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에세이

비료자
2023-12-02 23:02
69

2023년 평범한 여자들의 비범한 글쓰기 최종에세이/ 12. 3. 비료자

 

                                                                      괜찮을 리 없잖아

 

<비밀은 괜찮을 리 없는 사실의 존재다. 괜찮아 질 때까지 얼마나 어떤 시간을 지나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이제는 괜찮아진 비밀을 나누고 교감하는 순간이 온다면, 인생이 주는 선물을 받은 것이다.>

 

공원묘지에서

 

일년에 두 번, 봄의 예쁜 어느 날, 가을이 멋진 아무 날, 친구와 나는 공원묘지를 찾는다. 넓고 양지바르며 조경이 아름다운 그곳은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으나 대중교통이 굉장히 불편하다. 평생을 가장 가깝게 지냈지만 별로 부탁이라는 걸 안 하던 친구가 몇 년 전 어느 날, 같이 가자고 부탁을 해서 왔었다. 너는 잠깐 여기서 기다려, 하고 묘비 사이로 걸어 내려간 친구는 30분 정도 있다가 올라왔다. 늘 평정심을 지키던 친구는 울었던 듯. 누구? 라는 질문에 친구, 라는 답이 끝이었다. ‘나도 모르는 네 친구가 있었고, 벌써 죽기까지 했어?’ 속으로는 좀 의아했지만 친구는 입을 다물었고, 나도 더 묻지 않았다. 햇살이 좋다, 봄은 봄이다, 라일락이 피었더라, 이러다가 친구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일년에 두 번, 봄 가을에 한 번씩 여기로 같이 와 줄래?”

 

그런 봄의 어느 날, 친구

 

평일 오전의 공원묘지는 한적하고 평온하며 향긋하다. 보온 병에서 커피를 따르고, 좋아하는 잔까지 준비한 나는 모처럼 아무 생각 없이 나무 그늘에 앉아 풀냄새를 맡는다. 커피를 다 마시기도 전에 친구가 올라왔다. 커피를 별로 즐기지 않는 친구가 자기도 한 잔을 청한다.

 

“여기 묻힌 사람은 내가 아주 사랑하던 남자야. 초등학교 동창 소개로 알게 된 사람인데 외모는 작고 볼품이 없었지만 이야기를 나눌수록 좋아지는 사람이었지. 늘 같이 있고 싶고, 뭘 해도 마음이 평온해지는 사람. 하지만 자주 만날 수는 없었어. 그 사람은 연구소에서 일을 했는데 동료와 가정에 충실했고, 일은 늘 십분 단위로 바쁘게 밀려 있더라. 나도 밖에서 보면 별 문제 없는 성실한 직장인이고 엄마 노릇에 바쁘니까 서로 시간 맞추기도 쉽지 않았지만, 맞추려고 무리하지도 않았어. 일년에 많으면 다섯번? 만나면 우린 바로 뭘 사들고 모텔에 갔어. 처음 몇 번은 섹스도 했지만 나중엔 그게 별 상관이 없어지더라. 나는 섹스를 하던 안 하던 참 좋았어. 나, 그 오르가슴인가 뭔가를 몰라서 치료까지 몇 달 받았잖아. 그래도 모르겠기에 에라, 죽고 살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기를 쓸 일인가 하고 단념했지. 그런데 이 사람하고 섹스는 오르가슴 같은 거 없어도 그냥 느낌이 좋았어. 나중엔 이 사람도 체질이 허약한 편인데 늘 피곤하니까 둘다 섹스없이 안고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어. 둘이 보내는 그 시간이 너무 소중해서 섹스 안 해도 서로 교집합이 생기면서 내가 나로 완성되는 느낌이 들었지. 그런데 몇 달 동안 연락이 안되더라. 나중에 우리를 소개했던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이 사람이 죽어서 여기 묻혔다는 거야.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지. 사람이 죽어서 그대로 끝이라면 무엇때문에 태어나고 만나고 살아가는지 깊은 허무감에 한동안 괴롭다가 종교를 찾아다녔지. 딱히 어떤 특정 종교를 믿는 건 아니지만 성당이 맞아서 다니고 있어. 성당에서의 가르침과 다르지만, 난 우주 어디선가, 언젠가는 내 일부였던 그 사람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고, 기도하고 있어. 그 희망으로 살고 있거든.”

 

“누군지 모르지만 정말 고마운 사람이네. 너는 큰 행운을 만난 거야. 부럽다”

발치의 민들레처럼 노랗게 빛나는 마음으로 대답을 했고, 친구는 “그렇지? 행운이지? 하고 웃었다.

 

그런 가을의 어느 날, 나

 

오후의 공원묘지는 장엄하고 화려한 가을이 찬란하고 포근했다. 마지막 은총 같은 날씨. 부드러운 바람이 아직은 푸르고 긴 풀들을 이리 저리 흔들고 있었다. 햇빛은 단풍을 뚫고 빛나서 나뭇잎들은 붉은 보석같다. 이 시간이 지나면 떨어져 바스러질 붉고 노란 나뭇잎들이 어째서 저렇게도 장엄하고 찬란한가. … 나는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고, 연인을 만나고 온 친구도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며칠 전, 미영이를 만났는데 걔가 그러더라. 초등학교 5학년 늦가을인가? 초겨울 해 지고 어두웠을 때 내가 자기집에 찾아가서 가출하자고 그랬대. 뜬금없이, 간절하게…. 대체 왜 그랬냐고 묻는데 내가? 난 전혀 기억이 없다고 했더니 내가 분홍색 보자기를 쓰고 와서 되게 웃겼는데, 너무 심각하게 창밖에 서서 이야기를 했기에 분명히 기억한다는 거야. 내 생전에 스카프, 머플러 패션을 해 본 적이 없는데 뭔 바보 같은 소리야? 하고 짜증을 내고 말았는데, 네가 저기 내려가 있는 동안 심심하니까 그 말이 떠오르더라. 걔의 말이 너무도 구체적이라서 사실이라고 본다면, 내가 왜 보자기를 썼을까? 하다가 그 서리 내리던 계절의 저녁 무렵에 걔 창 밖에 서 있던 내 모습이 보이면서 전체가 떠올랐지. 내가 유년기에 도벽이 있었잖아. 늘 훔치고 들키고 큰오빠에게 맞고 하던 나날이었는데 그땐 특별했어. 아버지가 손수 나를 두들겨 팬 다음, 내 머리를 가위로 삭발을 한 거야. 그리고 발가벗겨서 대문 밖으로 내 쫓았지. 다행히 날이 어두웠지만 쪼그리고 앉아 대문안의 이 사람들은 정말 나를 싫어하는구나, 라고 온 몸으로 느꼈던 것 같아. 그래서 다음날인가? 어두워질 무렵, 보자기를 쓰고 걔를 찾아간 거야. 대문 밖에서 그나마 가까운 사람이 미영이 뿐이었으니까. 난 가족이 되 줄 사람을 찾았던 거 같아. 근데 그게 될 말이겠어? 걔는 이런 사정을 몰랐고, 지금도 몰라. 알아도 별 수 없었고, 몰라서 다행이지. 그냥 너네 집에서는 왜 너를 그렇게 구박하니? 넌 서열이 꼴찌더라. 지금도 걔는 그런 기억을 웃으면서 종종 말하잖아. 구체적인 일상까지 예로 들면서… 어쨌든 포섭에 실패하고, 난 가출을 단념했던 거 같아. 그랬으니 그 후 도벽을 싹 끊었겠지. 적응해서 살려고… 근데 몇 달 후에 진짜 누명을 쓰고 맞다가 도망가서 거의 일년동안 가출을 했었어. 그리고 기적처럼 귀가해서 겉으로 나마 멀쩡하게 살아온 거, 지금도 감사하고 있어. 매일, 매시간, 매분마다 과분하고 행복해. 하지만 그 시기에 내 안에서 뭔가 죽은 거 같아. 나는 너처럼 내가 나로 완성되는 기분을 알 수가 없어. 사랑을 믿기도 했고, 아이들도 낳았고, 열심히도 살았지만 모르겠어. 그런데 내가 언제 내 안에서 뭔가 죽었다는 기분이 들었는지 기억이 난 거 같아. 내가 왜 이렇게 엉망인 내면으로 살았는지 이젠 알겠어. 다른 사람들도 엉망이 많다면 그 사람들도 이미 죽은 사람인 거야. 어쨌든 난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었으면 좋겠어. 너는 네 소원대로 영혼이 흘러나와 어디서든 그 사람과 만나기를 빌어. 하지만 나는 죽어서 까지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고, 나를 보고 싶어할 사람도 없었으면 좋겠어.”

 

조용히 듣고 있던 친구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나도 만나기 싫어?.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영혼이 있을지 어떨지 모르지만 우리 둘 중 하나는 소원대로 되겠네.”

 

비밀도 유효기간이 있다

 

평생을 반듯하게 살아 모두에게 기준점이 되던 친구가 사실은 십 수년 간 연인을 만나고 있었다는 비밀은 유효기간이 지났다. 이제 상자 밖으로 나와도 무슨 힘을 쓰겠는가. 바람깨나 피우고 소통이 어려웠던 그녀의 남편이 좀 덜 미안해지려나? 이제는 나이 들은 자녀들도, 사실은 씨다른 형제가 있었다네! 라면 몰라도 엄마에게 있었던 과거 연인이 무슨 상관이랴. 더구나 죽어 묻혔다는데. 그 비밀은 친구에게 영혼의 존재를 믿고 싶은 희망으로 발효되었다.

내가 떠올렸던 비밀도 유효기간이 끝나서 떠올랐던 모양이다. 유효기간 내내, 나는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닌 곳에 위태롭게 끼어든 느낌으로 살았다. 도깨비의 기억을 잃고 평소에 우울하다가 비만 오면 미치도록 슬프던 김고은처럼, 나는 평소에 돈과 가족 문제로 앓으며 잊고 살다가 가끔 발작처럼 내 존재 자체가 부끄러웠다. 물론 부끄러울 구체적인 이유는 많았지만 이렇게나 괴로운 건 자의식 과잉 아냐? 혼자 부끄럽다는 사실 자체가 또 부끄러웠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고 바쁘던 어느 날, 차에서 뷔의 singularty를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나는 존재한 적이 없구나. 주변이나 나 자신의 생존을 위한 조언대로 이것 저것 모습을 만들어 오기는 했지만, 그냥 사람 노릇의 흉내를 내며 살았구나. 그러면서 토막 토막이던 내 기억들이 안개를 걷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치스럽지도, 우울하지도 않았다. 수치와 우울도 사람 흉내일 뿐이니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픔도, 슬픔도, 괴로움의 감각도 둔해졌다. 그러면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밑바닥 기억의 숲은 아름다움이 하나도 없었다. 자기연민이나 혐오감 없이 그 숲을 걸으며 궁금한 건 있었다. 도벽과 발각, 처벌로 반복되던 어린 시절의 어느 지점에서 나는 도벽을 끊었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내 영혼과 자아가 태어나 자라기도 전에 사산이 된 건 알겠는데, 물론 그럴 만한 이유의 기억들이 산더미라서 충분하긴 한데, 뭔가 빠졌다. 어린 내가 ‘바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고 몇 달은 정말로 ‘바르게’ 살았었다. (그대로 천천히 ‘바른 애’로 인정을 받았으면 좋았을 텐데, 누명을 쓰고 가출을 한 건 유감이다.) 그런데 그런 결심을 그냥 우연히 한 걸까? 그런 결심을 하게 만든 비밀을 알게 된다면, 또 다시 ‘바르게’ 를 시도할 수 있지 않을까? 꼭 그러고 싶어서는 아니고, 그냥 무심히 궁금했다.

 

그러다가 공원 묘지, 그날 갑자기 기억의 숲에서 보자기를 쓰고 있던 내가 보이면서 그 전말이 통으로 다가왔다. 꼼지락 꼼지락 생겨나 그래도 살겠다고 보자기 쓰고 한번쯤 결심을 했었구나. 그리고 뭔가 죽었다는 기분이 들기까지 과정은 오래 전에 남들에게는 한 접시 간식거리일 뿐이었지만 나에게는 그게 드러난 순간까지 수치스러운 비밀이었다. 나 자신에게도 비밀이있던 던 것의 유효기간이 끝날 때였다. 모든 비밀은 힘이 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비밀에 힘과 의미를 주는 사람은 나 자신이다. 비밀이라는 건 괜찮을 리 없는 사실의 존재다. 이 존재와 싸우며 괜찮다, 아니다 반복하는 동안 시간이 흐르고, 유효기간이 다가오면 나도 비밀도 나이를 먹어 빛이 바래며 숙성한다. 잘 숙성된 비밀은 힘도 없고, 독도 없이 괜찮아졌다. 적당할 때 익은 술 꺼내듯 꺼내, 적당한 사람과 주고받는 순간이 있다면 그게 인생이 주는 선물이다. 그 공원묘지에서 나와 친구는 인생이 주는 선물을 받았다. 선물은 얻기 힘들고 귀한 사치품이지 일상의 생필품은 아니다. 아름다움이 빠진 그 시절, 내 기억의 숲에 필요한 것이 바로 사치품이다.

 

나는 내가 나로 존재한다는 것이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 영혼이란 그런 걸 아는 사람의 것이겠지. 하지만 인생이 주는 소소한 선물들도 있으니, 그런 거 모르고, 없어도 괜찮다. 내 지난 기억도, 앞으로 만들 기억들도 사치품으로 꾸미고 싶다. 별 의미 없고, 별 무게없이 예쁘고 가벼운 사치품들. 언제든 사라져도 아쉬울 것이 없이 괜찮을 사치품들. 난 이제 괜찮은 게 더 많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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