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황금시절

수영
2024-04-2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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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평비글 시즌1/ 세 번째 에세이 / 240421/ 수영

 

엄마의 황금시절

 

작년 9월 원주시의 외곽 시골지역에 살던 부모님이 제천으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은 언니가 모신다. 낮에는 노인 유치원이라 불리는 데이 케어센터에 다니신다. 89세 아버지와 88세 어머니는 두분 다 치매 초기 진단을 받으셨다. 몇 년 전까지도 시골에서 경로당에도 다니시며 두분이 사셨는데, 코로나를 겪으며 급격하게 나빠지셨다. 두분은 데이 케어센터에서는 식사도 목욕도 하시고, 여러 가지 프로그램에 참가 하시고, 저녁에 돌아오신다.

내가 부모님 이야기를 꺼내게 된 것은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라는 소설 때문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 루시 바턴이 병원에 입원하면서 고향을 떠난 후 거의 왕래가 없던 엄마가 찾아와 간병을 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야기는 그 병실에서의 며칠을 기반으로 루시 바턴의 어린시절부터 그녀의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까지의 가족의 일들을 다룬다.

 

나는 우리가 아이였을 때 품게 되는 아픔에 대해, 그 아픔이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며 너무 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런 갈망을 남겨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꼭 끌어안는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끌어안는다.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문학동네, 2017)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이제는 퇴색되고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갈망이 이후의 삶에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책 속에서 루시 바턴의 습작 시절 선생인 셰라 페인의 조언대로 “누군가를 보호하려는 생각”(124) 없이 “냉혹하게” 기억들을 점검하고 싶었다. 내 어린 시절의 갈망에 대해서…….

나는 지금까지도 엄마에게 심리적 거리감을 갖고 있다. 왜 그랬을까? 엄마는.... 아, 엄마는 어진 성품을 지닌 분이셨다. 마음 아픈 이야기를 들으면 금세 눈물이 차오르는 분이시고, 아이들을 예뻐하고,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셨다. 할 말은 해야 하는 올곧은 분이시면서 고집스런 면모를 보이기도 하신다.

 

엄마는 19살에 얼굴 한 번 못 보고 사형제 맏이인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셨다. 시집을 오자마자 3일을 빨래를 했다고 한다. 당시 2살이었던 막내 시동생을 업고 집 안팎을 쓸고 닦고, 깔끔하게 살림하는 엄마를 할머니 할아버지는 엄청 아꼈다. 아버지도 엄마에게 다정하게 대하셨고, 이후의 10년은 엄마의 황금시대라 할 만하다.

할아버지가 집을 돌보지 않아 10대 중반부터 이미 가장 노릇을 해오던 아버지와 남의 땅을 얻어서 농사를 지어 겨울 양식을 장만하고, 곧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이사도 하셨다. 내가 태어나기도 한 그 집은 집 옆에 맑은 샘이 있는 집이었다. 솜씨가 좋았던 아버지는 서까레 사이를 하얗게 회칠을 하고, 부뚜막은 해마다 뽀얗게 흙칠을 하셨다. 시동생 둘을 어머니 손으로 집에서 혼례를 치루어 분가도 시켰다. 그리고 그 10년간 아들 둘 딸 둘을 낳았다.

엄마는 가난한 살림에 좋은 먹거리는 시부모 상에 올리고, 남편과 먹성 좋은 시동생들 먼저 챙겼다. 할머니는 이웃의 잔치에서 얻어 온 음식을 며느리에게 먼저 먹이고 싶어 했고, 아버지는 첫아이를 임신한 엄마를 위해 계란을 삶아 한밤중에 동생들 몰래 엄마에게 먹으라고 주기도 하셨다.

엄마는 21살에 큰 오빠를 낳고, 막내를 39살에 낳으셨으니 근 이십 년간 3,4년 터울로 7남매를 낳으셨다. 결혼하신 해가 1956년이니 우리나라는 급변하는 시대였고, 우리집 사정도 한해 한해 다르게 급변했다. 그래서 남매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면 모두의 기억이 각기 다르다. 아버지와 엄마에 대한 기억도 제 각각이다. 맏 아들을 낳고 둘째로 낳은 큰 언니는 남자들만 있던 집의 유일한 딸이라 귀염을 많이 받았다. 언니는 안목 있는 아버지가 철마다 사다 준 새옷과 신발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집안을 챙기는 알뜰한 가장이었고, 엄마는 시부모 잘 모시고, 남편에게 무조건적을 순종하는 참한 여자였다.

 

그런 아버지가 내가 태어나던 해는 바람을 피웠다. 한동네 살던 그녀는 결혼 10년째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술주정뱅이 남편에게 매 맞던 아내였다. 그런 그녀가 아버지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 그녀는 집에서 쫓겨나고 아버지도 학교에 다니던 큰아이들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맡기고, 나와 바로 위의 언니만 데리고 성남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쫓겨난 이웃 여성은 아버지가 시골에 다니러 간 사이 낳은 아이를 엄마에게 맡기고 갔다. 그래서 그 남자아이는 나와 젓을 나누어 먹었다. 그 아이는 곧 죽고 말았지만 엄마에게는 그 모든 일들이 지축을 흔드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엄마는 시골로 다시 돌아와 살던 앞동네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또다시 집을 지었고, 이번에는 샘물을 부엌으로 끌어들이고 부뚜막에 타일을 붙인 집이었다. 아직도 물을 길어다 먹던 집이 많았던 당시로는 획기적인 시설이었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엄마을 부러워했다. 아버지는 마을에 구들을 놓거나 집을 짖는 일에 단골로 불려 다니셨고, 새마을 지도자로 마을 일도 하시고 농사도 짓고 늘 바쁘셨다. 그리고 또 바람을 피웠다. 이번에는 더 오래 갔는데 마을의 과부였던 아주머니와 정분이 나 청주에 살림을 차리셨다. 내가 초등학교 때 추수가 끝난 후에 엄마가 싸준 메주며 고춧가루를 들고 청주에 보름씩 다녀오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태어나던 해부터 그러니까 아버지 34살부터 십여 년간 두 분에게는 애증의 시대였다. 나는 엄마가 보여준 가슴의 시커먼 멍자욱을 기억한다. 우리는 숨이 막혔다. 눈가도 붉거나 푸르게 부풀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집안의 살벌한 분위기에 늘 적막이 감돌았던 기억이 있다. 나는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보다 악착같이 달려들어 기어이 매를 벌고야 마는 엄마가 더 미웠다. 그리고 엄마는 나와 언니에게(그 위의 형제들은 이미 도시에 나가 있었고, 4살 아래 동생과 막내는 잘 기억이 안난다.) 그 멍자욱을 보여주었다.

나는 절대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 어린 시절 기억에 아버지는 엄마에게 다정하게 말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어딘가에 갔다가 집에 오면 우린 하던 놀이를 멈추고 보이지 않는 곳에 숨었다. 엄마는 내 보호자가 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고, 우리는 엄마를 지키기엔 무력했다. 그렇지만 나는 나를 지키려고 더한 부모도 많다고, 빨리 커서 돈을 많이 벌어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고만 싶었다. 나는 상처 받았고, 이 어린 시절의 갈망은 오랫동안 영향을 끼쳤다. 남편을 선택하는 것도, 이후의 결혼생활에도…….

요즘 우리는 부모님을 닭살부부라고 부른다. 아버지는 엄마의 어린시절 별명인 올콩으로 부르고, 자다가도 엄마를 확인한다. 엄마가 왜 그러느냐고 하면 예뻐서 그런다고... 두분 다 치매 초기인데 아버지가 더 심하시다. 엄마는 어버지를 유치원 다니는 어린아이처럼 챙기고, 아버지는 순한 아이처럼 엄마에게 기댄다. 나는 가끔 엄마에게 아버지가 그렇게 속을 썩였는데 밉지 않았는지 묻는다. 엄마는 그렇게 견디니까 이렇게 좋은 날이 왔지 안느냐고 말하신다. 아버지를 완전하게 소유하게 된 엄마는 또 한 번의 황금시절을 맞이 하고 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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