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란도를 위한 윤리적 애도 /해야
해야
1.제대로 애도한다는 것
2016년 6월 30일. 난 오랫만에 촛불을 들었다. 올란도의 Pulse 퀴어 바 총격 사건으로 희생된 49명의 젊은이들을 추모하는 행사였다. 단일범에 의한 총격으로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푸에르토 리코 등 중남미 출신의 퀴어들이었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아프가니스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29세의 오마르 마틴이라는 남성이었다. 처음엔 그가 IS와 관련되어 있다는 혐의가 있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그는 스스로 이슬람 과격주의를 신봉하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가 동성애 혐오자였다는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게 동기가 되어 Pulse를 택했는지 공식 수사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추모 행사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이 하나씩 불리고 이들의 배경이 소개될 때 난 슬펐고 분노했다. 총격범을 원망했고 단죄했다. 나의 애도는 거기서 그쳤다. 올란도를 생각하면 지금도 찜찜하다. 소수자들이 겪는 폭력과 죽음에 잠깐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지나갔다. 난 제대로 된 애도가 무엇인지 질문한 적이 없었다.
애도(mourning)의 사전적인 의미는 ‘(사랑하는) 어떤 사람의 죽음에 대해 슬픔을 표현하는 행동(케임브리지 사전)’이다. 이 정의는 애도가 슬픔이란 특정한 감정과 연관된 사적인 사건임을 내포한다. 일부 사전에는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한정되어 있다. 내가 애도를 이해한 방식과 비슷하다. 버틀러는 <<불확실 한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에서 보다 확장된 개념으로서의 애도를 제시한다. 저자는 911 테러를 군사적 해법으로 대응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위태로워지고, 상실과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응은 우리가 애도를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애도의 능력과 연관되어 있다. 버틀러는 대안으로 윤리적 책임감에 기초한 애도를 제시한다. 공동체로서의 연대감을 고양시키고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식으로 애도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적 애도를 넘어 이처럼 서로의 안전을 지켜주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방식의 애도란 무엇일까?
2.출발점으로서의 몸
윤리적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애도는 인간의 실존적 조건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버틀러는 몸에서 출발할 것을 제안한다.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몸’이 우리의 실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타인의 관심과 보호의 대상인 동시에 학대와 폭력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남의 시선과 터치에 노출되어 있어서이다.
<<아주 편안한 죽음>>에서 시몬느 보부아르의 애도는 엄마의 몸을 목격한 사건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진다. 지식인이자 유명 작가였던 중년의 보부아르는 엄마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곧이어 엄마의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녀는 늙고 병든 엄마를 끝까지 지키며 보살피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가녀린 몸과 성기를 우연히 보게 된다. 보부아르는 엄마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러자 잠옷이 벌어지면서 얼떨결에 쭈글쭈글하고 잔주름이 진 복부와 한 오라기의 털도 없는 음부가 드러났다… 마구 만지고 마음대로 다루는 전문가들의 손길에 내맡겨진, 의지할 데라곤 하나 없는 가련한 몸뚱이 (25-26쪽).
어머니의 알몸을 목격한 이 사건으로 인해 보부아르는 엄마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그녀 는 엄마이기 이전에 몸을 가진 존재였고, 그 몸으로 인해 노병사를 겪어야 하는 하나의 인간이었다. 몸을 가진 취약한 존재로서의 엄마는 자신과 운명을 공유하는 똑같은 사람이었다.
쇠약해진 엄마는 의사, 보호자, 간병인의 시선에 늘 노출되어 있었다. 이는 이들이 수족이 되어 주고 정서적 지원을 제공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그녀는 한 의사의 임상 실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폭력’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 존엄한 인간이 아닌 의사의 소유물이 될 수도 있었다. 보부아르는 엄마의 늙어 버린 알몸에서 모든 인간의 ‘취약성’(vulnerability)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늙음, 죽음, 폭력 앞에 취약하다는 점에서 엄마의 몸과 자신의 몸을 동일시하게 되었을 것이다.
3. 네 안의 나, 내 안의 너
우리 모두가 취약하다는 것은 상대로부터 위협을 받거나 폭력을 당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취약성에는 ‘상호의존’ (interdependence)이라는 또 하나의 실존적 조건이 따라온다 (버틀러). 우리는 서로 분리되어 있고 개별적이기 때문에 흔히 내 몸은 내 것이고 난 자율성과 의지를 독립적으로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 정치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들은 타인과의 관계성을 통해 자율성을 형성하고 발휘한다. 상대를 배제한 전적인 자율성이란 착각이다.
프로이트 식의 애도, 즉 애도하는 대상이 다른 대상으로 치환되는 완전한 애도가 쉽지 않은 것도 상호의존성 때문이다. 상대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네’ 안에 내가 들어가, 내 안에도 ‘너’가 들어 서게 된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상대방과 나누었던 신체적, 정서적, 사회적 상호 작용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관계성이 끊어짐에 따라 ‘네’ 안에 있는 ‘나’ 또한 상실된다. 따라서 나는 더 이상 내가 누구인지 알기 어려워진다. 이 관계성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타인들을 단지 분리된 타자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편안한 죽음>>에는 보부아르가 엄마를 돌보면서 깨닫게 된 상호 의존성이 잘 드러나 있다. 당시 그녀는 어머니와 멀어진 상태였다. 그녀에게 엄마는 가부장제의 불평등과 폭력성을 내면화한 채 고집스럽게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분리된 타자였다. 엄마는 보부아르를 어려워했고 보부아르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를 돌보면서 보부아르는 엄마의 삶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했다. 이를 통해 엄마가 했던 선택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고, 동정심과 동지애를 동시에 느꼈다. 특히 보부아르는 엄마 안의 모성과 여성성을 발견하고 본인이 엄마의 일부였음을 인식했다.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고 죽음 앞에 두려워 하는 엄마를 통해서는 죽음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와의 상호작용이 보부아르를 돌봄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용시켰다고 할 수 있다. 보부아르 안에 엄마가 있게 되었고 엄마 안에 보부아르도 들어섰다. 두 사람은 더이상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4. We Are Orlando. We Are One.
“우리는 올란도 입니다” “우리는 하나입니다” 이 두 문장은 올란도 사건 이후 가장 많이 게시되고 인용된 애도 문구였다. 우리는 하나로 뭉쳤고 올란도와 함께 한다는 이 구호들에는 슬픔을 같이 하고 치유를 위해 돕겠다는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사건 당시 나의 마음을 잘 대변한다. 나는 이 문구들이 위태로움이 경감되고 연대감이 고양된 공동체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지 질문하지 않았다. 윤리적 애도를 염두에 둔 공적인 담론을 접한 기억도 없다.
위의 구호에서 ‘하나가 된다’라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자문하게 된다. 나는 슬픔을 같이 한다는 측면에서 하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서로에게 의존하고 긴밀한 관계성을 갖기 때문에 늘 ‘하나’였다는 인식은 하지 못했다. 내가 만나고 접촉하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에게서 연결감을 느끼고 발견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퀴어 이민자로서 나는 나의 소수자성에 기초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올란도 사건을 곱씹어 보면서 무슬림 공동체, 난민들, 라틴계 (불법)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올란도 사건은 성소수자 뿐 아니라 미국 내 아랍인과 무슬림 신자들이 처한 취약함도 드러냈다. 오마르 마틴이 대규모 총격을 가하게 된 이유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여러 정황을 따져 보면 그는 이슬람 교도, 난민의 자녀란 소수자성으로 인해 주류 사회로부터 소외된 삶을 살았다. 911 이후 미국의 아랍 국가 침공과 미국 사회 내에 널리 퍼진 이슬람 혐오가 그를 취약하게 만들었을 거란 추정도 가능하다. 오마르 마틴도 희생자들과 똑같이 몸을 가진 취약한 존재였다.
이민자 특히 불법이민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민자들을 나와 다르지만 수용해야 할 타자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메리칸 인디언들을 제외하면 모든 미국인들은 이민자들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경우 가계의 몇 대만 거슬러 올라가면 복잡한 이민의 역사와 만나게 된다. 직계 조상들의 이민자로서의 고난, 성취, 실패 등이 그들의 몸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들의 몸은 현재 이민자들과 부대끼며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청소나 잔디 깎기, 집수리 등 모든 궂은 일을 멕시코나 남미 출신의 노동자들이 도맡아 한다. 이들 중 다수가 불법 체류자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다. 얼마 전 안전모도 없이 이웃집 지붕에 올라서 있는 젊은 라틴계 여성을 보았다. 혹시라도 떨어져 다칠까 아찔했다. 그녀는 다른 라틴계 남성들과 지붕 교체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은 위태로웠다. 그녀와 동료들을 보면서 나와 이웃들이 단순히 상호 의존을 넘어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자각이 왔다. 내가 퇴근 후 여유롭게 동네를 산책할 여유를 갖는 것도, 이웃들이 매달 풀 파티를 하는 것도 이들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위의 구호에서 ‘우리’와 ‘하나됨’을 곱씹어 보고 재해석 해내는 일이 내겐 윤리적 애도의 출발점이 될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취약성과 상호 의존성을 좀더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럴 때 올란도는 잊혀지지 않고 계속 애도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