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노후에 함께 모여 살아 보자(후편)
(글) 신상열 혹은 가마솥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고장난 것을 고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기를 좋아하며
별것 없는데 때를 잘 만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으로서
은퇴 후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강원도라고?
2009년 3월 어느날. 운영위원장인 ‘박장’이 강원도 평창의 임야를 계약 하겠다고 소식을 올렸다. 약 10,000 평 정도에 평당 5만원으로 가계약을 하겠다는 것이다. 귀촌해서 살려면 그 곳에서 무엇을 하고 살 수 있는지, 무슨 농사를 지을 수 있는지, 그곳의 주민들은 외지인에 대한 의식이 어떤지 면밀히 따져보고 토지를 구매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내려고 했으나 그만 두었다. 모두들 예산상의 가격과 규모이니, “잘 되었다. 고생했다”는 댓글 일색이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함께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를 치열하게 논의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문제제기 하기도 그렇고, 또 은퇴 후에 무슨 일을 할 것이라고...... 결국, 그 곳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우리 땅’을 보러 갔다. 큰 도로에서 꺾어져 산으로 올라가는 도로는 비포장이었다. 한두 번 걷는 것은 좋겠지만 매일 걷는다고 생각하니 아득하다. 남쪽 사면이니 햇볕은 잘 들어 올 듯하다. 뒤쪽은 보섭봉이라는 큰 산이 있고, 앞으로는 평창강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 자리라며 땅을 찾은 ‘된장’이 설명한다. 하이구 이 친구야, 사고를 제대로 쳤다. 서울에서 3시간 반, 고속도로 I/C에서 30여분 떨어진 해발 450m의 이런 야트막한 산을 평당 5만원씩이나 주고 구입하다니, 평지도 아니고 야산의 중턱이어서 토목공사 비용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성미산 마을의 핵심 활동가인 ‘짱가’가 탈퇴를 선언하였다. 부인 ’짱아‘가 강원도는 너무 추워서 못 간다는 것이다(개 키우는 문제로 속이 상했을 수도 있고, 서울시의 ’어공‘이 되어 공적인 영역에서 마을만들기 사업에 한창인 ’짱가‘가 이 일은 좀 묻어가려고 했는데....하는 여운을 내게 남기는 것으로 보아 잘못 가고 있음을 그도 느끼고 있었다). 그 뒤로 아이들이 어린 ’개똥이‘네가, 보습학원을 하는 ’바람꽃‘네가 떠났다. 마을 터인 방림면이 2,500여명, 거기에서 자동차로 20분쯤 걸리는 평창읍이 9,000여명의 인구수이니 경제활동을 한동안 해야 하는 그들에게는 막연했을 것이다. 농사는 죄다 콩밭이 아니면 배추밭이었고 비닐하우스에서는 파프리카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당장 이곳에서 뭐하고 살 것인가가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은퇴한 후에 특별히 경제활동을 하지는 않겠지만 뭐하며 지낼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나도 막연하기는 마찬가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우리가 그렸던 마을 전체의 구성도를 토대로 건축가 이일훈 선생이 마을 설계도를 완성하였다. 그 다음 해, 2012년 4월, 드디어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다. 붉은 흙들이 끊임없이 날라지며, 길이 보이고 무엇보다도 제법 넓은 평평한 대지가 펼쳐지니, 그 자체로 예뻐 보였다. 잘려나간 나무들과 그곳을 떠나야 하는 동물들은 그 순간만큼은 보이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마을 이장을 통해 방림 5리 발전기금을 내었지만, 동네 입구에서 경운기로 길을 막아 공사 차량 출입을 방해하는 방림 1리 텃세 노인에게 동일한 금액의 떡값을 주는 것도 아깝지 않았다.
토목비용은 항상 예상을 뛰어 넘는다. 이런 야산의 개발은 더욱 그렇다. 단단한 청암(靑岩)이 나와서, 흙을 버릴 곳이 없어서, 외진 곳이니 장비와 인부 구하기가 어려워서, 예상 못한 곳에 옹벽을 쳐야 해서, 원인은 가지가지다. 그 때마다 비용이 추가되어야 공사가 진행되었다. 건축학과를 나온 ‘찐빵’이 토목을 맡아서 진행하였는데, 그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었는지 탈퇴를 선언하였다. 왜 안 그렇겠는가. 추가 비용에 대해서 업자들과 실랑이해야 하고, 현장을 잘 모르는 회원들을 이해시켜야 하니 ‘내가 왜?’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찐빵’의 탈퇴로(부인이 의사) 의사 그룹에서 두어 가구, 그리고 바로 입주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제일 연장자인 성산동의 동네 어른이 탈퇴하였다. 급기야 탈퇴한 회원에게 그가 납입한 입회비를 지불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포기할 수도 없다. 토목 비용이 5억 가까이 집행되었어도, 회원들의 납입금액 이상으로 그 야산이 다시 팔릴 수가 없기 때문에 받은 돈을 돌려 줄 수가 없다. 법적으로 문제를 삼으면 대표인 위원장이 사기죄를 뒤집어 써야 할 판이다.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비상대책이 필요하였다. 이제부터는 탈퇴를 하면 납임금의 10%를 탈퇴비 명목으로 삭감하여 지불하며, 새로운 회원이 등록할 때에 순차적으로 지급하는 것으로 결의하였다. 납입금도 처음보다 거의 두 배로 대폭 상향하였다.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귀촌마을의 희망을 상상해 보지만 동력은 많이 떨어졌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였다. 대략 80%정도 진행된 토목공사를 인수받아 2기 운영위가 꾸려졌다. 의사 그룹이 운영위를 맡았다. 그 즈음에 스스로 집을 짓겠다고 내려간 성산동 멤버인 ‘지니’가 운영위에 합류하였다. 그는 동네에서 목공 프로그램을 이수한 경험으로 토목공사 중인 현장에서 자기집을 스스로 짓기 시작하였다. 운영위 구성이 다소 걱정이 되지만, 현장에 ‘지니’가 있으니 잘 될 것 같았다.
그런데, 2년이 다 되어도 토목공사는 완료되지 않았다. 공사는 시간이 비용이다. 거의 다 되었는데, 왜 그런지 들여다보았다. 이런 인간들. 전체적인 공사의 완성보다 자기들 집터의 유리함에 신경 쓰고 있었다. 윗터 바위 옹벽을 헐어서 아랫터 자기들 집의 법면에 축대를 쌓아 대지를 넓히는 공사에 3천만원 지급, 아랫터 입구만 시멘트 포장(나중에 군청에 요청해서 관급공사로 전체 마을길을 포장하였다)하는데 얼마 등 이해할 수 없는 공사들이 있었다. 더욱이 화가 난 것은 대지를 애매하게 잘라서 아랫터는 가구당 지급된 100평보다 많은 140여평을 가지게 되었는데, 추가된 40여평을 평당 2만원에 구입하는 것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참나! 토지를 평당 5만원에 구입하였고, 거기에 더해서 토목공사 비용까지 들어갔는데, 2만원이라니...... 100평은 5,500만원인데, 40평은 80만원이다? 성산동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용인에 사는 나도 누군가가 시간을 내어 진행하는 것에 고마워하며, 다소 비용이 들더라도 깊게 관여하지 않은 것이 불찰이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이상과 현실 사이
2기 운영위 임기가 다 되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자진해서 3기 운영위에 참여하였다. 진행상황을 알리고 성산동 멤버들로 꾸려 내가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공무원을 상대하는 일이 매우 어려웠다. 현장을 자주 가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행정업무를 진행시켜야 하니 평창군청에서 나는 진상 민원인이 되었다. 2010년에 평창 시니어 마을 사업대상에 선정된 것을 근거로 군청에 민원을 내어 관정을 더 깊이 파는 공사를 지원 받았다. 한전에는 민원을 내고 지인을 동원하여 전봇대를 끌어 들였다. 20여 가구가 이사 오는 귀촌마을이라고 강원도지사 상을 받았고, 이를 핑계로 방림면으로부터 마을길을 포장하는 지원을 받았다. 전기, 물, 도로가 확보 되었고 나머지 자잘한 토목공사를 마무리하여 회원들이 집을 지을 수 있게 만들었다.
회원들의 편의를 위하여 평창군에 있는 설계 사무소와 마을 전체의 건축 인허가 계약을 추진하였다. 현지 사무소이니 건축과 관련된 군청 민원을 쉽게 해결할 심산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설계 사무소 실무자가 “아니, 어떻게 23명 공동 명의로 된 땅에 각 자가 집을 짓는단 말입니까? 그렇게는 어려워서 진행하지 못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그 동안의 사업은 행정적으로 ‘성미산 귀촌위원회’라는 등록된 임의 단체 대표가 회칙인 정관과 등록된 회원들의 결정에 따라 집행하였다. 정관의 핵심은 모든 토지는 회원들의 공동소유, 건축물은 개인 소유로 하고, 의사결정은 만장일치로 하는 것이었다. 하여, 회원이 집을 짓기 위해서는 모든 토지 공동 소유주(등록 회원)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현실적으로 더욱 고약한 것은, 탈퇴하였지만 회비를 반환받지 못하여 귀촌위원회의 등록인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예닐곱 명의 동의를 얻는 일이었다.
전체 총회를 열었다. 설계 사무소 요구대로 진행하려면 정관변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공동소유와 만장일치 의사결정 구조를 유지하려는 나를 포함한 대여섯 성산동 사람들과, 각 가구에게 토지를 100평씩 분할하고 과반수 결정으로 정관을 바꾸자는 그룹으로 나뉘었다. 번거롭더라도 전자로 할 수는 있지만, 결국 후자로 결론이 났다. 착공식 축문에 장문의 소회를 적었다. 자본주의 문법으로 살아 온 삶이었지만, 은퇴 후에는 그 문법으로 살지 않는 희망을 키우는 마을을 만들어 후손들이 언제든지 들어 살 수 있도록 하자고 성미산 귀촌마을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진행과정에서 자본주의적 행정의 벽을 넘지는 못했지만, 그 기본이 토지의 공동소유와 만장일치 의사결정구조이었다는 점을 기억하자고...... 부질없는 짓인 줄 안다. 결혼식 주례말씀도 기억나지 않는데, 누가 귀 기울여 듣겠는가? 2015년 5월이었다. 대략 8년이 걸렸다.
욕망은 세세한 일상에서 나타난다
각자가 꿈에 그리던 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와 동시에, 함께 모여 그림 속의 동네를 만들며 기쁨을 나눌 때의 희망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자기 집 시공자와의 갈등은 기본이고, 사소한 문제로 바로 이웃해 있는 옆집과의 다툼도 자주 일어났다. 하다못해 자기 집과 다른 집을 비교하며(전망, 인테리어, 구조, 가구 등) 속상해 하는 멍청한 이도 있다. 어쩌라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되는 측면이 있다. 바로 욕심이다. 아마도 평생 처음으로 자기의 의사가 반영된 자기 집을 짓는 일이니, 평소에 숨어있던 모든 욕망이 튀어나와 충돌하는 것이다. 나는 이미 용인 고기리에서 한번 경험하였다. 그렇게 하면 한 뼘 이득은 가져갈지 모르지만, 마음의 큰 상처는 그대로 남아 엄청난 손해라는 경험 말이다. 주택이 들어섬과 동시에 따라오는 소소한 일상에서 각 회원들의 공동체성은 찢어지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2년이 지났지만, 나의 운영위원장 역할이 연임되었다. 지금까지의 진행에 대해서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이다. 딱 한 사람, 평당 2만원으로 40평을 구입한 가구만 끝까지 반대하였다. 위원장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자초한 일이니 마무리를 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실제로 일은 험난하였다. 가구당 100평씩의 부지를 소유권 이전 등기하는 일부터 난관이었다. 탈퇴한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서 설득하고, 내 이름을 걸고 회비반환을 ‘보증’하는 일은 예상보다 어려웠다. “공산주의처럼 내것 네것 구분없이 토지도 공동소유 한다는 사람들 아니었냐.”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이런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지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간신히 도장을 받아 서류를 만들어서 평창에 사는 ‘지니’에게 보내곤 하였다. 군청에 가서 서류를 신청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속을 썩였다. 평창군까지 다녀오는 출장비로 8만원씩을 달라는 것이다. 이게 나를 위한 일인가? 전체를 위한 일이지 않느냐? 나는 이 서류를 만들기 위해서...... 그가 그렇게 삐딱한 것은 혹시 그것 때문인가? 토목 공사가 한창일 때, 공사용 장비를 이용하여 자신의 집짓기에 활용하던 버릇이 있었는데, 토목이 끝난 후에도 자잘한 마을 정비를 위한 장비사용 사업을 만들어서 그 장비를 자기집 정리에 이용하곤 하였다. 2시간 장비작업이 필요한 마을 사업에 하루종일 작업으로 빌려서 나머지 시간은 자기집에 활용하는 식이다. 알고도 모르는 척 하였지만, 집을 짓고 내려간 다른 회원이 위원장인 나에게 자주 지적하기에 가끔씩 주의를 주었다. 어느 날, 막걸리를 사들고 가서 그의 속내를 들었다. 인정할 수 없지만, 그는 나름 서운한 게 있었다. 자기가 토목이 완료되지 않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기 집을 손수 지은 것은, 그 뒤로 집을 짓는 회원들이 자기에게 공사를 맡겨 일찍 내려온 자기를 배려할 줄 알았는데, 집은 고사하고 데크 만드는 공사도 외부인에게 맡기니 공동체 회원들이 맞느냐는 것이다. ‘공동체’라고 하지 않고, 꼬박 꼬박 ‘조합’에서 이런 것은 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당연하게 요구하는 의사그룹 아랫터 사람들의 불만을 들을 때에는 ‘그런가 보다’하였는데, 성산동 멤버인 ‘지니’의 말은 나의 다리를 풀리게 하였다. 하! 공동체라는 말을 이렇게 쓰는 것인데, 난 바보같이 각 집의 허가 서류들을 만들어 주느라 시쳇말로 개고생을 하였구나 싶었다. 내가 이런 마음이 들 정도이니, 그의 이기심은 다른 회원에게 더욱 깊은 실망감을 주고 말았다. 특히 그가 성산동 멤버이기에......
문탁에서 읽은 칸트가 아니었으면 이런 저런 섭섭함으로 지금도 평창에 가기 싫었을 것이다. 지성이 사물을 시공간에서 범주를 가지고 인식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들의 범주와 나의 범주가 다를 뿐임을 인정하면 될 일이다. 그들에 대한 나의 감정은 사실 얼마 전에야 흘려보낼 수 있었다.
가회당(嘉會堂), 그것 좋네
주말마다 평창집에 들러서 이것저것 가꾸는 재미에 푹 빠졌다. 하지만, 한동안 이 곳에서 상주(常住)하기 힘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짠다? 초심으로 돌아가 본다. 공동소유와 만장일치가 깨어진 날, 마을 밴드에 내가 쓴 글을 읽어 보았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 그러네. 이 집을 공유재(共有材)로 사용하면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적 문법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일이 아닐까? 내 것이 아닌 모두의 집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 머물며 좋은 추억을 만든다면, 그것도 또 하나의 공동체적 삶이 아닐까? 마눌님도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 집에 멋진 이름을 지어 주자. 개인이 구매를 통해 사유(私有)할 수 있고, 그 소유권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소비에서 배제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근간인, 사유재(私有材)를 벗어나는 이름을 지어 보자. 구성원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재화, 공공재(公共材)에서 따보면 어떨까? 집이니까, 제(齊)자를 넣어서 공공제(公共齊)? 어째 공적인 딱딱한 느낌이...... 그럼, 공유재(公有材)를 따서 공유제(共有齊)라고 하면 어떨까? 그런데, 이것도 에어 비앤비 같은 느낌이 든다. 둘 다 의미는 좋은데, 어째 자본주의 경제 냄새가 난다. 결국 가진다는 의미가 남아 있어서 그런가?
‘인디언’이 말한다. “가회당(嘉會堂) 어때?” “만나면 좋은 친구? 좋네......” “허이구, 무식하긴. ‘亨者, 嘉之會也’라고, 주역(周易) 문언전(文言傳)에 나오는 말인데, 그 뜻은 ...... (생략).” 또 뭐가 통(通)한다고 했는데, 설명을 들었어도 내 말로 옮기기 힘들다. 출전을 또 물어 본다.
“그니까, 내 말이 그 말이여. 만나면 좋은 친구!”
“으이구. 몇 번을 설명해도 또 물어보는 것 보니, 전교1등은 개뿔! 그렇다고 합시다!”
“전교 1등은 '셤'에 나오는 것만 외울 걸요~~~~”
여러분! 그러니까 그 뜻을 기억하기 쉬운 이름 하나 지어주세요.
뱀발: 가회당(嘉會堂)이 ‘회의 하기를 좋아하는 집’으로 해석되시는 분은 문탁 주역(周易) 강의를 꼭 듣기 바랍니다.
같이 사는 길을 찾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군요.
하지만 그래도 아직 기운 있을 때에 같이 늙어가면서 서로를 돌보며 잘 사는 방법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글고.. 얼마 안 있으면 평창집에 회의하러 갈건데 그때 이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겠습니다.ㅋㅋㅋ
최근 몇 년 동안 평창 집 알뜰살뜰 이용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꾸벅
저도 이번 효도여행-평창, 아주 좋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었네요~ 그래도 덕분에 저희가 함께 공간을 누릴 수 있으니 감사할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