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발견

먼불빛
2024-03-23 23:53
36

기쁨의 발견

1.

아파트 문을 나서 오른쪽으로 쭉 따라가다 보면 백 미터를 조금 지나 보도블록 안쪽 일렬로 서 있는 가로수 바로 옆. 아무렇게나 심드렁하게 쭈르륵 서있는 나무가 있다. 물론 가로수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나무를 처음 발견한 것은 늦여름이었다.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그 나무는 한눈에 보아도 잎이 우거진 것이 우람하고 쭉 뻗은 자태가 매혹적이었다. 이파리는 큰 새 발톱 마냥 날카롭게 결이 져 있었고 수피는 비교적 젊어 맨질맨질하니 매끄럽고 줄기는 곧고 힘차게 뻗어 있었다. 수령이 그리 오래된 나무 같지는 않아 보였다. 그때는 아무리 검색하고 뒤져 보아도 이름을 알기 쉽지 않았다. 이리 하찮은 곳에 아무렇게나 서있는 듯 보이지만 나무 특유의 듬직함, 무한한 시간을 품고 있는 듯한 신비로움, 하늘을 향해 꼿꼿이 뻗어가는 당당함까지, 젊은 그 나무가 품고 있는 수려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길을 지나게 되면, 아니 일부러라도 가서 한참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며 오랜 벗을 보듯 정겹게 살피게 되었다. 알게 된다면 누구나 반할 나무가 틀림없었다. 가로수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파트 정원도 아닌, (아무래도 LH 것이 틀림이 없는) 자투리땅에 도시의 질서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로 어정쩡 서 있는 그 나무가 궁금하고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 애처로웠다.

 

나무가 내게 더 매혹적이었던 까닭은 3~4미터도 안 되는 폭 안에 네 그루가 나란히 일렬로 서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잎이 무성한 여름에는 알 수 없는 그 나무들의 비밀은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는 겨울이 되어야 비로소 확연히 알 수 있다. 네 그루가 분명하지만, 이 네 그루는 한그루처럼 서있다는 사실을. 네 그루를 나란히 마주하고 서면 맨 왼쪽 나무와 세 번째 나무의 줄기는 제법 굵었고, 두 번째와 맨 오른쪽 두 나무는 조금 가늘었다. 맨 오른쪽과 왼쪽 나무는 공간이 많은 오른쪽과 왼쪽으로 각각 가지들을 뻗어내고 있었고, 가운데 두 그루는 양옆의 나무를 피해 말하자면 앞뒤로 가지를 치고 뻗어 있었다. 나무는 분명 네 그루임이 분명하지만,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이건 한그루 같은 그림이 나왔다. 나무와 가지들은 땅과 하늘과 태양과 바람을 각각 공평하게 향유하는 방식으로 서 있었다. 이 조화로운 나무들의 지혜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우연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의도적인 식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이 곳이 택지로 개발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나무인 것만은 확실하리라…그렇지 않고서는 사각형의 계획도시 한가운데 가로수도 아닌 것이, 누군가의 빈 땅에 저렇게 삐딱이 너무나 우연적인 방향과 자태로 서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나무는 알고 있지만 말이 없다.

 

이 나무로 인해 나는 4년 전 내가 매정하게 깨버린 황조롱이알을 생각하게 되었다. 황조롱이의 서식처가 되느니 살생을 선택한 나는 정당한가? 나는 두고두고 그 질문에 시달렸고 약간은 부끄러웠다. 알을 깨버린 덕에 하늘을 배배 돌기만 하던 황조롱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실외기 안쪽에 쥐라던가 이상한 벌레 사체들도, 부화되지 못한 깨진 알들에서 나온 끈적이는 액체들과 엉켜있던 새털, 똥들은 비와 눈, 바람의 시간이 말끔히 지워주었다. 물론 내 살생의 흔적까지 모두.

 

[오웰의 장미]를 읽는 내내 나는 사실 이 두 장면이 떠올랐다. 갑자기 나무가 보고 싶어졌다. 떠나버린 황조롱이야 어쩔 수 없지만, 나무는 그 자리에 여전히 아니 더 위태로운 풍경 속에서 하늘을 향해 서 있었다. 그 사이 광케이블 전선주가 나뭇가지 사이에 새로 자리 잡고 서 있었고, 나무와는 등을 돌리고 있는 LH 사업소였던 2층 흰 가건물은 누렇게 빛이 바래졌다. 새로 지어진 빈 상가 건물들에는 밥집, 술집, 병원과 카페, 각종 상업 시설들로 채워져 밤에도 불빛들이 휘황해졌다. 이제 곧 공공청사가 들어서고, 마지막 아파트가 입주하고, 초중고교가 다 지어지면 이 S지구의 개발은 막을 내릴 듯하다. 공사가 끝나면 저 나무들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가 안 본 사이 나뭇가지들은 앞다투어 자랐고 더 많이 뻗어 나와 있었다. 여전히 그들은 하나처럼 보였다. 하나의 나무 같은 네 그루가 내게 그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야릇한 신비감과 기쁨을 오늘도 선사한다.

 

 

2.

 

“우리는 세상을 다시 만들고 싶다

우리는 보람없는 수고에 지쳤다

간신히 먹고 살 쥐꼬리를 벌자고

생각할 시간이라고는 없구나

우리는 햇빛을 느끼고 싶다

꽃향기를 맡고 싶다”

(오웰과 장미/122p/미국노동운동초기 노동가 중)

 

적어도 정년퇴직 이후에는 생계에 매달려 옆도 뒤도 돌아볼 틈 없이 쫓겨 사는 생활은 그만하고 싶었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처 달리기에는 이제 기력이 달린다는 걸 하루하루 실감하고 있어서였다. 정년퇴직하고서도 남들처럼 제주도 한달살이니, 해외여행이니 같은 것은 하지 못했다. 늙어가려면 없는 돈도 아껴야 한다는 좀생이 같은 계산법이 작동했다(지금 생각하면 조금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물론 집이 주는 안정감과 쾌적함이 좋았던 이유도 있긴 하지만서도 말이다.

정작 나를 취업전선으로 몰아 내세운 건 국가였다. 실업급여를 타기 위해 구직활동을 하면서 나는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말을 더 이상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취업전선에서 내 나이는 사망선고나 다름없었다. 취업할 곳이 없다는 사실은 나를 괜히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제 뭘 하고 살아야 할까…돈을 벌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겨우 입에 풀칠 정도 할 수 있는 국민연금은 3년을 더 기다려야 하고, 이리 보아도 저리 보아도 생계형으로 살아가야 할 내게 남들처럼(누구??) ‘내적 삶을 살며, 바깥 세계’를 어슬렁거릴 자유란 없다. 오, 자유! 욕망을 부처님 수준으로 줄이지 않는다면 나는 결코 임노동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신세인데…갈만한 일자리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은근히 열받고, 팔자타령에 상한 자존심에 낙담하던 차, 바로 그때 일해보지 않겠냐는 악마의 유혹이 내게 뻗쳐왔다. 덥석 잡고 보았다. 그러나 그땐 몰랐다. 일이 이렇게까지 돌아갈 줄은. 한 8개월은 좋았다. 6시간 일하면서 최저임금 가까이 받고, 최상이었다. 지금을 즐기라고 주변 지인들의 축하 세례가 끝나기도 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엄마 돌봄에 내 주말이 날아갔어도 그래도 괜찮았다.

 

일은 12월에 벌어졌다. 어찌저찌하여 함께 일하기로 했던 상급자가 공석이 되고 그 공백을 울며 겨자 먹기로 메꾸게 되면서 올 1월부터 지금까지 주야장천 밤 근무까지 해가며 일을 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독박에, 뒷설거지에 미칠 것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너무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한심하다는 한탄 한번 하지 못하고 겨울이 추운 줄도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버렸다. 일로부터 놓여나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다시 노예 같은 옛날의 시간으로 회귀한 듯한 이 상황을, 이 시간을 나는 어떻게 보내야 할까? 그때 [오웰의 장미]가 내게 속삭인다. 빵도 좋지만, 장미를 향유하라고. 그래 행동하는 대로 행동하게 된다. 일은 일이고, 장미는 장미다. 일을 하되 일에만 매몰되지 않도록 나는 이제부터 이중생활을 하는 탕녀가 되어 보리라. ‘손에 잡히지 않는 일상적인 즐거움과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기쁨’(129p) 같은 것을. 그것은 내 집 길가의 그 나무일 수도, 또는 여기 글쓰기일 수도, 그리고 일하는 와중에 고개를 들고, 어깨를 펴보는 그 순간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세상을 다시 만들 수”는 없지만, “햇빛을 느끼고 향기를 맡을 수”는 있지 않을까? 위태로움 속에서도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네 그루 참나무처럼 말이다.(우기기)

댓글 2
  • 2024-03-24 02:46

    하나인듯 보이는 4그루의 나무가 너무 궁금하네요~~그나무의 에너지를 느낄수 있는 먼불빛샘은 이중생활을 하는 탕녀가 되어 빵보단 장미를 입에 물고 탭댄스를 치고 있을것 같은 상상을 해봅니다.

  • 2024-03-27 16:54

    '우기기'팁이 좋았다는 먼불빛님의 이야기를 듣고 웃음이 나왔어요. 계속 우기는 뻔뻔함을 가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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