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연출의 사회학> 1~3장 후기

당최
2022-11-10 21:33
300

인간은 배역 연기를 통해 다른 사람과 교류하며 사회화된다. 흔히 앞무대의 모습은 가식이고 뒷무대의 모습만이 진실하다 생각할 수 있지만, 누구나 사회 구성원으로서 앞무대에서 긴장하며 수행하는 역할이 있고 뒷무대에서 이완되어 풀어지는 모습이 있다. 개인의 정체성은 두 영역 중 하나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긴장과 이완 상태의 균형에 있다. 경험은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말처럼, 개인이 드러내온 모든 상황 반응의 총합이 그 사람의 성격이고 정체성인 것이다. 버리고 싶은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부정하고 싶은, 이상화 반대 지점에 있는 (흔히들 흑역사라 부르는)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자기가 연기하는 배역에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 우린 냉소하는 자아가 되기 쉽다. 역할의 권한의 한계를 느낄 때에도 그렇다. 진심을 담아 연기할 필요가 없을 때, 관객들이 나에게 진정성 있는 배역 수행이 아니라 그저 그 자리에 필요한 연기만을 요구한다 느낄 때다. 이 상황엔 ‘나’가 필요한 게 아니라 내가 수행하는 역할의 ‘기능’만이 필요하구나 싶으면 스스로도 배역에 몰입해 열연할 의지를 잃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에도 타인에게 냉소를 들키지 않게 우린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냉소를 들킨 사례가 국감장에서 강승규와 김은혜의 ‘웃기고 있네’ 메모다.

사회의 앞무대를 담당하는 이들에게 연기는 본업이고 책무다. 강승규와 김은혜가 자신들의 현재 위치가 앞무대인지 뒷무대인지도 모를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공적인 앞무대에서 대다수의 관객에게 추궁당하며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 높아진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뒷무대에서나 하는 퇴행을 몰래 시도했다가 까발려진 상황일 것이다. 관객은 늘 공연자의 빈틈을 예의주시하고 능숙한 공연자라면 이러한 빈틈을 잘 관리한다. 강과 김의 공연은 매우 미숙했고, 자신들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암묵적으로 알고 있더라도) 끝까지 숨겨야 하는 책무에 실패했다. 이 일의 파급이 큰 이유는 앞서 연이어진 사건들의 맥락 속에 있다. 관객들이 그 어느 때보다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공연팀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 메모는 매우 시의적절한, 탁월한 증거로 인식되는 것이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사회에서 우리가 평소 수행하던 일상 연기는 양극화된다. 대면 상황의 비언어적 연기는 대폭 축소되고, 문자나 메일로 주고받는 활자 연기는 대폭 과장되는 것이다. 용건만 간단히 보내면 어딘가 건조하고 싸늘하게 느껴지는 메신저 인터페이스 덕에 우린 ㅋㅋㅋ나 용용체나 넵이나 이모티콘 따위를 남용한다. 표정이나 몸짓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되어 편해진 만큼 톡창 너머 보이지 않는 영역까지 글귀에 꾹꾹 눌러 담아 연기하며 정신의 피로를 느낀다. 단문이 오가는 채널에선 그 비좁은 행간에 깃들 뉘앙스까지 연기해야 한다. 그리하여 톡은 또 다른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 무대가 되었고, 공연을 보조해주는 이모티콘은 불티나게 팔린다.

공연은 정신과 육체를 쓰는 일이다. ‘인간은 매순간 연기하며 살아간다’고 말하면 누구나 듣자마자 진저리나고 피로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단어가 주는 부정적 뉘앙스를 제거해 보면 연기는 결국 사회적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아기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오조오억 가지의 배역을 요구하며, 부모를 만족시키기 위해 방긋방긋 웃고 잼잼 도리도리를 한다. 사회적 존재이길 거부한다면 성격도, 정체성도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애초 타자에 대응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연기는 모여살도록 진화한 인간의 본능이다. 주어진 건 받아들이는 걸로.

 

댓글 3
  • 2022-11-11 01:52

    와우! 잘 읽었습니다. 냉소사례와 비대면상황에서의 연기변화 측면이 더욱 잘 이해되었습니다. 나는 왜이렇게 이콘을 많이 보유하고 있나까지ㅋ

  • 2022-11-11 08:12

    '웃기고 있네'를 여기서도 보네요.....연기를 너무 못하는 배우들 우째요.....당최님의 후기 리드미컬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2022-11-11 11:41

    신문칼럼을 읽은 듯 명쾌하네요. 연기, 나쁜거 아니다~~~~ 쫌 자알 하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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