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에 이름을 붙이고

꿈틀이
2023-06-07 00:33
322

캐롤라인 냅의 <욕구들>은 16년 동안 거식증을 겪어낸 자신의 이야기를 한올 한올 끄집어내어 정리한 글이다. 신체의 모세혈관 한가닥까지 도려내어 해부하듯이 그녀 내부에서 일어난 복잡하고도 심도깊은 감정과 욕망들의 이야기를 세밀하게 직조하여 우리에게 펼쳐 놓는다. 그녀가 선택한 ‘허기’의 키워드는 원하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 욕망과 죄책감, 욕구의 솟아오름과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참혹한 세계에 대한 공포. 이런 양가적 감정 사이에 자리하는 불안과 두려움을 잠재우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녀에게 배고픈 상태의 유지는 아우성치는 원함을 걸어 잠그는 열쇠이자, 원하는 것을 성취해낸 외부적 증명이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건 ‘거식증’의 극단까지 끌고 간 그녀의 강박스러움과, 그 속에서 복잡 다양하게 얽혀 있는 욕구들, 감정들의 이야기를 언어로 풀어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왜 ‘허기’를 욕구했는가? 라는 질문은 어머니와의 애착관계, 태생적 기질은 물론, 시대가 요청한 여성에 대한 억압까지 파헤치기에 충분했다. 개인이 신체에 가한 자해적 억압은 거대한 진실의 이야기이자 우리가 놓쳤던 스스로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원한다’는 ‘나는 존재한다’와 같은 의미이다. 나의 감정을 풀어내어 언어로 옮겨 놓는 작업은 그런 의미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포용하며 타인과 연결하는 고차원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나도 이 작업의 작은 시작을 해보려고 한다.

 

불안의 내면화

30대 초반부터 거의 십년 동안 나는 공황장애 환자였다. 심장이 미칠 듯이 빨리 뛰고 정신은 아찔하여 죽을 것만 같았던 경험들은 삶이 곧 지옥이 되는 순간들을 선물했다. 흔히 잘 알려져 있듯이, 공황장애는 위험에 처한 상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신체가 극도의 긴장과 급박한 상황에 돌입한 것 같이 작동하는 질환이다. 자율 신경계의 오작동으로, 심할 경우 공황발작으로 정신을 잃는 경우도 있다. 삶의 질은 엉망이었고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일들이 되었다. 당시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렸는지 원망하고 분노했었고 때론 비참하기까지 했다. 불안은 불안을 낳았고, 더 큰 절망이 다가왔었다. 나는 왜 이 ‘불안’의 스펙트럼 안에서 옴싹달싹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10살,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항상 무서웠었다. 공동체가 살아있던 내가 살던 동네의 관습은 사람이 죽으면 그 집 지붕에 흰 저고리 같은 걸 던져 올려 동네 사람들을 죽음의 의례에 참여하게 했다. 학교 정문을 지나 신작로를 따라 일직선으로 걸어가면 우리집이 정면으로 보이는데 나는 멀리서 우리집 지붕을 먼저 확인하고 걸음을 재촉하곤 했었다. 아픈 엄마가 누워있는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젠가 닥치게 될 공포가 현실이 될까봐 두려웠던 짧지만 무거운 시간들이었다. 엄마는 그해 여름 방학 때 돌아가셨고 예상했던 두려움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었다.

 

 

장례를 치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버려진 아이 같았다. 언니 오빠들 따라서 많이 울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뚝 떨어진 방에서 혼자 누워 있었던 한 조각의 기억은 슬픔보다 더 강한 공포였다. 그것은 아마 어린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지독한 고독, 준비되지 않은 외로움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비슷한 감정은 엄마가 돌아가신 후 어느 해,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바다에서 또 한번 느꼈던 것 같다. 우리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의 아랫동네는 바다를 끼고 있는 작은 항구마을이었는데 친구들과 한번씩 놀러가곤 했었다. 해가 넘어가고 곧 저녁이 닥칠 무렵이었다. 바다는 검은색에 가까웠고 흰색 파도는 그것에 대비되어 무서울 지경이었다. 서서히 밀려오는 밤의 기운과 스산함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가슴을 세게 파고 들었었다.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밥상을 받고 곤히 잠이 드는 누구나들의 저녁과 밤의 계절은, 나에게는 태양이 너무 밝아 감출 수 있었던 어떤 감정을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슬픔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죽음을 어깨에 올려놓고, 불안을 내면화 했다. 그리고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을 차라리 삶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롤라인 냅은 쌍둥이 언니보다 약하게 태어난 자신에게 유모가 저지른 ‘허기’ 상태의 감각을 거식증의 원인이라고 단정 짓는 것을 경계한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원인과 환경의 결합들이 얽혀 있음을 시사하는 말일 것이다. 나의 공황장애의 원인도 어머니의 상실에 의한 ‘불안’으로만 결정짓고 마침표를 찍기에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중학생이 되고 자아 형성기가 되면서 내 안에서 피어오르던 불안과 외로움의 감각들은 밖으로 표출시키기 보다는 더 꽁꽁 싸매어서 절대 나오지 못하는 금기의 영역처럼 만들어가고 있었다. 결핍에 대한 요구가 커질수록 떠안을 수밖에 없는 절망감의 무게는 나를 숨막히게 했을 것이고, 그것을 받을 만한 힘도 용기도 없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던 욕구는 음식에 대한 정의를 생명유지를 위한 필요조건일 뿐이라고 생각하기로 결정했고, 중학교 시절 첫사랑의 남자친구에게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들키고 싶지 않은게 너무 많았을 것이다. 자존심은 강하고 자존감은 낮았던 비쩍 마르고 까칠했던 소녀는 이렇게 결핍이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 그것은 진실로 내 주위를 머뭇거리던 그림자를 못본 척 하기로 결정한 것이고, 외부로 시선을 돌려 공허함을 채워 가기로 한 결심이었을 것이다. 나는 학교 선생님이나 직장상사 등의 평가로부터 늘상 자유롭지 못했고 그들로부터 받아내는 높은 점수가 나의 그림자 일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잘살고 있으며, 누구 못지않은 유능함을 보여주는 것은 외로움을 삼킨 보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내 마음에서 들려오는 원하는 것들의 목소리는 밖으로 새어 나오지도 못한 채 나에게 거절 당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갔다. 내부에서 일렁이던 복잡한 감정들은 아닌 것처럼 묻어두고. 언제나 그랬듯이 괜찮은 것처럼 살아가고자 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살아간다는 건 혼란스러움과 다양한 선택들의 복잡한 구도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일이다. 나는 어떤 면(성실하고 부지런함)에서는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어떤 측면(나의 내면과 대면하여 결정을 내리거나 선택해야 되는 일)에서는 유아기적 사고에 머물러 있었다. 학교생활이나 직장생활은 그럭저럭 나의 통제 하에 잘 흘러갔지만 결혼이라는 거대한 사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던 것 같다. 지금의 남편과 2년 정도 연애를 하고 다소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 당시 남편의 가부장적면이나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것 정도는 알았을 법 한데 나는 그것을 수면 위에 올려놓고 고민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회피해버렸다. 그리고 남편도 나를 평가하는 외부인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남자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고 싶었고 그가 던지는 평가와 판단의 말들 앞에서 무너져내렸다. 사건을 똑바로 직시하지 못했고 나를 억압하고 참아내는 능력에만 매달렸으며 남편은 나의 평가자가 될 수 없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지, 어떤 사람과 잘 맞고 소통하길 바라는지, 가족이 되는 의미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흡수되는 게 아니라 각자 고유의 모습을 찾아가고 인정하며 응원하는 관계라는 걸 정말 몰랐다. 나와 소통하지 않고 제대로 대면하지 못한 결과는 불행한 결혼 생활로 이어졌다. 물론 모든 시간이 힘들었다고 말한다면 비약이 심한 표현으로 되겠지만 나는 절대로 행복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일려고 무던히도 애썼고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와 갈등들을 잠재우기 위해 파묻고 파묻었지만 이런 삶에도 유통기한이 있음을 알았다. 갑자기 공황증상이 찾아왔고 나는 더 이상 그대로 나를 내버려둘 수 없게 되었다.

 

 

 

회복과 시작

캐롤라인 냅은 쌍둥이 언니의 권유로 우연히 조정을 하게 되고, 스컬링을 통해 몸과 마음이 연결되는 직접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팔과 다리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있고 온전한 하나로서의 몸, 살아가기에 훌륭한 장소로서 몸을 느끼기 시작했다. 억압. 소비주의, 남성의 대상으로서의 몸이 아니라 ‘나의 몸’ 그 자체를 보게 된 것이다. 물론 때때로 굶기의 충동은 그녀를 괴롭히기도 했지만 통제 수단으로써 신체를 놓아주기 시작하니 마음에서 일어나는 ‘허기’의 욕구도 점차 그 힘을 잃어갔다. 그녀는 서서히 거식증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어머니의 상실이 가져다 준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들은 청소년기를 거쳐 어른이 되어가는 나의 자아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외부의 평가와 시선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아’라는 안도감을 선물했을 것이다. 회피와 냉소의 태도는 ‘나’를 걸어잠그고 안도감을 증명해내기 위한 전략이었다. 나는 무던히도 나의 영혼을 말라가게 하면서도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캘로라의 냅의 ‘허기’의 감정에도 이런 이중적 맥락이 숨어있다. 그녀는 ‘허기’로 욕구를 통제하면서도 ‘허기’상태를 유지하는 자신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욕구를 차단하고 아닌 것처럼 사는 방식과 그녀가 ‘배고픔’을 통해 존재를 느끼는 방식은 공황장애로, 거식증으로 우리 둘 모두를 아프게 했다.

 

 

“고통은 고립 속에서 창궐하고 은밀함 속에서 번성한다. 단어들은 고통의 숙적이며 괴로움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 괴로움을 진정시키는 첫걸음이다..”p304<욕구들>

 

나는 괜찮지 않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닫아놓았던 마음의 빗장을 풀어 친언니들에게 ‘나’를 조금씩 보여주었다. 같이 공부하는 학인들에게도 사적인 자리에서는 털어놓기 시작한 것 같다. 물론 그들이 해결해주거나 결정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나 그 말이 세상 밖으로 나갔다는 건, 외부 시선을 두려워하거나 잘사는 척 하는 위선에서 자유로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나의 입을 통해 발설된 그 언어들은 내 마음의 단단한 자존심을 깨부수고 저 아래에 깔려있던 자존감이 회복된 결과물이기도 했다. 나는 잘사는 척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잘 사는-나를 직시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남편에게 더 이상 나를 평가하지 말라고 선언했고 행복한 가족에 대한 환상을 버렸다. 나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쥐고 있던 것을 버리니 그 자리에 풍요롭고 자유로운 무언가들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자리에는 외로움이라는 한덩이의 무게도 채워지고 있었지만 예전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냥 그 자리에 놔두어도 나를 메말라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익어가게 만드는 발효식품 같은 것이었다. 공황장애는 더디게 서서히 회복되어갔다.

 

 

그때도 그랬고 최근까지 나는 모든 불행을 잘못 선택한 결혼으로 퉁치려고 했었다. 그 이면에는 지혜롭지 못했던 젊은 시절의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건 지혜의 영역이 아니라 어쩌면 ‘나’의 마음을 읽으려 하지 않았던 또 다른 욕구, 그래야만 존재되어지는 어떤 상황이었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지면 위에 공황장애의 이름을 붙이고 그것 또한 살아내기 위한 ‘나’ 자신이었음을 인정하고 말할 수 있는 것. 여기서부터 나는 또 다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댓글 4
  • 2023-06-07 11:37

    오랜만에 꿈틀이 샘 글 읽으니 좋네요. “살아내기 위한 ‘나’ 자신이었음을 인정하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분투가 느껴졌습니다. 멋져요!

  • 2023-06-07 13:21

    잘 읽었습니다^^
    저도 불안장애를 갖고 있어서 더 와닿게 읽힌 글이었습니다

  • 2023-06-07 16:31

    아.... 길고 긴 터널에서 온 힘을 다해 걸어나온 꿈틀이 샘의 삶을 잠시나마 감히 상상해봅니다.
    읽는 내내 꿈틀이 샘 말씨로 퍼지는 운율을 고스란히 느끼며
    생생하게 읽어내려갔습니다.
    참으로 잘 버티셨고 잘 이겨내셨네요.
    멋진 우리 꿈틀이샘.
    다음에 봬면 꼬옥 안아드릴게요~♡

  • 2023-06-08 09:43

    꿈틀이를 자주 봐서 매우 기쁨^^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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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
2024.05.10 | 조회 172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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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
2024.05.09 | 조회 159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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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2024.05.07 | 조회 305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177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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