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의 미리덕질> SF매니아 정군님 인터뷰-'수확'의 읽기말고요~

기린
2024-02-29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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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군님과 SF인터뷰_ '수확'의 읽기 말고요~

 

문탁네트워크에서 철학학교 튜터를 맡고 있는 정군님이 SF매니아라는 말은 익히 들었다. 그래서 르귄의 작품에 대한 코멘트도 들을 겸 보라방에서 만났다. 소설을 거의 읽지 않는 편인데, 판타지소설인 『반지의 제왕』을 읽은 후 이 세계의 매력을 알아차렸노라 했다. 지금도 『듄』 전작을 사놓고 완독을 하고 영화를 보려고 벼르고 있지만, 끝나지 않는 일들로 인해 미루는 사이 영화는 계속 개봉되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르귄의 에세이를 읽으며 기존에 내가 공부했던 동양고전과의 연결지점을 찾을 기대감을 드러냈다. 정군님은 SF소설을 마주하는 나의 이런 ‘기대’에 대해 우려를 밝혔다.

 

 

정군: 저는 르귄의 작품에 대해 그런 ‘기대’를 갖고 접근하는 태도가 좀 불편해요. 여기서 뭔가 새로운 앎을 발견해야지 하는 그런 태도가 르귄이 피하고 싶은 태도인 것 같다는 거예요. 말 그대로 텍스트를 하나의 농경지처럼 생각해서 여기서 어떤 수확을 거둘거야 이런 거잖아요. 그거는 일견 텍스트를 굉장히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은 아주 자기중심적인 거라고요. 마치 자연과학자들이 자연에서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라고 하는 것과 같은 태도죠. 텍스트에 접근할 때 우발성을 그냥 눌러놓고 가는 거잖아요. 사람이니까 그런 기대감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마음먹은 걸 찾는 데 힘을 쏟지 말고, 오히려 그런 게 있음에도 나는 우발적인 마주침들을 훨씬 더 풍부하게 만나고 싶어 라는 방향으로 힘을 써야 된다는 거예요. 저는 르귄을 읽는 무수하게 많은 독법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읽기도 전에 일단 찾을 것들을 가지고서 접근하는 게 좋은 것 같지가 않다는 생각이 일단 듭니다.

 

 

신유물론에서 읽었던 ‘우발적인 마주침’을 여기서 만날 줄이야. 나의 기대가 나의 표상을 더욱 강화해서 내안에 잠재한 것들을 눌러놓는 결과 르귄의 세계를 받아들이는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우발적인 마주침은 나의 표상 너머에 표상되지 않는 세계까지 가늠할 때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정군님이 보는 르귄의 세계는 어떤 곳일까.

 

 

정군: 르귄의 세계에서는 신화적인 것과 과학적인 것을 한 작품 안에서 만나게 하거나 이런 식인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과학적 세계라고 부르는, 말 그대로 남성 중심적인 세계 안에서 잊힌 지식들, 예를 들면 남성 언어 안에서 저건 과학이 아니야 저건 앎이 아니야 라고 불렀었던 중세의 마녀들이 약초를 캐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산파 역할을 했었던 이런 것들을 이 세계 안으로 끌어오는 겁니다. 묻혀있던 목소리나 잊혀있던 목소리를 이 세계 안에서 다시 끌어내서 그 목소리들로 다른 세계를 구축하는 거예요. 그런 설정 속에서는 정상 비정상 경계가 없어지고 그러겠죠. 한편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가지고 있는 그림자가 반전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어둠의 왼손』 같은 작품에서 르귄이 전하는 메시지 중에 한 가지는 사랑이라는 게 뭐냐, 이성애적인 것만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그러면서 성적 경계를 허무는 것 같은 설정들이 계속 나온단 말이에요. 그렇게 지금 우리가 일부일처제의 가족 체제를 정상적이라고 보는 모습들이 아닌 형태로 구성된 세계를 실제로 보여줌으로써, 이성애적 사랑이 지배적인 이 세계가 사실은 얼마나 많은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을 그림자로 만들어 놓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거예요.

 

 

SF소설에 대한 코멘트를 들으러 만났다가, 르귄의 작품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대한 코멘트를 제대로 들었다. 정군님의 코멘트로 ‘평평한’ 읽기가 아니라 입체적 읽기로, ‘수확’의 읽기에서 ‘채집’의 읽기로 나아가는 읽기를 발견했다. 예상치 못한 발견, 이것이 진정 ‘우발적인 마주침’인가 ㅋㅋㅋ 이 마주침을 선사해준 정군님^^ 땡쓰입니다~ 인터뷰에 오면서 선물로 준 르귄의 ‘서부해안 시리즈’들도요, 르귄은 정말 이야기를 잘 만드는 사람이라는 코멘트도 기억해 두겠습니다~

 

 

 

댓글 9
  • 2024-02-29 19:46

    아, 그렇군요~ sf를 통해 뭔가 새로운 경험, 알지 못한 세계로의 탐험을 (안전하게 ㅋ) 해볼까 하고 신청했는데, 이런 중요한 포인트가 있었네요^^ 더 재미있을 것 같군요 ㅎ

  • 2024-03-01 09:26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는데
    제가 듄2을 일찌감치 예매해놓고
    (전 그렇다고 이걸 책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어요)
    듄1을 다시 보려고 맘 먹었는데

    갑자기 동은이가, 그걸 언제 다시 보냐구
    유투부에서 요약본을 보라는거에요.

    오잉? 그뤠? (다른 한편으로 그래도 되는걸까? 사람들은 영화를 왜 요약본으로 봐? 이런 질문을 삼키면서)
    유투브에 들어가 듄1 요약이라는 검색어를 쳤더니
    와우....쫘르륵....

    그거 몇 개 보려다가
    음, 하마트면 유투브 프레미엄 결제할 뻔 했어요.

    광고 덕분에 시간 낭비 덜 했다는^^

  • 2024-03-01 16:14

    감사합니다.~ 밑천이 있어야 어떤 '우발적 마주침'도 있을 듯 한데..;; 그래도 이 말을 마음에 넣고 소설을 읽어보겠습니다.

  • 2024-03-04 14:01

    지금 용아맥은 아니고 판아맥에서 듄2 보고 왔어요.
    음...

    듄1 본 후 느낌은, "와, 사막에서 적벽대전하는 것 같아..." 였는데...ㅋㅋ
    그래도 괜찮았어요. 그래서 듄2를 봐야겠다고 생각했죠.
    어제 듄1 복습하고 오늘 아침 다녀왔는데...

    처음에는 우앙~~~ (비주얼과 사운드는, 정말 압!도!적!이에유....3만원 주고 봐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했다가
    그다음 핵 어쩌구 나올 무렵....오잉...뭐지?...했다가
    마지막..메시아주의..에서는.... 완죤 쩝! 하고 나왔어요.

    게다가 판교현대백화점에서는 2시간 지났다고 주차료를 6,000원이나.... 기분이 완죤 거시기해졌어요.

    저는 영화가 서사로 환원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정치적 pc주의자도 아니에유^^)
    뭔가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곳곳에서 환호 밖에 없으니
    내가 뭘 놓치고 있나, 라는 생각도 들고
    개취의 차이인가 싶기도 하고
    내가 sf를 모르나 싶기도 하고
    반지의 제왕을 안 봐서 그런가 싶기도 하고 그렇네유.
    (정군님, 한 수 갈쳐 주시와요^^)

    어쨌든 르귄언니한테 돌아가는 걸루다가^^

    • 2024-03-04 16:10

      오잉... 제가 원작을 아직 읽기 전이라(3년 째 ㅠㅠ 토템처럼 방에 모셔져 있습죠) 뭐라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만, 제가 알기로는 프랭크 허버트가 <반지의 제왕>에 크나큰 영향을 받았으나, 톨킨 스타일의 도덕적 세계관에는 선을 긋는다고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톨킨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메시아-영웅주의로 서사를 짜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거든요. 반면에 프랭크 허버트는 ‘영웅이고 메시아고 종교고 그딴 건 결국 사회의 재앙이 될 뿐’이라는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만약 영화에서 메시아주의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났다면, 원작에 대한 헐리우드적 변환 때문이거나, 3편의 뒤집기를 예비하는 복선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ㅎㅎㅎ

      • 2024-03-04 16:29

        음...한번 보시오

    • 2024-03-04 16:34

      저두 귀동냥한 바에 따르면 영웅주의가 오히려 사회를 망친다는 메시지를 드러내는 거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듄 3을 집필 중이라는데 헐리우드적 변환이 될 지, 뒤집기가 될 지는 나오기 전까지는 알 수 없을 듯... 폴의 아들 레토 3세의 이야기를 담을 지도 무척 궁금합니다^^

    • 2024-03-04 17:02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같은 장르(스페이스 오페라)의 작품들 중에서 그러한 미감을 거의 거스르지 않는 작품으로는 로이스 맥마스터 부졸드가 쓴 <보르코시건 시리즈>가 있습니다요. 보통 스페이스 오페라물이 ‘제국’을 배경으로 하다보니 좀 거시기한 게 많이 나오는데 요건 그 거시기한 코드들을 뒤집는 작품입니다. 귀족정 체제이나 반귀족적이고, 남성중심 군사문화 체제이나 반군사적이고 히어로물인데 안티히어로고, 그런 뒤집기가 작품 전체에 녹아 있으면서도 서사도 탄탄하고 그렇습니다. 아마 영화화는 안 될 듯하지만... 읽는다면 보르코시건 시리즈를 추천합니다 ㅎㅎㅎ

      • 2024-03-04 17:05

        다만 이게 종이책은 절판이라 전자책만 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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