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탐구세미나]6회차 질문 올려주세요

요요
2024-04-19 19:10
63

 

피카소' 바이올린과 포도'

 

<바가와드기타 강의> 3부와 <세계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 5장 '힌두교와 죽음'에 대한 질문 올려주세요.

'힌두교와 죽음'을 읽으면서 <바가와드기타 강의>를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소 낯선 산스크리트어들이 계속 나와서 여전히 어렵게 느껴지시지요?

그래도 <바가와드기타 강의>를 통해 알게 된 내용들이 많이 나와서 읽기의 문턱을 낮춘 게 다행이다 싶습니다.^^

 

<바가와드 기타 강의>에 대한 질문과 <힌두교와죽음>에 대한 질문을 구분해서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댓글 9
  • 2024-04-19 21:52

    [죽음의 의미- 힌두교와 죽음] 에서도 힌두교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종교로 설명합니다.
    P 281 인도 신화는 우주가 무한하게 다양하다는 관념,
    그리고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발생하며 모든 가능성이 상호간 배제함이 없이 존재할 수 있다는 관념을 선호한다. [중략]
    여기서는 굳이 메시아의 시대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늑대가 양과 함께 뒹굴며 놀 수 있다.
    그리고 늑대는 양을 잡아먹을 수도 있다. 그러면 양은 더 이상 자신의 다르마의 길을 추구하지 않게 될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안전하게 풀을 뜯어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전체 우주의 희생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먹히는 자가 됨으로써 자신의 (임시적인) 다르마를 성취하게 된다. 라고 했는데
    시문학적 문해력이 부족한 탓이지 이해가 잘 되지 않네요. 잡아먹힌 양이 "더욱 안전하게 풀을 뜯어 먹을 수 있게" 된다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바가다드 기타 강의]에서 세 가지 요가를 설명하면서 행위의 요가가 가장 쉽고 수승하다고 합니다. (P207)
    경제 활동에 참여하기에 사회의 주축이 되는 이들을 위한 요가이기에 가장 중점을 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이 행위의 요가에서 '행위의 결과를 포기하라'는 가르침(P206)이 좀 걸립니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행위를 잘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거든요.
    문맥을 살피지 않은 오독이 될 수도 있겠지만 '국민의 눈치를 보지 않는 권력자'의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또, 한 편으로는 사회의 노동 계급에게 보상을 바라지 않는 태도를 주입함으로써 지배 체계를 더욱 공고히 하려는 속셈이 숨겨져 있는 가르침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김영 선생님도 세 가지 요가가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고 행위에 있어 지혜도 필요하다는 설명을 하셨습니다만,
    현대 사회에서 행위의 요가에 있어 내가 하는 행위를 분별하는 지혜를 어떻게 구해야 할까 하는 고민이 남습니다.
    저는 '타인에게 미치는 결과를 생각해서 행위하되 내게 돌아올 당장의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라' 정도로 정리 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나누고 싶습니다.

    [죽음의 의미- 힌두교와 죽음] 에서는 힌두교 또한 초기 경전에서는 죽음 이후 사후 보상이나 불멸의 영혼 개념은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P271 '여기서 죽음이란 여전히 필연적이고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조건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또한 죽음이란 필연적으로 희생적이다.
    왜냐하면 죽음 없이는 어떤 삶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략] "산다는 것은 다른 생명을 먹어 치우는 것이다." 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삶과 죽음은 상호 배척이 아닌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삶에 대한 열망과 노력으로 100세 시대의 문을 열었지만
    점점 아이들은 사라지고 노인들만 남는 사회가 되어가는 아이러니에 대한 답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은 너무 비약적인 것일까요?

  • 2024-04-20 02:07

    저는 힌두교와 죽음에서 저자의 논리전개를 따라가며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기타>는 죽음에 대한 힌두적 이해를 잘 보여주고 있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
    1) 죽음을 통해 자유로워진 자아는 크리슈나와 함께 거하는 지복과 평화의 상태
    2) 불멸하는 것은 브라만 뿐(크리슈나는 브라만의 한 형식에 불과), 크리슈나와의 합일이 궁극의 상태

    2. 아트만에 대한 두가지 측면
    1) 불변적 브라만으로서의 참된 본질적 측면
    2) 감각과 변화의 세계에 대한 집착의 측면-개별적 자아로서의 지바(jiva)

    3. <베다>의 죽음관은 <기타>와 상이하다
    1) 리그베다에는 죽음과 관련된 부분이 적고, 죽음과 관련된 구절에서도 재생의 이미지는 나오지 않는다. 죽음은 더 나은 삶으로의 입구도 아니고 현세의 고난에 대한 보상도 아니다.
    2) 베다적 세계관에서는 현세적 삶을 즐기는 쾌락주의적 태도가 지배적이고 죽음의 연기와 수명의 연장을 추구한다.(유대교의 죽음관과 통한다.)
    3) 죽은 자의 흔적은 preta의 형태로 지속되고, 제의를 통해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
    4) 조상의 길과 신의 길이 있다.

    4. 베다에서 브라흐마나로: <사타파타 브라마나>에서는 반복되는 죽음이 등장하지만, 윤회와 재생에 대한 언급은 없다.
    1) <사타파타 브라마나>는 신들의 길은 아므리타의 길이고 조상들의 길은 피트르의 길로 구분한다.
    2) 신들은 자신을 희생물로 바침으로써 불멸을 얻고 죽음의 반복(삼사라)에서 벗어났다.
    3) <리그베다>의 푸루샤숙타는 푸루샤가 자신을 희생물로 바침으로써(죽음으로써) 우주를 창조하는 우주적 희생제의라는 베다적 비전을 보여주는데, 브라마나 시대가 되면 푸루샤가 아니라 프라자파티가 희생물이자 희생제의의 수혜자로 등장한다.
    4) 프라자파티는 올바른 희생제의로 그의 몸을 불멸로 만들었다.

    5. 여기까지 오면 반복되는 죽음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가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고, 까르마-삼사라(윤회) 복합체에 대한 이론이 등장한다.
    1) 지속적인 경험주체인 아트만을 필요로 한다.(270)
    2) 베다적 세계관과 우파니샤드를 연결하는 것은 베다에서의 아트만(생기, 생명력)이 아니라 희생제의이다.
    3) 베다 시대에 아리안족에게 우주는 항구적 희생제의였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변형되는 것이 우주의 본성으로 비춰졌다.
    4) <우파니샤드>에서 나타난 신성의 표현: 이 세계 전체는 진실로 먹이와 그 먹이를 먹는 자다.(희생제의와의 연결성을 보여준다)
    5) <리그베다>의 <푸루샤수크타>의 희생은 말제사로 재현되고, <찬도기야 우파니샤드>에서는 5단계의 희생 의례로 아이가 출생한다고 본다.(세계를 희생물로 해서 소마가 나오고→ 비→ 먹을 것(식물) → 정액 → 태아)

    6. 죽음의 대표자는 야마, 칼리여신, 시바신이 된다. 이 세 대표자는 모두 이중적인 측면을 갖는다. 이들에게는 이원성이 공존한다.
    1) 야카는 최초로 죽은 신이자 죽은 자를 인도하는 지배자
    2) 칼리여신은 무시무시한 파괴자(시간)이면서 영원한 평화
    3) 시바신은 창조자이면서 파괴자, 죽음의 신이자 생명의 수여자

    7. 모든 가능성이 상호배제됨 없이 공존한다는 힌두적 관념이 탄트라적 힌두교의 바탕에 있다.
    1) 탄트라는 절대적 초연함 유지하면서 제 현상에 참여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2) 최후의 안전한 죽음은 바라나시 순례다.(가장 간단한 해방.)

    8. 베다에서 우파니샤드로, 힌두교와 탄트라, 바라나시 순례까지의 과정은 모순이 아니라 확장을 보여준다고 저자는 해석한다. 그 예로 <카타 우파니샤드>의 나찌케타스가 야마에게 말한 세가지 소망을 든다.
    1) 두 개의 소망은 베다적 전통과 모순되지 않는다.(아버지와의 화해, 희생제의를 통한 죽음의 저지)
    2) 마지막 소망은 육신을 떠난 최종적 상태에 대한 질문이다.(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브라만이 아트만이다라는 것, 나찌케타스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3) 그러나 대부분의 힌두인들은 <우파니샤드>가 아니라 신화, 제의, 희생의 세계, 즉 변화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4)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출생과 죽음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9. 그런데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이 야마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어떻게 반복되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인가? 불교는 힌두교의 윤회, 반복되는 죽음의 의미를 교정하려는 시도였다.(이것은 힌두교의 nirvana과 불교의 nirvana의 차이-촛불이 꺼지지 않는 것과 촛불이 꺼지는 것-와 관련된다.)

    질문
    1. 김영샘이 베다에서 우파니샤드로, 그리고 힌두교로 전개되는 과정을 사문적 전통과 브라만 전통의 종합으로 본 것과 다르게 존 바우커는 희생제의를 통해 베다와 우파니샤드를 엮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주제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종교를 희생으로 보기 때문에 이런 점을 포착해낸 것일까요?
    2. 죽음으로부터의 탈출이 야마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어떻게 반복되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인가?(288) 이하에서 희생제의가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 2024-04-20 07:15

    지바jiva, 지바부타jiva-bhuta 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났는데, ‘현상에 의존하면서 형상에서 형상으로 전전하는 찰나적 아트만’(236) 이라고 하네요. ‘아트만의 일시적 투사’라고 하는데 또 이것이 윤회의 주체인 것처럼 말하기도 하네요.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관련 내용들을 모아봤습니다.

    그러나 자아가 덧없는 현상의 현현에 대한 욕망에 집착하는 한, 아트만은 ‘지바jiva’로서 스스로를 투사한다. 다시 말해 지바는 아트만의 일시적인 투사이다. 이런 지바가 감각과 현상의 세계에 깊이 얽히면 얽힐수록 그것은 아트만 안에 있는 자신의 원천과 자유를 망각한 채, 스스로를 점점 더 이 복잡하고 덧없는 인간 형식과 동일시하게 된다. 따라서 아트만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나는 불변적인 브라만으로서의 참된 본질적 측면이다. 다른 하나는 감각과 변화의 세계에 대한 집착의 측면이다.(235~236)
    아트만이 마야의 현상적 세계에 고착되어 있는 동안 그것은 ‘지바부타’, 즉 살아있는 자아로서 지속된다. 여기서 ‘지속’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지바는 그것이 경험 대상에 부착되어 있는 한, 필연적으로 부수히 많은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나거나 다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237)
    그런데 카르마의 효과는 마야의 세계(현상과 변화의 세계) 안에서 결과에 집착하는 지바로서의 자아에 대해서만 작동한다. 그럴 때 인간은 지바가 곧 참된 자아이며 그 자아는 카르마의 집행자이고 따라서 현세의 일과 그 결실에 대해서만 에너지를 집중해야 한다고 하는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된다.(239)
    존재의 지속과 유지는 일시적으로 투사되어 세계와 온갖 행위들에 집착하는 그런 지바로서의 아트만 때문이 아니라는 깨달음, 오히려 반대로 아트만이 곧 브라만이라는 깨달음, 그런 브라만이 이미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 안에 있다고 하는 그런 깨달음이다.(242)
    지바는 당신이 이미 변하지도 않고 변할 수도 없는 그런 존재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에 소멸된다.(242)
    힌두교는 지바가 하나의 출생에서 다른 출생으로 넘어가면서 죽음의 무한한 반복이 있을 따름이다.... 사람이 죽게 되면 지속적인 자아가 함께 없어진다고 하는 신앙은 슬픔이나 애도에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힌두인들의 관념 안에 반영되어 나타난다.(245)
    사자의 화장이 끝나면 이 영체에 지바가 부착되어 훗날 그 영혼이 브라만과 함께 하는 아트만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회복할 때까지 원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249)
    베다 문헌에는 브라만과 동일시되는 어떤 불멸의 아트만이 있고 그것이 시간 속에 투사되어 지바로서 부착되고 마야의 세계 안에서 겪는 모든 혼란들로부터 벗어나 브라만과의 합일을 회복할 때까지 수백만 번이나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그런 이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250)

  • 2024-04-20 08:52

    P. 237
    아트만이 마야의 현상적 세계에 고착되어 있는 동안 그것은 ‘지바부타’, 즉 살아있는 자아로서 지속된다. 여기서 ‘지속’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지바는 그것이 경험 대상에 부착되어 있는 한, 필연적으로 부수히 많은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나거나 다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 따라서 윤회(삼사라)의 부단한 흐름 속에서 지바는 다시 나타날 것이다. 전통적으로 자아는 8,400만 번이나 다시 태어난다고 말해져 왔다.

    힌두교에는 아트만이 있늗데, 지바라는 개념이 왜 필요했나요? 죽음 또는 윤회에 대해 아트만을 제외한 새로운 설명이 필요해서 였을까요?

  • 2024-04-20 09:40

    <힌두교와 죽음>

    1. 반복되는 죽음과 깨달음의 문제

    “이러한 관점에서 보건대 죽음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윤회의 기나긴 연속 안에서 죽음은 여러 번 일어날 것이다.
    이슬람교에서는 오직 하나의 최초의 죽음이 있을 뿐이며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 이에 비해 힌두교의 경우는 지바가 하나의 출생에서 다른 출생으로 넘어가면서 죽음의 무한한 반복이 있을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순간 혹은 죽음의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자의 영혼은 죽음의 순간에 실제로 자신을 도울 수 있고 혹은 도움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자아 또한 자신의 몸을 떠나 그 다음의 상태로 옮겨가고자 할 때에 다음 생에 태어날 형태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이는 그 자아가 가장 원하는 형태에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가능하다.”(245-246)

    “그러므로 인과와 변화와 재생의 무한한 순환 고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만 하는 모든 것은 바로 지금 우리의 있는 그대로를 발견하고 우리 자신이 되는 것, 즉 우리 자신 안에 이미 자아를 가능케 하는 참된 자아인 아트만으로서의 브라만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있다.”(242)

    245-246쪽에서
    죽음은 동일한 아트만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지바를 만난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관점을 취하는데요.
    어차피 무한에 가까운(8400만번) 반복이니까 내 앞에 주어진 다르마를 꾸준히 준수하자는 입장(라운드 로빈 방식?)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순간에서 다음 생을 좀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도움닫기를 하는 것은 필요하다는 입장(토너먼트 방식?)이 저는 약간 다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다가 또 깨달음의 문제라고 하니 여전히 좀 헷갈립니다.
    지루한 라운드로빈이나 토너먼트를 모두 거치지 않아도 이런 깨달음이 오는 순간, 해방에 이르는 방법 또한 있는 것인가요? 어제 김영선생님이 강의에서 말씀하신 사랑의 요가와 같은 것?

    2. 시간의 여신 칼리

    “칼리 여신이 이토록 잔인할 뿐만 아니라 모든 시간을 삼켜 버리는 무시 무시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칼리 여신을 숭배하 는 것일까? 대답은 이렇다. 즉 재생의 기나긴 반복 속의 어떤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시간의 과정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그것을 싫어하든지(시간이 우리를 죽음으로 서둘러 데려갈 때) 혹은 우리가 그것을 환영하든지 (시간이 얼마 동안 부재했던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에게 되돌려 줄 때) 간에, 양자의 경우 모두 우리는 정서적으로 시간과 연루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더 그것은 해방 즉 목샤에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인 거리 두기와 모순된다 그러므로 다니엘루가 지적하고 있듯이, 파괴의 힘인 칼리 여신은 이중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279쪽)

    여기서 “칼리여신은 유한한 존재의 관점에서 보건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무시무시한 신이다. 그래서 그녀는 ‘시간의 힘’으로 알려져 있다.“ 라고 하는데 ‘시간’, ‘거리두기’‘이중적 측면’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2024-04-20 11:23

    저는 질문은 아니고 저에게 무척 인상적이었던(다들 이 과정은 이미 끝내셨으리라 짐작됨) 두 구절을 옮겨 적어 봅니다.

    -베다 시대의 아리안족에게 우주는 항구적인 희생 제의로 여겨졌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존을 위해서는 다른 것을 먹어야만 한다는 기이한 숙명이 그들을 두려움과 경이감으로 엄습했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으로 변형되는 것이 우주의 본성으로 비쳤던 것이다. ‘산다는 것은 다른 생명을 먹어 치우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두 가지 요인의 근본적인 이원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 ‘먹이’와 ‘먹는자’가 그것이다. 모든 생물은 다른 생물을 먹는 자이고 동시에 다른 생물들의 먹이이기도 하다. 존재한다는 것은 먹고 또 먹히는 것을 의미한다.(『죽음의 의미』 271쪽, 다니엘루의 말)

    → 죽음을 아주 멀리서 바라보는 입장으로 단순하면서 명쾌합니다. 나의 죽음만, 조금 넓힌다면서 가족과 지인의 죽음만 생각하다가 이렇게 떨어져서 바라보니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죽여서 살았다면 나도 누군가를 위해 죽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래야 우주가 순탄하지 않을까? 하는.....

    -에고는 자신이 체험의 주체라며 끊임없이 나대곤 합니다. 신경과학자 다마지오는 에고가 이차적 관념이라고 주장하지요. ‘우리 몸이 특정 대상과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지식(『스피노자의 뇌』)이 에고라고 합니다. 몸은 ’내가‘ 뭘 했다고 내세우지 않는데, 몸이 한 일을 알고 있는 에고가 그 공을 가로챈다는 뜻입니다. 에고가 의식적으로 선택을 하기 전에 이미 선택이 내려졌다는 증거가 뇌에 나타난다고 하지요. 몸이 한 일을 제가 한 것처럼 속임으로써 에고는 진짜를 가립니다. 그렇다면 진짜는 몸일까요? 몸을 움직이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경험적 자아(내가 나라고 믿는 것)의 뒤에, 선험적 자아(불변의 참나)라고 할 만한 것이 과연 있을까요? 불교가 ’없다‘라는 답을 내릴 때, 힌두교는 아트만을 거론하며 ’있다‘라고 답합니다. 『기타』는 자신(ego)을 이기고 고요함에 이르러 추위와 더위와 즐거움과 괴로움, 칭송과 비난에도 한결같이 평온한 지고의 참나를 깨달아야 한다고 갈파합니다.(『바가와드 기타 강의』243-244쪽)

    → 그러니까 에고는 남의 공을 가로채서 자신을 세우고 있다는 말이 참 좋습니다. 다마지오가 신경과학자라고 하니 더 믿음이?(그의 책도 아직 하나도 못읽어 봤지만 여러 권 있더군요) 어쨌든 자꾸 이 말을 반복해서 새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2024-04-20 11:26

    <바가와드 기타 강의>로 읽은 힌두교에 비해 <세계 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에서 보는 힌두교는 너무 다양한 경전들과 개념들을 거의 쓰나미급을 쏟아 부어 따라가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 중간에 저자가 이 책 서론에서 견지한 관점을 다시 만나서 일단 멈추고 다시 읽었습니다. 250쪽에서 “베다 문헌에는 브라만과 동일시되는 어떤 불멸의 아트만이 있고 그것이 시간 속에 투사되어 지바로서 부착되고 마야의 세계 안에서 모든 혼란들로부터 벗어나 브라만과의 합일을 회복할 때까지 수백만 번이나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그런 이해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시 서론으로 가서 71쪽에 의하면 “고대 종교들은 이처럼 사자들을 지속적인 존재로 만드는 사자의 상태 혹은 위상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을 경험적 증거의 범위 내에서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은 제의를 통해 사자에 대한 기억을 더욱 강화시켰고 궁극적으로는 사자들이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존재 양식으로 전이되도록 했다. (...) 거기서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탐구하는 가장 오래된 종교적 시도들이 보상 관념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또한 죽음의 사실에 관한 현실주의적인 태도를 거절했다는 점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부분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250쪽 이후로 저자는 힌두교가 <기타> 이전의 경전들을 통해 죽음에 대해 271쪽에서 “죽음에 대한 베다적 이해와 후대의 이해 사이의 실제적인 연결 고리는 브라만과 동일시된 아트만에 서 기대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사실적인 측면과 이론적인 측면 모두에서 의례 및 희생 제의야말로 연결고리를 제공해 준다.”고 주장합니다. 84쪽의 “종교는 희생이라는 주제를 통해 무질서와 죽음의 본질을 탐구해 왔던 것이다.”고 주장하기도 하고요.
    이렇게 제가 이해한 식으로 짜깁기를 하다보니 저자는 힌두교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가장 많이 밝히는 듯한 인상까지 받게 되는데요. <바가와드 기타 강의> 36쪽 “사문 전통이 브라만 전통에 종교 혁명을 촉발했고, 그 혁명이 우파니샤드의 철학적 성찰로 마무리됩니다. 형식주의에 빠진 베다의 제사를 타파하고, 삶 자체 혹은 내면의 제사를 통해 참된 자아를 실현해야 한다고 우파니샤드는 역설합니다.” 라는 관점과 달리, <기타>이전의 경전에서는 죽음을 제례와 희생 제의 등을 통해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사실과 그 실재성을 부정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에 의해 부정되지도 않은 그런 인간의 삶 및 인간관계의 가치를 주장하는데 있다. (....) 죽음에 대한 가장 초기의 종교적 탐구는 죽음의 파멸적 성격과 무질서에, 나아가 그런 카오스와 적의 및 악의 집요한 의지에 직면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지에 훨씬 더 집중하고 있다.”(77쪽)
    이렇게 정리하다보니 죽음과 관련한 고대 종교의 형식이 담당했던 의미가 현대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의 차이가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되기도 합니다. 질문보다는 너무 방대해서 우짜든둥 제 식으로 정리한 소감을 적어보았습니다.

  • 2024-04-20 11:32

    다들 존 바우커로 메모를 작성하는 것 같아서(심지어 요요샘은 정리까지 해줌) 저는 바가와드 기타로 메모를 작성했습니다

    1. 어떻게 이 세속에서 행위하며 살아갈 것인가?

    1)삿트와, 라자스, 타마스 (p230, 231)

    기타가 젖줄을 대고 있다는 상키야 철학의 개념인 물질의 세가지 구나(속성)으로 까르마 요가를 해석하는 부분이 재밌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어떤 “기질(요소배분)에 따라” 공부를 하는 방법, 행동을 하는 방법이 다르다.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라자스적 앎이다. 그것을 꿰서 ‘일이관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삿트와적 앎이다. 자기가 아는 작은 지식으로 손쉽게, 재빠르게 일반화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타마스적 앎이다. 내 공부가 라자스적 앎과 사트와적 앎 사이를 진자추처럼 왕복달리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꾸 돌아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집착없이 행하는 것은 삿트와적 행위, 결과에 집착하면 라자스적 행위, 생각없이 저지르면 타마스적 행위이다. 우리 행위는 또 얼마나 라자스적 행위와 타마스적 행위 사이를 오가는가? (어떻게 보면 라자스적 행위= 타마스적 행위인 것 같기도 하다. 탐욕과 어리석음은 같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2)선악을 넘어 행위한다는 것은? (p251)

    장자도 스피노자도 니체도 “선악을 넘어”를 강조했다. 일단 스피노자와 니체의 맥락에서 선악을 넘는 것은 도덕적 규범에 따라 행위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나에게 좋은 것인지 (코나투스를 증대시킬 것인지)를 알고 행위하는 것이다. (이것이 ‘윤리’)
    장자의 맥락에서 선악을 넘는다는 것은,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그 모든 것이 ‘기화(氣化)’의 한 국면이라는 점에서 동등하다는, '존재론적 평등'에 대한 표명이며, 윤리적인 차원에서는, 따라서 “시비선악을 넘어 중도의 도를 지키면緣督以爲經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삶을 온전히 할 수 있"다는 양생의 문제가 되는 것이다.
    기타에서는? 일단 이원성은 어떤 환영이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보기 위해서는 그런 이원성의 색안경을 벗어야 한다. 혹은 좌뇌가 조작하는 영화관의 스크린 밖으로 나가야 한다. (갑자기, ‘트루먼 쇼’가 생각나는군^^) 그게 해탈이고, 그게 깨달음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몸이 있는 한 뇌가 있고 뇌가 있는 한 좌뇌의 이분법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세속에서 아르주나와 크리슈나는 선/악에 입각해서 전쟁을 치룰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김영 선생은 “어느 쪽도 옳지만은 않지만, 어느 쪽으로든 움직여야 하”는게 “이원성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라도 말을 한다. 그러면서 “행위의 요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내는 것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헷갈린다. 집착없이 행위하는 것과 이분법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어쨌든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이 같은 것인가? “참혹한 전쟁도 영원의 차원에서는 게임”이라는 이야기는 너무 초월적으로 들린다.

    2. 개종에의 유혹

    1) 신은 아무 신이나 그냥 가져다 써라
    나는 불교가 최고인 줄 알고 있었는데, 오호, 인도철학, 이거 매력 있네. 특히 인도=신의 나라=다신교적 관용성 =다신교만큼이나 영성 풍부...라는 얄팍한 상식이 깨진 것이 이번 김영선생 강좌와 책읽기의 가장 중요한 깨달음 중 하나였다.

    “신애의 요가에서 신은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부싯돌 같은 존재입니다...지혜에서 신을 말한다면, 내면의 목표지점을 겨냥하기 위해서일 뿐이지요, 해탈로 가는 길을 닦는데 신을 쓸지 말지는 각자의 선택입니다.”(212)

    2)아트만을 아트만(신)이라 부르면 그것은 더 이상 아트만일 수 없다

    아트만=실체=부처님이 깨부순 가장 중요한 지점...이라는 상식도 좀 깨졌다. 이게 김영선생의 해석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을 도라고 부르든, 진재라고 부르든 (장자의 도에 대한 후쿠나가 미츠지의 개념), 진아(대승불교)라고 부르든, 그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체라기 보다는 비전이고, 명상의 화두이다.

    “사실 아트만이 있고 없고는 별 상관 없습니다. 에고 너머의 경지를 차근차근 밟아 나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신과 마찬가지로 아트만도 명상주제일 수 있습니다. 수행과 명상에 대단히 유용한 도구인데 쓰지 않을 이유도 없고요, 신이나 아트만이 지칭하는 실체를 ‘신’, ‘아트만’으로 부르면, 그 실체는 더 이상 신이나 아트마일 수 없습니다.”(p256)

    3. 그런데 결론에서 저자가 기타를 이렇게 비판해버리면 너무 허무하지 않나?

    음, 쪼깨 당황스러웠음. 그러면 우리는 이 경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걸까요?

    4. 작은 질문 하나. 수련의 요가(p206)은 앞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 요가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가? 위상이 뭐지?

  • 2024-04-2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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