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마음의 여유

무이
2024-04-07 00:17
33

조지오웰을 뛰어난 관찰력과 담백한 서사력, 인간적이나 정치적인 작가인듯하다.
꺼내어 놓기 쉽지 않은 자신의 경험을 담담히 풀어가며, 개인적인 소재를 보편적인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멋진 작가님이시다.

오웰을 알아갈수록 나역시 꺼내지 않았거나 잊혀져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그에게 조금씩 조금씩 동화되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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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살이 되던 2월의 어느날, 난 안산에서 서울로 이사왔다.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오느라, 어린 시절을 함께 웃고 떠들었던 친구들과 헤어지고 낮선 동네, 낯선 학교에 적을 두게되었다.
이사오기 전의 친구들은 회사원, 사진작가 아버지를 두고 있었고, 학교에서나 하교후에 만나기만 하면 웃고 떠들며 놀기 바빴더랬다.
새로운 학교는 사업가, 의사 아버지를 둔 아이들이 많았고 대부분의 친구들은 일상적으로 부르뎅 원피스를 입고, 여름이면 피서를 다니는 넉넉한 환경에서 자라고 있었다.
명랑하고 뛰어놀기 좋아했던 나였지만, 쉽게 친구를 사귀기 어려워서 쉬는 시간이면 책을 읽는 소녀가 되어가고 있었다.
공부를 못했던 편은 아니어서 매 학년 초마다 반장 후보-이때만 해도 성적순으로 후보를 선정했다 -에 올랐고, 그 때마다 사퇴하여 반장후보들이 맡아야 하는 학급 임원중 도서부장/체육부장을 도맡았었다.
그 시절만 해도 반장/부반장/각 부장 어머니들은 교실꾸미기, 학교 소풍, 학교 행사때마다 지갑을 열어야했고, 우리집 형편으로써는 어림없는 일들이라서 내가 몸으로 할 수 있는 임원직을 선택했던것 같다.
경제적인 이유로 선택의 제약을 받았던 그 경험들 때문인지, 지금도 나는 나서야하는 역할을 맡거나 무언가를 잘해서 사람들의 주목받는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인정받는건 좋아한다)
'정말정말 좋았지'를 읽는 동안, 부자동네 친구들의 구김없는 모습과 대비되던.. 철들었지만 약간은 주눅들었던 나의 학창시절이 떠올랐었다.
돌이켜보면, 덕분에 책을 읽는 즐거움에 눈뜨기도 했고 공부에 조금 더 신경썼던것 같기도 하고, 내 인생에 대해 꽤 어린시절부터 책임지려는 고민을 할 수 있었으니 꼭 나쁘기만 한 경험은 아니었다.
가난하지 않았지만, 부족하게 자랐다는 나의 자격지심이 과거의 나를 만들었고,
한참후에 오웰의 자신의 학창시절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제는 나를 들여다보고 담담히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에 약간의 동질감을 느낀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지금은 1등이 아니어도, 결승선에서 1등이면 된다고.. 현재에 낙담하지 말고 계속 열심히 노력해라"
어린 시절, 아버지는 딸 셋을 불러 앉혀놓고 종종 하시던 말씀이다.
난방이 안되어,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에 올려둔 물이 얼어 있는 신혼집에서 시작하여, 서울에 번듯한 집도 사고 자식들도 키우신 부모님이시니 얼마나 열심히 성실히 살아오셨을지는 짐작도 못한다.
그래서인가.. 나는 자연스럽게 학창시절에는 17,18,19살의 청소년이기 보다는,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학생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무렵에는 가정의 화합을 도모하고, 노후를 준비하고, 아이를 위한다는 이유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고, 모으기만 했다.
내게 부여된 역할들에 최선을 다하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현실을 이겨내는 모범적인 삶을 살기 위해 나의 행복을 미루고 미루기만 했던 시절이었다.
42살 무렵, 내 에너지는 위험 gage를 넘어 바닥을 드러낸 번아웃 상태가 되었는데, 미뤄두고 참아왔던 많은 일들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은 나보다는 타인이 이유였던 것처럼 몰아갔었다.
잠깐 멈춰 숨 한번 들이쉬면 달랐을텐데.. 잠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해야하는 일을 잊었어도 되었을텐데.. 해야 할 것들에 매몰되었던 나의 마음은 잠깐의 여유를 스치듯 느끼고 다시 현실로 돌아갔던 것 같다.
이후, 다양한 몸과 마음의 폭풍을 거쳐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도 잠깐은 멈추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도 하고 일을 다 하지못하기도 한다.
나의 47살을 살아감에 있어서 지금 꼭 해야만 하는일은 나를 살피고 아끼는 일, 아이를 사랑하는 일, 남편을 사랑하는 일, 나와 함께하고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일말고는 없는 것 같다.
일은 조금 못하면 미안하다고 하고, 다시 일정잡아서 하면 그만이다 라고 생각하는데, 되려 주변에서 더 많이 도와주는 건 참 신기할 따름이다.
숨가쁘게 달리기만 했더라면 몰랐을, 인간본연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함께하는 인성의 회복은 어쩌면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해주는게 아닐까?
일상을 살아감에 있어 인간적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시작은 자연을 돌아보고 느끼는 작은 여유부터 시작하라는 말이 아닐까?
'실생활의 모든 즐거움을 다 죽여버린다면 우리 자신을 위해 준비해야 할 미래는 과연 어떤 식일까?
사람이 봄이 돌아오는 것을 즐길 수 없다면, 노동력을 줄여주는 유토피아에선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라고 이야기한 오웰도 그렇게 생각한걸까?

 

24년이 되면서, 매일 아침 일과전에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나만을 위한 규칙적인 일상생활은 내가 '해야할 것'에 매몰되지 않고 다시 나로 돌아올 수 있게 한다는 걸 느끼고 있는 참이다.
최근 동네 텃밭 한고랑을 분양받아 가꾸기 시작하고 있는데,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활동은 규칙적인 나의 시간에 변주곡같은 즐거움을 주고 있다.
밭고랑을 일구다가 닭이 우는 소리 한번에 닭장을 한번 쳐다보게 되고, 허리가 아프면 고개를 들어 하늘도 한번 보고 남의 밭도 한번 보고...
쫓기지 않고 자연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끽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가득이다.
어떻게 오웰은 그 젊은 나이에 정원과 장미, 사실적인 전원의 삶을 기록하며 일상의 쉼표를 가질 수 있었을까?
수영님도 그런 마음으로 크로커스 구근을 심으셨으려나..

댓글 1
  • 2024-04-07 20:48

    정말 열심히 달려오셨군요. 그리고 42살의 번아웃과 그 계기로 회심(?) 그 과정의 마음들이 세세하게 궁금해요.
    힘들었던 만큼 지혜도 쌓였을 듯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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