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장미

이든
2024-03-2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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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장미

우산을 고쳐 쓰는 사람들에 관한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요즘 누가 돈 주고 우산을 고쳐 쓰겠냐 싶지만 놀랍게도 그 수리점엔 도처에서 의뢰해 온 우산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하늘로 간 아들이 선물해 준 우산을 보내며 이 우산을 쓰고 있으면 아들과 함께인 듯하다는 어느 어머니의 사연, 이제 세상에 없는 쌍둥이 동생과 같이 쓰던 우산을 맡긴 언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쓰시던 우산 수리를 의뢰한 미국으로 이민 간 아들까지. 낡음과 병듦 속에 숨어있는 각각의 애틋함이 고장 난 우산의 수명을 연장하고 있었다. 존재를 잊지 않으면, 어떤 형태로든 남아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내게도 그런 애틋함과 그리움의 대상이 있다. 18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다. 요즘 약과가 젊은 세대 사이에서 인기라는데, 우리 할머니의 약과는 정말 특별했었다. 무작정 달고 끈적임으로 뒤범벅된 맛이 아니라 생강과 꿀의 은은한 단맛 사이로 바삭하고 폭신하고 고소함이 느껴지는 그런 맛. 마치 크루아상처럼 맛이 겹겹이 쌓여 정신 차리고 보면 몇 개를 연달아 입으로 넣고 있곤 했다. 내가 할머니의 약과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시기에 약과를 만들 때면 늘 그 양이 넉넉했고, 겨울 내내 주 간식이 되어주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왜 할머니께 약과 만드는 법을 배워놓지 않았을까 후회한 적인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작년 초엔 우연히 강릉에 전통약과 명인이 있다는 방송을 보고, 그 주말에 바로 찾아간 적도 있었다. 할머니 약과와 비슷했지만 추억이 미화되어서인지 내 기억 속의 그 맛과는 달라 갈증이 더 심해진 것도 같았다.

 

할머니는 1919년 기미년에 태어나 2006년 병술년에 86세의 삶을 살고 돌아가셨다. 안동 양반가에서 태어나 모양만 번듯한 다른 양반 가문으로 시집와 아들 딸 오 남매를 낳고 평범하게 사셨다는 이 간략한 한 문장을 헤집어 보면, 그 시대를 살다 간 어머니들의 고단한 삶이 그대로 숨어있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언제부터였을까. 봄에서 가을까지 시골에서 과수원을 하시다, 가을이 끝나면 한여름 고군분투한 수확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겨우살이를 하러 서울 우리 집으로 오시곤 했다. 그 시절엔 소포나 택배 보내기가 어려웠는지 미리 짐으로 보내면 될 것을 할아버지 할머니는 늘 산처럼 많은 짐을 직접 들고 오셨다. 들고 오신 것들은 겨울 내내 우리 집 식량이 되었다. 중1 때까지 여름방학이면 시골 과수원으로 가 여름 방학을 보냈었다. 한여름의 생명이 무자비하게 요통 치는 자연 안에서 때로는 뒹굴고, 고추를 따거나 얼음을 동동 띄운 미숫가루를 타서 나르는 심부름과 같이 작은 일손을 보태고, 이르게 수확한 덜 여문 옥수수를 먹다 보면 짧은 방학은 금세 끝나버렸다. 집으로 가야 할 날이 오면, 엄마 아빠를 만나는 기쁨보다 할머니와 헤어지는 슬픔이 훨씬 더 커서 차 안에서 내내 울곤 했었다.

 

일흔 중반을 넘기시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우리와 함께 계셨다. 내가 막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였고, 일과 연애와 친구들과의 약속으로 바빴던 나는 할머니가 그 긴긴 하루를 서울에서 어떻게 보내셨는지 온전히 알지는 못한다. 화투 점을 떼거나, 읽고 또 읽어 닳은 언문과 한자가 뒤섞인 책을 들척이거나, 일일 연속극을 보며 시간을 보내셨을 것이다. 어느 주말, 친구와 만나러 나가는 내게 할머니가 처음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오늘은 집에 있으면 안 되겠니라고. 나는 친구와 약속이 있고, 주중에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며 외출해 버렸다. 가끔 그날이 떠오른다. 그날 할머니의 희미하게 웃는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는데, 내게 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걸까. 외로우셨을까. 나는 왜 한낱 쓰잘 것 없는 약속으로 할머니의 마음을 더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럼에도 내가 필요할 때는 할머니를 찾았다. 외출 전후, 퇴근 후에 들어가는 할머니 방에는 항상 쿰쿰한 평화의 기운이 있었다. 밖에서 있었던 시답잖은 갈등과 스트레스로 힘들 때면, 나는 배가 아프다고 하며 할머니 약손으로 문질러 달라고 하곤 했다. 별다른 말도 없이 그냥 고요히, 내 손은 약손이다 하고 살살 움직이는 할머니 손이 닿으면 그냥, 이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땐 그게 위로를 받는 것인지 몰랐는데, 할머니 위로의 방식이 그런 거였다는 걸 돌아가시고 한 참이 지나서야 문득 알게 되었다. 요즘처럼 감정이 고르지 않고 세상의 거칠한 면이 더 예민하게 다가와 밤잠을 설칠 때면, 더 자주 깊이 할머니가 그립다. <오웰의 장미>를 쓰기 위해 레베카 솔닛이 런던으로 가던 날이 '망자의 날, 디아 데 로스 무에르토스'라고 했는데, 픽사 애니메이션 <코코>를 보면 그날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일 년 중 단 하루가 망자의 날인데, 세상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으면 다시 돌아올 수가 없고 영원히 소멸하게 된다. 나는 할머니를 자주 생각하고, 그리움은 계속될 것이다.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한 할머니는 소멸하지 않으실 거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들었던 부질없는 위안이다.

 

. "그의 삶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1903년 6월 25일, 즉 보어전쟁 직후에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사춘기가 되었으며, 러시아 혁명과 아일랜드 독립전쟁이 1920년대까지, 즉 그의 성년기 초입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1930년대 내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참사의 조짐들이 고조되어 가는 것을 지켜본, 그리고 1937년에는 스페인 내전에서 싸운 사람 중 하나였다. 독일군의 공습 동안 런던에 살았으며, 살던 집이 폭격당해 길거리에 나앉았고, 1945년에는 '냉전'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다. 그리고 말년에는 냉전과 핵 병기고가 갈수록 무시무시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1950년 1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 모든 갈등과 위협이 그의 관심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웰의 장미, 21쪽)

책을 읽으면서 내내 오웰이 살았던 시기를 떠올렸다. 간략히 정리한 그의 일대기를 읽노라면, 연민의 감정이 솟구친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삶의 접점이 하나도 없는 할머니의 삶이 겹쳐진다. '전쟁'이 있던 시기를 살아냈다는 것만 빼면 아무런 교집합이 없는데도 말이다. 살아가는 배경에 늘 전쟁이 있던 삶, 누구보다 날카롭고 예민하게 현상의 이면을 꿰뚫고 경고했던 사람이 심은 장미는 어떤 의미일까. 어둡고 힘들고 부정적인 것이 아닌 아름다움을 통해 사람들을 모을 수 있다는 그의 혜안이었을까. 장미의 아름다움을 통해 잊히지 않고 소멸하고 싶지 않은 바람이었을까. 비슷한 침략과 전쟁의 시기를 겪으며 살았던 할머니의 '장미'는 무엇이었을까. 자식, 손주들이었을까. '장미'같은 존재가 있긴 했을까.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을 직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장미를 심으며 꿈꾼 건 아니었을까.

댓글 3
  • 2024-03-23 22:00

    마감에 맞춰 냈다는데 의미를 두겠습니다...ㅠㅠ

  • 2024-03-24 01:48

    이든샘의 할머니에게 응석부리며 약손을 받았을 날이 상상이 되는 아름다운 글이예요~ 오웰의 장미가 이든샘에게는 할머니를
    연상하게 하셨다면 오웰의 장미는 후손을 위한 장미가 된것이 맞네요~^^

  • 2024-03-27 15:34

    세미나에서 누군가 얘기했던 것처럼 '부러운' 마음이 드는 글이에요. 할머니와 그런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 이든님에게 큰 자산이 되리라 봅니다. 오웰과 할머니의 연대기가 겹치는 시기, 전쟁에 대한 생각이 이든님의 현재와는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찾아보면, 이 글의 '깊이'가 만들어질 것 같아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끝내기에는 조금 아쉬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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