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잠시 목수일을 멈춥니다 (完)
남어진
2024-05-10 00:32
197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나는 밀양에서 76만 5천Ⅴ짜리 송전탑을 볼 때마다 저 전선을 끊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높이 100m가 넘는 송전탑이 나를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 때마다 상처가 패이는 기분이다. 단 한 번도 동의한 적 없이 세워진, 높이 100m 철탑 아래에서 우리는 매일 살아간다. 송전탑을 세우겠단 결정과 그에 따른 진행 과정의 폭력성, 그에 대한 책임은 국가 권력에 있을진대, 고통의 책임은 계속 송전탑 아래의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아이러니이다. 상처 회복의 영역과는 별개로, 항상 근처에 존재하는 삶이다.
나는 아직도 철탑을 볼 때마다 ‘내가 뭘 잘못해서 송전탑이 세워지게 되었을까’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가끔 전선을 끊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사실은 실행, 아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내가 그런 선택을 하는 순간 이 전선 끝에서 전기를 사용하는 사람의 삶은 망가지게 된다. 밀양이 불평등하고 부정의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이 반대편에 사는 사람들의 안전과 권리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밀양 할머니들은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 살아 생전에 송전탑 뽑히는 것은 못 볼지 몰라도, 밀양을 찾았던 많은 사람들이 결국에는 저 철탑을 뽑아 줄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2회] 버려진 자두밭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일상을 살아 내는 운동을 하고 있다. 그 운동은 다른 말로 ‘소멸’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흙이 된다. 밀양 사람들은 한때 생을 걸고 최선을 다해서 싸웠고, 이제 그 싸움은 끝났다. 싸움이 끝나고, 이제 나에게 남은 일은 이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이 땅에서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식구들이니까. 투쟁 뒤에도 삶은 계속되니까. 먹고사는 일이 바쁘고 고되다 보니 참 힘들었다. 지역에는 생계를 해결할 만한 일거리가 없고, 내가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은 모두 서울이었다. 밀양에서 서울까지 왔다갔다, 참 멀고 힘든 길이지만 그래도 악착같이 돌아왔다.
밀양에는 내가 할 일이 있고, 아끼는 사람이 있다. 가끔 전화가 오면 거름이 될 깻묵을 나르고, 문을 고치며 살고 싶었다. 아프다는 한마디에 배가 터질 만큼의 죽을 끓여 주는 할머니에게 빚을 갚으며 살고 싶었다.
탈핵 운동, 기후 운동, 분산형 재생 가능 에너지*를 만드는 운동. 그것은 밀양이 앞장설 수도 없고, 앞장서면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책임감도 없이 일상에서 물처럼 사용하는 전기가, 실은 수많은 이들의 희생 아래 만들어지고 있음을 정확히 확인한 것으로 우리의 몫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여전히 밀양에 뿌리를 두고 사는 이들의 일상의 투쟁을 지키는 것이 소중했다.
‘나’의 운동이 끝나 가는 동안 기후 위기가 세상의 가장 뜨거운 의제가 되었다. 파국의 시간이 고작 반 세기도 남지 않았다는 과학적 근거들이 속속 공개되고, 이전과는 다른 날씨들은 우리 피부를 감싸고 있다.
올겨울은 마치 장마 같았다. 눈비를 맞지 않은 한 주가 없었다. 제주에 가면 제주에 대설, 서울에 가면 서울에 대설, 강릉에 가면 강릉에 대설. 밀양에서 10년 동안 봐 왔던 눈보다 올 겨울에 본 눈이 훨씬 많았다. 비는 또 어떤가. 비가 와서 일을 못 하면 그날의 벌이가 없어지는 입장인지라 그렇다고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냥 그치기를 바라며 일하는 수밖에 없다.
나야 비를 맞고 일하면 되지만, 농부들은 얼마나 속이 탈까 싶었다. 가물어도 속이 타고, 땅이 마르지 않아도 속이 탄다. 그들은 젖은 땅에 감자를 심지 못했고, 눈비로 흐린 기후 탓에 수박을 제대로 키워 내지 못했다. 기후 위기의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기후 운동은 시대의 가장 활발한 투쟁 중 하나가 되었다. 짓밟히는 것들은 지키고, 파괴하는 자에겐 맞서 싸워야만 했다. 기후 재난에 스러지지 않을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대책을 찾아야만 했다. 동시에,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해질 날씨에 적응하고 생존할 장기적인 계획도 필요했다. 이 과정 속에서 자본과 정치에 정확한 책임을 묻고 잘못을 바로잡는 것,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다시금 짓밟히는 생명이 없도록 하는 것, 불평등을 없애는 것. 이것이 내가 이해한 기후 운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 사회의 기후 운동은 당연히‘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는 문제를 함께 다룰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만의 착각이었다.‘우리 모두가 밀양’이라던 사람들은 밀양이 힘이 빠지자 빠르게 투쟁을 잊었다. 적응과 생존을 위해서 전기를 더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나 많이 생산해서 이렇게나 많이 버려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사라졌다. 송전 선로 공사로 인해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는 문제는 홍천에서, 또 봉화에서 반복되었다.
▲ 전기로 돌아가는 서울
자동차, 버스, 히터, 에어컨 등 화석 연료로 작동하는 모든 것이 이제 곧 모두 전기화될 것이란 예측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폭증하는 전기 수요를 어떻게 나를 것인가? 어디에서 얼마만큼 생산하고, 어디로 송전할 것인가? 전문가라고 불리는 자들조차 모두 생각이 다르다.
그래서 우리의 운동은 ‘이 모든 과정에서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방식으로 변화시켜야 하는가?’라고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나에게, 그리고 모두에게 남긴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밀양의 작은 목공소도, 서울 어느 대학의 연구실도, 경기도에 생긴다는 초대형 반도체 클러스터도 전기 없이는 돌아갈 수 없다. 도시의 높고 반짝이는 빌딩들은 전기로 강철을 녹이는 제철소들이 지탱하는 건물들이다. 그렇기에 이 문제에는 모두가 책임이 있다.
하지만‘밀양 대책위 활동가’라고 불리는 나조차 끊임없이 질문하지 않았다. 솔직히, 누군가가 대신 질문해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분산형 재생 가능 에너지: 대규모 집중형 전원과 달리, 전력 소비 지역 부근에 소규모로 분산하여 배치하는 발전 설비이다. 신·재생 에너지를 이용한 발전 설비와 자가용 전기 설비에 해당하는 발전 설비 등이 있다.
▲ 봄, 할머니, 송전탑.
분투: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노력함
송전탑이 있더라도, 이대로 살고 싶다. 부서졌던 것들을 다시 이어 붙이며 살고 싶다. 그런데 목에 칼이 들어온다.
정부는 2년에에 한 번씩 전력 수급 기본 계획을 발표한다. 이번에 발표될 계획에 신규 핵 발전소 건설이 포함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윤석열 정부는 총선에서 패배했음에도 정책 기조를 바꾸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국회 동의 없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업은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핵발전 진흥이 정권 창출의 근거라고 판단하는 듯하다. 발전소 2기 신설은 핵 산업계에 10조짜리 일거리다.
밀양 송전탑 건설의 근거였던 신고리 5, 6호기는 2018년 공론화되어 국민 500명에게 건설 재개 여부를 물었고, 이제 곧 완공을 앞두고 있다. 이제는 밀양 송전탑이 있으니 많은 전기를 보낼 수 있다는 이유를 근거로 다시 들어 신고리 7, 8호기 계획이 언급된다.
두렵다. 계획에 따라 정말 건설되면, 세기 말까지 가동할 수 있는 수명을 가진 핵 발전소가 또 생긴다. 발전소 12기가 밀집한 세계 최대의 핵발전 단지가 되는 것이다. 지금보다 몇 배나 많은 전기가 흐르는 송전탑……. 이건 할머니와 내가 그리던 미래가 아니다.
같은 싸움을 또 해야겠다고 재차 마음먹는 것은, 처음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어떤 지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을지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다시 뼈 아프게 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 또한 그렇다. 사람의 사지를 붙잡고 절단기를 목에 들이대어 쇠사슬을 끊었던 경찰, 사람들이 울고 있는데 조롱하듯 엔진 톱으로 소나무를 베던 한전…… 그런 폭력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다.
10년이 지난 지금, 이 싸움을 다시 해야 된다고 말하는 곳이 여전히 밀양이란 사실이 괴롭다.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평생 남을 후회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어느덧 연재 마지막 글이다. 공부를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닌데 다달이 글을 쓰겠다고 덤빈 것은 참 용기가 가상한 일이었다. 처음엔 신나기도 했고, 괴롭기도 했고, 쓰면서 몰랐던 내 모습을 보게 되는 신기한 일이기도 했다. 속에서 삭혀 왔던 말들,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쏟아 낼 곳이 그동안 없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 연재의 꼭지명에 쓰인, ‘분투(奮鬪)’라는 말의 뜻을 찾아보았다. ‘있는 힘을 다하여 싸우거나 노력함.’ 나는 이제 분투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매번 스스로 주문을 외었다. 나는 지금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우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래서 글을 쓸 때마다 분투하는 친구들이 떠올라 부끄러웠다.
있는 힘을 다해 싸우는 친구들을 보면 괜히 미안하거나, 그 사람이 빛나보이거나, 저 사람의 희생이 숭고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들을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저 코앞에 직면한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 혹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품을 들여 싸우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새로운 핵 발전소를 간절히 막고 싶다.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싸우기 위해, 잠시 내 생업인 목공소 일을 멈춘다. 싸우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몸과 마음에 상처가 난다. 그래서 이번엔 더더욱 나를 돌보고, 함께 싸움을 만들어 갈 사람들을 서로 잘 돌보며 가보려고 한다. 그것이 밀양의 할머니들이, 강정의 친구들이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다.
신규 핵 발전소 건설이 말이 안 된다는 근거는 이미 차고 넘친다. 민주주의, 안전, 경제성, 기후 정의, 그 어떤 것을 따져 보아도 이것은 실행해서는 안 되는 계획이다.
할 일이 넘친다. 밀집된 핵 발전소와 송전탑이 얼마나 비민주적인 에너지인지 외치는 일. 안전한 사회와 지금의 에너지 체계가 얼마나 상충되는 것인지 설득하는 일. 핵 산업계의 이익 보장을 위해 재생 가능 에너지를 억제하는 것이 곧 기후 위기 가속화임을 알리는 일. 덜 쓰고, 덜 만드는 세상을 꿈꾸는 일.
지역 주민은 생을 걸고 투쟁한다. 관심 있는 누군가는 이 투쟁에 연대를 표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넘어, 당신과 함께 모두가 에너지 문제의 당사자인 운동을 만들고 싶다. 과거 밀양의 운동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마음을 먹었으니 신명나게 길을 걸어 보려고 한다. 이 길에 함께하는 친구들이 생기기를 바라며.
▲ 밀양 상동면 고정마을에 사는 한 농부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지금까지 '남어진의 현장분투기'를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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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밀양이다, 수없이 외쳤던 그 말을 기억하며, 6월 8일 밀양에 갈게요~~
맞어. 기후위기와 에너지라는 묵직한 질문이 있지..너무 무거워서 피하고 싶기도 한데, 정면으로 맞서보자 하니,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겠군요.
지난번 탈탈 낭독회때 반가웠어요. 간절히 막고 싶은 그 마음 전해줘서 고맙습니다. 또 만나요 어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