면, 노동력을 줄여주는 유토피아에선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기계가 가져다 줄 여가에는 과연 무엇을 하게 될까? (281)

    ======
    그래서 난 오늘 댓글 마감도 안해논 주제에 연두빛 버드나무가 휘날리는 하천길을 따라 개나리, 진달래, 벚꽃과 목련이 앞다투어 피고 있는 봄길을 하릴없이 걷다가 맥주 한잔하고 들어왔다.물웅덩이에서 나와 이제 막 얼굴을 내미는 두꺼비와 눈맞추며 봄을 맞는 오웰에게 "인생 뭐 있어, 정말 정말 좋았지" 맞장구 쳐주고 들어왔다.

  • 2024-03-30 22:11
    [ 코끼리를 쏘다 ] p.33 마음 한편으로 나는 영국의 지배를, 납작 엎드린 민족들의 의지를 영영 억누르는 거역 불가능한 압제라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총검으로 승려들의 배때기를 푹 쑤시는 것보다 이 세상에 더 기쁠 일이 없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p.37 나는 이미 길에 멈춰 서 있었다. 나는 코끼리를 보자마자 쏴서는 안된다는 걸 완벽하리만큼 확실히 알았다. 멀쩡한 코끼리를 쏜다는 건 심각한 문제이며 피할 수 있다면 분명히 피해야 하는 일이었다. (중략) 더욱이 나는 녀석을 쏘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좀 지켜보며 녀석이 다시 난폭해지지는 않는다는 걸 확인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돌아서다 나를 따라온 군중을 흘낏 보고 말았다. 막대한 인파였다. (중략) 그 때 나는 내가 결국엔 코끼리를 쏴야 한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가 그러리라 기대하고 있었으니 그래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2000명의 의지가 나를 거역할 수 없게 밀어붙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략) 백인인 나는 겉보기엔 작품의 주연이었지만, 실은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바보 같은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중략)
    하지만 난 코끼리를 쏘고 싶지 않았다.
    ⇒ 은근한 기대감 또는 인습으로 인한 기대감 때문에 원치 않아도 코끼리를 쏴야만 했던 오웰에 ‘명절날의 며느리’였던 일화가 떠올랐다. ‘한 사람만 불편하면 모두가 편안하다’ 어느 날 큰 시누이 남편께서 하신 말씀이다. 다함께 즐거워야하는 명절에 왜 한사람은 불편해야 할까?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그 과정을 도우면서 가면되지 않나?
    ⇒ 큰 성공이나 출세를 이루지는 못했어도, 나름의 프라이드와 성취를 이뤄낸 내가 내 생각과는 관계없이 부여된 역할을 묵묵히 해내야한다는 의무감들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닌, 인습의 꼭두각시라는 느낌을 짓게 해주곤 했다. 오웰도 그런 느낌이었을까?

    [ 서점의 추억 ] p.43 우리 서점은 예외적으로 흥미로운 책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으나, 손님들 중에 10분의 1이나마 그 진가를 알았을까 싶다. 초판 밝히는 속물들이 문학 애호가들보다 훨씬 흔했고, 싼 교과서 값을 더 깎으려는 동양학생들이 그보다 더 흔했으며, 막연히 조카 생일 선물이라도 구하러 들르는 여성들이 제일 흔했다.
    ⇒ 속물, 동양학생, 여성에 대한 수식어에서 은근한 편견이 느껴진다.
    슬쩍 불편함이 밀려오는 수식어들, 은근한 편견 때문인가? 내가 그중 하나이기 때문인가?
    ⇒ ‘나’로 가득차 있던 치기 어린 시절, 나 역시 이런 시선과 시각으로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지금도 불쑥불쑥 솟아올라 타인을 불편하게 하고, 나를 frame안에 가두고 있지 않을까?
    서점의 추억에서 괜한 문구에 사로잡혀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본다.

  • 2024-03-30 22:56

    <스파이크> 9쪽
    머리 위로는 꽃 흐드러진 밤나무 가지가 드리워져 있었고, 그 위로는 맑은 하늘에 커다란 양털구름이 거의 움직임 없이 떠 있었다. 그 아래 풀밭에 흩어져 있는 우리는 도시의 거무죽죽한 쓰레기 같았다. 우리는 풍경을 더럽히는 존재였다.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 정어리 통조림이나 종이봉투처럼.

    =>오웰의 문체는 간결하며, 과장이 없고, 감정 보다는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묘사한다. 그렇게 묘사된 문장을 읽다보면 저절로 영사기가 돌아가는 듯 풍경이, 냄새가, 그 상황이 그대로 펼쳐진다 파노라마처럼. 그래서 제국주의에 복무하는 그의 위선이, 허위가 더 적나라하게 여실히 드러난다(코끼리를 쏘다). “묵은 식빵껍질 냄새가 나는 쇠약한 사람”, “우표 수집가들은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별나고 조용한 부류” 같은 표현은 왠지 딱딱 들어맞는 것 같이 느껴진다.
    풍경과 부랑자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이런 사실적인 표현이 왜 아름다우면서도 처연하게 느껴질까?

    <정치와 영어>271쪽
    과장된 문체는 그 자체로 일종의 완곡어법이다. 사실에다 보드라운 눈을 뿌리듯 라틴어를 잔뜩 쓰면 요지는 흐려져버리고 세부는 다 덮여버린다. 명료한 언어의 대적은 위선이다. 진짜 목적과 겉으로 내세우는 목적이 다를 경우,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긴 단어와 진부한 숙어에 의존하게 된다. 마치 오징어가 먹물을 뿜어대듯 말이다. 우리 시대에는 ‘정치와 거리를 두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모든 문제가 정치 문제이며, 정치란 본래 거짓과 얼버무리기, 어리석음, 반목, 정신분열증의 집합체인 것이다………중략………그런데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부적절한 어법은 알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관습과 모방에 의해 퍼져나갈 수 있다.

    ==>어떤 사실에 대한 정치적 주장이 억지스러워질 때 추상적이거나, 장황해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한다.실적 보고나 성과보고를 작성해야 할 때 특히 느끼는 문제다. 맨날 쓰면서도 되도 않는 소리라는 걸 내 스스로 느끼면서 심한 염증을 느낀다. 오웰의 글이 왜 그렇게 담백하며, 명료하고, 간결한지 알 것 같다. 그리고 그는 글을 쓰면서 한번도 낙담하거나, 우울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것 같다. 그 뿐 아니라 무조건 긍정하거나 희망만을 나열하지도 않는 것 같다. 이건 어떻게 가능하지? 정원을 가꾸면 가능해지는걸까? ㅋ

  • 2024-03-30 23:03

    <나 좋을 대로>
    지난여름 나는 전쟁 전에 살던 작은 시골집을 지나가게 되었다. 내가 심을 땐 아이들 새총보다 크지 않았던 조그만 백장미가 거대하고 왕성하게 우거져 있었고, 앨버틴 또는 그 비숫한 무엇은 분홍 꽃송이를 구름처럼 터뜨린 채 울타리 절반을 뒤덮고 있었다. 둘 다 내가 1936년에 심은 것들이었다. 그때 떠오른 생각은 ‘전부 겨우 6페니 주고 산 건데!’였다. 나는 장미가 얼마나 오래 사는지 알지 못한다. 평균수명이 10년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살아 있는 동안 내내, 덩굴장미는 해마다 한 달 내지 6주 동안 꽃이 활짝 피어 있을 것이고, 덤불장미는 적어도 넉달에 걸쳐 꽃이 피고 지기를 거듭할 것이다. 전부 겨우 6페니 주고 산 것이었다. 전쟁 전 기준으로 ‘플레이어’ 담배 10개비, 마일드 생맥주 한 잔 반, <데일리 메일> 일주일 구독료. 공기 텁텁한 극장에서 보는 영화 20분 정도에 해당하는 값이었으니! (177)

    -----> <두꺼비 단상>에서도 봄을 즐기는 건 '공짜'라고 강조함으로써, 봄을 즐겨야 한다는 정언명령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은 봄은 즐기지 않고는 못배기게 아름답다는 의미를 유머러스하게 하고 있다. 돈얘기는 늘 관심을 촉발한다. 전부 6페니를 주고 산 장미가, 10년 이상, 1년에 한 계절 꽃을 피운다는 사실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 생각하게 해준다. 그 비용이 얼마나 싼지, 안 하고는 못배길 일이라는 것을 담배, 생맥주, 신문구독료, 영화티켓값으로 다시 구구절절 근거를 들어주는 오웰의 유머가 다시 한 번 위트있게 다가온다. 매력적인 글이다. 꼭 이렇게 담배, 생맥주, 신문구독료, 영화티켓값+알파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나는 왜 쓰는가>
    나는 7년 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조만간 또 하나의 소설을 쓰고 싶다. 그것은 실패작이 될 게 뻔하고, 사실 모든 책은 실패작이다. 단, 나는 내가 어떤 종류의 책을 쓰고 싶어 하는지 꽤 분명히 알고 있다. (중략)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 나는 내가 글을 쓰는 동기들 중에 어떤 게 가장 강한 것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게 가장 따를 만한 것인지는 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300)
    ----> "나는 내가 어떤 종류의 책을 쓰고 싶어하는지 꽤 분명히 알고 있다"는 문장에 꽂혔다. 그걸 쓰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쓰지 못했다는 것을 알더라도, 그렇게 쓰려는 지향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있는 사람이 '작가'일 거란 생각을 해본다.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싶은 것일까? 오랫동안 헷갈려 했기 때문에 이 문장이 나에게 강렬하게 다가왔다. 지금도 나는 그것을 모르겠다. 그러나 다른 일이 아니라 글쓰는 일을 하고 싶다, 는 나의 지향을 확인했고, 그것은 어떻게 펼쳐지게 될 것인가 모색중이다. 나는 나의 지향을 회피하거나 의심하지 않는 것이 지금 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는 표현도 하나의 표지판처럼 내게 다가온다. 그래, 유리창에 비춰보자. 내가 뭘 쓰고 있는지? 뭘 쓰고 싶은지? 그걸 잘 하고 있는지?

  • 2024-03-31 01:05

    -코끼리를 쏘다
    P38 여기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군중 앞에 총을 들고 서 있는 백인인 나는 겉보기엔 작품의 주연이었지만, 실은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바보 같은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그순간 나는 알게 되었다. 백인이 폭군이 되면 폭력을 휘두르고 말고는 자기 마음이지만, 백인 나리라는 상투적 이미지에 들어맞는 가식적인 꼭두각시가 되고 만다는 것을 말이다.언제나 원주민 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안달하고, 그래서 위기가 닥칠 때마다 원주민이 예상하는 바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게 그의 지배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면을 쓰고, 그의 얼굴은 가면에 맞취져간다. 그러니 나는 코끼를 쏴야 했다.=> 팀의 팀장을 맡고서 5년간 조직안에서의 불편함, 억울함, 그리고 허탈함으로 여러감정을 느꼈던 지난날들이 스스로에게 설명이 되었던 글였습니다. 가면에 맞춰가던 스스로의 모습이 반추되었어요

    -마라케시
    P75 행렬이 지나갈때 아주 어린 흑인 하나가 돌아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중략)그는 백인종이 자신의 주인이라 배웠으며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흑인 군대의 행군을 보면 어떤 백인이든 품게 되는 생각이 하나있다. 정말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곳에 있는 백인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구석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그랬고, 다른 구경꾼들이 그랬고, 땀 흘리는 말에 올라탄 장교들이 그랬고, 그들과 함께 행군하는 백인 하사관들이 그랬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알지만 약아서 말은 안 하는 그런 유의 비밀이었다. 모르는 건 흑인들 뿐이었다.
    -정말정말 좋았지
    P424 그런데 내가 거의 눈치채지 못했던 건 헤일이 공식적으론 나와 싸우려고 덤볐으나 실제로 공격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그 한방을 맞은 뒤 녀석은 나를 다시는 괴롭히지 않았다. 내가 이사실의 의미 심장함을 이해하기까지는 20년은 걸렸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강자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약자가 처하게 되는 도덕적 딜레마를 뛰어 넘는 시야를 갖추지 못했다.
    나는 그런 경우에 약자가 자신을 위한 새로운 규칙을 만들 권리를 갖게 된다는 점을 몰랐다. 그런 생각을 했다 한들 내게 확신을 심어줄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년들의 세계에 살았고, 소년들이란 어울리기 좋아하고, 아무것도 의문시하지 않고, 강자의 법을 받아들이며, 자기보다 작은 아이에게 굴욕을 물려줌으로써 자신이 당한 굴욕을 갚는 존재였다.
    => 약자라는 프레임에 갇히게 되면,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하거나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하는 비슷한 글이였고, 평가절하하거나 부정적인 태도가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저의 한계적 상황에서 공감가는 글였어요

    -정치와영어
    p274 구체적인 대상에 대해 생각할 경우 먼저 단어로 표현하지 말고 생각부터 해보자. 그런 다음 머릿속에 그려본 것을 묘하고 싶다면, 거기에 맞을 듯한 정확한 단어를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추상적인 문언가를 생각할 경우엔 애초부터 단어를 선택하는 쪽에 끌리리가 더 쉽다(~중략) 그러니 가능한 한 단어 사용을 미루고서 심상이나 감각을 이용하여 전하고자 하는 뜻을 최대한 분명하게 하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이지 싶다.=> 구체적인 글쓰기 제안방법

    -두꺼비단상
    P279 중요한 건 봅이 주는 즐거움은 누구나 접할 수 있으며, 공짜라는 점이다. 아무리 지저분한 길거리라 해도 봄은 이런저런 신호로 자신을 알리며 찾아온다/ 봄은 어디나 스며들어 찾아오는 것이다. 어떠한 필터라도 통과할 수 있는 신헝 독가스처럼 말이다.=>봄이 스며드는 계절임을 간결하게 표현을 하고 있지만 저는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표현인 듯 해 인상적이였어요

    -어느서평자의고백
    P285 이렇게 심신을 고문당하고 짓밟히는 이도 불과 몇 년 전에는 고상한 포부를 품고서 이일을 시작했다./P286 아무리 양심적으로 칭찬을 하든 욕을하든, 본질적으로 사기다. 그는 자신의 불멸의 영혼을 하수구로, 그것도 한 번에 반 파인트씩 흘려보내는 셈이다=>생계형노동자로서, 사회 조직 구성원으로서의 나와 이상적 인간이고자 하는 나의 불협화음으로 자책과 자괴감이 불쑥불쑥 올라오곤 하는데, 뭔가 위로 받는 듯한..문장이였어요

  • 2024-03-31 08:31

    <나는 왜 쓰는가> 메모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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