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치의 전환이 시작됐다

윤아
2023-06-07 00:45
274

새로운 계절

 

남편과 결혼한 지 올해로 29년차이다. 그동안 떨어져 지낸 적도 거의 없다. 우리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더 오래 함께 살았다. 우리 사이에 세 아이가 태어났고 이미 모두 성인이다. 두 아이가 독립했으며,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한 막내가 있으나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 갈 길을 찾으리라 믿는다. 아이들은 별 탈 없이 자라주었고, 팔순이 넘은 양가 부모님은 아직 건재하시며, 풍족했던 것은 아니지만 경제적으로도 늘 안정되어있었다. 우리 부부는 각자의 방식으로 가정에 충실했고, 커다란 결격사유가 있다고도 여기지 않으며 서로가 책임감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가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는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처럼 외형적으로 보기에 우리 가정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남편도 늘상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불행을 예감하는 나름나름의 문제가 늘 잠복해 있음을 느껴왔다. 그러고 보면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행복한 가정은 다른 누군가의 불행이나 희생으로 지탱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막내가 성인이 되고 집을 떠나 도시로 가던 날 커다란 트렁크를 기차역에 내려주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앞으로의 30년을 당신과 살아온 이전처럼 살라면 난 그러고 싶지 않아”. 나는 할 만큼 했다는 마음이었고, 홀가분했고, 이제는 지금까지와 같이는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이제 날개 달겠네”하며 빈정거리고는 곧 잊어버렸지만, 나는 우리 부부에게 새로운 계절이 도래했음을 예감했다.

 

 

바로 우리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남편 퇴근 시간에 맞춰 저녁밥을 했고, 농사일과 마당일을 하고, 책을 읽고 도서관 문화교실 강사와 독서 동아리 활동을 했다. 집안 일거리는 많이 줄었다. 이제 며칠 여행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여행은 떠나지 않았다. 나는 집을 좋아한다.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고 내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달라진 것은 서울 감이당으로 일주일에 한 번 공부하러 간다는 거다. 감이당 책까지 더해지니 또다시 바빴다. 달라진 것은 이제는 가족의 일이 아닌 내 일로 바쁘다는 것이었다. 이전처럼 시댁 일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명절과 생신을 챙기긴 하지만 제사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기회만 있으면 남편에게도 나의 의사를 피력했다. 그는 내 말들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나는 제 좋은 걸 다 하고 살며 시댁에 대한 의무는 소홀한 여자였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문제들이 떠오르며 싸움이 잦아졌다.

 

 

 

당연한 것들의 세상

 

나의 결혼생활에 불씨처럼 잔존했던 나름나름의 문제는 뭐였을까? 뭐라 해도 처음부터 우리 부부가 독립된 가정을 꾸리지 못하고 시댁의 가부장적인 가족문화 직계로 편입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나는 처음 5년을 시댁 그늘에서 살았고, 11년은 20여분 거리에 살며 매주 시댁을 방문했다. 우리 집 일과 시댁의 일은 구분되지 않았다. 그것은 남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시골에서 7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나 고등학교 때부터 도시로 나왔다. 부모님은 농사일만으로도 바빴기에 우리 형제들은 이른 나이부터 대부분의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독립적인 삶을 살았다. 시부모님은 두 형제만 키우셨고, 결혼에 이르기까지 또 이후에도 자녀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으신 분들이었다. 시아버님은 전형적인 가부장이었고, 시어머니는 아버님이 지시하는 집안 대소사를 두 배로 초과달성하는 오지라퍼이자 에너자이저였다. 사실상 생각해보면 두 아들 장가보내기도 그분들의 프로젝트였던 거 같다. 두 며느리를 모두 선 보고 6개월 이내에 결혼시키셨다.

 

 

나는 결혼과 동시에 그의 대가족 가장 말단으로 편입되었다. 시댁식구라면 어린아이라도 도련님, 아가씨하며 존대하는 건 기본이었다. 난 개인주의적 성향에 독립적인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 환경이 낯설고 어려웠지만 남편의 배려는 없었다. 나를 부엌에 팽개치고 자신은 하던 대로 살았다. 남편은 가족들이 모이는 걸 좋아했고, 모이면 그 시중은 통 큰 어머니의 진두지휘 하에 며느리들이 척척 해치워야하는 것이 그 집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아버님 5형제에 6촌까지, 어머님 형제들까지 그 집 식구들은 모이고 또 모였다. 거동이 불편한 시할머니를 모시고 계시니 손님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제사만도 열 한 번이고, 명절에, 생신에, 모일 일은 많고 많았다. 시어머니는 그 일들을 정말 신나고 기운차게 해내셨다. 그 집안사람들은 남편처럼 목소리도 크고 활기찼으며 잘 먹었다.

 

 

나는 처음으로 시부모 모시고 큰며느리로 살면서 일곱 남매을 키웠던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는 어떻게 살았을까? 엄마는 한 번도 힘들다고 하소연 한 적이 없었다. 그러고보면 엄마는 그 모든 것은 살아있는 이상 당연하게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는 우리 시부모님을 좋은 분들이라 여기셨고 나도 그 분들을 나름 좋은 분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의 나를 힘들게 했지만 원망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냥 자신들의 시대를 산 것이다. 그러나 남편과 나는 우리의 시대를 살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부모님이 살던 방식에 문제의식이 없었고 나에게 자신의 방식을 강요했다. 사실 당시의 나는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된 것인지 헷갈렸다. 시댁 식구들에게 인사 잘하고, 안부전화 드리는 게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지 않느냐, 네가 전업주부이니 집안일은 여자들이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남편 말이 그리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보고 자란 것이 있기에 남편이 내 편만 되어 준다면 그깟 일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편은 참으로 무심했다. 그는 시댁 식구들 앞에서 내 입장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분가하고 시댁에 있다가 집에 가려하면 ‘에미가 가야한데요’하며 자신은 가고 싶지 않으나 내가 가고자하므로 가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는 나에게 시할머니는 무엇을 좋아하고, 시고모, 시작은 아버지 등등 그들에게 어떻게 해야 좋아하는 지를 말했는데 정작 내가 무얼 좋아하는 지, 무얼 먹고 싶은지, 무얼 보고 싶어 하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를 취향과 감정을 갖은 한 개체로 인정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내가 결혼했으니 시댁의 취향에 당연하게 녹아 들어가리라고 생각했던 거 같았다.

 

 

나의 모든 원망의 화살은 남편에게로 향했다. 우리는 시댁에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거의 매번 싸웠던 거 같다. 매번 그는 술에 취해 있었고 운전대를 잡은 나는 화가 나 있었다. 시댁은 모이면 술상이 차려졌는데 시아버지와 어머니, 고모들까지 술을 잘 먹었다. 아주버님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 일찍이 술상에서 배제되었고, 남편이 술상에서 어른들 장단을 맞췄다. 그건 그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도 했다. 친정에서 술 문화를 경험한 적이 없는 나는 그 시끄럽기 짝이 없는 술판 시중을 들다가 남편이 취해가는 속도로 분노 게이지가 올라갔다.

 

 

우리가 막 분가했을 때였을 것이다. 나는 처녀 적부터 용인 호암미술관을 가보고 싶었다. 결혼하기 전 인사동은 물론이고 청담동이나 평창동까지 미술관나들이를 좋아했던 나였었다. 호암미술관은 당시로는 서울에서 먼 곳이었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까다로웠기에 내 생일을 맞이해 거길 가고 싶다고 졸랐다. 그는 마지못해 나와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을 갔다. 때는 늦가을, 날씨는 청명했고, 단풍나무 아래 붉은 단풍이 떨어져 동그란 꽃방석을 만들고 있었다. 아이들이 잘 가꾸어진 정원을 뛰어다녔고, 나는 그날 아담한 호암미술관에서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비롯한 국보급 미술품들을 호젓하게 관람하는 호사를 누렸다. 남편이 이런 것에는 관심도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않았다면 완벽한 날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후에 혼자서 아이들을 데리고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을 다녔다.

 

 

 

그와 나는 다른 사람

남편과 헤어지는 상상을 많이도 했지만 나는 끈기 있게 그곳에 눌러 살았다. 그 이유를 나는 오랫동안 아이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는 아이들에 대해서 백퍼센트에 가까운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두고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혼자서 아이를 키울 자신도 없었다.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환경이 되어주는 자리가 바로 내가 있어야할 자리였다. 나는 유독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모성은 만들어진다’는 말에 고개가 갸우뚱해지는데, 나의 경우에는 아이를 보는 순간 엄마라는 숙명에 그저 납작 엎드려 복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엄마의 사랑과 노동만을 기다리는 무력한 존재들이었고 나는 기꺼이 그 짐을 졌다.

 

 

그러는 동안 나는 남편에 대해 이중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다. 하나는 그래도 아이들 아빠이자 지금 내 곁에 있는 그를 그냥 사랑하자는 것이다. 나는 거기에 있기로 선택을 했으므로 거기서 최대한의 행복을 가꾸어야 했다. 옆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 자리를 지옥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사실 그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고 바지런한 사람이다. 아무리 술을 먹어도 늦게 일어나지 않았으며, 시간약속은 칼 같이 지키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특히 어르신들에게 인사성 밝고, 싹싹하게 굴어서 누구나가 좋아하셨다. 그의 직업에도 몇 번의 풍파가 있었지만 생활력도 있고 책임감도 강한 그는 언제나 최선을 다해 헤쳐 왔다. 나는 그가 없을 때면 그의 장점들을 열거하며 감사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에 진심을 내기도 했다. 내가 너무 예민하고 까다로운 인간이라고 자책하며. 또 하나는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놓는 방식이었다. 네가 나에게 이럴 수는 없다. 용서치 않으리라. 나는 그와의 이혼을 대비해 집과 부동산을 모두 내 앞으로 했다. 남편은 모든 걸 내게 위임했는데, 이사 등등의 일에 위임장과 인감을 받아 일을 처리하는 것은 번거롭다며 내 이름으로 하겠다고 했고, 그는 매번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러나 복수의 다짐은 지난 몇 년간의 공부로 인해 서서히 변화해갔다. 과거의 일들에 대한 생각도 현재의 시각으로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사주 명리학과 별자리 공부가 큰 영향을 주었다. 처음에는 그의 단점을 찾는데 급급했다. 이거 봐 간여지동 역시 고집이 세군, 일지에 겁재를 깔았으니 아내와 불화하는 것이네. 그러나 점점 시간이 갈수록 내 생각이 바뀌어 갔다. 그 사람의 기질은 그가 타고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별자리를 보면 내 별들이 몰려 있는 곳에 그의 별들은 없다. 내 욕구가 있는 곳에 그의 욕구들은 없는 것이다. 나는 옛것 보다는 새로움에 관심이 있고 감각적인 것에 끌리고 문학과 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는 현실적 안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하던 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와 나는 그저 다른 사람일 뿐이었다. 그는 현실적인 사람이고 돈에 관심이 많은데도 통장을 모두 나에게 맡겼고 완전하게 나를 신뢰했을 뿐더러 정말로 최선을 다해 처자식을 부양했다. 그것은 그가 나와 아이들을 사랑하는 방식이었고, 그리하여 나와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울타리 역할을 했을 것이었다. 나는 그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공부해왔고, 어떤 걸 하며 살아가면 행복할지 고민해왔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이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그 고충을 술로 풀어가며 자신이 뭘 좋아하는 지 탐색할 사이도 없이 시간들이 지나가 버렸다. 그는 열심히 일하면 가족들로부터 인정받을 줄 알았고 사랑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인간관계라는 게 그렇게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남편에게 바랐던 것은 무엇보다도 감정적인 교감이었던 거 같다. 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과 친밀하게 감정적 교류를 나누고 싶어 했으나 그는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각자 갈 길을 가면 그만인가? 그가 그렇게 잘못했는가? 오히려 한 사람에게 그렇게 여러 가지를 바라는 것이 너무 무리였던 것은 아닐까? 그와 함께한 시간에 대한 예의가 있다면 더 부딪히고 깨지며 합의점을 찾아야하지 않을까? 게다가 최소한 그렇게 책임감 강한 남자와 있으면 안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자유의 기술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소소한 일도 부딪치는 그와 앞으로도 30년을 산다고 생각하면 끔찍해 진다. 그의 머릿속은 20세기에 머물러 있고 아직도 고집을 부리며 눈을 부라리며 이기려고 큰 소리를 낸다. 극신강의 이 남자는 거실에서 스피커 폰으로 통화를 하고, 흘러간 노래를 크게 틀어놓는다. 아이들은 다 커서 내 품을 떠나는데 이 사람은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거꾸로 가는 지 자꾸만 어려지는 거 같다. 가식이나 위선 따위는 없는 정말 속없는 무구한 행동들이 사랑스럽기도 하다. 그는 이제 어쩌지 못하는, 버리지도 못하는 가족이 되어버렸다.

 

 

나는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무엇 때문인지 자꾸만 머뭇거리는 기분이다. 나는 유리병에서 무엇을 쥐고 있어서 손을 빼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아직도 뭔가를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닌가? 가장 확실한 것은 조건이 바뀌고 상황이 바뀐 상황. 어차피 배치의 전환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계절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강을 건넌 배는 버려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시 돌아 갈 수는 없다. 정면돌파. 이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달려야 한다. 이제는 내 삶의 새로운 장을 펼치기 위해 발걸음을 뗄 때다.

 

 

자 이제 계산은 끝났다. 우리는 서로 원한도 분노도 없다. 서로 책임을 다했다. 환상을 가지고 결혼하고 그에게 의존했던 내가 내 발에 족쇄를 채웠고, 나의 선택과 동의가 그 관계를 지탱해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제는 남편과 이혼을 하든 졸혼을 하든 그냥 동거남으로 함께 살든 상관없지 않을까? 카잔차 키스의 묘비명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처럼 기대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댓글 1
  • 2023-06-08 09:41

    아이고..... 어찌 사셨을까?
    전 <나의 아저씨>에서 사실 주인공 아내가 (심지어 그녀의 바람까지도) 이해가 되었어요.
    무슨 남편이라는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계속 자기 형제들이랑 술 먹고, 초등 동창 선후배들이랑 술 먹고, 밥먹듯이 본가 가고, 동네사람들하고 조기축구 하고 그래요? 그거 쫌 이상하잖아요?

    윤슬샘, 언제 한번 우리 찐하게 이야기해봐요. 노하우, 전수해드릴 수 있어요. (제가 수만개의 케이스를 알고 있다는^^)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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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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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오영
2024.05.09 | 조회 191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인디언
2024.05.07 | 조회 354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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