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탐구세미나]2회차 질문 여기에 올려주셔요~~

요요
2024-03-15 13:44
115

책 읽다 멈추고 자신도 모르게 검색에 푹빠지는 재미 아시지요?

저는 잘 모르는 예술작품 검색할 때가 젤로 즐겁더라고요.

11장 183쪽에 피디아스(B.C.491~430)와 빌헬름 렘부르크(1881~1919)가 나와서 찾아봤습니다.

피디아스는 파르테논 신전을 만든 건축가이고, 렘부르크는 독일의 조각가군요.

렘부르크 작품은 뭔가 슬픔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명상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인간의 유한성> 후반부는 전반부와 약간 분위기가 달라지는 느낌이 듭니다.

지난 시간에 읽은 부분에서 '죄책존재'가 이야기를 끌고가는 키워드였는데, 

이번에 읽는 뒷부분에서는 '믿음'이 등장하는군요. '시문학적 초월'도 중요한 이야기인 것 같고요.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그렇다 치고 프란츠 카프카를 읽으면서 내가 아는 그 카프카인가, 놀라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에 저자가 인류세 이야기를 해서 인간의 유한성과 더불어 다시 종말과 멸종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죽음'이 단지 '개체의 죽음'인 것만이 아니라 '종의 죽음'이기도 한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인간의 유한성>의 저자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인 '유한성'에 대해 세미나에서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궁금해집니다.

잊지 마시고 토요일 12시까지 질문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댓글 11
  • 2024-03-15 20:23

    125쪽 "왜 삶이 감옥인가? 삶이 유한하고 시간적인 한계성과 협소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카프가는 개별 존재를 넘어 세계의 무상함에 대한 사상으로 종합하고 있다. ...이제 카프카의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목적은 분명해진다. 그것은 생명의 나무 열매이다. ...낙원에의 믿음 때문에 무상한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는, '무상한 세계와 더불어 영원성 안으로 여행하기'를 '결심한' 자이다. 그럼에도 그는 이 세계의 무상함과 투쟁해야 한다고, 특히 가능하다면 '희망과 믿음보다 더 현실적인' 무기를 들고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무상한 삶에서 '희망과 믿음보다 더 현실적인' 무기가 그리스도교적 믿음인 생명의 나무 열매라는 것 같아요. 결국 그 믿음은 '파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신뢰, 믿음 자체, 정신적인 세계의 진리인 영원성을 말하는 것 같은데...136쪽 "이에 상응하는 카프카의 경우, 믿음의 목표는 단지 믿음이 향하는 목표점(끝)에 있는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이 삶의 기쁨 자체에 있다."라고 해서 무상함과 생명의 나무 열매, 삶의 기쁨 등이 연결되지 않는 것 같아 알쏭달쏭합니다.

    (뭐 사실 이 책 전체가 다 알쏭달쏭 하지만요..ㅎㅎㅎㅎ)

  • 2024-03-15 21:32

    끝까지 읽기는 했는데, 저자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알 듯 말 듯.. 왜 서문부터 '시문학'을 강조했는지 알 듯 말 듯 합니다. ^^;;

    1. 먼저 개념 질문이요. 7장 107페이지, '바르트와 하이데거는 모두 시원을- 지금은 근원이라고 말하지 않겠지만 -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시원'은 아주 짧게 번쩍이다 곧 사라졌다고 하는데요. 무슨 의미인지? 107페이지 말미에는 근원적인 것을 다시 획득하는 것을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고, 전적으로 새로운 것은 결코 또다시 약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데, 시원은 왜 사라졌고, 이제 믿음이나 사유를 통해서 새롭게 이해한 것은 약화되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가 뭔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 듯요.

    2. 12장 유한성에서 저자는 현대인들이 인간의 유한성-죽음에 대해 탐구하지 않고 '죽지 않는 것','더 오래 살 수 있는 삶' 에만 집중해 죽음과 멀어지고, 영성을 잃어버리고 대지를 대상화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죽음과 가능한 멀어지려 애쓰며 삶에 집착하는 것과 죽음과 삶이 순환의 길에 있음을 알고 삶에 충실하려 하는 거는 생활에 있어 어떤 차이로 드러날까요? 둘 다 '내 삶을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산다' 는 의미에서는 드러나는 차이는 그닥 크지 않을 거 같기도 합니다. 유병장수, 100세 시대를 외치는 시대입니다.개인적으로는 중년이 넘어가며 구매하는 영양제의 종류가 슬금슬금 늘어가는데요. 문득 이게 집착일지 주어진 삶을 잘 살겠다는 순수한 의지일지 헷갈리기도 합니다...

  • 2024-03-15 22:44

    178쪽: “인간은 대지, 다른 인간들과 관계하면서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자이다. 이러한 것들과 관계할 때 수반되는 기술적, 경제적 상황들이 매우 변화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대지의 보화들을 착취하고, 자신과 같은 인간들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방식으로,① 반복적으로 살아간다. (....) ‘인간은 변하지 않고 개선되지 않는다’ 는 말은, 그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그가 정신적-종교적으로 변화된 조건들 하에서도, 변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급진적인 변화를 수행하는 자 역시, ②반복적인 삶에 충실하게 참여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①번과 ②번의 반복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정확히 이해가 안 갑니다. 단어는 같지만 의미는 다른 것 같아서요. 아닌가요?

    198쪽: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생명 연장을 위한 목적으로 하는 신체 위생학은 과학과 경험에 의해 이루어진 강력한 시도이다. 그러나 이것에 의해 시문학, 특히 종교적인 시문학에로의 입구는 닫히게 된다. 신체 위생학적인 노력과 연관된 책략들과 기술들이, 비록 정신적인 것 안에 근거한다고 하더라도, 그때마저도 ‘높임’과 초월에의 욕구는 거부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도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기를 시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제 유일한 관심사는 더 많은 편안함을 제공하는 유기체들의 건강에 놓여있을 뿐이다.”
    : 이 부분을 읽으면서 존엄사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좀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동안 지지극한 고통이나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불치병에 대해서는 존엄사도 가능하지 않나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렇게 용인하는 이면에 “아무도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기”를 시도하지도 않고 “더 많은 편안함을 제공” 받고 싶은 욕망이 잠재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12장의 유한성 부분에서 “삶에 대한 긍정은 부득이하게 양가성을 지닌다.(.....) 긍정적인 불만족은 유한한 생명력이라는 우연성을 지닌 생명체에 원망을 품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그들의 생명력을 행운으로 인지하고, 삶의 시간을 풍요롭게 만들도록 미래를 열어젖힌다.”(202) 죽음에 대하는 사유를 좀 더 풍요롭게 하는 책읽기였습니다^^

  • 2024-03-16 07:54

    202쪽 나는 삶에 속하는 불만족을 긍정적인 불만족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긍정적인 불만족은 유한한 생명력이라는 우연성을 지닌 생명체에게 원망을 품지 않고, 오히려 시간 안에 있는 그들의 생명력을 행운으로 인지하고, 삶의 시간을 풍요롭게 만들도록 미래를 열어젖힌다. 물론 긍정적 불만족은 자체 안에서 위기를 발견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 역시 삶의 풍요로움으로 만들어야 한다.
    --- 신과 함께, 신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이야기? 약간 계몽주의적인 느낌으로 오는 것은 왜일까요?

    204-205쪽 죽음과 삶의 문제는 진리의 문제, 즉 감정의 진리의 문제이다. 종교들이 지성과 이성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종교들이 본래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 세계의 실재적 의미와, 그 안에 내지한 정신적인 힘들이 아니라, 감정과 정서의 세계이다.... 이때 그를 지배하는 것은 죽음의 감정과 삶의 감정이다. 기분들은 곧잘 삶의 상황들과 시간들을 지배한다. 반면에 대지와 세계의 삶을 지속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감정들이다. 삶의 신뢰, 삶의 만족, 삶의 성취-이러한 것은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종교들이 지배하려고 하는 것은 기분이 아니라 감정이다. 왜냐하면 감정들은 시간적 존재에 강한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죽음의 감정과 삶의 감정은, 인간이 잘 감지하지 못하는 시간의 감정들이다. 그러나 감정들은 인간에게 말을 건네고, 형태를 제공한다. 감정들을 통해 인간은 삶의 유한성에 대하여 직감하게 되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맥박에 대하여 관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감정들은 삶의 시공간 전체와 관여하는 것이다.
    --- 여기서 말하는 감정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시문학적인 태도를 말하고 싶은 것일까?

  • 2024-03-16 09:46

    207쪽; 인간은 자궁 안에 있는 태아를 미리 볼 수 있다면, 그 아이가 틴생의 불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삶으로서의 입구는 매우 좁고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삶의 불안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삶의 <중간에> 있는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이다.죽음으로의 입구가 매우 좁고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죽음에의 불안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왜 그는 죽음존재 앞에서 불안을 가져야 하는가? 유한한 삶을 긍정하는 자에게 죽음존재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들의 암시가 성공했기 때문인가?

    여기서 저자는 탄생과정과 삶을 따로 보고 있고, 죽음과정과 죽음존재를 따로 보고 있다. 그것이 새로웠다. 저자는 탄생이 삶의 불안이 아니듯이 죽음이 죽음존재의 불안일 필요가 있냐고 묻고 있다. 생각해보니 나는 죽음을, 죽음과정과 그 이후를 그냥 뭉뚱그려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죽음의 과정이 몹시 괴로울 것 같고 그 이후도 그리 긍정적인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죽음이후의 세계가 종교들의 암시로 지옥 개념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일지, 문화적으로 귀신이나 악귀나 이런 존재들이 판치는 세상으로 인지하기도 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죽음 이후에 대해서 막연히 긍정적인 상상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번 고미숙 선생님의 줌 수업에서 환생에 대해서 들으니 조금의 틈이 생긴 것도 같다. 사실 환생은 나에게 그저 단군신화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고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뭔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까지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고통을 거쳐 죽음에 이르고 그 이후는 그냥 흙이되고 자연이 되어 흩어진다, 정신도 나의 정신은 남아있을 리 없다, 이런 생각이었는데 이 구절을 읽으면서는 죽음 존재는 '모르는 일' 이므로 함부로 단정지을 수 없다, 로 생각되어진다. 언젠가는 고선생님처럼 죽음이나 환생이 두려움이 없거나 비젼이 되는 날이 올까? 여전히 죽음으로의 입구는 두렵다. 그러나 죽음 이후는 꼭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알지 못하는 세계이므로... 어쩌면 엄청 좋은 세상일지도... 죽음과정만 잘 견디면 된다! 뭐 이런 생각이다. ㅎ ㅎ 여러분의 생각도 궁금합니다.

  • 2024-03-16 10:25

    일찍 나가야 해서리...

    1. 플라톤의 철학과 바르트의 신학이, 모두 포에지일까요? 혹은 이것을 포에지적 활동으로 부를 때 어떤 유용성이 있는 것일까요?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삶과 죽음의 의미를 묻고 찾아가는 모든 정신적 활동이 포에지이다, 라는 저자의 규정이, 지난주에는 그럴듯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주는 오잉? 리얼리? 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시인을 싫어하고 예술 활동을 낮은 정신활동으로 생각했던 플라톤을 읽을 때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의 철학, 이데아론도 포에지라.... 갑자기 개념이 너무 광범위해져서 유효성이 없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다른 걸 동일한 구도 안에서 함께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번과 같은 맥락입니다만, 죽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인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 (‘유동적 지성’ 혹은 ‘초월성’)은 역사적으로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데 여기서는 그리스 신화부터 플라톤의 이데아론, 바르트의 신학, 하이데거의 철학을 횡단하면서, 차이보다는 어떤 동일한 구조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자는 왜 그랬을까요? 혹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1번의 질문을 스스로 뒤집는 중^^)
    그 동일한 것은 아마 ‘믿음’ 같습니다. 그러니까 레싱의 반지에서 보이는 계몽주의적 이성을 넘어서 ‘믿음’의 영역으로 갈 것! (“믿는 자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가지고 ‘은폐된 시문학’이 시문학적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또한 믿음 속에서 그는 결코 인간이 창작한 것과 마주치지 않고, 오히려 그는 전적으로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p186)
    그런데 이 ‘믿음’을 종교가 없는 저도 이해할 수 있는 세속적 언어로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유일신적인 ‘믿음’과 계몽주의 이래의 ‘이성’(=과학), 이 둘을 넘어서는 개념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니체의 ‘위버멘쉬’...이럴 수는 없는 거잖아요?). 문탁도 ‘영성’이라는 단어를 써보려고 노력하는데, 아직 구체적으로 탐구된 것은 없구... ㅠ
    다만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일리치가 해석한 사마리안의 에피소드. 우리가 낯선 자를 돕는 것은 어쩌면 이성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 아닐까? 낯선 타인을 환대하고 신뢰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에 대한 신뢰”(181)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3. 그래서 바르트의 신학이 중요해 보입니다

    하이데거의 철학과 바르트의 신학이 이 책의 중요한 두 가지 거점처럼 보입니다. 하이데거도 모르는데 바르트라니.. (이런 걸 첩첩산중이라고 하는구나...) 엄청 번역된 바르트의 책 소개도 대충 훑어보고, 나무위키 등의 바르트 소개도 좀 봤습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이성을 가진 인간의 인류학 정도로 신학을 재해석^^)에 완전 빠져있다가 전쟁과 나치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신학을 완전히 재구성했다고 하더라구요. “하느님이 말씀하신다”, 인간에서 하느님으로 관점의 이동! 인간은 이성으로 알지 못합니다. 다만 믿을 뿐!!
    그리고 또 하나는 부활에 대한 사유라고 합니다. 인간은 죽어 육신은 썩지만, 영혼은 천국에 가서 영원히 그곳에 거한다, 는 ‘영혼 불멸성’을 부정하고, ‘완전한 죽음’, 육신과 영혼의 ‘완전한 죽음’을 주장했대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듯이 우리는 몸과 영혼이 부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바르트는 “성공적인 종말론자들은 ‘반복’을 강조한다”고 표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삶의 무상함, 노화, 노쇠함, 죽음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있”(184쪽)지만) 텍스트 전체가 넘나! 신학적이라는 생각은 떨쳐버리기 힘듭니다. ㅎㅎ

    4. 우리의 세미나, 우리의 읽고 쓰기도 공동창작자로서의 우리의 시문학적 활동이 될 수 있을까요? (p183)

    존재자에서 존재로! 혹은 “인간과 대지의 생명의 연대성”을 강화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더 시문학적인 창작의 욕망을 불태워야 합니다. 그런데 쏘우 왓? 나는 예술젬병인디... 하지만 저자는 예술이란 음악, 미술, 조각 같은 장르가 아니라 “익숙한 것이나 진부한 것과 같은 저급한 현실성을 파괴하고, 공동체적이고 유한한 삶에 도움이 되는 고귀한 현실성을 건립하는 데 있다”라고 말합니다. 또한 “예술적 형태로 작품을 감상하려는 욕구도 일종의 창작에의 욕구”라고 하면서, 그러한 감상자 역시 “이 세계보다 더 높은 현실성을 지닌 세계를 창작하려는 또 다른 ‘공동창작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의 공부도 그런 시문학적 활동일까요? 정말로요? (자신 없음...ㅎ )

    5. 200쪽의 유한성에 대립되는 것은 무한성이 아니라 또 다른 유한성이다. 죽음이 유한성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유한성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미 너무 많이 써서...생략함

  • 2024-03-16 10:42

    1. 바르트도 카프카도 무상한 이 세계에 대항하여 항존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서 항존적인 것은 모두 다르게 묘사됩니다.

    바르트와 바울의 경우, 죽음은 생명의 적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바르트는 "희망하는 자로서 우리는 이미 지금 생명의 존재들인 것이다"라는 믿음에 대한 시문학적 표현을 통해 죽음의 세계인 이 세계를 죄의 세계이자 구원의 세계로 바꾸어냅니다.(119쪽)
    카프카는 "신뢰와 믿음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아직 들어보지 못한 항존적인 존재이지만, 이것은 결코 인간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며, 이 세계의 밖에 이미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126쪽)라고 말함으로써 바울과 바르트를 넘어섭니다. 제 생각에는 카프카는 바르트의 시문학을 더 극단으로 밀여붙였다고 말해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플라톤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철학이 숙명적으로 항존적인 것(이데아?)에 우월권을 부여한 것은 삶에 대한 거역을 뜻하며, 이런 점은 현대철학이 이성을 선택한 것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다"(156~157쪽)고요. 저자는 그리스철학과 현대철학 모두 삶에 적대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플라톤 역시 인간 안에 있는 영혼을 통해 삶에 대한 적대성에서 빠져나가는 시문학을 창조합니다. 물론 플라톤은 문학적 시인이 아니라 철학적 시인으로서 이 작업을 해내는 것이지요.

    믿음의 시문학과 사유의 시문학, 다시 말해 바울도 바르트도 하이데거도 플라톤도 '시문학'의 형태로 인간의 유한성 너머, 실재적인 것 이상의 초월을 향한다고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정 문제는 '시문학적 독해'가 되는 것같습니다. 바울과 바르트와 하이데거와 플라톤이 시문학을 지향하며 쓴 것은 아닐테니까요.

    2. 저자의 불교이해는 참 오묘합니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혹시 오리엔탈리즘적 독해는 아닐까요?

    "불교도에게 늙음이 고통인 이유는 늙음이 삶의 무상함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도의 경우, 고통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것은 살아있는 육체성을 소멸시키는 것이다."(134쪽)
    "불교적인 깨달음을 '내재적 초월'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믿음적인(초월적인) 초월과 비교될 수 없다."(154쪽 각주1)

  • 2024-03-16 11:29

    뭘 알아야 질문을 하는데, 아는게 없으니 도통 질문도 어렵습니다.
    삶에 대해 아는 것도 어렵지만 나이듦, 죽음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길이 첫 걸음부터 이리 녹록치 않을 줄이야...
    그래도 아니한 것보다 나을 거라는 믿음!(이번 내용에서 꽤 중요하게 등장하는^^;)을 가져봅니다.

    p96. '불가능성'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반면에 세계의 불가능성이란 표현은 전혀 다른 의마를 지닌다. 즉 그 세계는 신으로 부터 아무런 실재성이나 진리성을 허가받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무'와 '무화'의 의미는 모든 <도구적 존재자>와 <사물적 존재자>가 중요성을 상실하고, 무의미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의하면 바로 이때,
    즉 세계의 무 앞에서 실존할 때, <세게-내-존재 자체>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p200. 필연적으로 비밀로 남아 있는 유한한 삶의 비밀은, 순환하는 삶의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삶에게만 나타난다. 삶의 비밀과 가까워지는 것은, 가까운 타자와, 가까운 죽음과 가까워지는 일이며, 종교적인 인간의 경우 신과 가까워지는 일이다. 가까운 타자는 누군가로 하여금 유한성을 경험하게 한다. .......타자에 대한 '알 수 없음'은 자신에게 고유한 '알 수 없음'을 매개해 준다. 죽음이 비로소 삶의 유한성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항상 살아있는 타자가 가르쳐 주는 것이다. 타자와 분리된 삶은 동시에 타자와 유한성을 공유하는 삶이다.
    서술을 통해서는 알 듯 말 듯 합니다. 타자를 통해 삶의 비밀을 알아간다는 예시가 있으면 훨씬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타자

  • 2024-03-16 11:48

    184쪽
    "삶은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고, 자손의 번식에서 정점에 이르고, 죽음과 더불어 끝난다..."
    190~191쪽
    "삶의 비밀은 인간이 대지에 의존한다는 것, 더 나아가 우주적 사건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중략) 오히려 확실한 것은 삶과 시-공간은 모두 계속되고, 계속 팽창한다는 점이다. 비록 인간이 알지 못하더라도, 그는 자신의 후손을 통해 계속 살아간다. 이와 같이 인간의 삶은 계속되고 팽창하는 삶 안에서 완성된다..."
    207쪽~208쪽
    삶은 종말을 강요하며, 아무리 귀중한 시간도 계속 삶으로 채워지지는 않는다. 마침내 다가오는 죽음은 삶을 살아온 인간으로부터 모든 시간을, 즉 살아온 삶과 살아가야 할 삶의 합일의 수간을, 즉 삶의 과거와 미래의 합일의 순간을 빼앗아 간다. 죽음은 완전하게 자기가 없어지는 일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은, 시간과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죽음과 삶의 드라마는 삶 안에서 수행되는 것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은 무엇인가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우주의 한 생명체로서의 무한성과(유전적으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 인간 개개인의 유한성(육신의 죽음. 현대 의학이 진단하는)은 어떻게 연결시켜 사고해야되는지, 이는 개개인이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어때야 되는지를 생각할 때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요. 생각이 잘 정리가 안돼서 그냥 질문을 던져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인간이 시간과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자신과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말도 이해 안되구요. 해석을 부탁드려요~

    7,8,9장은 이 책만 읽어서는 도무지 이해와 공감이 안되더군요. (다른 자료를 찾아 볼 노력은 못하겠구요 ㅎㅎ)

  • 2024-03-16 12:19

    1/ 칼 바르트가 신앙을 이야기했다면, 카프카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요 ? 근자감처럼 느껴지는 이 믿음은 어떤 거라고 저자가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그냥 어떤 믿음과 다른 건지,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떤 믿음을 이야기하는 건지.. 또 잘 모르겠습니다.

    2/ 10 장 신과 함께- 신없이 에서 p154 각주
    불교적인 깨달음을 <내재적인 초월> 이라고 말한다면, / 그것은 믿음적인(초월적인) 초월과 비교될 수 없다.
    아닌 이건 무슨 말인가요 ?

    3/ 신 - 믿음 - 영혼으로 이어져서 p172 철학자의 형이상학은 사유를 위한 사유,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는 자로, 신을 이성으로 규정하고 이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규정한다고,
    ~ 오성과 이성이 감각적 실재성을 향하는 한, 초-하늘적인 장소는 유-토피아적인 장소 존재하지 않는 장소가 된다. 그러나 단호하고 열광적인 사유 안에서 시적 사유를 구성하는 힘이 인식되다면 그 때 초-하늘적 인 장소는 완성된 장소 즉 철학적-시문학적으로 완성된 장소가 된다. ~ 무신론자는 시문학적인 힘에 근거한 자족적인 정신적 상태를 이해할 능력이 전혀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 아니 철학자들은 완성된 시문학을 하는 자라는 이야기인 것 같은데,,, 이해가 어렵습니다.

    4/ 신-믿음-영혼-신뢰와 긍정으로 이어지면서,
    p182 유한한 삶은 그 삶이 부정되고 영원한 삶 안으로 지양될 때 긍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
    p183 저 너머를 열망하는 시문학적인 초월의 형태들은 결국 삶이 살아볼 만하다고 긍정하는 것이다.
    p 204 죽음 없이 삶이 존재하지 않듯이 죽음에 대한 진정한 감정이 없다면 삶에 대한 진정한 감정도 없다...
    : p201 유한한 원의 운동성 안에서 탄생과 살아감, 후손의 생산과 죽음이 순환되는 삶이라고 이걸 부활이라고도 본다는 건지....
    어쨌든 삶이라는 단어가 live 생기있음, 살아있음, 숨을 쉬다의 명사형이라면 이생에서의 삶이라고 보고
    또 이것을 무한성 유한성이라는 것을 가두지 말고, 또 저생에서의 삶이라고 보면 안되는 것인지.
    아니 저자는 그것까지 말하는 것인지,,,,,
    신 - 믿음 - 영혼 등 만져지지 않는 것들을 시문학으로 믿어 오게했다는 건지... 하여간 이러한 것들을 근거로
    이야기하니 확 동의가 되지 않는 것들이라 뜬구름 잡듯이 어렴풋하기만 합니다....

    벌써 두 번째 질문이 늦어져 죄송합니다.
    꼭 시간 엄수할게요 !!

  • 2024-03-16 12:34

    지금까지 올라온 질문모음입니다. 새로운 질문이 있는 분들은 추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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