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름다워질 수 있을까

겸목
2024-03-23 21:45
66

1.

페이스북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2년 전인 2022년 3월 22일 나는 리베카 솔닛의 『멀고도 가까운』을 읽고 있었다. 로고가 박힌 커피잔과 책표지가 잘 보이게 찍힌 사진을 보고 나는 그 장소를 한눈에 알아봤다. 분당서울대병원 4층에 위치한 스타벅스다. 그때 나는 만성신부전 진단을 받고 2년차에 접어들어 혈액채취와 소변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며, 그 주 세미나의 텍스트인 책을 읽고 있었다. 하필 내가 읽고 있던 부분이 암치료중인 리베카 솔닛과 유방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그녀의 친구 앤에 대한 이야기라 색연필로 줄을 쳐가며 읽었다. 이때는 친구가 위암 1기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은 직후였다. 리베카 솔닛의 문장은 나에게도 위로가 되었지만, 친구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어, 더 세게 줄을 그었다. 이 문장을 사진을 찍어 톡으로 보낼까? 책을 선물할까?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책이 친구에게 위로가 될까? 괜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웠다.

 

 

그 타일들은 환자들의 길동무가 되어 준 이야기들이었다. 그 이야기들은 환자들이 감히 서로의 상황을 물어보지 못하는 그곳에서 자신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나는 그녀가 다시 꾸민 정원 근처에 있던, 그 로비의 그 벽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곳은 병원의 다양한 병동으로 가기 전에 꼭 거처야만 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나 자신이 환자가 되어 종양 전문병동에 다니게 되면서는, 병동의 대기실 구석 벽에도 그녀의 녹색타일들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계절에 나는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중 몇몇 글은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 내용이었고, 몇몇은 환자 본인의 불행함이나 불쾌함, 혹은 두려움을 드러내는 내용이었다. 처음부터 타일에 새겨져 있던 식물의 잎이나 줄기, 꽃 주위에 적힌 글 중에는, 환자 본인이 본 것을 건조하게 적은 문장도 있고, 하이쿠 같은 시, 혹은 감사의 마음이나 저주의 마음을 담은 글도 종종 있었다. 음각된 그 글들은 실제로는 우울함이나 부재, 혹은 식물들이 남겨 놓은 흔적들이었다. (『멀고도 가까운』, 189쪽)

 

 

2년 후인 2024년 3월 22일 즈음에도 나는 리베카 솔닛의 『오웰의 장미』를 읽고 있다. 2년 전과 같이 세미나를 하고 있고, 텍스트는 또 다시 리베카 솔닛의 책이다. 큰 변화 없는 내 일상을 발견하고 문득 마음이 놓였다. 친구는 수술을 잘 마치고 다시 일을 시작한 지도 꽤 됐고, 나는 만성신부전 4년차에 접어들었다. 3년까지는 긴장감을 갖고 식단조절을 해왔다면, 4년차에 접어들며 마음이 해이해져 최근에는 다시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다. 집밖에서 음식을 먹다보면 아무래도 염분섭취가 많고 식사량도 늘었다. ‘이래선 안 된다’ 혼자 마음을 다잡으며 여전히 책에 줄을 그으며 읽고 있다. 『오웰의 장미』에서는 이런 문장에 밑줄을 쳤다.

 

 

사회적 변화나 정치적 참여의 목표는 무엇인가? 어떤 선이 이미 존재하며 존재해왔는가를 연구하는 것도 그 작업의 일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오염되거나 부패해 있으므로 언제까지나 상처에서 출발한다는 음울하고 널리 퍼져 있는 입장과, 선이란 일종의 씨앗처럼 존재하며 그것을 좀 더 힘써 돌보고 널리 퍼뜨려야 한다는 입장 사이에는 물론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오웰의 장미』, 261쪽)

 

 

리베카 솔닛은 ‘정원’을 사랑한다. 『멀고도 가까운』에 나온 앤의 정원은 그녀가 입원한 병원 로비 벽에 그린 타일그림이다. 앤은 벽 전체에 부드러운 색감의 커다란 타일을 붙이고, 타일 하나하나마다 식물 문양을 넣고 식물의 이름도 새겨 넣었다. 거기에 환자들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앤도 시나 좋은 문장들을 옮겨 적었다. 『오웰의 장미』에는 조지 오웰이 심은 장미나무와 그가 가꾼 정원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두 권의 책에 나온 정원과 식물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식물’의 수사(修辭)는 왜 아름다움의 원형이 되었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식물 표현에는 ‘진/선/미’의 미덕이 있다고 우리는 왜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일까?

 

 

2.

이런 의심도 무색하게 이번주 금요일 나는 산수유꽃이 활짝 핀 배경으로 일리치약국 쌍화탕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렸다. 회의에서 매출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인스타 유료광고를 해보기로 결정했는데, 그때 우리가 쌍화탕 사진을 ‘아름답게’ 찍기 위해 선택한 배경이 꽃이다. 봄의 싱그러움을 담은 산수유꽃과 쌍화탕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예쁜 배경으로 찍은 보기 좋은 사진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을까 하는 게으른 시도였다. 산수유꽃의 호감이 쌍화탕에 대한 호감으로, 호감이 구매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안일한 선택이었다. 이런 걸 얄팍한 상술이라고 하고, 애꿎은 산수유꽃은 상업적인 이미지로 이용되었다. 광고가 매출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팔로워가 조금 늘었고, 좋아요 버튼을 누른 낯선 닉네임을 보며 내 마음이 온전히 기쁘지만은 않다. 오웰의 질문인 아름다움과 정치가 내겐 아름다움과 생존으로 변형되었다. 아름다우며 시장경제에서 살아남는 길은 어떤 것일까? 예술적으로 상업적이라는 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이고, 내가 그걸 바라는 건 아니다. ‘폭망’만은 피할 수 있는 예술성과 상업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3.

그리고 내게도 테라스 정원이 생겼다. 부동산업자와 함께 집을 보러 다닐 때, 지금 이사 온 집의 테라스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른 집보다 뒷베란다 창고가 널찍한 것이 마음에 들어 이사를 결정했다. 선택의 변수는 아니었지만, 테라스는 아파트 실내에서만 살아온 식구들에게도 호응이 좋다. 겨울에는 더 춥고, 난방비가 더 들 것이라는 두려움도 있지만, 지금은 봄이고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면 몇 발짝이라도 걸을 수 있는 땅이 있고, 흙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집 좋다’는 소리가 그냥 나온다. 테라스의 정원은 좋은데, 현재 이곳은 집주인이 심어놓은 나무 몇 그루 외에는 텅 비어 있다. SNS에 올라오는 테라스 정원의 꽃들과 텃밭 채소들을 보려면 내 손발을 움직여야 한다. 전에 살던 세입자는 테라스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흙들이 단단하게 굳어 있다. 저기에 봄꽃도 보고 푸성귀라도 맛보려면 흙을 뒤집어주고, 비료도 넣어주고, 화원에 가서 모종도 사와야 하고, 그 뒷정리도 해야 한다.

 

3월 모든 프로그램들이 시작되며, 혹시 빼먹는 일정이 있을까 싶어 탁상달력에 스케줄을 써넣었다. 빽빽하다. 그리고 하루하루 엑스표를 해가며 ‘벽돌깨기’하듯 살아가는 일정 속에 정원에서 보낼 시간이 날까? 그 시간을 만들어내는 일이 내가 아름다워질 수 있는 길일까? 그 길을 가야 할까? 탄광으로 가고 스페인내전에 참전한 오웰의 결정에 비하면 나의 선택은 민망한 수준인데, 선택이 쉽지 않다. 올봄 나는 저 땅을 그냥 두고 볼 것인가? 뭘 심을지 모르지만 꿈지럭거려볼 것인가?

 

댓글 3
  • 2024-03-23 23:53

    과제는 해야 하는데.. 글머리가 잡히지 않아 애꿎게도 추천해주신 <멀고도 가까운>을 다 읽었습니다.
    초반에는 오웰의 장미처럼 에둘러 가더군요. 그리고 뒷 부분에 줄을 박박 그어가며 읽었어요.
    그리고 친구에게 문장 몇 개를 카톡으로 보낼까 고민하다가 그냥 두었어요.
    이 대목이었는데 여기에 써두고 싶네요. ㅎ

    당신은 오래된 괴로움이라는 추한 짐을 내려놓고, 끔찍한 것과 이어져 있던 끈을 풀어 버리고, 거기서 멀어진다. 용서란 공적인 행동, 혹은 두 당사자 사이의 화해이지만, 용서가 마음속에서 벌어질 때 그 과정은 좀 불명확하다. 갑자기 혹은 서서히 무언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마치 어떤 범위에서 벗어나거나 그것을 넘어선 것만 같다. 그러다 그 무언가는 그것에서 벗어난 당신 스스로를 축하하려는 바로 그 순간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342-343쪽)

  • 2024-03-24 21:42

    "예술적으로 상업적이라는 건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이고, 내가 그걸 바라는 건 아니다, '폭망'만은 피할 수 있는 예술성과 상업성은 어떻게 가능할까? "
    이 글의 핵심 질문이 이 문장이라고 생각했어요.
    예술의 아름다움과 시장경제의 작동 자체가 서로 다른 가치로 움직이는데 시장경제가 좋아하는 성공의 잣대에 들이대면
    보나마나 예술이 지고 마는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른 가치의 성공, 다른 의미의 생존에 대해 생각해보면
    예술은 영원한 생존를 획득하지 않을까요?
    좀 이상주의적인 생각 같지만 조지 오웰과 리베카 솔닛이 말하려는 아름다움은
    이상주의라 불리우는 것들에도 깃들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겸목샘의 글은 항상 제가 닮고 싶은 간결함과 담백함이 있어서 좋습니다.!

  • 2024-03-25 22:42

    뭔가 사소하면서도 그것에 깃든 생각을 담은 겸목샘의 글은 진짜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순간 쉽지만 결코 쉽지만은 않은 <벤투의 스케치북>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맞나요? 정원 테라스가 있는 집이라니 참 궁금하고, 땅을 두고 꿈지럭거려 볼지, 그냥 둘지의 결과도 참 궁금합니다요.왠지 저는 꿈지럭거려 보는 쪽에 걸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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