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를 지냈습니다!
고사를 지내야 할까?
공동체는 여러 일들이 생겨나고 사라지고 다시 또 생겨난다. 자누리생활건강, 길쌈방, 이어가게, 주술밥상, 청년협동조합 길드다, 쿠키무이, 일리치약국과 용기네가게 등등 우리 공동체에도 참 여러 일들이 생겼고 더러 사라졌다. 올해 들어 새로운 일이 출발했다. 2월 15일, ‘로이, 기쁨이 되는 차’(이후 로이약차)의 개업식 겸 고사가 있었다. 사업자등록증 상 개업일은 작년 12월 26일이지만 날이 좀 따뜻해지면 친구들을 초대해서 고사를 지내자고 문탁 선생님께서 제안하셨다. 로이약차 스텝들은 무슨 고사씩이나? 하는 생각이었다. 떡 해서 함께 먹고 간단히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번거롭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사업이 잘되기를 빌고 싶은 마음에 고사를 하기로 했다.
공동체에 들어와 3번 정도 고사에 참여했다. 청년협동조합 길드다와 쿠키무이 오픈 때는 축하해주러 갔고 일리치약국과 용기네가게 오픈 때는 약국의 주체로 참여했다. 이번이 4번째 고사였다. 길드다 오픈 때 동물권을 지지하는 청년들이 나무로 돼지머리를 만들어 고사를 지냈다. 나무 돼지머리는 이후로 고사를 지낼 때마다 귀하게 쓰인다. 이번 고사상에도 어김없이 나무 돼지머리를 올렸다. 거기에 로이약차의 제품들, 친한 목수가 제작해 준 작은 나무 간판, 꽃꽂이 수업에서 온 꽃바구니들, 친구가 선물한 과일과 떡이 올라가니 그럴싸한 하이브리드적인 고사상이 되었다.
전통적인 규칙을 벗어난 고사상을 차려놓고 우리는 절을 했다. 이런 고사상이라도 괜찮은 걸까? 고사를 지내는 우리는 어떤 마음일까? 새삼스럽게 이런 물음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 고사의 사전적 의미는 나쁜 기운은 없어지고 복은 오도록 집안에서 섬기는 신에게 올리는 제사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 사전적 의미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로이약차를 시작하는 나의 마음에는 약차가 잘 팔리고 그로 인해 우리에게 풍요로움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고사는 나쁜 기운을 없애고 복을 비는 것이라 했다. 그러니 그 풍요로움은 그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나쁜 기운이 그저 생긴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살풀이를 했다
고사 때 축문을 읽는 순서가 있었다. 공동체 연장자 가마솥 선생님께서 고사 전날 목욕재계하고 정성스럽게 붓으로 쓴 축문을 직접 읽어주셨다. 옆에서 같이 무릎을 꿇고 앉아 축문을 들었다. 특히 살풀이 대목은 유쾌하면서도 가슴에 와 콕콕 박혔다. “이 말 달라 저 말 옮겨 동네방네 불란살(不亂煞), 보냈는데 못 받았다 도적(盜賊) 난다 실물(失物)살,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사장없는 상하관계살, 나는 좋아 성격 몰라 상처 받는 MBTI살, 자그만 일 생채기내는 이웃지간 훼살살, 하는 일이 산더민데 책 보고 싶은 가방끈살, 아침까지 좋았는데 점심 먹고 눕고 싶은 찌부둥살, 오늘은 괜히 먼 산 보고 싶은 왠지모를살”.
고사의 제사장이 특별히 살풀이에 넣어달라 주문했다는 ‘훼살살’. 고사를 통해 없앨 수 있다면 가장 없애고 싶은 나쁜 기운이다. 공동체에 여러 사람이 모여 복닥거리다 보면 별일 아닌 일로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작은 공동체지만 그 안에서도 이해관계가 갈릴 때가 있다. 그 이해관계라는 것도 실상 마음이 풀리면 별것 아닌데 마음이 꽁하면 첨예해질 수 있다. 일리치약국과 같은 공간을 나누어 쓰는 에코실험실 친구들과도 소음 문제나 공간 문제 등으로 인상을 찌푸린 적이 종종 있었다. 로이약차와도 공간을 쉐어하게 되면서 이전과는 또 다른 공간 활용이 필요해졌다. 함께 모여 논의했지만 다르게 이해한 부분도 있어서 실랑이가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신경이 예민해지고 친구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축하해주기 위해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모인 친구들의 얼굴을 본다. 그들이 전하는 덕담을 듣는다. 서운함은 사라지고 가슴속 깊이 고마운 마음이 솟는다. 몸을 낮춰 절을 하면서 살들이 풀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좁아터진 내 속 때문에 친구들을 이해하지 못했구나. 함께 잘 살고 싶은 마음은 다 같을 텐데…. 친구들과 나의 본심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축문은 불에 태워져 공중에서 재가 되었다. 내 마음속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창밖에는 서설(瑞雪)이 내리고 있었다.
함께 모이자!
문탁 선생님은 A4 용지 한 장에 걸쳐 써온 긴 축사를 했다. 지난 14년 동안 공동체 내의 수많은 크고 작은 실험들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새로운 일들이 생겨났다고 하셨다. 또 내부의 이질성과 트러블들이 지혜와 창조와 생성의 역량으로 만들어지길 희망한다고 덧붙이셨다. 힘들지만 사이좋게 지내자는 말씀이었다. 공동체를 세 개의 단위(문탁네트워크, 마을양생실험실 인문약방, 에코실험실 파지사유)로 운영하는 실험을 시작하는 시기와 코로나 시기가 맞물렸다. 그나마 매년 열리던 축제마저 사라져 모두가 모일 일들이 점점 줄었다. 그래서인지 사소한 오해들이 좀 쌓인 것 같다. 이를 의식한 축사였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 좋은 일들만 생길 수 없다는 것이 기본값일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공동체에서는 주기적으로 한 장소에 모여 서로의 얼굴을 보고 웃고 떠들며 나쁜 일은 털고 좋을 일을 도모하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실패, 이질성, 트러블 등은 그런 기회를 틈타 어떤 의미로든 정리가 되어야 그저 나쁜 기운으로 남지 않고 또 다른 일들을 도모하는 데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사를 지내고 나서 알았다. 공동체는 함께 하는 리추얼을 통해 다시 새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번 고사는 천신과 지신에 올린 제사였다. 즉 우주 만물을 향한 의례였던 거다. 최근 카렌 암스트롱의 『성스러운 자연』을 읽고 있는데, 사람들은 제의라는 상상력이 풍부한 예술적 장치를 통해 자연의 힘을 경험했다고 한다. 자연의 힘은 모두를 하나의 종합된 전체로 끌어들인다. 그 때문에 인간, 동물, 식물, 심지어 물체도 나름의 생명을 갖고 모두 똑같은 존재 양식에 참여하여 서로 영향을 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즉 자기중심적이며 제한된 세계관 속에 갇힌 자신을 자기로부터 끄집어내 확장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엑스타시스’이다. 카렌 암스트롱은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얽혀 살면서도 위험할 정도로 서로 소외된 상태인 오늘날에는 자신을 넘어서려는 시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라고 강조한다.
나무 돼지머리를 올린 하이브리드적 고사상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한 것 같다. 고사를 지내면서 우리 또한 좁은 자기의 경계를 넘어 더 확장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교하게 고사를 계획하며 마음을 쓰고 제사장이 되어 진행해 주신 자누리 선생님을 비롯해 여러 선생님들께 고마운 마음이다. 공부하는 공동체여서일까? 공동체의 연장자들이 꼰대력보다는 세심하게 주위를 살피고 돌보고 있었음을 새삼 느낀다. 공동체에서 열 살이나 나이를 더한 나도 이제 좀 ‘어른’답게 변모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함께 모여 얼굴 보고 이야기할 일들을 더 만들어야겠다. 우선 여기저기 더 기웃거려보려고 한다. 문탁네트워크에서 하는 세미나에, 에코실험실 파지사유에서 하는 강의에 신청 댓글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