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오브 대사증후군②] 아픈 자 돌보는 자 치료하는 자 모두를 위한 의료윤리

블랙커피
2023-05-10 09:42
299

 

 

 

먼저 듣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의료윤리

-『아픈 자 돌보는 자 치료하는 자 모두를 위한 의료윤리』(김준혁, 휴머니스트, 2021년)를 읽고

 

경기 중 부상을 당해 전신 마비가 된 권투 선수가 트레이너에게 인공호흡기를 떼어달라고 부탁한다. 괴로워하던 트레이너는 권투 선수의 인공호흡기를 떼어준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장면 중 하나인데, 과연 의식도 병세의 호전도 없는 환자의 생명을 연명치료로 유지하는 것이 윤리적일까?

 

이와 같은 존엄사와 관련된 오래된 질문 외에도 우리는 의료와 관련된 질문들에 쉽게 답할 수 없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은 서로 대립하나?, 치매 환자는 무능력한가?, 치매 환자와 관련한 결정을 타인이 내리는 것은 타당한가?, 다수의 환자가 발생한 응급상황에서 누구를 우선적으로 치료해야 할까?, 유전자 조작은 허용되야 하는가?, 의료 개인정보는 어디까지 보호되어야 하나?

 

<모두를 위한 의료윤리>의 저자 김준혁은 질병과 치료, 돌봄이 일상이 된 오늘날, 긴박한 의료 현장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문제에 직면하기 전에 이러한 의료 문제들을 미리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결정의 순간, 아마도 우리는 머뭇거릴 것이다. 중대한 결정일수록 더 그럴 것이다. 중환자실에 가족이 누워 있다면, 그의 치료를 중단해야 하는지 아닌지를 손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떤 결정이든 내려야만 한다. 이 결정은 자신이 감내해야 하는 몫이기에 우리에겐 도움이 필요하다. 물론 결정하기 전에 의료인과 먼저 상의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닥치기 전에 내가 나와 타인의 건강과 질병에 대한 문제를 고민해본다면 어려움을 마주할 준비를 보다 단단히 하는 것이 된다. 절벽에 선 듯 난감한 고민과 갈등의 순간에서 우리를 구해줄 밧줄과 같은 역할을 의료윤리가 해줄 것이다(9쪽).

 

<모두를 위한 의료윤리>는 답을 내리기 어려운 현실의 문제, 지금 가장 논쟁적인 국내 보건의료 이슈들을 의료윤리적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연명치료 중단, 안락사, 임신중절, 치매 돌봄, 감염병, 유전자 조작, 건강세, 의료 개인정보, 환자-보호자-의료인의 관계 등의 다양한 주제들을 역사적·과학적·철학적 맥락에서 꼼꼼하게 살핀다. 또한 영화, 소설 등의 예를 들어 다양한 대안을 상상하도록 하는 미덕도 지니고 있다.

 

나의 경우는 소개되는 많은 의료윤리 이슈들 중에서 특히 존엄사와 안락사를 다루는 부분이 가장 많이 다가왔다. 4년 전에 지인 한 분의 아버님이 지병이 악화되어 응급실과 중환자실을 여러 번 번갈아 입원하시다 아버님 스스로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하셨고, 얼마되지 않아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돌아가셨다. 지인은 아버님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는 순간까지 끝까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어 몹시 힘들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연명치료 중단이란 얘기를 처음으로 듣기도 했고, 죽음의 문제가 아직 멀다고 느껴서인지 이 문제를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모두를 위한 의료윤리> 중에서 존엄사와 안락사를 다룬 부분을 읽으며, 이 문제에 대한 생각들을 좀 더 깊게 전개시킬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임종 단계 환자가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인공호흡기 착용 등의 의료 행위를 중단·거부 할 수 있도록 한 제도(연명치료 결정법)는 2008년 ‘김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도입되었다. 당시 뇌사 상태인 76세 할머니의 인공호흡기를 뗄 수 있게 해 달라는 가족들의 소송에 대법원은 “현 상태만을 유지하기 위해 이뤄지는 연명치료는 무의미한 신체 침해 행위이고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친다”는 가족 손을 들어주었고, 연명치료 중단의 법제화를 권고했다. 이후 관련 논의가 이루어져 2018년부터 ‘연명의료 결정법’이 시행되었는데, 얼마 전 신문 기사를 보니 올해 2월까지 ‘연명치료 중단 의향서’를 작성한 사람이 164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김준혁은 김할머니 사건이 터진 원인이라 할 수 있는 보라매병원 사건(1997년)부터 연명치료의 역사를 되짚는다.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환자 보호자의 완강한 퇴원 요구에 환자를 퇴원시켰다가 환자가 사망하자, 환자의 다른 가족으로부터 고발을 당하게 된 보라매병원 사건. 이후 병원들은 고발을 피하기 위해 소생 가능하지 않은 환자를 퇴원시키지 않고 환자의 생명을 무의하게 유지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한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고, 이는 김할머니 사건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김준혁은 의학적 개입이 없는 한 사망이 분명한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연명치료는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지만, 환자의 상태를 호전시키지 못하면서 고통을 연장하는 것뿐인지라 무익한 치료라고 얘기한다. 그러므로 연명치료를 받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정은 ‘나’를 소외시키던 의료화의 물결에서 벗어나는 결단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김준혁은 다양한 의료 이슈를 다룬 뒤, 맺음말에서 의료 문제와 관련한 모든 상황에 다 들어맞는 황금열쇠는 없다고 말한다. 의료분야 쟁점들을 둘러싼 역사와 맥락을 충분히 인지한 상태에서 각자가 처한 상황을 세밀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당면한 문제가 어디서 왔는지 성찰하고, 이후 어디로 갈 것인지를 상상하는 능력인데, 여기서 핵심은 서사윤리라고 얘기한다.

 

서사윤리는 어떤 이야기를 세심하게, 특히 이야기 흐름에 감춰진 전제 등의 윤리적 측면을 자세히 살펴 해석과 상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김준혁은 이러한 서사윤리적 접근은 원칙에서 나오는 무딘 결정(생명권이 중요하니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 등등)을 피하는 길로 이끌고, 판결이 아닌 조정과 방향 설정에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즉 의료윤리가 해야 할 역할은 최종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닌, 참여자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윤리적 방향으로 결론을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김준혁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먼저 들어야 한다는 점을 마지막까지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더 많은 읽기와 쓰기를 부르는, 그리하여 우리가 서로를 좀 더 긴밀하게 만나기 위한 시작이다. 그러면서 우리의 이 결함 많은 의료는 조금씩 바뀌어갈 것이다. 약자를 위한 의료로, 병을 끌어안는 의료로, 의료인의 괴로움을 보듬는 의료료, 사회와 환자가 힘을 얻는 의료로. 이 책에서 거듭 이야기한 ‘윤리’는 바로 그 꿈을 위한 것이다(376~377쪽).

 

 

 

댓글 3
  • 2023-05-10 11:14

    서사의학! 궁금해지네요^^ 김준혁님이 번역하신 걸로 주문해봅니다~

  • 2023-05-10 11:27

    전 이 책과 서사의학, 두 권을 주문했어요. 읽는 속도는 사는 속도를 전혀 못 따라가지만....음....나중에 읽지 않은/못한 새 책으로 도서관 차리면 될거라 생각하고 일단 구매... ㅋㅋㅋㅋ
    (예전에 이런 말이 유행했었는데...."나는 소장학자야, 젊은 학자 말고, 책 소장하는...." ㅋㅋ

  • 2023-05-10 11:57

    이번에 <병든 의료>로 세미나를 하면서 현재 의료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이 리뷰를 읽으며 "죽고싶어도 죽지 못한다" 는 한탄이 뼈를 때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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