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연대기 #2 그럼에도 연결되어 있었다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대학교 합격자 게시판에서 내 이름 석자를 확인하고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쁨, 설레임, 죄책감, 부담감 등의 감정이 교차했다. 두려움 자체였던 아버지에게서, 성소수자로서 철저히 고립될 수밖에 없는 시골 동네에서 벗어날 명분이 생겨 기뻤다. 거기에다 대학교 졸업장으로 내 처지과 인생이 달라질 거란 기대감이 있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건 우리집 형편에 무모한 일이었다. 다른 시골 친구들처럼 취업하여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어 주질 못할망정 가난한 시골집에서 서울로 대학을 가겠다고 선언한 것은 아들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겠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 한 켠에 늘 죄책감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디에도 쉽게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고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꼈다. 과연 내가 돈을 벌어 생활비를 마련하고 수업료에도 보탤 수 있을까, 내향적이고 자의식 많은 내가 고립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속에서 상경하게 되었다.
서울 생활은 만만하지 않았다. 구로공단 근처의 지하방에서 자취를 했다. 바퀴벌레와 같이 사는 건 일상이었고, 때론 쥐까지 출몰했다. 보안이라곤 자물쇠 하나가 전부였던지라 며칠이라도 집을 비울 때면 밤손님들이 문을 따고 들어와 방을 다 헤집어 놓고 가곤 했다. 집주인들은 이사를 할 때면 아직 나오지 않은 마지막 달의 전기세와 물세를 몇 배로 뻥튀기하여 받아냈다. 그런 다음에야 월세 보증금을 내주었다. 거기서 언제 벗어날 수 있을지, 수업료를 제때 내고 졸업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노순택 사진
(오마이 뉴스에서 가져옴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49822 )
처음엔 편의점에서 일을 했다. 일머리가 별로 없는데다 멀티태스킹이 잘 안되어 힘들었다. 게다가 점주가 일한 시간을 정확히 계산해 주지 않아 그 일은 오래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강남이나 목동에서 대학생 과외 수요가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과외를 연결해 주는 학교 취업처를 자주 들락거리고 벼룩시장에 광고를 냈다. 처음에 구한 과외들은 단기로 끝났다. 언변도 없었고 의욕이 없는 학생을 독려할 카리스마도 부족했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금씩 요령을 터득했다. 난 무조건 10분 일찍 도착하는 걸 룰로 정했다. 내가 공부했던 방식을 복기해보며 어려운 영어문법 개념을 정리해서 가르쳤다. 학부모의 신뢰를 얻었고 과외가 꾸준히 연결될 수 있었다. 만원권 지폐가 빼곡히 담긴 봉투를 매달 받게 되면서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은 질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한정된 돈으로 살아야 했기에 짠테크는 필수였다. 고등학교 때부터의 자취로 요리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다. 가격이 싼 몇 가지 제철 야채와 계란만으로도 여러 반찬과 국을 뚝딱 만들어냈다. 또 얼마 안되는 수입이지만 이를 조금이라도 불리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매달 정해 놓은 금액을 단기 적금에 넣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불어난 원금을 수업료에 충당했다.
나는 출퇴근 시간의 1호선 열차가 좋았다. 마치 시루 안의 콩나물처럼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사이에 있다보면 안도감이 느껴졌다. 실제적인 연결감이 아니었지만 이는 일시적으로나마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친밀한 네트워크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으나 그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단 근처에서 살았기 때문에 지방 출신의 노동자들과 어울릴 기회가 종종 있었다. 주로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돈도 내세울 지위도 없는 이들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들의 신앙에 기초한 세계관은 내가 쉽게 수용할 수 없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힘들게 노동을 하면서 사는 고향 친구들을 가끔씩 보는 게 반가웠지만 갈수록 이들과의 공유 지점이 없어졌다. 술에 취해 마초적 기질을 드러내는 것은 특히 견디기 힘들었다. 학교에 가면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속한 학과는 강남 출신과 해외거주자 특별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학회 활동이나 데모 등을 열심히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들의 정의감과 열정이 부러웠지만, 난 노동자 계층에 대한 부채의식이 없었고 사회문제를 깊이 있게 들여다 볼 여유도 없었다.
나는 청년기에 대한 기억을 의도적으로 억누르며 살아왔다.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를 위해서 살았다는 죄책감이 지금도 마음 한 켠에 있다. 가난과 어수룩함으로 인해 온당한 대우와 존중을 받지 못했다는 상처도 있다. 또 고립되어 힘들었다고 기억되는 시절이었다. 이처럼 자존감을 지켜주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시절은 건드리지 않고 묻어두는 게 속편했다. 20대를 기억하고 성찰하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했다.
죄책감을 곁으로 밀어 놓자 지금껏 주목하지 않은 모습들이 조금씩 드러났다. 내게는 당시 마주한 장애물의 무게만큼이나 이를 넘어설 에너지가 있었다. 제대로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천천히 꾸준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때론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도 발휘했다. 내 안에 자신을 지키는 힘이 생각보다 많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청년기를 떠올릴 때 무심코 사용했던 ‘자립’이란 단어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를 챙겨주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등장했기 때문이다. 가르쳤던 학생의 어머니는 다른 과외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난 시골집에서, 누나에게서 가끔식 경제적 지원을 받았고, 학과장님은 장학금을 챙겨주기도 했다. 과외 학생의 학부모는 명절 때마다 보너스를 주셨다. 쉽게 잊고 살았지만 알게 모르게 나를 살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처지와 내향적 성격으로 인해 깊은 관계를 맺지 못했지만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나에게 다가와준 학교 친구들이 있었다. 한 친구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우울증을 털어 놓았다. 다른 친구는 가족 문제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불교와 서양 철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난 이들에게 아버지 이야기나, 다음 학기 수업료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이란 얘기를 할 수 없었다. 농촌 출신의 일하는 가난한 대학생이라는 내 배경에 대한 수치심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 거부당할 것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자의식과 외로움으로 힘들었고 마음을 다해 사람들을 대해주지 못했다. 그럼에도 난 연결되어 있었다.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다음 편에서는 성소수자로 살아가면서 가진 두려움이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