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비글] 2차시 3월 17일 <오웰의 장미> 후반부 공지

겸목
2024-03-13 15:28
161

어떤 모임이든, 수업이든 첫 시간의 '긴장'이 있어요. 약간 어색하고, 조심스럽고, 떨리고, 흥분되고.......그래서 첫 시간을 마치고 나니, 앞으로는 한결 수월할 거란 자기암시를 하게 됩니다.  후기도 벌써 올라왔어요. 이미 읽어보셨나요? 수영님과 단풍님 후기 읽으며 지난 시간에 오고간 내용 떠올려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차시 3월 17일에는 <오웰의 장미> 뒷부분 세미나합니다. 잠시 읽어봤더니, '오웰의 장미'와 대비되는 '스탈린의 레몬'이 나오네요. 야! 정말 절묘하다~ 오웰과 스탈린을 장미와 레몬으로 언급하다니!! 앞으로도 흥미를 가지고 읽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오웰의 장미> 후반부 읽어보며, 좋았던 부분 혹은 의문시되는 부분 또는 반대의견이 있는 부분 체크해주시고, 왜 그러한 느낌이 들고 생각이 드는지 이유도 같이 써주세요. 3월 16일 토요일 오후 10시까지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처음이라 잘 모르겠다는 분들은, 다른 분들 올리는 것 보고 하셔도 됩니다. 그럼, 한 주 잘 보내고, 일욜 오전에 파지사유에서 뵙겠습니다.

 

다음주 간식, 청소, 후기는 꿈틀이님과 유유님입니다. 간단히 준비해주세요~

 

시즌1 계획서 파일 첨부해놓겠습니다.

 

 

댓글 7
  • 2024-03-16 18:05

    아름다움에 관하여

    p.258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품이 넉넉한 말 중 하나로, 가장자리가 닳아지고, 너무 친숙한 나머지 무시되며, 순전히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뜻하는 데 사용될 때가 많다. 하지만 <옥스퍼드 영어 사전>이 열거하는 아름다움의 종류에는 시각적이지 않은 것도 많다. 가령 "사람이나 사물이 아주 마음에 들거나 만족스러운 성질, 도덕적이거나 지적인 탁월성, 감탄할 만한 사람, 어떤 사물의 인상적인 또는 예외적으로 훌륭한 본보기 같은 것들이다.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일레인 스캐리는 아름다움에 관한 비판 중에는 아름다움의 관조가 수동적이라는 것도 있다고 지적한다. "자신이 보거나 들은 것을 바꾸고자 하는 아무 바람 없이 그저 보거나 듣는 것." 이것은 단순하면서도 놀라운 정의이다. 바꾸고자 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람직한 여건이 실현된 상태일 수 있으며, 그것은 미학적 표준과 윤리적 표준이 일치하는 지점이다. ...생산성이나 불의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종종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폄하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라 해도 실은 수많은 사소한 행동과 관찰과 관계 유지를 포함하는, 다양한 종류의 행함인데도 말이다. 그것은 쉽게 물량화되거나 상품화될 수 없는 가치나 결과를 지닌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이다.

    p.260
    "조이, 이것들은 아름다워요. 우리는 이것들을 위해 싸우는 거예요. 우리가 화를 내고 불평하는 것은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가 돌아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아름다움이에요. 만일 당신이 그걸 놓아버린다면, 우린 갈 데가 없어져요." 그러므로 아름다움이란 바꾸기를 원치 않는 무엇인 도잇에 가고자 하는 곳, 나침반 또는 북극성일 수 있다. 레너드는 그 상호 교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알다시피 우리는 아름다움을 즐기기에는 너무 상심해 있었어요. 나는 이 구름 사진들을 보면서 스스로 머저리처럼 느껴졌어요...이 모든 싸움을 거쳐야 하는 건 싸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모두 함께 어딘가에 도달하고 싶기 때문이지요. 둘러앉아서 구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창조하는데 도움이 되고 싶은 거예요. 그건 우리가 인간으로서 갖는 권리가 되어야 해요." 만일 우리가 둘러앉아 구름에 대해 생각하지 못한 채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다면 그렇게 하는 법도 그래야 하는 이유도 잊어버릴지 모른다. 길에서 너무 헤매느라 더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P.276
    아름다움은 형식적인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눈이나 귀에 호소하는 피상적 특질들에만 있지 않으며, 의미의 패턴에, 가치의 호소에, 독자가 살고 있는 삶에, 그리고 각자 보기 원하는 세상과의 연결에 있다. (중략) 형식은 기능과 분리되지 않는다. 아름다움 또는 추악함이란 그저 외관보다는 그 의미, 영향, 함의 등에 있는 것이다.

    p.280
    오늘날 세상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추악한 수단을 통해 생산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광산이 수익을 내기 위해, 신발을 가능한 한 싼값에 생산하기 위해, 정유소가 휘발유 생산 과정에서 유해 가스를 내뿜어도 되기 위해 사람들이 죽는다. 나는 그 양자 간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 현대 생활에 만연하는 전일성integrity의 결여라고 종종 생각해왔다.

    p.283
    "오늘날은 꽃이 다정함이 아니라 눈물로 키워져요. 우리 생산품은 전 세계에서 아름다운 느낌을 표현하는데 쓰이지만, 우리는 아주 형편없는 대접을 받지요."

    p.309
    명징성, 정직성, 정확성, 진실정 등이 아름다운 것은 그런 것들 가운데서 비로소 대상이 진실하게 재현될 수 있고, 앎이 민주화되고, 사람들이 힘을 얻고, 문들이 열리고, 정보가 자유롭게 이동하고, 계약들이 준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런 글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그 글에서 흘러나는 것에서도 아름답다. 오웰의 작품에는 더 인습적인 종류의 아름다움도 있다. 하지만 윤리와 심미성이 별개가 아닌 이 아름다움, 진실과 전일성의 언어적 아름다움이야말고 그가 자신의 글 쓰기에서 도달하고자 노력했던 핵심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런 아름다움은 언어와 그것이 묘사하는 것 사이, 한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 한 공동체나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종의 온전함이요 유대감으로 작용한다.

    ==> 오랜 시간 생명을 유지하고, 지속적인 울림으로 우리를 매혹하는 본질은 결국은 '아름다움'이란 저의 생각과 와닿은 지점입니다. 오웰이 장미를 심은 것, 자연에 가까이 다가간 것, 사물의 심미성에 매혹당하면서도 세상의 진실에 눈 감지 않은 것, 미학적 표준과 윤리적 표준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낸 것, 삶과 작품의 전일성을 갖춘 것...삶의 궤적 하나하나가 동일하게 가리키는 지점은 결국은 자연과 인간과 사상과 삶의 아름다움의 회복이 아니었을까요.

  • 2024-03-16 19:52

    1) p 173
    오웰의 장미들과 그것들이 어디에 이르렀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회가 많은 과정이고 어쩌면 리좀형의 과정이다. 여러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러너’라 불리는 뿌리들을 내는 딸기 같은 식물들을 묘사하는 이 말은 철학자 질 들뢰지와 펠릭스 과타리가 탈중앙화 내지 비위계화된 지식의 형태를 묘사할 때 처음 차용되었다. “리좀의 어느 지점이든 다른 지점과 연결될 수 있고 그래야만 한다” 라고 그들은 선언했다. 이것은 나무나 뿌리가 한 점을 지정하고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것과 전혀 다르다. 나무와 가지의 가지 뻗기는 종종 계보의 모델로 사용된다. 종(種)이나 언어의 진화 과정이 가문의 계보처럼, 그 연대적이고 분화하는 전수의 형태가 나무 모양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과타리는 후에 이런 말도 했다. “리좀은 반계보적이다”

    --> 리베카 솔닛은 조지오웰이 장미를 심었다는 단순 문장으로 글의 시작을 알린다. 장미 오웰, 리베카 솔닛 자신, 별 연관성이 없을 것 같은 단어들을 엮어 문장을 만들고 그것으로부터 정원을 거쳐 역사, 시대, 이념과 결국 인간이라는 철학적 소재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 이 책이 나에게 안긴 첫번째 영감은 들뢰즈 과타리가 명명했다는 리좀식 글쓰기라는 전복적 전개 방식에 있었다. 작은 정원에서 시작한 문장이 드넓은 대양의 어느 끝점을 향해 내달리는 것과 같이 독자로 하여금 숨막히는 지적인 풍요로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약간의 절망감도 안긴다. 어떻게 이런 전개 방식으로 주제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글을 쓸수 있었던 걸까?..
    나는 조금은 예민하게 글의 주제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틀을 만들고 연결장치를 고려하며 그야말로 중심이 드러나는 글을 고수했던 것 같다. 또한 나의 일상도 질서와 균일성에 초점을 맞추려는 여러 장치들을 만들어 놓은 것 같기도 하다. 글쓰기도, 나의 일상도 갑자기 반계보적으로 전개되기는 힘들겠지만 다른 시도를 고려해보는 것. 리베카 솔닛이 던져준 이 풍성한 전개방식을 삶에 한번 녹여내 보고 생각하는 것. 이 책이 독자에게 안겨준 자극이자 과제인 것 같다.

    2) p256
    나는 자연계에서 우리를 감동시키는 아름다움의 상당 부분은 그림으로 포착될 수 있는 정태적이고 시각적인 미려함이 아니라, 패턴과 반복으로서의 시간 그자체, 날들과 계절들과 해들의 리드미컬한 지나감, 달의 주기와 조수, 태어남과 죽음에 있다고 종종 생각한다. 조화와 구성과 일관성처럼 패턴 그자체도 일종의 아름다움이며, 기후변화와 환경파괴가 우리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그 리듬이 깨진다는 데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질서는 공간적 질서가 아니라 시간적 질서이다. 때로 그림들은 그 점을 전달하지마 그림을 보는 습관적인 방식 때문에 우리는 그 시간의 춤을 간과하게 된다. 자연을 영국 전원의 전통에 따라 감상하지 못한다고 때로 경멸당했던 식민지 원주민들은 흔히 그것을 정태적인 회화적 즐거움이 아니라 시간속의 질서 정연한 패턴으로 체험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드물게 아름다운 일몰의 한 장면보다는 태양이 한 해를 통과해가는 시간적 진행을 더욱 경하하는 것이다.

    --> 나는 항상 아름답게 사는 것을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때론 유년기때의 동심과 아름다운 자연 그 자체와 함께한 삶에 대한 동경이었을 것이다. 때론 결혼과 육아 등 사회제도의 공고한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나 자신을 펼쳐보이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붓다의 그것처럼 성인이 되기 위해 세상의 번뇌를 극복하며 사는 삶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보면 아름다움이란 위의 글에서 ‘원주민들이 한 해를 통과해가는 시간적 진행을 경하’하는 의미에 대한 해석에 있을 것 같다. 지금 내가 발딛고 있는 곳에서 이미 알고 있는 윤리와 진실이라는 축적된 데이터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지속적 질문과 마주하는 것.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다른 것은 아름다움이 때론 고통과 슬픔과 우울, 좌절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딸기의 ‘러너’처럼 다른 것들과 연대하고 연결하여 가능성을 생산하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 2024-03-16 21:04

    1) 293쪽
    장미는 어떤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른 것이라는, 일종의 거짓말이 되었는가? 그것들은 이제 기만의 징표, 실제 생산 여건보다 외관상의 아름다움을 표의하는 일종의 기만이 아닌가? 오웰의 작품 상당 부분은 다양한 종류의 추악함에 대한 것이지만, 그가 추악하다고 본 것은 그가 아름답다고 본 것의 잘 드러나지 않는 이면이었다.
    ☞ 장미 농장을 다녀온 레베카 솔닛은 장미가 향기는 없고, 눈물로 키워지는 것을 목도 한다. 오웰은 어린 시절 예비학교를 다니며 신분과 돈에 의해 차별받는 현실을 체험했고, 식민지 경찰로 근무하면서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광부들의 가혹한 삶이나, 밑바닥 삶을 체험하며 사회의 부조리함을 절실하게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물질을 공평하게 나누고 누구나 존중 받는 공산주의로 마음이 기운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거짓말과 추악함을 발견하게 된다. 아름다운 장미의 이면처럼. 그가 죽음에 이르는 병고 속에서 쓴 『1984』는 이상적 사회를 꿈꾸던 이들이 만든 전체주의 사회, 거짓과 기만이 판치는 사회에서 소박한 아름다움을 꿈꾸는 주인공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2) 351쪽
    오웰은 간디의 불굴의 의지의 절대주의와 금욕주의, 그리고 초월적 영성이라 여겨지는 것을 다소 우려스럽게 보았다. 그는 그런 특질들에서 일종의 추상화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식의 태도를 보았다. 그에게 그런 것들은 자신이 평생을 바쳐 반대해온 이념적 광신주의와 너무나 가까운 것이었다.
    ☞ 오웰은 세상 사람들이 추앙하는 것에 휩쓸리지 않았다. <간디에 대한 소고>는 1948년 1월 인도에서 영국을 몰아내기에 마침내 성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암살당한 즈음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간디의 업적을 치하하기에 바빴을 것이다. 오웰이 완전하지 않았듯, 그 누구도 완전하지 않다.
    오웰은 간디에게서 또 그를 추앙하는 사람들 속에서 이념적 광신주의의 냄새를 맡는다. 그는 그 글에서 “인간됨의 본질은 완벽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고, 때로 신의를 위해 기꺼이 죄를 저지르는 것이며, 정다운 육체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금욕주의를 밀고 나가지 않는 것이고, 결국엔 생에 패배하여 부서질 각오를 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인간들에게 우리의 사랑을 걸자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이다.”(352쪽) 그는 정말로 “이상화되지 않은 불완전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새로운 능력”(353족)이었다.

  • 2024-03-16 21:18

    p259"보거나 들은것을 바꾸고자 하는 아무 바람없이 그저 보거나 듣는것" 아마도 오웰의 가사일기는 그런 기록일 것이다,. 노동과 재배와 사소한 사건들의 짤막한 기술에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와 다르게 어떠했으면 하는 바람이 별로 들어있지않다. 서사-허구 신화 .동화.저널리즘-은 무엇인가가 잘못되어갈때 일어나느 일에 대한 것이기 쉽다. 가령 정치가 부패화고 강이 오염되고 노동자가 착취당하며,. 사랑하는 이는 사라졌다는 식으로 말이다. 가장 안정적인 아동용 책들도 나름대로의 상실 위기를 담고 있으며 없는 연결을 찾고자 한다. "바꾸고자 하는 아무 바람없이 " 존재하는 것이란 정태적이다. -중략- 서사는 종종 옳은것. 아름다운것. 선한것을 옹호하고 복구하려는 욕망에 내몰린다.

    =아무 편견(바람?)없이 그저 보거나 듣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아 가게 된다.

    p293 장미의 추악함은 그런 식으로 생산된다는 데 있을까. 아니면 우리가 그 점을 간과한다는데 있을까? 장미는 어떤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다른 것이라는 일종의 거짓이 되었는가. 그것들은 이제 기만의 징표. 실제 생간 여건보다 외관상의 아름다움을 표의 하는 일종의 기만이 아닌가?
    =보이는 것과 그 이면에 숨어있는 사실을 아는것은 얼마나 다른지. 살면서 놓치고 있는 것들을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다.

  • 2024-03-16 22:02

    P309
    명징성, 정직성, 정확성, 진실성 등이 아름다운 것은 그런 것들 가운데서 비로소 대상이 진실하게 재현될 수 있고, 앎이 민주화되고, 사람들이 힘을 얻고, 문들이 열리고, 정보가 자유롭게 이동하고, 계약들이 준수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런 글은 그 자체로 아름다우며, 그 글에서 흘러나오는 것에서도 아름답다. 오웰의 작품에는 더 인습적인 종류의 아름다움-버마의 숲에서 영국의 초원에 이르는 자연 경관, 그 모든 꽃들과 두꺼비의 황금빛 눈알에 이르기까지-도 있다. 하지만 윤리와 심미성이 별개가 아닌 이 아름다움, 진실과 전일성의 언어적 아름다움이야말로 그가 자신의 글쓰기에서 도달하고자 노력했던 핵심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런 아름다움은 언어와 그것이 묘사하는 것 사이, 한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 한 공동체나 사회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종의 온전함이요 유대감으로 작용한다.

    =>명징성,정직성,정확성,진실성…전일성, 윤리와 심미성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 글쓰기의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핵심 키워드 같아 보인다. 어쩌면 ‘수정 같은 정신’과도 일맥상통하는 말 같이 보이기도 하다. 오웰은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내가 글을 쓰는 것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하게 하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내 우선적인 관심사는 사람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라고 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하고 싶은 말이 명징해야 하고, 그것이 예술의 경지까지 가려면 윤리가 있어야 심미성이 더해진다는 사실. 글을 쓰고자하는 이유와 자세, 모든 글은 정치적 글쓰기임을 다시 한번 깊이 새겨야 하는 문장인 것 같다.

  • 2024-03-16 22:26

    “보거나 들은 것을 바꾸고자 하는 아무 바람 없이 그저 보거나 듣는 것.” 아마도 오웰의 가사 일기는 그런 기록일 것이다. 노동과 재배와 사소한 사건들의 짤막한 기술에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와 다르게 어떠했으면 하는 바람이 별로 들어 있지 않다. 서사-허구, 신화, 저널리즘-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어갈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것이기 쉽다. 가령 정치가가 부패하고, 강이 오염되고, 노동자가 착취당하며, 사랑하는 이는 사라졌다는 식으로 말이다. 가장 안정적인 아동용 책들도 나름대로의 상실 위기를 담고 있으며, 없는 연결을 찾고자 한다. “바꾸고자 하는 아무 바람 없이” 존재하는 것이란 정태적이다. 그것은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은혜로부터 실추되기 전, 또는 재결합, 시정, 그 밖에 다른 형태의 복구가 이루어진 다음이다. 그러나 잘못된 것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는 만일 사태가 제대로 굴러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 적어도 암암리에는, 가치이자 목표로서 들어 왔다. 서사는 종종 옮은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을 옹호하고 복구하려는 욕망에 내몰린다. (259)

    --->어디로 수렴되는지 모를 문장들을 그냥 써보고 싶다. “아무 바람 없이 그저 보거나 듣는 것‘을 쓴다는 것! 내게 강조되게 다가왔다. 무엇을 하기 위해, 무엇을 시정하기 위해, 무엇을 바꾸기 위해 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 했던 것 같다. 의식적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시간들에 비해 그런 결과물을 얻지 못한 시간이 길다. 그래서 이제는 역으로 해보려 한다. 그런 것 없이 쓴다는 것은 어디에 도달하게 될까? 그런 도달이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 원래의 길을 잘 갔으면, 이런 생각을 먹지 않게 되었겠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나쁘지는 않다. 좀 더 강박 없이, 구속 없이 보고, 들리는 것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4월에는 “봄비가 내린 후 땅에서 나는 냄새”가 있고, 5웰에는 “내의를 입지 않은 즐거움”이 있으며, 6월에는 “갑작스런 폭우와 건초 냄새, 저녁 식후의 산책, 허리가 아프도록 감자 캐는 일”, 7월에는 “셔츠 바람으로 출근하기, 런던의 보도를 걸을 때 탁 탁 탁 끝없이 튀는 버찌씨들”, 이런 식으로 11월의 “엄청난 강품”과 “군불 태우는 냄새”까지 이어진다. 2월은 “짧다는 것 말고는 달리 장점을 찾아볼 수 없는, 특히 싫은 달이지만, 우리 나라 기후에 공정을 기하자면, 그대로 이 축축하고 추원 시절 없이는 1년의 나머지가 퍽 다르게 느껴질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느끼는 소소한 세부들, 느껴지고 맡아지고 맛보아지고 보이고 들리는 온갖 것이 그의 소설들을 생생하게 하며, 역시 같은 공정함의 감각이 그의 모든 작품에 나타나 있다. (322)
    --->이런 문장을 만나면 피식 웃게 되고, 마음이 다정해진다. 그대로 좋다. 그리고 내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내가 이런 것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게도 분명 이런 것들이 지천에 널러 있는데 한눈팔고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새 집으로 이사 온 지 3주 정도 돼간다. 1층이라 엘리베이터를 안 탄다. 이건 근 30년 만에 처음 경험하는 일이다. 산을 파헤쳐서 지은 아파트 단지라, 외지고 조용하다. 이 고요함도 근 15~6년 만에 느껴본다. 집이 고요해지니, 20년 된 냉장고가 너무 시끄럽게 돌아간다. 노선버스가 지나가는 도로 옆에 살 땐, 늘 주위가 왕왕거려 느끼지 못했던 소음이다. 아! 조용해서 좋은데, 갑자기 시끄럽게 느껴지는 고물 냉장고를 어찌 해야 할까? 새걸로 바꾸기엔 돈이 들고, 그냥 살기엔 거추장스럽고. 없던 불편이 생겼다. 바꿔달라는 건지, 애교로 봐달라는 건지, 냉장고는 더 시끄럽게 모터 돌아가는 소리를 들려준다.

    “하지만 나는 책을 쓰는 일도, 그저 좀 긴 잡지 기사를 쓰는 일도, 그것이 또한 심미적인 경험이 아니었다면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인 선전 글이라 해도 전업 정치인의 눈에는 무관하게 보일 대목들이 많다는 걸 알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살아서 정신이 멀쩡한 한, 나는 줄곧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땅의 표면을 사랑할 것이며, 구체적인 대상들과 쓸데없는 정보 조각들에서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무관하게 보일만한 것이란 일련의 즐거움들과 개인적인 열심들이다. 마치 ‘빵과 장미’에서 장미처럼 말이다. (308)
    (*“내 작품을 주의 깊게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아차릴 것이다. 내 글은 노골적인 프로파간다일 때도 본격 정치인이 본다면 엉뚱하다고 여길 만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습득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 없으며 버리고 싶지도 않다. 살아 건재하는 한, 나는 산문 문체에 매력을 느끼고, 이 세상을 사랑하며, 구체적인 대상들과 쓸모없는 정보 조각들에서 즐거움을 얻기를 계속할 것이다. 내 이런 면을 억누르려 해도 소용없다. 문제는 내 안에 깊이 자리한 좋고 싫음을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들과 조화시키는 것이다.”(49))
    --->비슷한 문장이 앞뒤로 반복되고 있다. 리베카 솔닛의 신조.

  • 2024-03-17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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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목 | 2024.04.01 | 조회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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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비글] 3차시 후기 (5)
먼불빛 | 2024.03.29 | 조회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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