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가 돌봐줄까

유유
2024-03-23 22:33
32

나는 누가 돌봐줄까?

 

 

스물세살 큰아이는 대학교 4학년이다. 며칠 전 아이에게 전화가 걸려 오는데 영화를 보던 중이라 미처 받지를 못하자, 문자메시지로 “엄마 큰일났다 ㅠㅠ”하는 메모가 전달된다. 깜짝 놀라 급하게 영화관을 나와 전화를 걸어보니 수강철회한 수업이 잘못되어서 수업을 들어야한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짜증이 확 치솟았다. 내게 전화를 걸어 징징거릴 시간에 학교로 쫓아가든 전화로든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해야 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얼른 학교에 연락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나중에 다시 통화하자며 겨우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도 아이는 몇 차례 더 전화를 걸어왔고 내게 넋두리를 했다. 이런 비슷한 양상의 일은 처음이 아니다. 딸아이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생이 된 이후에도 지금껏까지 친구관계든, 학교 생활이든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에게 하소연하거나 의견이나 대처방안을 물어왔다. 나는 그 나이때 부모에게 나의 고민과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상담을 해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든지 선배든지 아니면 공식적인 기관이든 교수에게 상담을 의뢰했지 부모에게 뭘 요구해본 기억이 없다. 용돈이나 생활비는 물론이고 학비마저 나는 아르바이트나 장학금으로 해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했다. 그런데 지금 내 아이는 학비는 물론이고 자취생활비 용돈을 당연하듯 내가 책임지고 있다. 물론 아이가 아르바이트를 아예 안하는 건 아니나 자신의 용돈에 보태는 정도이다.

그래서 난 아이가 내게 이런 역할을 요구할 때 냉정하게 때론 짜증스럽게 대하면 아이는 무척 서운해하거나 힘들어한다. 이런 아이의 반응을 대할 때마다 난 참 당혹스럽고 심지어 죄책감도 느끼게 된다.

최근 성인기 자녀-부모관계에 대한 고민들이 나뿐 아니라 비슷한 생애주기를 살아가는 부모들에게 큰 이슈로 부각된다는 글을 보며 한편으론 나만 힘든게 아니었구나 하는 안도감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내겐 여전히 고민거리며 과제다.

 

나는 열네살의 포메라니안 보리와 다섯 살 짜리 말티푸 탐라라는 반려견 둘과 함께 살고 있다. 반려견과 함께 살며 돌보는 생활을 결코 간단치 않은 일이다. 하루 최소 두 번의 산책과 수시로 배변패드를 갈아주고 사료와 물그릇을 살피는 일은 가장 기초적인 일이고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접종도 날짜를 잘 지켜 해줘야 한다. 이 모든 일은 오롯이 다 나의 일이다. 내가 정신없이 집을 나서느라 혹은 깜박해서 아이들 먹을걸 못챙기고 나간 날이면 두 마리 반려견 아이들은 내가 귀가할 때 까지 쫄쫄 굶고 갈증에 허덕이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한다. 남편이나 딸 아이의 눈에는 누렇게 더럽혀진 배변패드가 수 없이 그 옆을 지나다녀도 눈에 안들어오는 매직이 벌어진다. 강아지를 키우게만 해준다면 헌신적으로 돌볼것이며 절대 엄마 손을 안거치게 하겠다고 간절한 눈빛으로 호소하던 약속은 잊힌지 오래. 어쩌다 나는 개 엄마가 되어 두딸의 육아가 끝난지가 언젠데, 강아지 육아로 또 종종걸음을 치고 있단 말인가.

 

친정부모님은 올해 여든 넷-여든 셋이시다. 친정과 비교적 가까운(승용차로 20분 정도 소요)거리에 살기도 하지만 K-장녀로서의 요구되는 역할과 책임은 자발적이든 상황적이든 더 무겁게, 전방위적으로 요구되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비교적 건강하신 편이지만 고령에 따른 자연스러운 노화과정으로 병원에 다녀야 할 일이 더 자주 생기고 있다. 지난 달만 해도 아버지 하지정맥 진료와 점검차 흉부외과, 대상포진으로 인해 통증의학과 2회, 엄마도 발목 통증으로 통증의학과 1회 방문을 내가 모시고 다녀와야 했다. 1월에는 엄마의 척추 MRA 촬영을 앞뒤로 예진과 촬영, 촬영결과 상담 등 총 3회 대학병원 방문이 있었다. 다음주에는 엄마 요실금 진단과 수술여부를 결정을 위한 대학병원 방문 1회, 아버지 하지정맥 정기검진 1회 등이 예정되어있다. 병원 방문은 기본이고 장보기나 무슨 조합 총회 참석 등도 내가 차로 모시고 다녀온다. 자차 운전을 하던 아버지가 반복되는 접촉사고와 보험가입 거부등을 겪고 나 포함해서 주변의 운전 만류로 차를 처분하신 이후론 운전 수행은 또 내 몫이 되어버렸다. 처음엔 미리 내 일정을 확인하고 부탁하는 어조로 말을 하시던 부모님도 이젠 직전에서야 내일 어디 좀 가자... 이런식으로 당당하게 말을 꺼내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신다.

시간이 흘러 내일이면 내년이면 더 많이 노쇠해지시겠지. 나는 더 자주 더 오랜 시간 노부모의 건강과 일상을 살피며 전전긍긍하겠지. 시간이 더 흘러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병이 들어 시설에 모실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오겠지. 그런 상황에서 느껴야 되는 일말의 죄책감과 여러 생각들도 또 나만의 몫인건가...

 

아이를 돌보며 키워냈고 이제 두 아이 다 스무살이 훌쩍 넘어가는데도 엄마로서의 부모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요구한다(나 혼자만의 생각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 역할과 책임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요즘이다. 사안마다 다를 수도 있겠다면 그 원칙을 어찌 세워야 옳은 걸까? 엄마로서, 부모로서가 아니라 선배로서, 어른으로서 무엇보다 나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그런 인간 대 인간으로서 관계 맺음을 할 수 없을까?

 

절대적인 의존자로서 두 마리의 반려견은 오로지 함께 사는 인간 가족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키우는 가축이 아니라, 사람 아닌 동물이 아니라 내 가족으로 반려자로 교감과 소통을 온몸과 온 맘으로 함께 하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기에 나는 어떤 마음과 자세로 그들을 대하며 함께 사는 인간가족들에게도 적절한 역할과 책임을 나눌 것을 요구할것인지가 또 하나의 숙제이다.

 

나는 원래 3남매의 맏딸이었다. 7년전 사망한 남동생과 그리 멀지 않은 도시에 사는 여동생이 있다. 친정부모에 대한 모든 돌봄과 일상에 대한 관여는 주로 내 몫이다. 두 동생에게 나 또한 기대하는 바가 그리 크지 않고 아직까진 감당못할 수준의 큰 일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나만 바라보는 부모의 눈길이 답답하고 퉁명스런 대답을 더 자주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본다. 경계란게 있긴 했었나. 나는 심리적으로 정서적으로 부모로부터 독립되어 본 적이 없었던 건 아닌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계속된다.

 

나는 누가 돌봐주나. 나는 누구에게 징징거려 볼까. 나 힘들고 답답한건 누구 앞에서 하소연을 하면 가벼워질 수 있을까.

댓글 2
  • 2024-03-24 02:19

    유유샘은 자유를 민끽하실줄 알았는데 돌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셨네요~같이 모색해봐요~

  • 2024-03-27 16:40

    유유님의 현재를 너무 잘 보여주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차차 풀어가봐요. 일단,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텍스트로 읽은 책들을 참고해봐요. 나만 봐서는 나를 잘 못 보니까, 참고서들을 오가며 나에 대해 거리감을 두는 연습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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