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탐구세미나]3회차 질문 올려주세요.

요요
2024-03-22 14:38
130

 

윌리엄 블레이크 <태초의 창조주 하나님(Ancient of Days(God the First Creator )> 

 

일주일 잘 보내셨는지요? 저는 어제 일산에 왔지만, 내일은 문탁에 가서 세미나를 하려고 합니다.

가까이 사는 남동생에게 아버지와 저녁식사 같이 해달라고 부탁을 해놓았거든요.ㅎ

 

두번째 책은 시문학적(!!)이지 않고 산문적이고 정보전달도 많아서 훨씬 잘 읽히는 것 같습니다만,

저자가 엘리엇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인용했을 때

저는 죽음을 탐구함에 있어서는 역시, 시문학적 접근을 도외시할 수 없다는 느낌이 강해지더군요.^^

 

1장에서 맑스와 프로이트, 죽음의 고고학과 인류학, 죽음의 현상학을 거치는 나름의 분석 끝에 저자는 말합니다.

"이제 종교는 '사자에 대한 심판'이라든가 사후의 보상이나 징벌이 있을 거라는 신앙이 전혀 부재할 때

어떻게 도덕적, 사회적, 개인적 가치의 주장이 유지될 수 있는지를 묻기 시작한 것이다."(81쪽)

그리고 죽음에 대한 근본적인 종교적 탐구는 '희생과 우정'을 빼고는 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건 '종교'를 뛰어넘는 '종교적 죽음탐구'가 아닌가 싶어서 살짝 가슴이 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2장 '유대교와 죽음'을 읽을 때는 폭풍검색과 함께 읽어야 해서 그 두근거림이 가라앉고 말더군요.ㅎ

저는 2장을 읽는 동안 위키피디아의 유대교 항목을 참고했습니다. 링크 붙입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8C%80%EA%B5%90

 

이제 막 새로운 책을 펼쳤는데 지난 번 책에 이어 또 다시 죽음이란 무엇인지, 

'죽음 탐구'의 범위가 어디까지이며, 그 방법은 어떠해야 하는지 거듭 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 세미나를 하는 동안 떠나지 않을 질문 같기도 합니다.

 

질문은 토요일 12시까지 부탁드립니다~

댓글 13
  • 2024-03-22 22:00

    57쪽 사자들은 저 구름 너머 푸른 하늘 위의 어딘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세상 가까이 어딘가에 살면서 베일의 반대쪽에 존재한다고 여겨졌다.
    63쪽 인류의 조상들에게는 죽음 앞에 어떤 미래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이 죽으면 기껏해야 희미하고 비실체적인 그림자만이 남아 있을 거라고 여겨졌다. 그 그림자는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기억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70쪽 머나먼 과거의 우리 조상들이 사후에도 무언가가 살아남고 따라서 사자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최소한 어떤 흔적을 남긴다고 믿었던 까닭은......사자의 흔적이 분명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사자는 무엇보다 기억이라든가 자손의 존재를 통해 지속된다.

    저는 이 부분들이 좋았어요. 죽음후에 가게 되는 베일 속은 우리 세상과 겹쳐있지만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
    비실체적인 실루엣을 가진 기억의 흔적들...삶의 흔적들이 그림자로 남아 있다....는 표현들이 천당과 지옥...그리고 완젼 소멸되는 이미지보다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떤 정령들의 세상, 영적 존재에 대한 신앙:spiritualism 들은 지난 주에 읽었던 <인간의 유한성>>에서 말한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를 살아낼 수 있는 그 어떤 초월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유대교로 넘어와선 또 재미없어졌습니다. ㅋㅋㅋ

  • 2024-03-22 22:10

    작가는 종교의 기원이 사후의 가치 있는 삶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죽음에 대한 종교적 탐구는 죽음을 부정하지 않고 삶의 가치를 집중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거 같습니다. (1장 77page)
    그리고 종교 전통을 탐구하면서 '희생과 우정'이라는 주제를 다룬다고 명시했는데요,
    어떤 보상에 대한 기대도 없이 인류의 가치를 위해 죽음을 넘어선 아담 폰 트로트의 에피소드(p82)에서 이런 주제가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장 유대교와 죽음의 끝 부분 자노스카 수용소 이야기는 뭘 얘기하려고 하는 지 좀 갸우뚱해집니다.
    결국 살아난 자들의 이야기인데.. 신에 대한 믿음, 그리고 우정이 죽음을 넘어섰다는 얘기일까요?
    그리고, 유대교는 철저한 자기 헌신의 종교라고 하는데 (p133) 이 자기 헌신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신에 대한 복종, 헌신 = 민족의 번영. 이런 의미일까요?

  • 2024-03-22 22:28

    84쪽: 우리는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의 시시한 일반화를 넘어서서 탐구해야할 근본적인 토대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내버리면서 총체적인 세계를 획득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그것은 곧 또 다른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양도하고 또 다른 부분을 위해 자신의 부분을 양도할 줄 아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다. (.....) 총체성의 획득이 어떤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 이 문장의 맥락에서 '총체적인 세계' '총체성의 획득' 등 총체성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 2024-03-23 00:30

    1. 49쪽 방주네프의 <통과의례>와 마찬가지로 빅터 터너 역시 ‘ 살아있는 상태→죽어가고 있는 상태→죽어있는 상태의 세 단계 중 중간적인 전이단계는 의례과정에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특성을 갖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 경험하는 장례의례와 사후애도의 절차 역시 전이단계에 속하는 의례인 것 같습니다. 여러 시대, 여러 사회의 다양한 죽음 풍습들이 전이단계에 대한 제의적 중요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과 비교해 보면 우리 사회는 죽음을 일회적 사건으로 간주함으로써 전이 의례에 대해 질문하고 탐구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54쪽 유령신앙에 대한 분석과 함께 이런 문제를 현상학적으로 접근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자는 현상학적 태도와 관련하여 ‘말은 쉽지만 실행은 어렵다’고 경고하고 있는데요. 죽음이나 사후신앙과 관련하여 보상설 등의 환원주의적 접근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한편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선험적 관점을 내세우지 않고 맥락적으로 이해하면서 복수의 구속요인들을 살필 줄 아는 유연함과 예민함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책 역시 그런 관점으로 쓰려고 했다는 이야기이겠지요.(유령, 부활, 윤회, 환생, 영혼불멸 등의 개념과 믿음에 대해서 현상학적 태도로 탐구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3. 저자는 “결국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물음들은 결국 삶 안에서 우리의 도덕적 미적, 정치적 판단으로 귀결된다.(85쪽)”고 하면서 이 책은 “죽음문제와 관련하여 각 종교의 뿌리에 무엇이 놓여있는지 보여주고 각 종교의 고유한 색깔을 부여하는 목적을 갖는다(86쪽)”고 말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유대교 전통에서 죽음과 관련하여 뿌리에 놓인 것과 고유한 색깔은 어떤 것일까요?
    저자의 논점을 정리해보았습니다.
    1) 성서시대는 이승의 삶을 중시하고 스올로 가는 것을 연기하고자 합니다. 죽은 뒤의 보상이나 죽은 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사색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그리고 다음 세대들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가운데 어떻게 질서와 안정을 지속시킬 수 있는가가 주요 관심입니다. 영혼이 아니라 생명=피의 사고가 지배적입니다. 희생도 속죄가 아니라 생명을 지속하기 위한 하느님과의 소통으로서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2) 마카비 반란(기원전 167~142)과 관련하여 순교자가 등장하고, 의로운 죽음의 의미를 물으면서, 죽음 이후 생명의 회복에 대한 믿음이 나옵니다. 이때 플라톤의 이원론이 <마카비4서>에 도입됩니다.(히브리 사유와 헬레니즘 사유가 만나는 장면/1세기, 요세푸스와 필로)
    3)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 ‘부활’에 대한 사두개파의 부정과 바리새파의 긍정입니다. 사두개파는 부활을 부정합니다. 성서적 전통에 위배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파괴(70년) 이후 사두개파가 소멸된 후 바리새파 랍비들은 헬레니즘 사유(영혼불멸)와 결별하면서 오히려 부활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4) 랍비전통을 종합한 위대한 마이모니데스(12세기)는 부활을 믿지 않는 자 유대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성에 근거한 철학적 해석을 했다는 이유로 랍비들의 논쟁에서 마이모니데스도 비판받습니다.(무슬림에 의한 그리스철학 재발견의 시대/이성 vs 계시)
    5) 그러나 부활과 관련한 철학적 논쟁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개인적 믿음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안의, 그들의 자녀 안의 연속성이라는 성서시대의 전통적 믿음이 끊임없이 반복된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리하여 죽음은 밀접한 관계를 확인하는 계기이자 장례에 대한 여러 의무와 관련하여 이해됩니다. 오랫동안 고인을 애도하고 기억하는 관습은 장례식 관습만큼이나 중요해집니다.(친족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유대교의 강조는 계산적 이득이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 자체만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 2024-03-23 08:48

    위에 요요쌤이 언급하신 방주네프의 ‘중간적 임계성’과 관련된 질문입니다.(49쪽)
    이 개념은 빅터 터너의 <상징의 숲>에서 더욱 발전적으로 전개 되었고 터너는 ‘중간적 임계성의 자율성’을 강조합니다. 중간적 임계성의 자율성은 죽음 외에도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다면서 특히 ‘병적으로 분리된 일군의 사회적 현상들’을 이야기하는데요. 예를 들면, ‘의례적 전이 단계의 신참자, 정복당한 토착민, 약소국들, 궁정의 어릿광대들, 탁발승들, 선한 사마리아인들, 천년왕국 운동, 부랑자들, 부계사회 내의 모계적 방계, 모계사회 내의 부계적 방계’와 같은 것들.
    그 뒤에 전이 의례가 ‘복잡하고 장기간 지속되므로 일종의 자율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라고 나와 있긴 하지만
    저는 중간적 임계성이 갖는 ‘자율성’이 무엇인지, , 그게 왜 저런 일군의 사회적 현상과 연결될 수 있다고 봤는지 이해가 잘 안되네요.

  • 2024-03-23 09:08

    유대교에도 윤회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는 부분이 흥미로웠습니다.
    형벌을 받을만한 영혼들만 다시 태어난다는 믿음도 있었지만(회복의 기회) 하느님의 자비로 의로운 자들도 타자들을 위해 다시태어난다는 부분이 특히 흥미로왔습니다.(103-104쪽)
    유대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윤회와 마찬가지로 개인의 부활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나 자손으로 다시태어나는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그래서 충실한 유대인들은 죽음이 곧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을 희생이라고 하는 것인가요?
    그들의 최종목적은 유대 민족의 영원성?

  • 2024-03-23 10:03

    이번에 저는 어떤 질문은 아니고, 독서 후 간단한 소회 정도로 씁니다.
    69~70쪽, 왕충의 설, ‘불이 꺼질 때 그 불빛은 더 이상 빛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이 죽으면 그의 지성은 더 이상 아무것도 지각하지 못한다. 결국 양자의 속성은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사람들이 마치 사자가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는 것처럼 여긴다면 그것은 오류이다. 이제 막 임종하려는 병자와 이제 막 꺼지려고 하는 불빛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따라서 몸이 죽으면 땅으로 돌아가 한 줌의 흙이 될 따름이다. 그런데 어떻게 영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생기의 흐름이 심각하게 손상을 입으면 그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게 되고 한꺼번에 흩어지게 된다.’
    근자에 계속 모호한(시문학적? 고미숙 샘의 환생설 등 동양적 사고) 이야기들은 접하다가 오랜만에 이런 유물론적 이론을 접하니 얼마나 시원하고 통쾌한지 다시 이리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막 솟구칩니다. 잘은 모르지만 왕충의 시대(1세기)에는 특히 동양에서 이런 생각하기가 더욱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왕충은 왠지 ‘어르신’이라고 부르기보다 ‘오빠’라고 부르고 싶은 생각이 드는군요. 그가 지었다는 ‘논형’이라는 책도 관심이 갑니다.

    71쪽, ‘고대 종교들은 이처럼 사자들을 지속적인 존재로 만드는 사자의 상태 혹은 위상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을 경험적 증거의 범위 내에서 알고 싶어 했다. 그리고 우리의 조상들은 제의를 통해 사자에 대한 기억을 더욱 강화시켰고 궁극적으로는 사자들이 더 이상 기억되지 않는 존재 양식으로 전이되도록-4대 혹은 5대째- 했다.’
    제가 종손과 결혼을 하여서 맏며느리인데 코로나 이후로 제사도 거의 없어졌는데 넷째 작은 아버지가 제사를 꼭 지내야 한다는 입장이라서 그 분만 제사에 옵니다. 제사 지낼 때마다 저는 어차피 조상의 존재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니까 은근히 그분을 미워하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분을 좀 이해하게 되었어요. 조상을 믿게 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라구요...

  • 2024-03-23 10:48

    이번에도 깁니다. ㅠ

    1. Homo sapiens, Homo Religiosus, Homo Philosophicus
    저는 이 책이 좀 어렵네요. 책 제목만 보고 아, 각 (고등^^)종교의 담론(경전)과 실천(의례)을 살피면서 각 종교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의미부여를 하는 지를 설명하는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인트로에 해당하는 1부를 읽으면서, 오잉, 종교가 뭐지?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인데, 사피엔스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질문하고 사색한다면, 모두 Homo Religiosus가 되는 것인가요?
    카르도프가 일기에서 유태인인 리버만 부인의 죽음에 대해서 질문을 할 때, 즉 “선량하고 친절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변형을 통해 그런 악마로 변신하고 마는 것인가?”라고 질문할 때, 저자는 이것이 죽음에 관한 (심판, 사후 징벌이 아니라는 차원에서) 종교적 탐구의 극적인 변화의 순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p81) 그런데 이 순간을 우리는 종교적 탐구가 아니라 철학적 탐구의 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렌트도 바로 그런 질문을 통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잖아요?

    2. 죽음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과 종교
    1부의 제목은 종교의 기원과 죽음입니다. 그리고 말리노프스키, 타일러, 프레이저 같은 인류학자,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같은 사상가들이 일관되게 죽음에 대한 공포와 그것의 대한 대응(보상)으로서 종교가 발생했다고 설명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잘 알고 있듯이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하고 프로이트는 종교가 환영illusion이라고 말했지요. 그런데 저자가 보기에 이런 접근은 헛다리입니다. 전형적으로 자신의 이론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환원론적 태도입니다.
    고고학과 인류학은 바로 이런 죽음과 보상으로서의 종교라는 통념을 질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고고학/인류학적 보고의 내용은 너무 다양해서 ‘죽음의 인류학’을 보편적으로 정리하긴 여전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현상학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일종의 영적 존재(귀신, 유령, 죽은사람)에 대한 실재적 감각 (보았다, 만났다..)을 이성과 이론의 통념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현상학적으로, 그러니까 주관적으로 어떤 의미로 체험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저자는, “죽음에 관한 가장 초기의 종교적 탐구는 죽음의 파멸적 성격과 무질서에, 나아가 그런 카오스와 적의 및 악의 집요한 의지에 직면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훨씬 더 집중”(p77)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전, 여기까지는 수긍했습니다.

    3. 그런데 왜, 희생과 우정이 종교의 본질이 되는 것인가요?
    이 논증을 위해 나치정권의 정치범 독일인 아담 폰 트로트의 사례를 가져옵니다. 완벽하게 맹자의 사생취의(捨生取義)의 구현자이죠. 그런데 이 사생취의는 아시다시피 동아시아 고대 담론에서 유가의 죽음에 대한 태도입니다. 노장은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왜 저자는 이 사례를 통해 인간의 도덕성- 삶의 초월- 종교적 태도를 연결시키면서 이런 희생이 “종교가 죽음의 본질과 의미를 탐구해왔던 가장 오래된 범주”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p84) 전 좀 비약같은데 제가 뭘 잘못 읽은걸까요?

    4. 구약성서와 유대교 혹은 시오니즘
    저자는 “성서 시대에 죽음에 대한 유대인의 이해는 이스라엘의 자기 이해가 형성된 배경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기 백성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서 하느님 자신과, 그리고 서로가 충실한 계약으로 결속해서 살아가도록 하신 하느님의 섭리와 권능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그들이 판단하기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당연한 신뢰는 죽음 이후의 보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지속적인 실재가 하느님이 선택한 민족의 회복을 보증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죽음 이후 개인들의 회복은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민족적인 연속성과 자기 자손을 통한 연속성만이 있을 수 있다”(p97)고 말합니다.
    그런데 <만들어진 유대인>의 저자 슈로모 산드는, 그것이 바로 문제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정반대라는 것입니다. 수백년된 유대 공동체에서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종교텍스트는 구약이 아니라 탈무드 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19세 시오니즘이 만들어지면서(이건 명백히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입니다) 시오니스트들은 자기 역사를 창작하기 위해 구약을 다시 끌어냅니다. 그리고 구약을 통해 자기 민족의 수난과 엑소더스, 디아스포라, 이스라엘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의 미션을 재구성합니다. 그래서 자꾸 질문하게 되네요. 저자의 이런 접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라고.

    5. 그 유명한 시편 23장
    저희 어머니의 기독교 신앙은 현상학적으로^^ 심판과 구원, 영생입니다. 시편 23장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늘 암송하고 (찬송가로) 부릅니다. 왜 저자는 자꾸 시편의 메시지가 심판이나 구원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좋은 삶을 위한 하느님과 우정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혹시 이것도 일종의 환원론적 태도? ㅎㅎ

  • 2024-03-23 11:07

    1. p86
    "...본서는 궁극적으로 이 두가지 주제(희생과 우정)안에 죽음에 대한 세속적 이해와의 살아있는 접촉점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죽음의 가치를 회복하고 또한 죽음 안에다 근본적인 가치를 복원시키는 작업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그것은 최소한 의학적 전문영역과 호스피스 운동의 차원에서도 그러하다. 요컨대 본서는 죽음에 대한 종교적 관점과 세속적 관점이 중요한 점에서 일치한다는 점, 그리고 양자의 관점이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 안에서 서로를 강화시틸 수 있다는 점을 논하고 있다."

    이 책을 쓴 목적이 이러하다고 해서 이 관점을 가지고 책을 읽어보려고 했으나...유대교와 죽음까지만 읽고는 아직 모르겠네요^^
    죽음의 가치를 회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회복과 복원이라고 했으니 그 전에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럼 뭐지? 난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그것을 찾는 것이 이 세미나의 목적인가?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2. p108~109
    “ 성서시대에 죽음의 실재와 그 필연성이 입증된 것은 희생을 통해서였다......경전에서 희생은 대단히 복잡한 현상이며.....어떠한 단일한 ‘희생의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희생을 통한 죽음의 탐구에서 속죄가 유일한 주제라고 주장하는 것은, 희생적 죽음이 어떻게 그 목적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단지 하나의, 단일한 이해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희생에서 중요한 요점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살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희생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이 계속되기 위해서 생명이 포기된다”
    p119~120충실한 유대인들은 죽음이 곧 생명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실 여기서 죽음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생명으로 인도된다. 충실한 자들의 죽음은 희생적이기 때문이다. ㄱ러나 <마카비4서>가 충실한 자들이 정말로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는 방법으로 강조한 것은 몸의 재건이 아니라 영혼의 불멸성이다.p129“나는 생명의 세계에서 주님 보시는 앞에서 살렵니다.”(시편)
    p131
    “유대교에서 죽음은 밀접한 관계를 확인하는 계기로 이해된다”
    p133
    “ ...유대교는 철저한 자기 헌신의 종교이다...따라서 모든 경우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으로 인해서만 존재해 왔던 공동체를 확인하는 기회이다...”

    희생과 헌신, 부활에 대한 믿음, 영혼의 불멸성, 밀접한 관계, 공동체.
    유대교 편에서 중요하게 보이는 단어들인데, 이 단어들이 연결될 듯 말 듯...이해는 아직 더디지만 저자가 역사적 흐름데로 잘 설명해주시는 것 같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 2024-03-23 11:30

    일단 지금까지 질문 모았고요.. 제가 이동해야 해서 나중에 다시 취합할게요. 질문 계속 올려주세요.^^

  • 2024-03-23 11:52

    1. 프로이트의 '죽음의 본능' 개념
    p. 36 따라서 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서 그 반대편에 있는 평상심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그 본능은 유기체로 하여금 비유기체적인 요소로 돌아가게 한다. 따라서 프로이트에 의하면 "총체적 생명으로서의 본능이 죽음을 야기하는 하나의 목적으로 기능한다." 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프로이트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모든 것이 내적인 이유로 죽는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다시금 무기질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예외 없는 하나의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생명의 목적은 죽음" 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p.37 달리 말하자면 '쾌락원칙을 넘어서서' 원초적인 죽음 상태로 복귀하려는 보다 근본적인 충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 자체보다도 비생명이 더 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의 목적은 죽음이다. 죽음이야말로 생명이 필연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2. 중간적인 임계성의 자율성
    p.49 방주네프는 이미 전이 의례(rites of transition)에 비해 시신으로부터의 분리 의례(rites of separation)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는 점에 주목한 바 있다. 전이 의례는 "종종 매우 복합적이고 장기간 지속되므로 일종의 자율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 2024-03-23 12:22

    p86 이 책은 죽음의 문제와 관련하여 각각의 종교 전통에 고유한 색깔을 부여하고, 희생과 우정이라는 주제를 다룰 것이라고 했다.
    죽음에 대한 종교적 관점과 세속적 관점이 중요한 점에서 일치한다고, 그리고 이 두 관점이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 안에서 서로를 강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p62 세계종교 전통의 뿌리에는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는 신앙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에 이집트의 경우는 예외이다. 라고 했는데,
    이집트 피라미드의 경우도 사후 세계를 위한 무덤으로 보지 말고, 죽음에 직면했을 때의 두려움 때문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죽음의 순간 본인이 이 삶을 더이상 영위할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으로, 그냥 이러한 현생의 삶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죽게 되더라도 자기를 이대로 기억하고 기려달라는 바람 같은 것으로...
    엄청난 규모의 피라미드를 보면 당시 인구 수나 그 위엄이 그대로 느껴지는데, 거기서 유배되고 싶지 않은 마음같은 것말이다.
    알타이 족의 장례행위도 죽은 자의 사후 세계를 위한 행위가 아닌, 헤어짐에 대한 단순한 애도의 행위로 볼 수도 있는 건 아닐지, 그런 걸 어떤 믿음의 행위라고 보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p74에도 있듯이, 생자들이 가능한 공식적이고 완전하게 죽음 및 사자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싶어 했기 때문인지도...

    p77 종교의 기원이 사후의 가치있는 삶을 제공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종교는 사후의 삶을 언급하고 인간의 삶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죽음에 직면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유지할 수 있을 지에 더 집중하고 있다. 여기에 보상과 징벌이 아닌 도덕적, 사회적, 개인적 가치의 주장이 유지될 수 있는지 근본적인 탐구를 해야 할 근본적인 토대가 있다. 즉, 자신의 생명을 내버리면서 총체적인 세계를 획득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또 다른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양도하고 또 다른 부분을 위해 자신의 부분을 양도할 줄 아는 인간의 인식 능력이다. 타인을 위해 스스로의 죽음을 희생 제물로 바치기도 한다는 점에 대한 인식이다. 종교가 죽음의 본질과 의미를 탐구해왔던 가장 오래된 범주가 바로 이런 '희생'이다.
    그 희생은 삶의 가능성을 실현 가능하게 만드는 삶을 위한 삶의 양도이다. 종교는 희생이라는 주제를 통해 무질서와 죽음의 본질을 탐구해 왔다. (비약처럼)
    : 1) 양도는 내가 죽고 난 다음 세대로의 이양을 희생이라고 하는 것인가. 거기엔 어떤 종교가 필요한 것인가 ?
    2) 타인을 위해 스스로의 죽음을 희생 제물로 바친다는 것엔 전태일이 떠오른다.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영성, 좁혀서 말하면 ‘종교적 영성’이 이끌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영성은 ‘나와 전체, 나와 역사가 하나라는 믿음’을 뜻한다. 전체가 나와 하나라는 믿음, 그리고 그 전체의 역사가 뜻과 의미를 지녔다는 믿음은 오직 영성에서 얻을 수 있다. 전태일의 영성적 자기 희생" (단톡방 문탁샘 링크 - 김상봉, 영성없는 진보)

    쌩뚱맞게도 종교는 엄청 장삿꾼들이란 생각이 더 강하게 드는 건......... 책을 반대로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 2024-03-23 14:26

    질문 최종 모음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16
[죽음탐구세미나]8회차 질문+뒷풀이 공지 (12)
요요 | 2024.05.17 | 조회 74
요요 2024.05.17 74
15
[후기] 7회차 세계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 6~7장 (4)
박지원 | 2024.05.08 | 조회 87
박지원 2024.05.08 87
14
[죽음탐구세미나] 7회차 질문 올려주세요 (11)
요요 | 2024.04.26 | 조회 107
요요 2024.04.26 107
13
[죽음탐구세미나]6회차 질문 올려주세요 (9)
요요 | 2024.04.19 | 조회 75
요요 2024.04.19 75
12
[죽음탐구세미나] 5회차 후기 (6)
니은 | 2024.04.16 | 조회 98
니은 2024.04.16 98
11
[죽음탐구세미나]5회차 질문 올려주세요 (10)
요요 | 2024.04.12 | 조회 79
요요 2024.04.12 79
10
[죽음탐구세미나] 4회차 후기-기독교, 이슬람교와 죽음 (2)
인디언 | 2024.04.03 | 조회 106
인디언 2024.04.03 106
9
[죽음탐구세미나]4회차 질문 올려주셔요~ (9)
요요 | 2024.03.29 | 조회 91
요요 2024.03.29 91
8
[죽음탐구세미나] 3회차 세미나 후기 (5)
이송지 | 2024.03.25 | 조회 123
이송지 2024.03.25 123
7
[죽음탐구세미나]3회차 질문 올려주세요. (13)
요요 | 2024.03.22 | 조회 130
요요 2024.03.22 130
6
[죽음탐구세미나] 후기_<인간의 유한성> 2차_2024.3.16. (10)
박지원 | 2024.03.18 | 조회 163
박지원 2024.03.18 163
5
[죽음탐구세미나]2회차 질문 여기에 올려주셔요~~ (11)
요요 | 2024.03.15 | 조회 126
요요 2024.03.15 126
4
종말과 유한성, 형이상학과 인류세철학 - 잠시 딴짓했어요. ㅋ
문탁 | 2024.03.15 | 조회 117
문탁 2024.03.15 117
3
[죽음탐구세미나] 1회 후기 -끝까지 읽어보자... (4)
기린 | 2024.03.09 | 조회 126
기린 2024.03.09 126
2
[죽음탐구세미나] 1회차 질문 올려주세요 (13)
요요 | 2024.03.07 | 조회 171
요요 2024.03.07 171
1
[죽음탐구세미나] 시즌1 개강 안내 (1)
요요 | 2024.02.20 | 조회 192
요요 2024.02.20 192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