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살 차이 나는 두 여자

나래
2023-06-07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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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모범생 딸의 방황과 탐색

“이건 내가 알던 딸이 아니야.”

엄마 입장에서는 27년간 모범생으로 속 한 번 썩이지 않던 딸이 낯설었을 것이다. 나는 엄마의 집안일을 잘 돕지는 않았지만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수다를 같이 떨어주고 미주알고주알 묻지 않아도 이것저것 잘 말해주는 딸이었다. 엄마에게 나는 서울의 4년제 대학도 나오고 중국으로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직장도 잘 다니는 딸이기도 했다. 그러던 딸이 갑자기 주중에는 무역회사에서 퇴근하고 술 마시느라 연락도 없이 밤늦게 들어오거나 외박을 하거나, 주말에도 2030등산동호회를 다니느라 또 집에 붙어있질 않으니, 엄마는 딸이 방황하고 있다고 느꼈다. 더군다나 내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아빠는 모두 엄마 탓을 해대는 통에 엄마는 이중고를 겪었다.

 

 

엄마의 이런 마음은 고려하지도 않고 나는 ‘이건 내가 알던 딸이 아니야’라는 엄마 말을 듣고 그동안 애써 유지해오던 가면을 이제야 깬 것 같아서 시원하고 통쾌했다. ‘나는 나래가 공부 못 할 줄 알았는데, 곧잘 하네.“ 중학교 1학년 때쯤 아빠가 엄마에게 말을 듣고나서 나는 줄곧 반 1등의 모범생 모드를 약간의 압박을 느끼면서도 편하고 즐겁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시험 때 잠깐의 벼락치기가 아닌 1년을 공부해야 하는 고3때 나는 오히려 한,중,일 드라마에 빠지고 친구들을 꼬여내어 노래방에서 놀며 보내다 당연히 명문대는커녕 서울의 4년제 대학에 겨우 붙었다. 딱히 분명한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재수는 하기도 싫었으면서, 당연히 돌아온 결과를 받아들이기보다 내가 가장 불만족스러워했다.

 

 

어학연수도 다녀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를 거쳐 무역회사로 전직하여 5년째 다니면서고, 계속 스스로 성에 안 차는 마음은 이어졌다. 중소기업에서 경리, 영업관리, 비서 노릇까지 해야 했지만, 전천후로 하고 있는 나를 해고시킬 리는 없었으니 안정적이기는 했다. 하지만 일은 생계 뿐만 아니라 영혼을 채워주어야 하며 자기계발에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내면화된 내게 당시에 일은 성에 차지 않았다. 퇴근하고 나서도 이대로 하루가 끝나는 것인지 만족스럽지 않아 술을 마셨고, 주말에는 전국 각지의 산을 타고 여러 사람들이랑 최대한 놀고 연애를 했다. 집은 아빠에게 맞춤식이기도 했고, 갑갑했다. 20대 나는 오히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비로소 하게 되면서, 그 당시의 에너지를 최대한으로 바깥으로 발산하며 여러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극을 받으며 탐색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엄마가 지금 나의 모습이 ‘내가 알던 딸’이 아니라고 했고, 엄마가 알던 딸은 내가 오히려 벗어 던지고 싶어했던 모습이니, 나는 울상이던 엄마를 뒤로하고 등산복에 배낭을 휙 둘러메고 지리산으로 가버릴 수밖에 없었다.

 

 

 

2.각자 분투기

“엄마의 변화는 공부하기로 선포한 그날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이 말을 엄마에게 건네면, 엄마는 언제나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확실히 엄마는 공부를 시작한 이후 그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갔다. 엄마는 내가 대학에 입학하는 2002년에 가족들에게 공부하기로 선언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2년간 중졸, 고졸 학력을 획득하고, 한식 조리사 자격증을 땄으며, 급식소에서 일을 하기도 했고, 공인중개사 공부도 하고, 천주교 세례도 받았다. 엄마가 공부를 시작한 시기와 내가 성인이 된 시기가 같았고, 그래서일까 우리는 책을 읽고 알게 된 것들, 인간관계에서 깨달은 것들을 나눌 때면 ‘너도 그래?’, ‘엄마도?’라며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치는 일이 잦았다. 그야말로 26살 차이나는 여자 둘의 수다였다.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엄마는 전업주부로 매일 살림을 척척 해내면서도, 아빠와 싸우고 난 후나 술 한잔을 마시는 날이면 오랜시간 눌러왔을 한이 맺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때 엄마의 이야기는 반복되는 패턴을 띠었는데 대상은 외할머니와 아빠였다. 평소에 나는 가족 안에서 엄마의 남편과 다섯 시누이의 뒷담화를 할 때 엄마 편을 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엄마가 결혼 전 회사에서 사무직 업무를 했고,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7장이나 되는 러브레터를 받기도 했다는 일화까지 알 정도였다.

 

 

평소 엄마는 부지런하고 칼같이 할 일을 제 때 해내는 야무진 모습인 데 비해, 술에 취한 엄마는 가슴 깊은 곳에서 사무치듯 내뱉는 울부짐 비슷한 소리로 조각난 문장들을 반복해서 말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여 끝까지 엄마의 말을 못 듣고 내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러면 엄마는 혼자서 한참을 넋두리를 늘어놓다 잠이 들었고, 다음날 새벽에는 또 척척 아빠 도시락을 싸고 아침밥을 준비했다.

 

 

엄마가 공부를 시작하고 스스로 자부심과 자신감을 느낄 성취들을 늘려가면서 아빠에 대한 원망은 쏙 들어갔다. 외할머니를 향한 마음은 조금 더 오래 걸렸다. 엄마가 중풍으로 쓰러진 외할머니를 집에서 3년간 간병하고 임종을 지키면서, 엄마는 외할머니를 향한 어떤 한을 끝내 풀어냈다. 엄마가 매일 아침 수행하듯 기도와 명상을 하고, 타인의 임종 곁에서 기도하는 천주교 봉사활동도 엄마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내 문제는 내가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아빠 흉을 내게 보듯, 내가 첫직장과 관련된 뒷 이야기를 하면, 그날 밤 나는 잘 잤으나, 엄마는 내 걱정에 잠을 잘 못 이루는 사람이었다. 나는 당연하게도 20대 이후로는 엄마에게 말 못하는 비밀이 늘어갔다. 20대 초반 있었던 자실시도와 남자친구의 자해 등의 일은 덮어두고 마치 없었던 것처럼 살다가 20대 후반에는 누군가에게는 털어놓고 싶어졌다. 나는 엄마, 절친, 산을 같이 타던 사람들이 아닌 같이 읽고 쓰고 배우는 사람들과 함께 서로의 이야기를 글로 썼다. 독자를 상정하여 글을 써야 했으니 나조차 진득히 들여다보지 않은 서사를 객관적으로 풀어놓아야 했고, 그제야 이해되는 것들이 생겼고, 사건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도 생겼다. 그제야 나는 모두 각자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도, 한 시인의 ‘이것을 불행 혹은 상처라고 얘기했을 때, 이미 그것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말도 이해하게 되었다.

 

 

3.그 후 엄마와 나

35살 비혼인 딸에게 엄마는 "니가 돈 벌어서 니가 쓰고 싶은 데 쓰니 얼마나 좋니. 그건 대단한 거다. 결혼은 친구같이 너로서 살 수 있게 해주는 남자와 천천히 해라", “승승장구해서 국장까지 되어라.”고 하면서도, 짬짬이 ‘꽃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늙어 죽으려고 해.’라며 농담도 섞어했다.

 

 

결혼하지 않겠다던 딸이 결혼하고 나서도 엄마는 ‘알아서 하게 둬야지, 알아서 잘 하겠지.’ 하면서도, 아침상은 잘 차려 사위와 잘 먹고 사는지, 둘이 싸우지는 않고 화목하게 사는지, 혹여 시댁에 미움을 받지나 않는지 걱정이 많다. 취업, 결혼, 임신, 출산, 육아 등 엄마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생애주기에 딸이 잘 맞춰 사는지는 표현을 하고 안 하는 차이만 있을 뿐 꾸준히 엄마의 관심이자 걱정거리인 것 같다.

 

 

결혼하고 나서 우리는 바뀐 상황에 맞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엄마와 나는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에 살지만 한 달에 1번 외식을 하고, 2-3번 전화하거나 만난다. 전화해서 나는 주로 ‘우리 부부는 재미나게 살면서도 가사 일은 잘 배분해서 한다,’, ‘운동도 하고 건강도 잘 챙긴다’는 등 별일 없이 잘 사는 딸의 소식을 규칙적으로 엄마에게 알린다. 엄마도 이에 맞춰 ‘오이소박이 좀 먹겠냐’ 묻고 산책길에 딸네 대문 앞에 툭 놔두고 가거나, 전화해서도 ‘잘 사냐’ 세 글자로 각종 관심과 걱정을 압축해서 물으며 관심 어린 거리두기를 애써 한다.

 

 

엄마는 나와의 관계가 가장 좋았던 시기를 내가 첫직장에 들어가서 2030등산동호회에 가기 전까지라고 말한다. 나는 그 때 직장에 다니면서 생활비 조로 용돈도 매달 꼬박 드렸고, 맛있는 것도 엄마 드시라고 사오고, 영화를 같이 보기도 하고, 맛있는 식당에도 종종 엄마와 같이 가기도 했다. 한 번은 엄마 생신에 내가 출근 전에 새벽같이 일어나 미역국에 불고기도 직접 만들어 생일상도 차려주었다. 딱 한 번이었지만, 엄마는 마치 매년 그런 생일상을 받았던 것처럼 떠올린다.

 

 

우리는 현재 서로 어느 정도의 거리는 있지만, 각자의 인생 통틀어 가장 안정적인 시기를 보내고 있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물론 나는 2년 넘게 2세를 위해 시험관시술을 받다가 쉬었다를 반복하다 다음달 마지막 이식을 끝으로 시험관 시술은 더 이상 하지 않을 생각이다. 엄마는 작년 골다공증 경계 판정을 받고 건강을 최우선으로 관리하고 있다. 손주도 간절히 바라고는 있지만, 엄마도 나와 비슷하게 ‘노력하고 있는데도 아직 소식이 없으니 어쩌겠냐’며 열심히 집 앞 망우산을 가고 단백질과 약을 챙겨 먹을 뿐이다. 우리는 누구든 심하게 아픈 몸이 된다면 우선 각자의 배우자와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댓글 1
  • 2023-06-08 09:33

    <나이듦과 자기서사>팀의 김미정샘의 글도 모녀서사였어요. 아니 다시 쓰는 어머니 이야기이죠.
    우리에겐 더 많은, 다양한 모녀 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샘글도 그 중 하나네요^^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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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
2024.05.10 | 조회 156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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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
2024.05.09 | 조회 145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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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2024.05.07 | 조회 277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168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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