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추억

유유
2024-04-06 23:52
48

경주의 추억 - 24.04.06 유유

 

 

금요일 오전 9시23분. 경주로 가는 SRT를 타고 이동 중이다. 지금 경주에는 벚꽃이 폭발중이란다. 기차를 타고 가는 내 마음도 폭발 중이다.

 

요즘 난 경주를 가면 무작정 걷는다. 완만한 능선의 옛무덤 골짜기 사이 사이를 걷다가 커피한잔 나누며 풀밭에 앉아 나누는 담소는 초록빛 한장 이미지로 저장된다. 돌무더기만 남은 거대한 폐사지에서 온몸에 부딪혀 불어오는 바람의 감각 또한 선명하게 느껴진다.

월성 주변에서 관광객을 태우고 힘겹게 꽃마차를 끄는 늙고 여윈 조랑말의 안식을 빌며 무심한 척 인파와 함께 흐른다.

 

불과 5년전만 해도 경주는 내게 이런 도시가 아니었다. 걷기보다는 관광버스를 수없이 타고 내리며 장소와 장소를 점으로 연결되어 인식했던 곳. 교과서 속의 역사적 지식과 정보를 눈앞의 장소와 유물과 어떻게든 연결하고 각인시키려 애쓰던 장소. 초록의 이미지를 눈에 담기보다 바람만큼 광활한 절터의 쓸쓸함을 느껴볼 수 있는 여유가 없던 시절. 증거사진 찍어서 보여줘야 할 의무로 아이들을 채근해가며 다음 이동 장소만 머리속에 가득했던 시간들.

 

10여년 정도 초중등 아이들을 대상으로 역사문화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역사논술 강사였던 나는 교과서에서 나와 실제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보고 내 발로 밟아봤던 역사 유적지와 유물들에서 느꼈던 생생한 경험을 통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역사공부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당시 개정된 학교교육과정 또한 체험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아이들과 함께 박물관으로, 궁궐로, 경주로, 강화도로. 심지어 청와대로 이른바 '체험학습'을 다닐 수록 나는 뭔가 거북한 마음이. 점점 커져갔다.

백제향로를 바라보며 느꼈던 신비로움을 자연스럽게 품을수 있는 시간을 갖게하기 보다 박물관구석 자리 아이들 앉혀놓고 시험에 나올만한 향로의 특징에 대해 쪽집게 강의를 하는 꼴이라니. 청와대본관의 파란색기와지붕과 국회본회의장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찍고나면 우리 아이들은 저절로 우리의 민주주의의 역사와 현재를 알게되는건지. 시간이 지나도 내안에 회의감과 자괴감이 깊어지기만 하던 즈음. 코로나19로 강제로 체헝학습진행이 중지되고 어쩌나보니 아예 그 일을 접게 되었다. 내 고민이 결론 나지 않은 채로.

 

최근에서야 비로소 나는 '일'로서가 아니라 그냥 경주를 목적없이 다니게 되었다. 다시 찾게된 경주는 내게 더 이상 '천년고도'도 문화관광의 도시로 교과서 속의 '그 유명한' 도시가 아니다. 천년도 훨씬 전에 박혁거세의 알을 낳았다는 숲도 내겐 그저 초록과 연두가 눈부신 반짝이는 숲이라 좋은 곳. 황룡사지 드넢은 절터에 선덕여왕이 뭐라했다는 것보다 꼬맹이들이 달음박질하며 뛰놀기에 그지없이 편안한 공간이라는 거. 감은사터에서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던 문무대왕의 충심에 감동하기 보다는 해 저무는 가을 들녘의 고운 색감을 뚫고 걸어오던 허리 접힌 할머니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시간들.

 

오늘 경주에 가면 또 어딜 어슬렁거리다 어느 곳에. 어떤 장면에 꽂혀서 돌아올까? 설렘과 여유로움이 함께 차오른다.

일정 내내 사고 없이 지점과 지점을 잘 연결해서 물 흐릇듯 행사를 진행하고 마칠 수 있기만을 바라며 오가던 경주. 오늘에서야 비로소 경주를 제대로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 5
  • 2024-04-07 20:58

    일로 가는 여행이 아닌 경주, 어디를 어슬렁거리다 돌아오셨는지, 어떤 장면에 꽂히셨는지 궁금하네요. ^^

  • 2024-04-07 21:27

    조지오웰도 좋아하는책을 서점에서 여러사람을 맞이하면서, 좋아하던 책의 대한 거부감을 느꼈듯이 유유샘에게도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군요~
    경주를 자주 가시는 거 같아서 궁금했는데 이제서야 알았네요 역사샘이셨군요~~^^역시~~~~
    유유샘의 결코 자유 롭다고 할 수 없는 풀지 못하는 굴레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가실지 기대됩니다~^^

  • 2024-04-08 08:06

    유유샘 역사해설가셨구나 그래서 말씀을 조곤조곤
    잘 하셨나봐요
    봄 경주는 한번도 안가봤지만 샘의 글에서
    봄을 한껏 느끼게 됩니다
    지금 창밖에도 꽃들이 난리가 났네요!!

  • 2024-04-09 01:15

    이 모두 오웰 효과인가요? ㅎㅎ

  • 2024-04-12 05:48

    "일정 내내 사고 없이 지점과 지점을 잘 연결해서 물 흐릇듯 행사를 진행하고 마칠 수 있기만을 바라며 오가던 경주. 오늘에서야 비로소 경주를 제대로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처럼 저도 봄에 경주에 가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경주의 봄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고요. 박해일과 신민아가 나왔던 영화 <경주>도 인상적이었다는 생각과 유유님의 경주는 이제 어떤 모습으로 펼쳐질지도 무지 궁금해지고 설레네요~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234
냉혹함--살아가는 힘 (1)
먼불빛 | 2024.04.21 | 조회 27
먼불빛 2024.04.21 27
233
루시 바턴과 나 (1)
이든 | 2024.04.21 | 조회 20
이든 2024.04.21 20
232
엄마에게도 가슴 시린 연애와 이별의 시절이 있었다 (1)
유유 | 2024.04.21 | 조회 31
유유 2024.04.21 31
231
루시 바턴에게 배운 것들 (1)
겸목 | 2024.04.20 | 조회 33
겸목 2024.04.20 33
230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사랑을 하니까요" (2)
꿈틀이 | 2024.04.20 | 조회 38
꿈틀이 2024.04.20 38
229
엄마의 황금시절
수영 | 2024.04.20 | 조회 20
수영 2024.04.20 20
228
아빠의 기억 (1)
단풍 | 2024.04.20 | 조회 23
단풍 2024.04.20 23
227
이해한다는 오해 (1)
시소 | 2024.04.20 | 조회 35
시소 2024.04.20 35
226
사용 목적이 명확한 사람 (5)
이든 | 2024.04.07 | 조회 63
이든 2024.04.07 63
225
소중한 마음의 여유 (1)
무이 | 2024.04.07 | 조회 33
무이 2024.04.07 33
224
경주의 추억 (5)
유유 | 2024.04.06 | 조회 48
유유 2024.04.06 48
223
누가 나를 규정하는가? (5)
수영 | 2024.04.06 | 조회 51
수영 2024.04.06 51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