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회)따로 또 같이

가마솥
2024-04-15 11:29
223

    고기리 집은 2층집이다. 설계 컨셉을 ‘따로 또 같이’로 잡았다. 건물 전체 덩어리를 5개 정도로 나누어, 함께 쓰는 공간과 독립적으로 쓰는 공간이 분리되게 설계하였다. 당시 공항동에 사셨던 장인, 장모님을 모시기 위하여 1층을 독립공간처럼 방과 화장실 그리고 거실을 크게 만들었다. 2층의 아이들 방도 침실과 공부방 그리고 거실을 두었다. 우리 부부도 침실과 전실 공간을 두었다. 음식을 나누는 식당과 부엌은 1층 가장 좋은 뷰를 가진 공간에 두었다.

 

 

 

    장모님이 치매로 혼자 생활하기 힘들어 졌다. 우리 집에 오셔서 4년을 함께 지냈다. 미리 준비한 아래층, 부모님 공간에 계셨으니 지내시는데 크게 무리가 없었다. 문제는 3년 전에 아들놈이 집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발생했다. 녀석들이 결혼하기 전에 사용했던 2층, 방 2개와 거실공간에서 그럭저럭 지낼만 했는데, 아이가 생기고 고 녀석이 자람에 따라 ‘아이의 공간’이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모든 일상에서 아이가 1순위이니, 공간도 녀석의 성장에 맞추어 늘려 주었지만 항상 북적거렸다. 젊은 부부들의 살림살이를 우리들 공간으로 재배치하여 공간을 확보하여도 아이의 장남감이 곳곳에서 발에 채이기 일쑤였다. 문득, 이 넓은 공간에도 세 집 살림이 힘들다니, 옛날 우리 5형제는 그 작은 고향집에서 어떻게 살았지? 하고 떠올려 본다.

 

 

 

 

 

그 전에 어떻게 살았더라?

 

    올해 들어 장모님을 더 이상 집에서 모시기 어려워졌다. 파킨슨과 치매가 더욱 심해져 거동할 수 없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계신 장모님을 시간마다 이리 저리 옮겨 드려도 욕창이 줄어들지 않는다. 전문적인 처치가 가능한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규칙적인 재활운동도 시켜드린다니 더 나빠지지 않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 부부의 시간 사용에 좀 숨통이 트였다.

이어서 아들 녀석이 분가(分家)를 선언한다. 말하지 않았어도, 할머니와 아이의 돌봄에 매어 있는 엄마 아빠의 일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녀석도 함께 느꼈으리라. 일하는 젊은 부부를 위하여 아내가 매끼 식사를 준비하고, 내가 아이를 유아원에 등/하원시키는 일은 정해진 시간대로 움직여야 하는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공간문제와는 별개로 시간의 문제였다. 분가하면 이 일들을 오롯이 녀석들이 해결해야 하니, 힘들게 뻔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독립해야 할 일이다. 나도 용기를 내어 손주놈과 ‘빠이빠이’를 했다. 두 살림이 빠지니, 온 집안이 휑하다. 언제든지 팔 벌리며 다가 와서 이제 막 “합빠”와 의사소통을 시작한 손주 놈이 없어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집을, 아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무던히도 끼고 살았던 옷이며 책이며 많은 살림살이들을 정리했다. 덕분에 그 동안 그렇게 찾아도 안보이던 물건을 찾는 행운도 있었다. 대청소하면서 이제야 인생 2막을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그 느낌은 공간에서부터 왔다. 여기 저기 빈공간이 많이 보인다. 이렇게 넓었나? 장모님이 오시기 전에도 우리 부부 둘만 살았는데, 그 때에도 이렇게 넓었는지 새삼스럽다. 아니지, 지난달만 해도 아무리 정리해도 짐을 쌓아 놓아야 했던 깔끔하지 않았던 공간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짐들을 정리하니 새로 지은 집에 이사 온 것 같다. 나만 그런지 몰라도 신혼집(!) 꾸리듯 새로운 공간 사용을 구상해본다. 건물 전체 5개 덩어리를 따라서 손님방, 음악방, 악기방, 명상방, 내 공부방, 아내 서재(!).....등등.

 

신혼과 황혼사이

 

   갑자기 “각방 함 써보는 게 어때요?” 아내가 제안한다. 윽? 각방? 이 양반은 신혼 기분이 아닌가 보네? 이것이 세간에서 회자되는 황혼00? 순간 당황했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면, 잠귀가 아주 밝아서 옆에서 부스럭 소리만 내도 잠이 깨는 나도 싫지는 않다. 젊을 때에는 잠이 깨도 곧 바로 다시 잘 수 있지만, 요즘은 한번 깨면 날을 새야 한다. 해서, 굳이 한 침대에서 함께 자는 것을 고집할 이유는 없다.

얼마 전, 텃밭에서 만난 앞집 70대 노인장이 내게 물었다. “신 사장은 각방 쓰는 겨?” “아뇨. 저는 아직......” “그려, 함께 자는 게 좋아.” “왜요?” 얼마 전에 당신이 잠을 자다가 뇌졸중이 왔는데, 다행히 부인이 깨워서 응급수술을 받고 부작용 없이 치료하였단다. 그런데, 각방을 쓰는 당신 친구 분은 그만 유명을 달리했다는 얘기를 하신다. 나이 들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서로를 챙겨야하는 부분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공간을 함께 쓰는 것은 시간을 같이 쓰는 것과 같다. 4대가 함께 살았던 지난 삼년동안, 크게는 1층, 2층으로, 세부적인 공간들도 가능한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었지만, 힘들었던 부분은 동일 공간으로 인하여 각자의 시간이 제약되는 순간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젊을 때에는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야 좋은 부부인 것으로 인식하여, 깨어 있으나 자고 있으나 항상 함께 있으려고 노력하였다. 이제 나이 먹었으니 서로의 시공간으로 독립해서 살아 보자는 것이다. 한국 남성중에 은퇴하여 부인과 함께 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려 하나, 그 동안 독립심을 키운 부인은 황혼이혼은 아니더라도 내 시간을 가지겠다고 선언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들었다. 이해할 수 있다. 은퇴 전, 사회생활을 하던 남성의 시간과 공간 사용에 부부생활이 맞춰졌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요즘은 젊은이들도 꼭 한 침대를 쓰는 것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더블 침대를 싱글 침대 두 개로 교체하는 부부가 늘었다는 것이다. 부부라고 해서 늘 같은 공간, 함께 하는 시간이 많은 것만이 능사가 아님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나이듦에 따른 서로의 돌봄이 필요한 시기에 항상 독립적으로 따로 따로 지내는 것만도 좋은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따로 또 같이’의 지혜는 신혼에도 황혼에도, 또 공간에도 시간에도 필요하다.

 

따로 또 같이

 

<공부방이냐 서재냐>

    4년간 비워 놓았던 어머니 집을 비우는 일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보관해야 될 물건과 쓸만한 물건을 정리했다. 장인이 쓰시던 큰 원목 책상이 보인다. 그냥 버리기에는 아깝다. 2층, 작은 방을 개조한 나의 공부방에 놓아 보니, 진한 밤색 책상이 아주 멋지다. 책상 옆쪽에 책장을 들이면 좀 좁긴 하겠지만, 그럴 듯한 서재가 될 수 있겠다.

1층, 2층 가릴 것 없이 빈 공간에 채워져 있는 문제의 책들을 정리한다. 장인이 쓰시던 책장과 우리 책장을 나란히 진열하여 주제별로 책들을 옮겼다. 최근에 인문학 공동체 ‘문탁’을 들락거리기 시작했으니 내 책은 책장 한 두 칸 정도이고, 대부분 10년 내공의 아내 책들로 채워진다. 열심히 책들을 정리하고 의기양양하게 "어때?"하며 아내의 폭풍칭찬을 기대한다. 그런데, 뜻밖의 제안을 한다. 책장과 어울리는 그 밤색 커다란 책상을 거실 공간으로 빼내고, 그 책상을 당신이 쓰면 좋겠다는 것이다.

좋을 수 없는 기분을 달래면서 재배치하였다. 전보다 훨씬 무겁다. 그런데, 그곳을 내가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고는, 배치가 훨씬 좋다. 마치, 아내 사무실과(아들놈 표현으로 ‘OOO원장님’) 그녀의 비서 공간에 내가 들어 간 기분이 든다. 흠...... 그래.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은퇴 후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세상은 온통 디지털로 바뀌었고, 나는 디지털 치매 노인에 다가서고 있었다. 모든 일정, 예약 등을 비서가 해주는 생활을 하였으니, 내가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해결하려면 무슨 단계가 그렇게 많은 지, ID 생성 단계에서 때려 친 적도 있다. 어쩌다 외식을 하려면, 꼭 햄버거 집이 아니어도 이제는 키오스크 앞에서 주문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이제는 비서의 마음으로, 바뀐 세상에서 내 스스로 부딪혀 보는 즐거움을 찾기로 했다.

 

 

 

<명상방이냐 악기방이냐>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서 띵똥거렸던 클래식 기타를 다시 연습해보고 싶었다. 한 번도 누구에게 배워보지 않았으니, 연주(?)할 수 있는 곡은 정해져 있고 틀리는 부분은 항상 똑같다. 운 좋게도 동네 근처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첫 시간, 중간에 틀리기는 하지만 내가 제일 잘하는 ‘로망스’를 연주했다. 한 곡을 쳤을 뿐인데, 나의 연주자세, 탄현법 등 앞으로 연습할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세고비아 시대에 기타를 접한 나는 그의 연주법을 따라 연습하였는데, 그 방법으로는 안 되고 다시 배워야 한다고 한다. 오래된 습관을 바꾸는 것은 처음 배우는 것보다 어렵다. 하지만, 내가 막혀있던 수준을 넘을 수 있으니, 기꺼이 바꾸기로 하였다. 사는 방법도 바꾸어 갈 텐데, 연주법 정도야 리셋 수준으로 바꿀 수 있다. 맘 놓고 연습할 수 있는 공간도 있어야 하겠지?

2층에서 끝 쪽에 있는 방이어서 제일 조용하고 창밖으로는 숲속만 보이는 아들 부부의 침실을 악기 연습하는 방으로 만들었다. 나의 기타들과 보면대 등을 옮겨 놓았다. 그런데, 아내는 요즘 매일 새벽마다 침대에 앉아서 하는 명상을 그 곳에서 하겠다고 한다. 하여, 그 공간을 텅 비우기를 원한다. 하필이면 왜? 꼭 그곳이어야 하냐고..... 악기방이냐 명상방이냐, ‘악명대전’이 벌어졌다. 아내가 연습하다가 지금은 그만 둔 아코디언을 슬쩍 들여 놓았다. 명상할 때는 어차피 눈감고 하는 것이지 않은가? 장인 칠순 기념으로 받은 ‘고불심(古佛心)’의 글씨를 편액해서 걸어 놓아 명상방의 분위기를 내는 것으로 평화협정을 맺었다. 내 마음으로는 악기방이고 아내의 마음으로는 명상방일 것이다. 고집한 이유는 있다. 은퇴 후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리라 하였지만, 그동안 가장(家長)의 무게로 무디어진 나의 욕망을 살려 내기가 쉽지 않았다. 겨우 찾아 낸 것 중에 하나가 기타 연주이니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운동 좀 하시죠?>

    생일이다. 우리 가족은 생일에 위시 리스트(Wish List)를 단톡방에 올린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지 허벅지 운동을 할 수 있는 운동기구를 올렸다. 페북만 열면 광고에 뜨는 몇 만 원 짜리 그 물건이다. 당뇨가 조금 있어서 약을 먹는데, 당뇨약 끊는 데에는 이 허벅지 운동이 최고라는 광고에 솔깃했다. 그 것을 본 아내가 ‘이 때다’ 싶은지, 1년 짜리 피트니스를 끊어 왔다. 나는 축구, 골프 등 놀이가 수반되지 않는 (근력)운동은 질색이다. 하지만, 어쩌랴. 아내가 함께 운동하자고 내미는 회원등록을 뿌리칠 수 없다. 하루에 서너 시간을 붙어 있을 것이니, 반은 싫고 반은 좋을 것이다. 은퇴 후에 부인이 자기 생활하느라고 함께 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고 불평하는 친구들에 비하면, 난 행운아인 것이지?

처음 보는 기구들이니, 간단하게 그 사용법을 배우고 힘을 써 보았다. 어? 꿈쩍도 안한다. 가만히 보니, 가장 무거운 무게에 걸쇠가 걸려 있다. 슬쩍 바꿔서 25kg에 걸고 들어 보았다. 15회를 한 세트로 3세트를 하라는데, 이 무게에서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무거운 것을 드는 지 궁금하다. 둘러보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와 여성들이 운동하고 있다. 여성들은 아닐 것이고, 설마 이 노인들이......? 슬슬 기구들을 돌면서 흘끗 흘끗 그들의 무게를 본다. 대부분 나보다 두 배 정도는 더 드는 것 같다. 흐미...... 저 분들이 저런 무게를 들 수 있는 것은 이곳에서, 그 나이에, 혼자 나와서, 많은 시간을 자신과 싸웠기 때문일 것이다. 근육을 키워야 하는 곳은 허벅지 뿐 만이 아니었다. 몸도 정신도 운동 좀 해야겠다.

 

 

 

 

반지 원정대를 떠나는 나이든프로도 배긴스처럼.

 

    누구든지 기정 사실화 되어 있는 은퇴를 감안하여 이런 저런 준비를 한다. 하지만 막상 그 때가 오면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한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은퇴 후에 바로 장모님을 우리 집으로 모셔서 사위노릇을 했고, 아이를 가진 며느리를 불러서 출산하고 아이 키우는 것을 도우며 가장노릇을 이어 갔다. 사회에서 주어진 나의 입체적 자리매김을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가정에서 되새김하였던 것이다.

장모님도, 아이들도 떠나고 남은 새로운 공간을 정리하면서 이제 진정으로 은퇴하였다는 것이 느낌으로 다가 온다. ‘나이든’ 2인 가구 삶의 리듬을 재정립해야 할 때이다. 그 동안 익숙하게 ‘함께’했던 공간과 시간에서 ‘따로’를 찾아내고, ‘따로’했던 시간 속에서 ‘함께’를 찾아내야 한다. 시작은 이제 나는 다른 사람임을,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는 즐거움을 찾는 것에서 출발해야겠지. 알을 깬 새가 이소(移巢)한 것처럼 텅 빈 아이들 방을 정리하면서, 그 동안 내가 안주하였던 공간-생각-일상에서 이소하는 나를 그려 본다. 한쪽으로 비켜 놓았던 서양 철학공부와 동양 사상 공부, 악기연습, 운동에서 나의 ‘따로’가 시작되었다.

 

 

 

 

반지 원정대에 참가하려는 ‘프로도 배긴스’가 친구 ‘샘’과 함께 평화로운 호비트 마을을 떠나는 경계에 서서, 설렘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모험의 세계로 한 발을 내밀던 기분이 이런 것일까? ‘반지의 제왕’같은 모험은 아닐지라도, ‘프로도 배긴스’의 설렘을 등에 지고 ‘나이든’ 새로운 능력들을 찾아 떠나는 기분이다.

가 보 자.

 

댓글 5
  • 2024-04-17 21:11

    신혼과 황혼 사이에서 새로운 능력을 함양해 갈 가마솥샘의 앞날이 흥미진진하게 기대됩니다~~~

  • 2024-04-18 10:16

    은퇴후 글쓰기 13회만에 다시 새로운 출발점에 선 설렘이 느껴져요.^^

  • 2024-04-20 07:11

    근력운동의 세계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저는 헬스장에 가는 것이 일상 중 가장 중요한 일과예요.
    하루 1시간이상씩 하는 운동은 저의 생활의 기본기를 단력해주는 아주 중요한 활동이거든요.
    근손실의 최소화가 저의 목표라....들어 올릴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까지 가보려 노력합니다.
    처음 한동안은 몸살이 날 정도로 하셔야 근력이 늡니다. ^^
    가마솥님 파팅~~~

  • 2024-04-20 15:25

    새로운 기운이 느껴집니다. ^^

  • 2024-05-02 16:05

    와 가마솥샘의 고기리 집 이야기를 읽으니까 (1234 글쓰기 걱정과는 별도로..^^) 이번 달 처음으로 방문할 날이 더더 기대됩니다^^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셈이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얻은 양...
오영
23:20 | 조회 1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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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2024.05.07 | 조회 205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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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06 | 조회 141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19
아스퍼거는 귀여워
  감자는 정말, 정말정말정말 오줌, 똥을 못 가렸다. 만 3살이 지나, 한국 나이로 5살이 되었는데도, 기저귀를 못 뗐으니 말 다 했지. (네이버에 쳐보니 ‘기저귀를 떼는 시기는 18개월에서 24개월이 적당하다.’라고 쓰여있다) 발육이 남다른 감자에게 맞는 기저귀 사이즈가 더 이상 없어서, 더 큰 기저귀를 찾으려면 성인용으로 가야 할 판이였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어린이집을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일단 벗기고 팬티를 입혀 놓으면 자신도 축축한 것을 알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떼게 된다나? 그 말을 믿고 덜컥 어린이집 적응과 배변 훈련을 동시에 해버리자는 안일한 생각을 해버렸다. 어린이집 적응도 힘든 마당에 배변 훈련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나도 울고, 감자도 울고,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마도) 울었다.       기저귀 벗기 강제집행을 시행한 후, 어린이집에서 하루 평균 2~3번 오줌을 쌌다. 여벌 바지와 팬티를 수도 없이 챙기고, 심지어 바지가 모자라는 날은 친구 것을 빌려 입고 오는 일도 허다했다. 외출 시에는 무조건 화장실만 보이면 억지로 오줌을 뉘었다. 내가 신경 써서 화장실을 보내면 괜찮지만, 조금만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내가 집안일이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실수했다. 외출도 불안하고, 늘 둘 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도 늘상 실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줌은 나았는데, 똥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갈수록 똥 누는 걸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나중에 가서는 변을 5일에서 일주일 정도에 한 번 눴다. 똥은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져서 더 누기 힘든 악순환. 온갖...
  감자는 정말, 정말정말정말 오줌, 똥을 못 가렸다. 만 3살이 지나, 한국 나이로 5살이 되었는데도, 기저귀를 못 뗐으니 말 다 했지. (네이버에 쳐보니 ‘기저귀를 떼는 시기는 18개월에서 24개월이 적당하다.’라고 쓰여있다) 발육이 남다른 감자에게 맞는 기저귀 사이즈가 더 이상 없어서, 더 큰 기저귀를 찾으려면 성인용으로 가야 할 판이였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어린이집을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일단 벗기고 팬티를 입혀 놓으면 자신도 축축한 것을 알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떼게 된다나? 그 말을 믿고 덜컥 어린이집 적응과 배변 훈련을 동시에 해버리자는 안일한 생각을 해버렸다. 어린이집 적응도 힘든 마당에 배변 훈련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나도 울고, 감자도 울고,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마도) 울었다.       기저귀 벗기 강제집행을 시행한 후, 어린이집에서 하루 평균 2~3번 오줌을 쌌다. 여벌 바지와 팬티를 수도 없이 챙기고, 심지어 바지가 모자라는 날은 친구 것을 빌려 입고 오는 일도 허다했다. 외출 시에는 무조건 화장실만 보이면 억지로 오줌을 뉘었다. 내가 신경 써서 화장실을 보내면 괜찮지만, 조금만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내가 집안일이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실수했다. 외출도 불안하고, 늘 둘 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도 늘상 실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줌은 나았는데, 똥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갈수록 똥 누는 걸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나중에 가서는 변을 5일에서 일주일 정도에 한 번 눴다. 똥은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져서 더 누기 힘든 악순환. 온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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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5 | 조회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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