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탐구세미나]4회차 질문 올려주셔요~

요요
2024-03-29 16:23
91

지오토 <최후의 심판>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이미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과연 우리는 세례를 받고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스런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생명을 얻어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예전의 우리는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물든 육체는 죽어버리고 이제는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죄에서 해방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다시는 죽는 일이없어 죽음이 다시는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느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죽어서 죄의 권세를 벗어나 그와 함께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시오."(로마서 6:3~11)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성서에 기록된 대로 첫 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가 되었지만 나중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영적인 것이 왔습니다. 첫째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진 땅의 존재이지만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흙의 인간들은 흙으로 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의 인간들은 하늘에 속한 그분과 같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이 말을 잘 들어두십시오. 살과 피는 하느님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썩어 없어질 것은 불멸의 것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마자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빡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갔느냐?' 한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고린토 전서 15:42~55)

 

바울의 서신에는 힘이 넘치는군요! 죽음에 대한 승리를 외치는 시문학적인 표현이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신약성서에 표현된 죽음관은 확실히 지난주에 읽은 유대교의 죽음관과는 다릅니다.

육체적인 몸과 영적인 몸이 등장하는 대목에서는 그리스철학의 영향력이 강하게 감지됩니다.

저는 이슬람교의 죽음관을 읽으면서 <인간의 유한성>에서의 이슬람교의 서술과 비교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일산에 오면서 그 책을 챙길 생각을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모두 <인간의 유한성>의 바울편, 이슬람편과 같이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충분히 세속화된 사회에서 종교를 가진 사람과 갖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을 생각할 때 어떤 유의미한 차이가 있기는 한 것일까?

세 종교의 서로 다른 죽음관이 믿는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어떤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는 한 것인지도 궁금하군요.

 

질문은 내일 12시까지 올려주셔요~~

 

댓글 9
  • 2024-03-29 23:05

    1. 저자는 '예수의 가르침이 유대교의 전통에서 확실히 벗어난 것으로 자신의 모든 가르침과 행동을 자기 생명의 원천이자 방향인 하느님과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제사장이나 랍비가 해석한 토라의 중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150쪽)는 점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의 예루살렘행은 '회피하지 않는 죽음이라는 주제를 부각시킨다'(151쪽)고 합니다. 또 그런 이유로 '기독교의 죽음이해는 십자가에서 못박힘에서가 아니라 성만찬에서 시작된다'(151쪽)고 하는군요.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과 같은 예수의 죽음의 의미는 성만찬에서 시작된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성만찬에 대해서는 기독교 내부에서도 다양한 해석이 있다고 하는데요. 그 예로 제시된 것이 트리엔트 공의회의 법규(1753), 리마문서(1982), 성공회의 답변입니다(153쪽~155쪽). 성만찬은 기독교 의례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 같습니다. 이 각각의 해석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어떤 공통점을 갖는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기독교 문해력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성만찬을 어떻게 보느냐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도 같이 이야기해보았으면 합니다.

    2. 기독교의 전형적인 속죄이론은 예수의 죽음과 희생으로, 속죄가 이루어지고, 하느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졌으며, 만인이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와 다른 것으로 아벨라르의 관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벨라르의 관점은 십자가가 죽도록 아픈 환자에 대한 불가피한 수술처럼 필수적인 행위는 아니었다는 반대를 면할 수 없었다. 즉 십자가는 치유가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환자의 동의를 얻고 있었다. 대조적으로, 대신해서 받는 속죄의 이론들은 우리를 지배하는 악의 세력들에 대한 승리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한다고 본다."(172쪽) 이 두 입장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3. 이 책에서 소개된 이슬람교의 죽음관은 아주 소박하고 단순한 것 같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집행유예기간이고, 죽음은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통과의례의 기간이고, 최후의 심판에서 하느님의 저울은 공평하지만 신의 뜻에 따라 자비를 얻을 수도 있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의 신은 공평무사하며, 자비로운 신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런데 저자는 무슬림의 경우 꾸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며, 꾸란의 낙원의 묘사를 은유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합니다.(205쪽) 그 근거로 압드 알카디 아수피의 주장(206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장에서 드러나는 바는 오히려 교육받은 무슬림들이 이슬람교의 지혜의 책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반례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기독교의 성직자나 신학자도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자는 무슬림에게 있어서 낙원과 불지옥은 개념적 삽화가 아니고 종말론적으로 증명될 실재(219쪽)라고 거듭 강조하는데,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저는 그것이 이슬람의 역사적 정치적 맥락과 무관하지 않고, 오늘날 이슬람 신학에서 근본주의적 해석이 부각되기 때문은 아닐까하는 의문이 드는데, 이 점과 관련하여 저자는 전혀 언급이 없군요.

    4. 기독교의 죽음관에서 희생이 중요한 것과 달리 이슬람의 죽음관에서는 희생의 주제가 감소된다(219)고 저자는 말합니다. 기독교의 죽음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해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독교의 죽음의 주제야말로 희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경우 희생은 예수의 희생이지 기독교 신자들의 희생은 아닙니다. 물론 예수처럼 살자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긴 합니다. 이슬람의 경우 '희사'가 종교적 의무로 요구되며, '산 제사'(220쪽)의 주제도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희생물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희생'이 주제가 되고 있는 것 아닐까요? (나카자와 신이치의 <녹색자본론>에서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이 자본의 이윤증식을 정당화하는 반면 이슬람은 이자를 엄금함으로써 녹색자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이자없는 사회에 대한 상상이 이슬람의 신학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지요.)

  • 2024-03-29 23:57

    기독교와 죽음]
    예수는 자신을 'the son of man' 이라는 관용어로 가리켰다고 합니다.
    전능한 신의 아들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 속에서 하느님의 활동을 드러냄을 강조한 것이라 하는데요, (p145)
    왜? 라는 의문이 먼저 듭니다. 사람들을 따르게 하려면 신의 권능을 보여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지 않은가요?
    (제가 신자가 아니라 조심스럽지만, 교회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강조하는 건 뭐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으로서 예수는 죽음에 종속 됩니다. 그리고 이 죽음에 이은 부활의 목격으로 예수의 죽음이 인류를 구원하는 '속죄'로 발전된 거 같습니다.
    이 '속죄'의 해석이 어렵습니다. 저자도 여러 이론이 있다고만 합니다.
    예수의 속죄로 인해 신과 죄많은 인간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속죄로 이루어진 하느님과의 화해, 구원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믿는 자에게 내려지는 영혼의 '영생'을 뜻하는 건가요?
    마지막 페이지(P178) 에 영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인간 육체의 소멸 이후 영혼이 남아 영원히 존재한다는 세계관은
    현재 살아있는 삶의 가치를 위축시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과의 화해 이후에도 세상은 왜 여전히 혼란스러운가? 라는 질문에 사후에 영생이 있다(?)라는 답변으로 퉁칠 수 있는건지..
    그래서인지 P160에서 인용한 존 버너비의 질문 '속죄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세상은 아직도 화해되기를 기다리지 않는가?'
    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문구 '유일한 대답은 속죄의 결말은 성육신의 결말이라는 것이다.'는 뭔 말인지 모르겠네요..

    [이슬람교와 죽음]
    이 책의 저자도 이슬람교에 대해서는 '박하다'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슬람교는 다른 종교와는 다르게 꾸란의 언어를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고 있다고 강조하는데서 이슬람교에 대한 오랜 선입견 - '꾸란 아니면 칼' 이 연상됩니다.
    종교 근본주의의 문제는 이슬람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고,
    카렌 암스트롱의 책을 보면 이슬람교가 극단으로 변질된 건 현대의 일이고, 원래 평등과 친절, 관용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했었구요.
    죽음에 관해 기독교와 크게 차이나는 점이 '속죄' 라는 게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명확한 가르침이지 않나 싶습니다. 누군가 내 죄를 대속해 주는 건 기대하지 말고, 살아서 신의 말씀에 따라 사람들에게 관용과 친절을 베풀면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 천국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면,
    현세에는 비록 보상이 없더라도 사후의 보상을 믿고 현세를 좀 더 착하게 살 수 있는 거라는 점에서요. ^^

  • 2024-03-30 08:24

    이슬람교와 죽음 파트를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김수현쌤이 언급하신 것처럼, 이슬람에서는 ‘속죄’를 통한 구원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개인의 일생이라는유예기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가 두 천사에게 감시되고(186)
    죽음 후 무덤 속에 이르면 또다른 두 천사(문카르와 나키르)가 나타나서 질문을 던지고(184)
    그 심판에 의해 낙원이나 지옥으로 분리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슬람에서는 현재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가 정말 중요하고 자신의 삶에 부끄러움이 없다면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한 사람의 일생이 두 천사에 의해 기록된다는 부분을 읽고 깜짝 놀라긴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CCTV가 보편화되고 난 후 태어난 세대들이 그 이전 세대들에 비해 공중도덕을 더 잘 지킨다
    는 말이 생각나기도 했는데, 이려면 평생 모든 순간을 자기 검열에 시달리면서 사는 것인가? 싶고요. ^^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서(218쪽)

    “일반적으로 무슬림의 죽음 이해는 이 책의 전반부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설명들과 많은 부분에서 모순된다. 이슬람교는 확실히 ‘중간적인 임계성(liminality)의 중요성을 예시한다.
    그러나 이슬람교는 중간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최종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돕기 위해 의례들을 배풀지 않는다. 사실 정확히 그 반대다. 그런 어떠한 형태의 간섭도 하느님의 최종 결정에 거스르는 것이 될 것이다.”

    여기서 중간적인 ‘임계성의 중요성’으로 표현한 부분이 살짝 모호한데요,
    이슬람에서는 죽음 이후 전이의례를 하지 않는데, 왜 임계성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일까요.

  • 2024-03-30 10:16

    「이슬람교와 죽음」 까지 따라오면서 계속 서문에서 저자의 문제의식이었던 종교가 탐구한 죽음은 사후의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가능성을 실현 가능하게 만드는 ‘삶을 위한 삶의 양도’”로서의 희생을 탐구 했다는 것을 밝히겠다는 것을 계속 잊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읽었는데요. 이슬람교 부분에 와서 결론 부분에 이르러서 자신의 주장과 들어맞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힙니다. 그 근거로 유대교나 기독교에 비해 “후기의 종교 전통 형식” 이어서 “유대교와 기독교인들이 천국과 지옥에 대한 특수한 심상들을 그 발생과 쇠퇴를 추적할 수 있는 개념적 삽화들로 여길 수 있는 반면, 무슬림들은 (....)낙원과 불지옥의 묘사들은 장소이고 상황이며, 종말론적으로 증명될 실재다.”(219)
    그 결과로 “이슬람교는 죽음 이후 인간 생명의 최종적 결과를 나타내는 문자적이고 틀림이 없는 하나의 그림을 믿는다.”(222)고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이 맥락으로 보면 저자는 이슬람교는 태생부터 꾸란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따르면서 사후의 보상을 믿고 현재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종교라고 해석하고 있는 것처럼 읽힙니다. “이슬람교는 서구의 종교사와 종교 전통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형식화된 죽음 이해를 대변한다.”(220)고도 한 부분을 보면 현재 이슬람 세계가 벌이는 테러 등등의 대응이 이슬람교 태생에서부터 내재되어 있는 형식이라고 저자가 주장하고 있다고 읽힙니다. 저자 주장의 맥락을 정확하게 따라가고 있는지 헷갈려서 확인 차 올립니다.

    • 2024-03-30 10:39

      질문이 비슷합니다.
      p220~p222 의 마무리는 저자의 생각인 거죠 ?
      잘 이해를 못한 건지, p221의 '가장 자애롭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이름으로 경계하라'의 결론이 이슬람교는 꾸란의 언어를 잠정적인, 대략적인, 혹은 수정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 2024-03-30 10:21

    1. 종교의 본질이 희생과 우정이라는 저자의 메시지는 기독교의 죽음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질문 아님)

    희생과 우정이 종교의 본질이라는 저자의 입장은, <기독교와 죽음>에서는 너무 명약관화하다. 혹은 이 부분에서만 저자의 입장은 근거를 갖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자의 이야기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이야기를 섞어 요약해보자.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러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아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태복음 26장 26절)

    예수, 그는 인간인 상태로 (신약에는 ‘인자’라는 호칭이 86번 나온다) 하느님이나 가질 수 있는 치유의 권능 등을 가졌고, 유대교와 달리 성전(폐쇄적인 종파 혹은 민족) 밖에서까지 그 권능을 펼쳤으며 바로 그 때문에 (유일하게 하느님과의 계약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은 유대교 랍비들의 권위에 도전) 죽음을 면할 수 없었다.

    죽음을 앞두고 그는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했고 (“이것은 나의 몸이고 피이니라”) 게세마니 동산에 가서 최후의 기도(“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하소서, 하지만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하소서”)를 하고, 유다의 배신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십자가형으로 죽고, 3일만에 부활한다.

    핵심은 성만찬과 게세마니에서의 기도이다. 성만찬은 (다양한 해석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계”시키며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수단이며, 우리는 이미 세계를 통해 그 죽음에 동참했다”(p154)는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아담의 배신에 대한 속죄를 아담의 아들인, 인간(피조물)인 자신이 대속하면서 하느님과의 화해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독교 죽음 이해의 뿌리와 토대가 있다. 그것은 부활이라는 보상을 약속함으로써 죽음의 실제적 현실과 고통을 제거하지 않는다”(p155) 메세지는 죽음의 고난을 통해서만 하느님으로부터의 소외가 제거된다는 것이다. (벤야민적 의미에서의 '메시아적 시간')

    2. 그러나 예수의 회개가 진정 새로운 점은 무엇일까? (이것에 대해 토론해 보고 싶습니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저자의 질문, “하느님과의 화해가 이미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예수의 죽음은 생명에 무엇을 보태는가”(p162) 였다. 즉, “예수의 죽음은 용서와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주었는데, 사실 죽음 이전에도 이미 하느님에게 회개와 화개의 주제는 이미 존재해왔다면, 예수의 죽음과 용서, 구원이라는 주제가 진정으로 새로운 점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을 “화해를 보편화한다는 것”(162)이라고 이야기한다. 유대교에서는 성전 안에서의 희생제의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 예수가 살아있을 때는 예수와 만난 일부의 사람들에게 이루어졌던 것들이, 이제 예수의 죽음을 통해 모두의 구원으로 이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해의 객관적 뜻은 “예수는 특정한 개인들이 이미 확실히 알았던 진리(이전에는 내가 보지 못했으나, 이제는 보고 있는 진리)를 보편화하기 위한 하느님의 뜻이다. 신약성서는 하느님과 화목하고 서로 협력하는 인간이 되는 새로운 방식이 존재한다는 이러한 진리의 생생한 결과이다.”(p164)

    그러나 “구원은 최종적인, 성취된 사실이지만” 주관적으로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p165)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의 속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베드로 전서’에 나와있는 것처럼 예수가 기꺼이 받아들인 십자가형은 우리에게 우리가 사는 방식을 바꾸라는 호소로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p171) “사실상 우리의 구원(그리고 죄의 용서)은 우리가 홰개한 후, 사랑이 우리를 이긴 후에야 비로서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p172)이다.

    하여 바울이 다시 등장한다. 바울은 유대교적인 어떤 것(유대민족적^^)과 완전히 결별한다. 그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희생과 구원의 문제를 예수를 통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떤 구원의 메시지를 던졌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통해 어떤 구원의 가능성을 얻게 되었는가로 바꾼다. (p173) 그는 인간 삶의 보편적 윤리에 대해 질문한다고 있는 것이다.

    이 주제는 이반 일리치 텍스트 전체에도 되풀이되고 있다. 그의 이야기를 좀 들어보자. (이건 세미나 시간에는 읽지 않을 겁니다, 너무 길어서^^) 다만 예수가 혁신시킨 죽음과 구원의 ‘보편성’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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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예수의 강생incarnation으로 인하여 사랑과 지식이 놀랍도록 완전하게 새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성경 속의 신을 이제 육체적인 형태로도 사랑하고 경배할 수 있게 되었다....여기에서 사랑의 새로운 차원이 열렸다...이전에는 사람은 나고 자란 곳의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도록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사랑할 사람과 사랑할 장소를 선택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윤리의 기초는 언제나 사람들의 집단이었고, ‘나’보다 모든 면에서 우선하는, 역사적으로 주어진 ‘우리’였는데, 이것이 흔들린 것이다....

    (수태고지...신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었다는 이야기) 이는..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기독교 전통에서 믿음이라 부르는 대단히 특수한 종류의 지식을 만들어냈다...나는 성경과 코란에 나오는 강생, 육체화가 분명 역사의 전환점을 나타내는 것이라 믿는다. 이 전환점은 교인 여부와 관계없이 전 세계 역사에 해당하는 것이다...

    수태란 말의 어감 때문에 강생을 어떤 필연적이고 미리 정해져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강생은 구속받지 않는 순수한 자유의 완성이었고 그렇게 남아 있다. 이런 자유는 현대적인 시각에서는 이해하기 대단히 어렵다. 현대인은 어떤 일어난 일을 확률적인 사건이나 인과의 연쇄로 본다. 우리는 이런 극단의 사이에 호의나 은혜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호의의 영역은 부름에 대한 응답이지 어떤 결정론적인 원인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복음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필연이나 우연이 아니라 어떤 넘쳐흐르는 호의로 자유롭게 받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사마리아인의 이야기) 이 새로운 상태의 기본 바탕은 회개다. 회개는 죄가 아닌 슬픔과 용서, 자비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다. 내가 만든 관계를 배반했다는 것에 대한 슬픔, 동시에 용서에 대한 확신과 타인의 자비를 배반했다는 것에 대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입장에서의 서글픔에 의해 회개가 생겨난다. 이 용서는 부채의 탕감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기독교 사회가 마땅히 가져야 하는 사랑과 상호관용의 표현이다....
    신약의 시각에서 죄는 오로지 용서의 관점으로 봤을 때에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죄를 믿는 것은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은 은총으로,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축복이다. 회개는 사마리아인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감미로운 찬미가. 이 관계는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취약하고 무너지기 쉽지만 항상 되살아날 힘을 가지고 있다. 마치 자연이 항상 치유되는 과정에 있다고 여겨지듯 말이다....” (이반 일리치, <복음>, <이반 일리히의 유연>>, 이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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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이슬람교는 패스 (위의 요요님과 수현님의 질문으로도 충분할 듯)

  • 2024-03-30 11:03

    어떤 종교든지 처음 창시자가 존재하는데 아시다시피 기독교는 예수이고, 이슬람교는 무함마드이다.
    기원 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신이 내린 사람이라고 주장하다가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사회에서 밀려나 자연사하기도 했을 것이다.
    예수와 무함마드도 처음에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첨차 세를 불려서 인정을 받게 되고 새로운 종교를 세우게 된 것인데 그 둘과, 여타 자기가 신이 내린 자라고 주장했던 많은 사람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들을 사이비교주라고 부를 때 이들도 처음부터 내가 ‘사기를 쳐야지’하고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언가 자신이 아닌 신들린(?)느낌을 받고 시작했을 것인데 어떤 요소의 차이가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이 되는 걸까?
    개인의 역량인가? 사이비교주는 잡신이 씌인 것일까? 진짜 하느님의 존재가 있어서 예수와 무함마드는 선택을 받은 것인가? 그들은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알아서 잘 요리한 것인가? 아니면 예수와 무함마드가 아닌 또 다른 진짜 신의 대리자라는 존재가 앞으로 출현을 할 것인가? 사람들은 진짜 ‘신이 내린 자’라는 존재를 어떤 기준으로 믿게 되는가? ......
    이번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읽으면서 교주의 탄생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어서 적어봅니다.

  • 2024-03-30 11:36

    궁금해하는 질문들을 많이 해주셨네요.

    이슬람교가 기독교와 달리 속죄를 문제삼지 않는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 않는 것외에 아담과 원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인지요?
    아담과 원죄 부분에 대한 이슬람교의 입장이 궁금합니다.

    이슬람교에서 죽음 이후 심판의 날에 낙원 아니면 지옥으로 분별될 때 예외가 존재한다는 부분이 명쾌하지 않습니다.
    죽음 이전의 회개는 가능하다...그너나 죽음 이후에는 너무 늦다.(195)
    꾸란은 심판의 날에 다른 사람의 중재에 의존하려는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꾸란은 아브라함에게, 천사들에게, 그리고 분명히 무함마드에게 어떤 예외들을 허용한다(199)
    분별의 날에 두 무리가 분류될 것이다.... 다시금, 두 무리로 이렇게 엄격히 분리되는 데 대하여 단지 몇가지 예외들이 존재한다....비록 그들이 지금은 저울의 어느 한 지점에 있을지라도 그들이 앞으로도 그대로 머무르게 될 것이라고 그려지지는 않는다. (208)

    지하드에서의 죽음에 대해 궁금해요
    그러한 미래의 보상 때문에 증언자의 지위에 대한 열망은 때때로 하느님을 위해 죽는 것, 특히 지하드에서의 죽음을 매우 결연히 추구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었으며, 이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210)

  • 2024-03-30 12:59

    질문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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