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탐구세미나] 1회차 질문 올려주세요

요요
2024-03-07 13:57
172

3월 9일 첫세미나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한성>은 어떻게 읽고 계시는지요?

1장부터 6장은 이야기 소재가 아주 다양하지요? 무려 판도라, 아담과 이브, 붓다, 마호메트, 바울, 하이데거라니!!

 

저는 저자가 신화, 종교, 문학, 철학을 모두 시문학(!!)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하면서

각각의 저자들의 이야기와 작품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검토 한다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신화도 종교도 철학도 문학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지더라고요..ㅎㅎㅎ

 

판도라 신화와 아담과 이브 신화는 신과 인간의 분리를 키워드로 인간의 유한성을 해명하려는 문학으로 읽을 수 있고요.

부처와 마호메트 그리고 바울은 모두 위대한 세계 종교인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창시자들의 이야기를 근거로 합니다.

불교의 초기경전, 코란, 로마서와 고린도 전서, 그리고 바울에 대한 루터의 해석을 기반으로 하면서,

이들 각각이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어떻게 보았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이데거!!  6편의 글 중에서 가장 까다롭다고 느낄 수 있는 글이 아닐까 싶었는데 어떠셨는지요?

 

죽음에 대한 탐구를시작하는  첫 책이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처음 시작하는 책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지고 있어서 꽤 무겁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첫세미나이니, 좀 가볍게 진행하는 것이 좋겠지요?

 

네!! 아무튼 세미나는 서로의 질문을 놓고 토론하며 질문을 해결해 가는 형식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잘 이해되지 않았던 것도 좋고, 함께 토론하고 싶은 주제도 좋습니다.

단, 텍스트와 연관된 질문이어야 합니다.

질문에서 텍스트의 본문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페이지를 표시해주시고요, 몇장과 관련된 질문인지도 적어주세요.

질문은 이 글의 댓글로 토요일 낮 12시까지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댓글 13
  • 2024-03-08 19:02

    1주차 질문 올립니다.
    ① 역자가 서문에서도 강조했듯이 저자는 신화, 종교, 철학 등의 해석에 시문학(Poisie)적 접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화와 종교는 그 형태부터 시문학이라 여겨지지만, 철학은 명징하게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서인지 철학을 시문학으로 바라보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싶습니다.

    ② 5장 바울에서 바울의 믿음은 신의 의로움을 절대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신의 말씀이니까 무조건 복종하라는 마모메드의 이슬람교와 차별되는 점으로 드러나는 거 같습니다. 인간을 원죄에서 구원하는 신에게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의로움’을 강조한 걸까요? 구원자에게 ‘의로움’을 부여한 이유가 뭘까요?

    ③ 6장 하이데거의 ‘죄책존재’는 창세기 신화와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원죄’의식과 어떻게 다를까요? 인간이 느끼는 불안, 고통, 두려움의 근원에 대한 해석의 차이인지, 아예 다른 차원의 죄책감인지 궁금합니다.

  • 2024-03-08 22:55

    저는 텍스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해율이 10%도 안 되는 거 같은... 이번 회차엔 질문을 못 올릴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좀더 열심히 씨름해서 다음엔 죽이라도 쑤어보겠습니다^^;; 낼 뵐께요.

    • 2024-03-09 08:37

      네! 샘, 책이 어렵네요. 첫날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오세요.(이 책을 읽자고 한 제가 밉군요.ㅠ)
      서로 같이 이야기나누다보면 죽을 쑤든 밥을 짓든, 뭐가 되리라 믿습니다.^^
      잘 모르는 책을 읽으며 뭔가 찾아가는 게 세미나니까요.^^
      게다가 죽음만큼 우리가 모른다는 걸 잘 보여주는 게 있을까요?(어려운 책에 대한 저의 변명이자 궤변같기도 합니다.ㅎ)

  • 2024-03-09 07:32

    '죄책'이라는 단어가 기독교적인 '원죄를 타고난 인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은데...

    21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 죄책존재가 된 인간은, 이제 자신의 죄가 속죄되도록 조정한다.
    자기자신의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은, 단지 '결코 죽지 않는 생명'만이 자기 자신으르 만족시킬 수 있다는 확신으로 부터 힘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평안함에 이르기까지 생명과 죽음의 드라마는 끝나지 않는다. 즉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새롭게 상연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결코 끝낼 수 없는 것이다.
    33 이 시는 끊임없이 인간의 현재적인 '존재-상태'를 항상 새롭게 '죄책-상태'로 선언하고 있다.... 인간의 '자기-죄책-존재'
    삶은 죄책을 통해 획득된 악이라는 것. 이것이 신화가 말하고자 하는 유일한 목표이다.
    36 (신화적인 근원을 넘어선 역사적인) 그 인간은 자기 자신이기도 하지만, 신화가 제시하듯이, 이미 죄책존재인 것이다.
    39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대한 죄책존재라는 것, 자신의 실존의 '어떻게'에 대한 죄책존재라는 것...
    75 인간 현존재가 실존하는 한, 인간은 '근원적으로' 그리고 '항상' 죄책에 사로잡혀 있다.
    아마도 이 개념은 하이데거의 개념인 것 같습니다만, 그래서 이해하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하이데거를 알 수가 없으니...

    자신의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죄책존재일까요?
    부처와 마호메드에서는 죄책존재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는 걸 보면 기독교적인 '원죄'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고... 아이고, 모르겠습니다.

    너무 어려워서 뒷부분을 읽어봤더니 마지막 12장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습니다만...시문학적 감수성이 없는 예술가가 아니라서 인지 저자의 글을 따라가기가 힘드네요.

  • 2024-03-09 08:26

    앗, 이렇게 가독성이 없는 책은, 오랜만이다. ㅠ 하여, 일단 뭔 책인지부터 감을 잡아야 했다. ㅋㅋ

    1. 이 책 전체가 하이데거 해설이구나.

    이 책은 하이데거 제자인 마르텐 교수가 87세 되던 해인 2013년에 발간한 책이라고 하며, 하이데거의 제자의 제자인 역자가 2017년에 번역한 책이다. 앗, 이건 하이데거 죽음 책이구나!! 핵심 키워드는 두 개로 보인다. 여기서는 시문학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poesie’. 보통은 그냥 ‘포에지’라고 말하는 것. 다른 하나는 여기서는 ‘죄책존재’라고 번역되어 있는 ‘schuldigsein’. 보통 우리나라에서는 ‘탓이 있음’ 혹은 ‘책임 존재’ 등으로 번역되는 개념. (이 책의 원서의 6장 마르틴 하이데거: 근원적인 죄책존재에서의 ‘죄책존재’의 원어는 ‘ursprünglich schuldig’ 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포에지와 schuldigsein, 이 두 개념을 알 수 없으면 쉽게 독해하기 힘든 책인 거시어따!
    (음, 망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존재와 시간>을 읽은 요요가 있지 않은가? 다행. ㅎ)

    2. 역시 '서문'을 잘 읽어야 한다. 서문은, 언제나 전체의 요약이다.

    서문에 시문학과 죄책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짧게, 다, 요약되어 있다. 신화(최초의 포에지?!)는, 인간이 신 (무한, 절대, 본질 )과 다른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그렇게 신=자기자신의 본래성으로부터 우리가 소외된 채로 살고 있다면, 그것은 왜 (누구 ‘탓’)인지를 질문한다. 그렇게 발견된 것이 인간의 자기책임, 죄책존재로서의 현재의 모습이다. 하여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 죄책존재가 된 인간은, 이제 자신의 죄가 속죄되도록 조정한다. 이렇게 시문학적으로 진행된 인간의 자기소외와 죄책존재라는 이야기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지금’을 넘어서게 한다. 즉 이야기 속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원받거나, 혹은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삶의 유한성과 가사성(可死性-언젠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으로부터 구원받거나, 혹은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21)

    하지만 인간은 대부분 구원받고 싶어하지 않는가? 다 멋지고 폼나고 훌륭하게 살고 싶어하지 시시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이건 현상학적으로 그렇다. ㅋ) 따라서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새롭게 상연하는 인간의 이야기를 결코 끝낼 수 없는 것이다.” 신화든, 종교든, 철학이든, 신학이든, 문학이든, 인간이 살아있는 한, 이 모든 포에지는 지속된다.
    원제 (Endlichkeit -Zum Drama von Tod und Leben)가 드러내는 것은, 책 표지 아래 깨알같은 글씨로 써진 것처럼 "삶이 궁극적으로 중단된다는 생각은 삶을 자극하는 동기로 드러난다. 죽음은 무엇보다도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도록 만들며, 삶을 하나의 성장드라마나 실행드라마가 되도록 한다" 이다.
    이제 비로소 책 제목과 전체 윤곽이 좀 이해가 될랑말랑...ㅋ

    3. 인간은 포에지적 존재이고 학문은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 자신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특히 학문(공부)에 대한 저자의 태도!!

    난 죽음에 대한 공부를 하자고 제안했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빙의된 저자에 따르면, 모든 학문은 죽음에 대한 공부이다. 이것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마르텐 교수는 이 책을 통해, 죽음 앞에서 학문은 추상적, 사변적 이론이 아니라는 것, 학문은 이제 죽음을 마주하는 인간 자신의 ‘태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 태도 외에 또 다른 진리는 존재하지 않기에, 그 태도에 대하여 더 이상 불안해하지 말고 담담히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점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마르텐 교수님이 말하는 태도는 아우렐리우스와 유사해보인다.” (18)

    이번에 나에게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죽음에 대한 공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부가 죽음에 대한 공부라는 것! (그럼 나이듦연구소는 어찌 운영하지? 크하핫) 이 이야기를 두고 두고 같이 해봤으면 좋겠다.

    -세분적인 질문도 있긴 하지만, 이미 길게 썼고, 또 두 개인지, 세 개인지만 쓰라고 해서리 오늘은 일단 요기까지.

  • 2024-03-09 09:02

    1. 서문에서 저자는 "인간은 죄책 존재, 즉 죄를 진 인간이라는 것은 신화적인 자기해석의 과정에서 더 확실해진 시문학적인 선택의 결과(20쪽)"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관점에 입각해서 판도라신화와 아담과 이브 신화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

    2. 어제 고미숙샘의 현자들의 죽음에 대한 강의를 들었는데 오늘 우리가 읽는 책은 현자들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유한성을 상연하는 끝나지 않는 인간의 이야기'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유한성에 대해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창시자인 붓다와 마호메트, 바울은 다르게 접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판도라와 아담과 이브 뒤에 이 세사람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저자가 그 차이를 보여주려고 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저자가 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이슬람교에 대해 잘 모르지만 마호메트를 위해 변명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이슬람교를 저평가하는 것 같은데 저만 그렇게 본 것일까요?(혹시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 질문을 끼워 넣어봅니다.^^)

    3. 그리스도교에서 죽음은 본래적인 죽음이 아니지만,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에의 존재'는 실존의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놀라운 사상이라고 합니다.(81쪽)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그리스도교적인 원죄나 죽음과 무관하게 '근원적 죄책존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저자 자신은 하이데거나 <존재와 시간>에서 신과 종교를 다루고 있지 않지만 이 책이 비의적이고 종교적 열광으로 쓰여졌다(87쪽)고 보는 쪽이라고 말하고 있군요. 그 근거는 하이데거가 인간은 신이 아니라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종교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때 말하는 종교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 2024-03-09 09:41

    처음 역자 해설을 읽을 때는 꽤 잘 읽혀서 희망적이었는데 본론으로 들어가니 너무 읽히지가 않아서 영어 원서 읽은 양 중심문장이 뭔지도 모르겠는...ㅠ
    제 질문은 앞서 두 분도 얘기 하셨는데 마르텐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삶과 죽음이  '시문학적' 존재라는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시문학이란 진실을 무언가에 빗대어 말하기도 하고, 이야기 속에서 파악하기도 하고, 현실과 동떨어져 생각하기도 하고, 해석을 다양하게 할수 있기도 한다는 측면이 있는 형식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렇게 삶과 죽음을 파악한다는 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본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얘기를 더 해보고 들어보고 싶습니다.

  • 2024-03-09 09:58

    1. 하이데거를 모르는 입장에서 저도 ‘죄책’이라는 단어의 올가미에 빠진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특히 1장 판도라에서는 ‘어떻게’가 많이 나오는데요. 죄책 존재와 어떻게(?)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실존의 ‘어떻게’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27쪽)

    -신과 인간의 분리와 더불어 시작되는 시문학은 이 세계 안으로 근원적인 죄를 끌어들인다. 그것은 도발적으로 묘사된다. 신적인 존재에 대한 신화적, 종교적인 시들은 죄의 원인을 인간의 근원적인 죄책성에서 찾는다. 그런데 그의 죄책성은 인간이 자신에게서 찾아낸 죄책성과 다름없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죄책성은 그의 삶이 <어떻게>에 놓여있다는 것을 말한다.(29쪽)

    -제우스가 앙심을 품었고 이를 통해 인간은 그의 존재의 <어떻게>로 존재하게 된다(33쪽)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대한 죄책존재라는 것, 자신의 실존의 <어떻게>에 대한 죄책존재라는 것(39쪽)

    2. 이번 읽기 범위 중에서 인간과 신의 분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 3장 부처에서 51쪽 각주 14에 보면
    무상함과 죽음을 의식하면서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탈출구>를 찾는다. 이러한 입장은 인간의 자아와 죽음을 비사회화하는 사상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비사회화는 인간의 기질에 반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나와있고
    3장의 시작 부분에서도
    ‘<깨우친 자>가 아직 깨우치기 전이나 깨우쳤을 당시 그는 사회적 관계없이 단지 자기자신과만 관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회적 연대성은 차단되어 있었다.’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는 서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관계 속에 있다고 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여기서 사회적관계가 없다고 한 것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합니다.

  • 2024-03-09 10:58

    서문까지는 공감을 하면서 읽다가 1장을 읽는 순간부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가 안된채로 읽었습니다 ㅠㅠ
    그래도 군데 군데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에 위로를 받기도 했습니다^^

    1. 아무래도 시문학(포에지)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읽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포에지'에 대한 해석을 부탁드립니다.
    P16 ".....학문이 지시하는 것이 무엇인지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학문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지시하기 위한 '시문학'(Poesie)이기 때문이다.

    2. 3장 부처 p51. 각주14.
    "......인간은 <참기 어려워 보이는 생각을 멈추면서 살아가야 하며>, 그 때 중요한 것은 하나의 <탈출구>를 찾는 일이다.......이러한 입장은 인간의 자아와 죽음을 비사회화하는 사상에서 완성된다. ....부처가 깨달음의 도에서 묘사하고 있는 반사회적인 것을 투겐트하트는 자기 초월, 자기를 없앰, 관심을 없앰, 영혼의 평안이라고 부른다...."
    투겐트하트의 불교 해석이겠지만< 자기 자신 안의 평안>안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도록 하는 유아론적 태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적 존재, 보리심, 회향심'을 생각해 볼 때 잘 이해하기 어렵군요. (불교의 가르침은 잘 모르지만)

    p45. "....그런데 그가 시간에 대해 분노하는 이유는 시간이 살아있는 것이란 점에 있다. 따라서 삶을 괴롭게 하는 가시를 시간으로 부터 뽑아 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삶을 죽음과 같이여기며 살아가는 일이다..."

    3. p79~88 사이에 나오는 개념들에 대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개념들이 이해가 되지 않으니 6장은 무척 어렵더군요.
    <무화> Nichtigkeit, 죽음은 <현존재의 전적인 무화>이다.
    역운 (Geschick)

  • 2024-03-09 11:06

    1) 저자는 서문에서 인간이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이야기를 통해 제시하고 싶은 인간의 형상을 창작” 하면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대지 위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실제 모습과, 시문학적으로 기획된 모습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면, 이미 시문학은 그런 차이의 책임이 누구 때문인지, 혹은 무엇 때문인지 질문하기 시작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시를 짓고 믿음을 갖기 시작한 인간이 자신을 시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신과 같지 않다는 이상한 느낌과 고통을 경험한 점”으로 인해 “시로 지어진 신들이나, 믿음의 대상이 된 신들이 살아남았다” 고 합니다. 그 결과로 “인간은 죄책존재”가 되었다고 보고요.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 죄책존재가 된 인간” 이라고도 합니다.
    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질문하자면,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상상하는 형상(신)을 창작해 놓고,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인간 자신은 죄를 지은 탓이라고 스스로 정의했다는 의미일까요?

    2) 연결해서, 본편에 신화와 종교 철학으로 이어지는 저자의 해석은 이러한 활동을 이야기로 보고 이야기를 통해 실제로 유한한 인간 존재가 어떻게 계속 문명을 지탱해 오고 있는가를 추적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을까요?

    3) 그렇다면, 판도라를 보내 여성을 첫 번째 악으로 언급했다는 이야기는 다른 버전을 상상해내는 또 다른 이야기를 통할 때 “여성에 대한 사회적, 현실적 경멸”을 해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아질 수 있을까요?

  • 2024-03-09 11:37

    인간의 유한성 : 죽음과 삶의 드라마로서

    저자는 죽음과 삶의 드라마로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죽음도 삶과 분리되어 하나의 드라마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책에는 여러 사람의 다양한 삶의 드라마는 그려 놓았지만 죽음의 드라마는 잘 보이지 않는다.
    ( 표지에, ‘ 죽음과 삶이 서로 대립적이며, 죽음은 삶과 원수라는 생각대신, ... ... ’라고 써 놓았지만 본문에서는 죽음과 삶의 이런 대비는 찾기가 어려웠다. )

    그래서 생겨난 나의 시선

    1. 삶의 드라마는 참으로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죽음의 드라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찰나적인 죽음의 순간 이후는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2. 죽음과 삶은 따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삶이 있거나 없거나 할 뿐이다.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 삶이 없음에 의미를 준 것일 뿐이다. 즉, 죽음이란 삶이 끝나는 순간을 지칭하는 개념어로 존재한다.

    3. 사람은 죽음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삶의 소멸을 더 두려워하는 게 아닐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의 탄생 이후, 진화를 거쳐 유전자 속에 각인된 본능일 뿐이다. 또는 죽음이라기보다 잘 모르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죽은 사람이 불쌍해 보이는 이유는 남은 가족 등 연관된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 지거나, 나의 죽음이 연상되어 느끼는 감정으로 생각된다.
    ( 개인적 경험으로는, 어릴 적 내가 죽음을 두렵게 느꼈던 이유는 나의 죽음 이후 아니 삶이 끝난 후 화장 때 뜨거울까 걱정이고 또는 매장 때 썩어가는 느낌이 싫을 것 같아서라는 게 이유이었댜. 지금도 약간. )

    질문 1.
    역자 해설, P.7,16, 죽음의 세계는 . . . 플라톤적인 이데아의 세계나 불교적인 니르바나의 세계와 같다. - 사실일까요?

    질문 2.
    3장 부처, P.45,6, 무상함이 곧 고통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 사실일까요?

    질문 3.
    5장 바울, 이 책에서는 죽음에 대한 바울의 생각이 잘 안 보여요.
    바울신학연구소 - ‘죽는 것이 두려운가?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천국의 소망스런 삶의 시작이다.’ - 사실일까요?

  • 2024-03-09 12:03

    1. 인간은 죄책존재라는 전제하에 삶과 죽음의 드라마는 시작되어야 하는 것인가요 ?

    2. p79 <이제 철학은 실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 더-이상-여기에-존재할 수-없음> 이 가장 고유하고 본래적인 "존재할 수 있음"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른다. 즉 자신이 <존재하고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안에서 자신의 고유한 본래성을 "더-이상-여기에-존재할 수-않음"에 근거해 이해하고 기투해야 하는 현존재, 그것도 극단적으로 개별화되고, 격리되고 중성화된 현존재의 경우, 그 존재는 어느 정도까지 근원적이고 항구적인 죄책존재인가? 라는 점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무화>에 대한 사상과 연결된다.
    : 어떻게 존재할 수 없음이 존재할 수 있음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아래의 질문이 떠오르는지, 그 개연성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떠올랐는데, 무화로 연결된다는 말이 약간은
    그렇구나라는 생각은 하게 되지만, 이것도 하이데거의 사상 안에 있는 흐름인 거 같은데, 좀 더 자세히 알아야 할 거 같습니다.

    3. p88 그리스적 사유와 독일적 사유는 역운적인 관계로 설정되고 있다 ~ 하이데거는 영혼의 구원을 추구하는 개별자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역운적인 과제를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사유하고 있다. 그것은 민족을 옹호하는 사유로 이어진다. ~ 마지막 신은 사유와 존재, 인간과 신의 역운적 관계를 종말론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신으로서 민족적으로 규정되고 있다. 선택되고 소명으로 불리어진 독일적 사유 안에서 은총에 의해 정당화된 존재와 같은 것을 하이데거가 궁극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여부는 결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 이렇게 이어지는 사고의 개연성은 어떤 것인지, 여기서 민족적이란 건 어떤 것인지...

  • 2024-03-09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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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탐구세미나] 4회차 후기-기독교, 이슬람교와 죽음 (2)
인디언 | 2024.04.03 | 조회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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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탐구세미나]4회차 질문 올려주셔요~ (9)
요요 | 2024.03.29 | 조회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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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탐구세미나] 3회차 세미나 후기 (5)
이송지 | 2024.03.25 | 조회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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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탐구세미나]3회차 질문 올려주세요. (13)
요요 | 2024.03.22 | 조회 130
요요 2024.03.22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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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탐구세미나] 후기_<인간의 유한성> 2차_2024.3.16. (10)
박지원 | 2024.03.18 | 조회 163
박지원 2024.03.18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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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탐구세미나]2회차 질문 여기에 올려주셔요~~ (11)
요요 | 2024.03.15 | 조회 126
요요 2024.03.15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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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과 유한성, 형이상학과 인류세철학 - 잠시 딴짓했어요. ㅋ
문탁 | 2024.03.15 | 조회 117
문탁 2024.03.15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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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탐구세미나] 1회 후기 -끝까지 읽어보자... (4)
기린 | 2024.03.09 | 조회 126
기린 2024.03.09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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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탐구세미나] 1회차 질문 올려주세요 (13)
요요 | 2024.03.07 | 조회 172
요요 2024.03.07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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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탐구세미나] 시즌1 개강 안내 (1)
요요 | 2024.02.20 | 조회 193
요요 2024.02.20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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