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회) 사람 낳고 돈 나왔지, 돈 낳고 사람 나왔나
(글) 신상열 혹은 가마솥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고장난 것을 고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기를 좋아하며
별것 없는데 때를 잘 만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으로서
은퇴 후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고등학교 때, 한문 선생님은 대학에 들어가면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꼭 읽어 보라고 기회가 될 때마다 말씀하셨다. 학교가 전두환 일당들에게 강제휴교를 당했을 때, 도서관에서 『사기』를 대출해서 고향에 내려가서 펼쳐 보았다. 아뿔사! 한자 원문이었다. 아마도 본기(本紀)쯤 되었나 보다. 그냥 중국 역사책이다. 몇 페이지 읽어 보다가 덮었다. 급변하는 이 시기에 한가로이 지금 중국 역사를 읽는 게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게 멀어진 『사기』를 문탁 고전읽기 모임에서 열전(列傳)으로 다시 만났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하! 이래서 『사기』를 읽으라고 하셨구나’, 지우기가 아까울 정도로 멋지게 판서(板書)하셨던 선생님 모습을 열전 속에서 떠올렸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사공자(四公子)라고 불리는 인물들이 있다.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楚)나라의 춘신군(春申君)이 그들이다. 이 들은 수많은 인재들을 모아 자신의 식객(食客)으로 후하게 대접하며, 자신의 나라를 위하여 그 들의 식견을 취하며 경쟁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기』에 소개된 많은 식객들 이야기는 여기 저기서 들은 바가 있어서 익숙한데, 뜻밖의 발견은 풍환(馮驩)이란 인물이다.
풍환(馮驩)
맹상군의 식객 중 풍환(馮驩)은 전국책(戰國策) 제책편(齊策篇)에서는 ‘풍훤(馮諼)’으로 나와 있다. 맹상군의 지략가 중 으뜸인 풍환과 관련된 유명한 고사는 세 가지이다. 수 천명의 식객 중 하나인 자기를 불러 의견을 묻지 않는 맹상군에게, 수시로 “긴 칼아! 제자리로 돌아 가자”고 외쳤던 ‘장협귀래호(長鋏歸來乎)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라고 요구하는 말’로 쓰인다. 또, 자신의 능력에 걸맞지 않은 대접이라며, 자신에게 고기반찬, 수레 제공을 요구한 ‘거어지탄(車魚之歎)’은 ‘끝없는 욕심’의 대명사로 쓰인다. 많이 회자되는 사자성어는 ‘교토삼굴(狡兎三窟)’인데, ‘토끼는 항상 세 개의 굴을 파서 위험을 대비한다’는 경구이다. 『전국책』 제책편에서는 맹상군이 수십 년 재상 자리에 있으면서 작은 재앙조차 당하지 않은 것은 모두 풍환의 계책이었다고 하였고, 사마천은 『사기』 권75 맹상군(孟嘗君) 열전(列傳)에서 이를 상세히 소개한다. 나는 그의 지략보다는 그의 인물됨을 소개하는 에피소드 중에서, ‘빚문서 소각‘사례에 눈이 번쩍 뜨였다.
맹상군은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으면서 설(薛) 땅 1만호에 봉해졌다. 그 식객이 3천에 이르렀기 때문에 봉읍에서 들어오는 수입으로는 식객을 보살피기 부족하여, 설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게 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도록 수입이 없었다. 설 땅의 수확이 좋지 않아 돈을 빌려간 사람 대부분이 이자조차 낼 수 없었던 것이다. 맹상군이 하릴없이 놀고 먹는 풍환을 찾아 이자를 받아 올 일을 요청한다. 이에 풍환은 설 땅에 가서 그들에게서 10만 전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술과 살찐 소를 사서 돈을 빌려간 사람을 다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다. 술이 돌자 이전의 차용증을 모아 보고는 이자를 낼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기한을 정해주고, 가난하여 이자를 낼 수 없는 사람의 차용증은 거두어 불태웠다.
맹상군은 풍환이 차용증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듣고는 화가 나서 풍환을 불러들인 뒤, 사실관계와 그 이유를 따져 물었다. 풍환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습니다. 소를 잡고 술을 많이 차리지 않으면 다 모을 수가 없는 일이고, 그러면 여유가 있는지 부족한지를 모르게 됩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는 기한을 정해주면 되지만, 부족한 사람은 10년 기한을 주어도 이자만 늘고, 급하면 도망쳐 증서를 버릴 것입니다. 급해지면 어떻게 해도 갚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위로는 당신은 이익만 밝히고 백성은 아끼지 않는 것이 되고, 아래로는 주인의 빚을 갚지 못해 도망가는 꼴이 되니, 이는 인재와 백성을 격려하고 당신의 명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차용증을 불태워 받을 수 없는 헛된 돈을 버림으로써 설 땅의 백성들을 당신과 가깝게 하고 당신의 좋은 명성을 드러낸 것인데, 군(君)께서는 어찌 의심하십니까?”
어차피 갚지 못할 빚증서로 닦달해보았자 도망가서 증서를 버리면, 빚도 못 받고 노동력도 상실할 상황이니, 쓸모없는 빚증서를 가지고 당신의 명성(전국책에서는 ‘義’)을 사왔다는 이야기이다. 맹상군은 바로 손뼉을 치며 풍환에게 감사했다.
5억원으로 8,100억원의 빚을 갚는다.
10여년 전에 성남에서 중소기업 지원 일을 할 때이다. 중소기업 대표로부터 몇 번의 사업고비에 대한 경험담을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정부의 서민의 채무지원 정책 혜택을 입어서 재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채권 추심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경우, 은행은 그 대출금을 회수할 권리인 ‘채권(債權)’을 가지게 되고 그 금액을 표시한 유가증권이 ‘채권(債券)’이다. 이제 빚을 낸 채무자가 일정기간 원금과 이자를 갚지 못할 경우에, 은행은 그 채권을 평가하여 장부에서 떨어 낸다. 왜냐하면, 받을 돈(채권)이 많아 장부상(대차대조표)으로는 매우 좋은 은행으로 표시되나, 실제로는 수금하지 못하는 (부실)채권이 많이 쌓여 있어 은행부실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방법은 그 채권의 원래 가격을 깎아서(할인하여) 하위 금융권으로 매각한다. 이 하위 금융권으로 서너 단계만 걸치면 그 가격이 원금의 1% ~ 10% 가격으로 뚝 떨어진다. 그와 동시에 채무자는 금융계에서는 신용불량자가 되어 이 자본주의 하에서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못하게 되고, 그 채권을 사서 소각하지 않는 한, 전문 채권추심업체가 나서서 채무자를 닦달하는 근거가 된다. 추심업체가 구입한 가격은 채권액이 소액일수록 싼 가격이었는데, 1% 미만의 것도 있었다.
기업 대표들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펼쳤다. 1년간 고생하며 모은 성금이 약 2억원 가량 되었다. 그 돈으로 부실 채권 소각액으로는 106억원, 구제 인원은 1,072명에 이르는 성과를 보았다. 이제야 통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펑펑 울던 아주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공감할 수 있었다. 많은 것이 디지털화 되어가는 요즘 우리 사회에서, 모든 것을 현금으로만 거래해야 하는 생활 말이다. 그녀가 빌린 원금은 500만원이었고, 채권의 매매가격은 12만원이었다. 좀더 지속적인 사업을 위하여 OO시(市) 사업으로 옮겼다. 공적인 기관에서 운영하면 더 많은 기부금을 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공무원들의 불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사실, 기부와 뇌물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이럴 때 따지는 것이 법적 근거인데, 있을 리 만무하다. 할 수 없이 민간단체인 롤링 주빌리 은행으로 사업을 옮겼고, 그들의 홈피 현황판에는 현재까지 5억여원의 성금으로 8,100억의 빚을 갚아 51,500 여명이 혜택을 보았다고 게시되어 있다.
풍환의 고사에서 현대판 롤링 주빌리 은행을 보았고, 2,500여년 전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 매우 놀라웠다. 그런데, 가만. 그 당시에도 돈이 돈을 버는 대부업이 있었고, 이자 개념이 있었나?
대출, 이자개념은 언제부터?
가장 오래된 대출과 이자에 대한 법률은 기원전 1,800년전의 함무라비 법전이 최초이다. 기원전 3,000년경의 수메르 시대에 있었던 이자 관습을, “보리 대출에 대한 관습 이자율은 연 33.33%이고, 은에 대한 관습 이자율은 연 20%”라고 법제화 하였다. 금융의 역사를 보면, 역사시대 초기부터 상호 합의한 수준의 이자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빌려주는 생산적 대출 행위가 있었다고 한다. 선의에 따라 비생산적인 물품을 이자 없이 빌려주는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오래 전부터 '이자가 있는 생산적 대출'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것이 화폐의 발달과 더불어 오늘날과 유사한 '이자가 있는 비생산적 대출' 형태로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사기』에 나와 있는 고대 중국의 이자개념, ‘식(息)’에는 돈만 빌려주고 이자만 받는(예 : 맹상군) 현대식 이자개념도 있지만, 화식열전(貨殖列傳)의 무염씨(無鹽氏) 사례처럼 아무도 대부해주려 하지 않는 위험한 대출에 10배의 식(息)을 받는 투자 개념도 있다. 욕심많은 대출(貪賈三之)에는 33.33%, 염치있는 대출(廉賈五之)에는 20%로써 함부라비 법전의 이자조항과 비슷하다. 고대의 통상 이자율을 엿볼 수 있는, 우연치고는 재미있는 비율이다.
금융의 순기능과 그 이상을 위하여
금융은 원래 물건(곡식, 씨앗)을 빌려주고(대출) 일정기간 후에 원금에 일정부분 추가된 량으로 갚는 ‘이자가 있는 생산적 대출’에서 시작하였다. 화폐의 등장으로 자금의 흐름이 신속하고 원활한 세상이 되자 ‘이자가 있는 비생산적 대출’이 생겨났고, 현대에는 이런 형태가 금융의 전유물이 되었다. 사마천이 토지와 인력이 경제의 근본인 고대 중국의 경제체계에서-당시의 많은 사상가와 다르게-상공업이 가진 재생산 가치(재화의 유통측면)를 인정한 것처럼, 금융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화의 생산에 기여하는 필수적인 서비스임에 틀림없다.
또한 금융의 역사는 그 본래 기능을 넘어서, 인류역사 속의 흥망성쇠에 대한 보이지 않은 손으로 작용하곤 하였다. 표면화된 수많은 전쟁의 물밑에는 금융이 흐르고 있었으며, 금융은 르네상스를 이끈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을 만들기도 하고, 리먼 브라더스의 Subprime Mortgage Loan 사태를 만들어 전 세계 경제를 나락으로 떨어 뜨리기도 한다. 인간의 무한한 욕심이 금융의 본래 기능을 잃게 하고 이자로부터 파생된 위험을 폭증시킨 것이 사태의 본질이다.
20세기 들어 현대금융의 어두운 그림자, 이자지급 방식에 대한 재검토가 이슬람 세계에서 일어났다. 즉,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Shariah)'에는 대출에 대한 이자(Riba)의 수취를 부당 이득으로 간주하고 있다. 더 분명하게 기술하면, 사업의 성패와 관계없이 받게 되는 현대 금융 시스템의 ‘확정수익(prefixed Return)’을 금지한다. 글로벌시대에 다른 나라와도 연계되어야 하니, 다양한 대안 모델들이 만들어졌다. 즉, 단순 대출에 대한 이자취득이 아닌, 파트너십 형태의 신탁인 ‘무다라바’ 서비스 등이 그것이다. 1975년, 두바이 이슬람 은행과 이슬람 개발은행이 설립되어 서비스를 시작하였고, 서구의 많은 은행들이 이슬람권의 금융사업을 위하여 ‘무라바하’, ‘무샤라카’, ‘사르프’ 등등 다양한 형태의 서비스로써 동참하고 있는데, 기본 사상은 파트너쉽 형태의 투자 혹은 운용신탁으로 이익과 손해에 대해 대출자와 동등한 책임을 지는 공동책임 형태이다.
또 다른 금융형태는 방글라데시 그라민 은행 총재인 무함마드 유누스에 의해 개발된 빈민 구제 방식인 ‘마이크로 크레딧’이 있다. 그는 능력도 아이디어도 있는데 돈이 없어서 잡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태반인 시골 빈민들에게, 금융으로 가난을 극복하는 빈민구제 기능을 수행하게 한다. 즉, 빈민들에게 소규모 사업 자금을 무이자 무담보로 지급한다. 다만, 완전한 무이자가 아니다. 정해진 이자로 상한선을 긋고, 이자를 낼 수 없는 첫 거래자는 제외한다. 이 정도도 엄청난 제안인 것이, 방글라데시 서민들이 어쩔 수 없이 쓰는 사채업자의 이자는 50~70% 이상에 심지어 90%가 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라민 은행의 이자는 10% 남짓이다.
이러한 서민구제 금융이 20년 동안 운영되면서 얻는 효과를 보면서, 다른 은행들도 이 사업에 참여하였다. 그와 함께 사업이 확장되고 난립하기 시작한 일부 마이크로 크레디트 단체들이 고리대금업을 마이크로크레디트로 포장하기도 하는 부작용도 생겼다. 유누스는 아직은 더 많이 노력하고 고쳐야한다면서 일부 밖에 성공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 일부가 500만명을 헤아린다. 무엇보다도 ‘금융으로 빈민을 만드는’ 서구의 첨단 자본주의와 다르게, ‘금융으로 빈민을 구제한다는’ 정신과 그 실례를 만든 것은 실패라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이런 사상이 이슬람 국가를 중심으로 세계로 퍼져 나가고 있다.
한국의 마이크로크레디트(미소금융)는 민간 주도로 2000년부터 처음 시도되었다. 이를 시도한 단체가 정식 금융기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출만 시행하며, 자본금은 국가·기업으로부터 기존 빈곤층 창업지원 사업을 위탁받는 방식으로 받거나, 개인들한테 기부금을 받아 마련하고 있다. 사회연대은행, 신나는 조합, 아름다운 세상 기금(아름다운 세상 재단), 사회복지은행 등이 한국의 민간 마이크로크레디트를 담당하고 있다.
전 세계가 엮여있는 거시 경제차원의 건전한 금융정책은 정부가 할 일이고, 나는 ‘풍환’이 일깨워 준 서민 경제에서 일어나는 금융의 어두운 그림자에 햇볕이 들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첫째, 은행은 금융 본연의 기능, 재화의 생산력 증진을 위한 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담보물에 대한 확정금리로 대출해 주는 정도의 기능이 아니라, 투자형 대출위주의 기능을 하여야 한다. 채무자의 손익을 함께 가져가는 것이다. 손해 보지 않으려면 대출이후에도 적극 지원해야 한다.
둘째, 금리의 차등지원이다. 즉, 투자형 대출에는 상호 협의에 의해서 이자율을 정하겠지만, 생계형 지원에는 일정 금리 이하를 적용하는 것이다. 貪賈三之는 33.33%, 廉賈五之는 20% 정신으로, 소액의 경우에는 더욱 낮은 금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은행은 투자형 상품에서 돈을 벌어서 ‘이자있는 비생산형 대출’에는 아주 낮은 금리를 적용하라는 것이다. 지금처럼 예대마진(預貸margin : 예금금리와 대출금리의 차이)로 앉아서 이익을 보는 제한적인 기능에서 벋어나야 한다. 사실, IMF 때 부도난 시중은행을 살려 놓은 것은 국민의 세금, 시민들의 돈이 아니었나?
셋째, 평가된 채권 가액이 일정수준 이하(예, 10% 이하?)인 부실채권은 하위 금융기관 혹은 채권추심업체에 매매하는 것을 금지하고, 소각되어야 한다. 은행도 대손처리하여 비용으로 떨어 버리면 당기순이익이 줄어들어 세금이 줄어든다. 회생된 채무자가 정상적인 경제활동에 참여하면 개인의 행복을 물론 사회적으로도 이득이다. 특히, 소액 대출 후 연체비용이 급증하여 파산을 맛보고 있는 청년 대출자들에게는 일정 조건으로 그 빚을 탕감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문탁의 ‘무진장’은 투자 부분이 없지만 앞서가는 금융이다. 마르지 않게 잘 살려 보자.
주빌리은행을 방문해서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지요. 그때만 해도 그게 그렇게 혁신적인 것인지 몰랐는데, 가마솥샘의 글이 기억을 되살려 주셨네요. 화폐에 대한 책을 모아 읽던 2015, 6년쯤에 이자야말로 화폐의 악마성을 보여준다고 공분했던 기억도 나구요....사기에서 함무라비 법전으로 현대판 주빌리은행으로, 미소금융으로 종횡무진하며 돈이야기를 이리 깔끔하게 정리해주신 가마솥샘 멋지심!!!!
데이비드 그레이버의 '부채 그 첫 5000년' 제목 아래 이렇게 씌여 있다.
'세상에 돈이 있기 전에 거기에 부채가 있었다'
책 표지를 넘기면
일단 프롤로그.. 제목은 '당신은 빚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
제가 밑줄 친 몇 줄을 적어 보면...
*성경의 희년禧年 정신을 따르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부채란 반드시 상환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전제가 바로 그 문제이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거예요" 이는 경제적 진술이 아니다 도덕적 진술이다.
*부채는 왜 생기는가? 소비자 부채는 우리 경제의 피다.
*부채의 파워는 우리가 부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과 부채라는 개념 자체의 유연성에 있다.
폭력에 근거한 관계들을 정당화 하고 도덕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최고의 방법은
그 관계들을 부채의 언어로 다시 구성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부채를 바탕으로 할 경우 폭력의 희생자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저는 예전부터 금융을 상품이라고 하는 말이 이상했어요
왜 금융을 상품이라고 하지?
그런데 금융도 떨이 판매를 한다고 하니 이해가 확~ 되네요.^^ 그것도 2차, 3차로
추심이라는 말이 이런 때 사용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 인간은 부채라는 폭력에 반대 급부로 잘살기 위한 생각으로 희년처럼 탕감의 실천도 발명했나 봅니다.
풍환이나 주빌리은행처럼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희년:그리스도교에서 罪를 赦하여 주는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