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59년생 서른살

가마솥
2023-01-1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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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상열 혹은 가마솥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고장난 것을 고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기를 좋아하며

별것 없는데 때를 잘 만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으로서

은퇴 후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두번째 은퇴

 

 중소기업 연합회 회장이 “내일 저녁 시간을 비워 달라“고 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략 예상이 된다. 올해, 2020년. 호적나이로 만 60세이다. 이 곳은 경기도와 산업자원부에서 예산을 지원받아서 업무를 처리하는 수탁기관이다. 센터장은 그들의 인사권(?)으로 지명 받은 사람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다. 나도 그랬다. 인사철인데, 자기가 추천했노라고 생색내며 전화하는 놈들이 없다. 연임은 물 건너 간 것이다. 담당 후배에게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시쳇말로 ‘가오’ 빠지는 것, 조용히 내가 정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랫배에서 무언가가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이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서 들어야 해? 이 놈들이 나를 이렇게 취급하는 거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동지는 어디 가고!’ 등등. 워워워...... 진정하자, 진정해. 예우하며 직접 듣는다고 바뀔 것인가? 어떻게 통지하든, 어떤 이유로든, 계약해지는 누구나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며칠 전 한차례 책상을 가볍게 하였으니 별것 없지만, 마지막으로 컴퓨터 파일들을 정리하고 서랍을 정리했다. A4용지 박스 하나로 충분했다. 시원 섭섭. 딱 그런 기분이다. 돈 버는 일에 내 시간을 저당 잡히지 않아도 되니 “야호! 이제야 해방이다!” 해야 하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헛헛한 기분이 올라온다. 필요한 사람들은 이미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데도 다시 볼 것 같지 않은 명함철을 버리지 못하고 박스에 담는 나를 발견한다. 뭐, 이 정도는 기념품으로 하지. 혹시 알어? 또 필요하게 될지...... 일일이 악수하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였지만, 많은 직원들이 아쉬워하며 배웅 나오는 것을 위안 삼아 사무실을 나섰다. 작은 박스를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나를 졸졸 따라 나오는 몇몇 직원들 모습이, 꼭 ‘유골함’을 따라 가는 장례행렬 같다. 짜식들, 박스나 들어 줄 것이지.

 

사실 난 이번이 두 번째 은퇴이다. 지금 이곳에서 센터장으로 일하기 전에, 그가 市長인 도시의 산하기관에서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8년을 일하고, 2018년 8월에 공식적으로(?) 은퇴하였다. 직장에서는 그를 따라 경기도로 영전해 갈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니 은퇴가 아닌 퇴임이었지만, 우리 집에서는 은퇴이었다. 마눌님의 호출에 따라 식구들이 모두 모여 은퇴를 축하하는 파티를 열어 준 것이다. 은퇴를 주장한 것은 '고맙게도' 마눌님이었다.

 

 2010년부터 그와 함께 일한 ‘어공’의 포지션은 참으로 애매하였다. 원래 사기업에서 그 분야에서 25년을 일한 전문성을 선택하였으니 본연의 업무 처리는 별것 없었다. 문제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 위하여 정무적인 일을 해야 할 때이다. 이 일은 철저히 Give & Take 논리이었고, 무조건 상대방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성사되는 일이다. 그런 일, 소위 ‘특명’을 받으면 내 안에 우글거리고 있는 새로운 ‘자아’들이 튀어 나왔고, 그 때문에 나 스스로 놀라곤 하였다. 또한 무언가를 창조하는 잠재태로서의 즐거운 ‘애벌레 자아’가 아니라, 전문가와 정치인 사이에서 ‘나’를 선택해야 하는 흔들리는 ‘자아’를 발견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는 일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전문성을 갖춘 정치적 역량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마눌님은 ‘당신은 정치인은 절대 못 되니, 그만 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였다. 소는 누가 키우고? 라며 일축하였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그 스트레스는 달콤한 것의 댓가일지도 모른다. 사실, 주어진 예산을 바르게 집행하는 ‘어공’의 일은 돈을 벌어야 하는 사기업의 스트레스에 비할 바가 못 되고, 시민운동 할 때에는 그렇게 철옹성 같던 행정력이 전화 한 통화로 움직여지는 권력의 맛은 통쾌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두 번 시장선거에서 승리하였고, 나는 네 번이나 연임하여 8년을 그와 함께 하였다.

 

 2018년 12월, 남들처럼 은퇴 기념여행을 떠났다. 해외출장으로는 가보지 않은 곳을 선택했다. 쿠바. 쿠바인들의 삶은 우리네 60년대 사회의 모습이었다. 체 게바라가 살아있으면 달랐을까? 책을 통해서 그려 보았던 쿠바를 현장에서 보니, 사회주의 정치만을 고집하며 사람들을 배고프게 하는 쿠바 정치인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념은 무엇이고, 정치는 무엇이란 말인가? 시선은 차창 밖의 경치를 보고 있지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지곤 하였다. 문자 한통이 날아 왔다. 경기도에 들어간 후배이다. ㅇㅇ센터장의 자리가 났는데 형님이 제일 적합하다는 것이다. 여행 중이니 나중에 답을 하겠다고 하고는 바로 다음 날 승낙하는 답신을 보냈다. 바로 다음 날! 참나...... 내가 생각해도 찜찜하다. 식구들에게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잖어? 하지만, 지난 서너 달 동안 나의 마음은 좀 애매하였다. 다른 사람들의 질문, “요즘 뭐해?”하는 대답으로 “은퇴하고 논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고, “쉬고 있다.”고 얼버무리고 있던 터이었다. 은퇴? 왠지, 뒷방 늙은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식구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나는 은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식구들은 덤덤한데, ‘아버지, 재취업 축하드려요~~~’하는 사위놈의 문자에 기분이 묘했다. 재‘취업’이라......

 

 

 

 

은퇴하면 귀촌이나 하지

 

2009년부터 성산동에서 공동육아로 만난 친구들과 반백년 기념으로 ‘은퇴 후 모여살기’를 준비하였다. 그 결과가 평창 방림면에 만든 꽃숲마을이다. 스무 가구를 목표로 출발하여 2017년도 기준으로 16가구가 집을 지었고, 현재는 대부분 세컨드 하우스로 이용하고 있다. 한 날 한 시에 동시에 은퇴하는 것도 아니고, 3가구만이 상주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무언가 함께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원래 계획하였던 ‘은퇴 후 모여 살기’는 요원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센터장의 임기만료가 불 보듯 뻔한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은퇴 후 평창에서의 삶을 어떻게든 그려 보았다. 은퇴하기 몇 년 전부터 책도 보고, 인터넷도 찾아보고, 유투브도 열어 보았다. 주로 귀촌관련 사례들이다. 온라인 수업도 들었다. 그럴수록 평창은, 그 곳에서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에 대하여 심도 있게 논의한 후에 그에 적합한 장소를 구한 것은 아니었다. 멋진 풍광을 자랑하지만, 스콧 니어링처럼 강의하며 메이플 시럽을 만들 수도 없고, TV 속 자연인처럼 채집하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세상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 집과 관련된 안정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하여 주말마다 평창에 갔다. 태양광을 설치하고, 데크를 깔고, 나무를 심고, 화단을 만들고, 낮은 울타리를 치고, 경계의 흙이 쏠리지 않게 토낭를 두르고 등등. 언제든 들어와 살 수 있는 공간으로 가꾸었다. 당분간 상주할 수는 없으니, 원격조종이 가능한 IOT도 설치하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그것은 나의 취미이기도 하였지만, 비용만 지불하면 전화 한 통화로 해결할 수 있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시골 생활에 대비하는 훈련과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읍내 만물가게에 들어가 작업할 물품들을 고르는데, 사장님이 묻는다. “얼마나 되었우?” “?”. “평창에 집지은 지 얼마나 되었냐구?” “아 예, 한 1년 쫌 넘었습니다.” “흠......보통 3~4년 가요.” “예 ?” “처음에 이사 와서 집 주변도 가꾸고, 큰 개도 키우고 닭도 키우고, 이것저것 심어 보기도 하고..... 한 3년은 그렇게 재미있게 지내요. 그러다가 문득 사람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면서 한 두 해 더 있다가 결국, 도시로 다시 나가더라고.”

 

정확했다. 한 3년쯤 지나니, 집주변 공간이 빠르게 정리 정돈이 된다. 그와 비례해서 무언가 계획하고, 연구하고,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완성된 모습을 그려보며 엔돌핀이 팍팍 도는 그런 감흥이 나지 않는다. 더욱이 나이를 먹었는지, 울타리 작업한다고 바위에 삼십여 개의 앙카볼트 작업을 하였더니 팔꿈치에 골프 엘보우가 왔다. 골프는 안하기로 마음먹고 골프세트를 통째로 친구놈에게 주어 버렸는데, 테니스 엘보우도 아니고 ‘골프’ 엘보우라니...... 그러고 보니, 마당에서 작업 좀 하면 다음 날 아침, 뻑뻑한 손가락 관절들이 모두 ‘나 여기 있오’하고 알린다. 농사? 원래 농사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귀농(歸農)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것이지, 도시사람이 은퇴 후 한 번도 안 해본 농사를?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을 농사를 지어보지 않고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문제, ‘그럼, 여기서 뭐하고 살지?’하는 질문까지 겹치니 평창 가는 발길이 뜸해진다. 나도 다른 집들처럼 세컨드 하우스로 평창집을 사용하게 되었다. 남 몰래 은퇴를 준비하였다고 자부하였건만, 실행할 수 없으니 전혀 준비하지 않은 것과 같다. ‘남 몰래’ 답답한 상태가 되었다.

 

평창 방림면 꽃숲마을 조감도

 

 

어쨌든 집에서 나온다

 

한 놈은 매일 도서관에 간단다. 또 한 놈은 동네 근처 산인 광교산, 청계산을 매일 올라 다니고. 특이하게도 한 놈은 정장을 입고 작은 방으로 출근을 한단다. 미친 놈. 은퇴를 하였어도 스스로 무언가에 매어 있기를 자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산이 좋아서 산들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면 몰라도, 죽으면 항상 누워있을 산인데, 왜 벌써 못가서 안달인지...... 혀를 끌끌 찼다. 헌데, 정작 나는 점점 소파에 앉아서 TV보는 시간이 늘고 있었다. 손흥민의 게임은 당일도 보고, 재방송도 보고, 하이라이트도 보면, 그의 EPL 모든 경기를 거의 외울 지경이었다. 소파에 앉던 자세도 점점 눕고 있었고, 그 시간에 비례해서 허리도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마눌님이 “이제 그만 움직여 보시죠?“한다. 센터장을 그만 둔 이후 정말로(!) 은퇴한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삼식(三食)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지하실에 묶어놓고 있던 자전거를 청소했다. 엉덩이 받침이 있는 자전거 복장에 헬멧, 선글라스까지 챙겨서 쓰고 탄천으로 나갔다. 슬슬 패달을 밟아 보니 바람이 뺨을 살살 스치는 게 상쾌하다. 내친 김에 한강까지 나아갔다. 평일인데도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룹지어서 씽씽 속도를 내어 다니는 사람들도 있고,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어떤 이는 뽕짝을 틀어 놓고 달렸다. 꼴불견. 성수대교 쪽으로 가다가 너무 무리하나 싶어서, 핸들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맙소사! 죽는 줄 알았다. 멍청한 놈. 생각이 없었다. 탄천은 당연히 하류인 한강 쪽으로 흐른다. 그러니 한강 쪽으로 갈 때에는 완만한 내리막이 계속되어서 룰루랄라 내려갔던 것이다. 그럼, 올라 올 때는? 오후 맞바람까지 불어서 힘들기가 배가(倍加)되었다. 이것도 매일 하기에는 재미없어 보인다. 하기야 매일 자전거 타는 것이나 할 일없이 산에 가는 것이나 ‘집을 나간다’는 측면에서 똑같다. 그런데 가만, 내가 뭘 잘못했나? 왜 은퇴해도 매일 집에서 나가야 하지? 속에서 무언가 부글거린다.

 

 

59년생 서른 살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첫 번째 칸에 주저앉았다. 이곳이 우리 집에서 제일 시원하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요즘에 알게 된 사실이다. 이런 저런 생각하기가 좋은 곳이다. 치매가 진행 중이긴 하지만 건강하신 장모님과 태어날 손주 녀석을 돌보면서 이렇게 내 생의 마지막, 노년을 보내는 것인가 하는 상념에 빠졌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전면에 커다란 족자가 걸려 있다. 사실, 족자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 십년 전에 이 집을 지은 기념으로 장인어른이 써주신 것이다. 약간 흘려 쓰셔서 몇 글자는 못 읽는다. 검색해본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벽란도판상시(碧瀾渡 板上詩)이다.

 

 

登眺江樓日(등조강루일) 강루에 올라서 구경하는 날

奔馳宦路年(분치환로년) 벼슬길에 헤매는 시절이라오

何當伴鷗鷺(하당반구로) 어느 때 갈매기와 무리를 지어

歸釣碧山前(귀조벽산전) 저 산 앞에 돌아가 고기를 낚을꼬.

 

 

벽란도(碧瀾渡)에 있는 벽란정(碧瀾亭)에서, 고려말 조선초 격동기의 학자이자 정치인인 권근이 벼슬길의 아슬아슬함을 떠나 초야에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즐기며 살 수 있는 날을 그리며 지은 것이다. 87년 대기업에 들어가 직업을 가진 이래, 사람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고민하고 싸웠다. 직원들 말처럼 ‘바보같이’ 손해도 많이 보았고. 마지막 10년 동안도 ‘어공’으로 보내며, 사방에 널려있는 진흙탕 구덩이들에 용케 빠지지 않을 정도로 행동하였다. 그들과 한배를 타기 싫어 일정한 거리를 두는 방법으로 나를 지켰다. 그러니, 눈 매서운 후배들이 형님으로 예우하면서 뒷방으로 밀어내는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오늘, 그림으로 걸려 있던 이 족자가 나의 욕망을 꺼내 보여준다. 권근(權近)과는 다르게 나는 벼슬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 동안 어정쩡하게 하루를 보낸 것은, 혹여 ‘그의 대선 캠프에서 불러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랬다. 지금은 소를 키우지 않아도 되는데, 마음은 짭짤한 권력의 달콤함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은퇴의 변(辯)으로 “앞으로는 선택을 구하는 삶이 아닌, 내가 선택하는 삶으로 살겠다.”며 전직원에게 메일을 보내 놓은 나인데, 부끄러웠다. 어디든 일단 집을 나서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집안을 뱅뱅 도는 나도 은퇴가 안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 ‘이제 그만 움직여 보자.’ 앉은 채로 핸드폰을 꺼내서 그와 관련된 밴드를 탈퇴하고, 카톡방을 나오고, 텔레그램 방들을 폭파하고 나서, 관련된 전화번호들을 모두 지웠다. 후 ~~~~

 

 

 

 

한국 남자의 평균수명으로 80은 산다고 보면, 앞으로 남은 20년을 뭐하고 살까? 늙지 않았다고 혹은 늙지 않겠다고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지혜로운 60대이라면 여기 저기 좋은 말을 해주고 다니면 좋겠지만 어림도 없다. 하기야, 그 동안 쌓은 알량한 지식과 경험으로 추억을 먹고 사는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무엇을 하고 살까?’가 아닌, ‘어떻게 살까?’라고 질문해야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일단 오늘 즐거운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기로 하였다. 그 동안 미뤄 놓았던 해보고 싶은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버킷 리스트? 그런 것을 만들고 싶지 않다. 그 것은 목표를 세우고 나의 현재를 미래에 미뤄 놓는 그 동안의 삶과 비슷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도래하는 미래를 지금 여기서 맞이하는, 현재를 살아 보고자 한다. 우선 지난 30년 동안 했던 돈 벌기 위한 공부와는 다른, 사람 사는 공부로 새로운 20년을 시작해 본다.

 

36년 전 사회 초년생일 때 가졌던 두려움과 기대, 그 상반된 떨림을 살려 내어 ‘59년생’이 아닌 ’서른 살’로 출발 해보자. 20년 뒤에 생(生)을 은퇴할 때에는 한 번의 은퇴로도 만족스러운 삶이었다고 말하는 모습을 그려 본다.

댓글 9
  • 2023-01-16 16:25

    가마솥님의 서른살을 응원합니다~

  • 2023-01-16 16:44

    가마솥님의 글을 읽으니 꼰대와 어른의 차이를 알겠네요 ~ ㅎㅎ
    서른살의 공부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 2023-01-16 18:29

    우와 가마솥쌤과 함께 공부해보고 싶어요..!!!

  • 2023-01-16 19:00

    가마솥님~~ 사람 사는 공부, 응원합니다~~~

  • 2023-01-16 19:06

    그렇다. 가마솥의 누룽지는 아직 끓고 있다.
    한 20년은 더 불을 지펴야 맛 볼수 있는 누룽지.
    그 가마솥은 그만큼 단단했다.

  • 2023-01-16 23:15

    가마솥님의 글을 읽는데, 왠지 드라마 인트로가 시작하는 느낌처럼 장면 하나하나가 상상이 되네요^^
    앞으로 주인공이 어떤 삶을 펼칠지 기대가됩니다~ㅎ

  • 2023-01-17 00:02

    새로운 공부 20년!! 멋져요~

  • 2023-01-17 13:06

    와~ 60갑자를 돌아오신 ‘59년생 서른살’님의 사주가 매우 궁금해집니다.(루보살~~~제가 운띄웠으니 하반기에 공략!)

    가마솥님과 함께 하는 20년 공부. 기대됩니다^^

  • 2023-01-18 17:42

    정말 솔직한 글이네요… . 응원합니다!!

인문약방 에세이
    1.몸은 흐른다 _노년과 장애   요즘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학생들과 ‘장애를 만드는 사회구조’라는 주제로 사람들이 이동할 때 겪는 불편함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고 있다. ‘평균’이라는 몸을 기준으로 사회가 암묵적으로 지정한 특정한 속도에 대해서 질문하는 조사이다. 예를 들면 횡단보도를 건널 때의 신호 변경이 자신의 보폭에 적당하지, 지하철이나 버스 승차시의 단차에서는 어떤지 등을 묻는다. 한 번은 동네 공원에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계신 노인 분들에게 질문을 했을 때였다. 80대의 한 할머니께서는 우리의 질문을 듣고는 ‘횡단보도 신호가 너무 빨리 바뀐다’, ‘안내판의 글자들은 너무 작아서 보기가 힘들다’고 맞장구를 치셨다. 또 이런 조사를 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하시며, 사탕까지 주고 가셨다.   설문조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쉽게 특정 연령층의 사람들로부터 ‘무릎이 아파서 오래 걷기 힘들다, 핸드폰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잘 안 들린다’라는 말을 듣는다. 나는 이것이 각자의 생애주기에 따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몸의 변화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장애와 무관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시력도 저하되고, 귀도 어두워지고, 무릎도 아프게 된다. 말하자면 누구나 장애를 갖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하지만 ‘평균 몸의 속도’를 기준으로 구축된 사회에서는 노년층이 스스로를 ‘정상신체’에서 배제된 몸으로 살게 만든다. 나이 듦은 우리 모두가 맞이할 존재 상태이다. 우리의 질문만으로도 ‘고맙다’고 하신 할머니의 말씀은 노년의 존재 상태가 어떻게 배제되고, 비가시화 되었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노년의 존재 상태는 장애와도 교차한다. ‘전국장애인투쟁보고서_버스를타자’(2002) 다큐를 본 적이 있다....
    1.몸은 흐른다 _노년과 장애   요즘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학생들과 ‘장애를 만드는 사회구조’라는 주제로 사람들이 이동할 때 겪는 불편함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고 있다. ‘평균’이라는 몸을 기준으로 사회가 암묵적으로 지정한 특정한 속도에 대해서 질문하는 조사이다. 예를 들면 횡단보도를 건널 때의 신호 변경이 자신의 보폭에 적당하지, 지하철이나 버스 승차시의 단차에서는 어떤지 등을 묻는다. 한 번은 동네 공원에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계신 노인 분들에게 질문을 했을 때였다. 80대의 한 할머니께서는 우리의 질문을 듣고는 ‘횡단보도 신호가 너무 빨리 바뀐다’, ‘안내판의 글자들은 너무 작아서 보기가 힘들다’고 맞장구를 치셨다. 또 이런 조사를 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하시며, 사탕까지 주고 가셨다.   설문조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쉽게 특정 연령층의 사람들로부터 ‘무릎이 아파서 오래 걷기 힘들다, 핸드폰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잘 안 들린다’라는 말을 듣는다. 나는 이것이 각자의 생애주기에 따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몸의 변화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장애와 무관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시력도 저하되고, 귀도 어두워지고, 무릎도 아프게 된다. 말하자면 누구나 장애를 갖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하지만 ‘평균 몸의 속도’를 기준으로 구축된 사회에서는 노년층이 스스로를 ‘정상신체’에서 배제된 몸으로 살게 만든다. 나이 듦은 우리 모두가 맞이할 존재 상태이다. 우리의 질문만으로도 ‘고맙다’고 하신 할머니의 말씀은 노년의 존재 상태가 어떻게 배제되고, 비가시화 되었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노년의 존재 상태는 장애와도 교차한다. ‘전국장애인투쟁보고서_버스를타자’(2002) 다큐를 본 적이 있다....
문탁 2023.12.04 조회 142
인문약방 에세이
      1. 나는 실패한 걸까?   10대까지는 스무살이 목표인 것처럼 살았다. 그 때가 되면 나를 옭아맨 숱한 규제들이 한 방에 펑하고 날아갈 거라 생각했다. 스물은 성인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내게 자유와 같은 말로 이해되었다. 구체적인 꿈을 갖지 못한 채 나는 맹목적으로 스무살을 갈망했다. 막상 20대가 되니 혼란스러웠다. 내가 대학을 왜 갔는지 그제서야 스스로에게 물었다. 난 뭘 기대했던 걸까? 방황하던 눈길에 걸린 현수막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학보사에 들어갔다. 거기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사회를 만났다. 나는 강의실보다 학보사와 인쇄소, 시위 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편으론, 부모의 걱정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걱정이 늘 따라다녔다. 무엇 하나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살았다.   대학 졸업 후 2년을 학생운동조직에서 일했다. 확신보다는 대의에 대한 당위로 선택한 길이었다. 거기서 전 남편을 만났다. 나는 결혼을 부모로부터 벗어날 최선의 길로 생각했다. 삶을 직시하지 않은 비겁함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로 숨겨졌다. 결혼을 한 후에야 깨달았다. 우리는 삶을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와 헤어진 건 막 서른이 됐을 때였다. 아들이 만 세살이 되기 전이었다. 나는 아들과 함께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부모의 그늘로 다시 들어갔다. 어린 아들의 돌봄 뿐 아니라 내 한 몸 사는데 필요한 가사까지 전적으로 부모님께 의탁하며, 구애없이 사회생활을 했다. 서른이면 젊음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서른이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젊었고, 사회생활에서 새로운 기회도 생겼다.   나는 30대가...
      1. 나는 실패한 걸까?   10대까지는 스무살이 목표인 것처럼 살았다. 그 때가 되면 나를 옭아맨 숱한 규제들이 한 방에 펑하고 날아갈 거라 생각했다. 스물은 성인이 된다는 것이고, 그것은 내게 자유와 같은 말로 이해되었다. 구체적인 꿈을 갖지 못한 채 나는 맹목적으로 스무살을 갈망했다. 막상 20대가 되니 혼란스러웠다. 내가 대학을 왜 갔는지 그제서야 스스로에게 물었다. 난 뭘 기대했던 걸까? 방황하던 눈길에 걸린 현수막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학보사에 들어갔다. 거기서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사회를 만났다. 나는 강의실보다 학보사와 인쇄소, 시위 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편으론, 부모의 걱정거리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걱정이 늘 따라다녔다. 무엇 하나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며 살았다.   대학 졸업 후 2년을 학생운동조직에서 일했다. 확신보다는 대의에 대한 당위로 선택한 길이었다. 거기서 전 남편을 만났다. 나는 결혼을 부모로부터 벗어날 최선의 길로 생각했다. 삶을 직시하지 않은 비겁함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로 숨겨졌다. 결혼을 한 후에야 깨달았다. 우리는 삶을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와 헤어진 건 막 서른이 됐을 때였다. 아들이 만 세살이 되기 전이었다. 나는 아들과 함께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부모의 그늘로 다시 들어갔다. 어린 아들의 돌봄 뿐 아니라 내 한 몸 사는데 필요한 가사까지 전적으로 부모님께 의탁하며, 구애없이 사회생활을 했다. 서른이면 젊음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서른이 넘어서도 나는 여전히 젊었고, 사회생활에서 새로운 기회도 생겼다.   나는 30대가...
문탁 2023.12.04 조회 45
인문약방 에세이
      1. 나의 방황이 시작되다   2020년 여름이 찾아올 무렵, 나는 번아웃에 빠졌다. 2007년 입사 이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회사는 그동안의 내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을 완벽하게 끝내고 느낄 수 있는 그 뿌듯함이 내가 일을 열심히 하도록 하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자발적인 야근도 모자라 집에 가서도 다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해오곤 했다. 일이 아무리 많이 쌓여 있어도 재미있기만 했고, 하나씩 업무를 완수할 때마다 느끼는 성취감은 달콤했으며, 직장동료들로부터 나의 업무능력을 인정받기라도 하면 난 지칠 줄 모르고 더 열심히 일에 매달렸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업무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회사 내 대표적인 워커홀릭이었던 내가 어느 순간 일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 업무를 처리하면서 느꼈던 보람은 점점 줄어들었고, 그에 비례하게 조직에 대해 내가 느끼는 회의감은 점차 커져 갔다.         조직생활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는 것은 나의 지난 삶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바보같이 일만 열심히 했을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조직에 충성한 것일까? 지금까지의 삶은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이라 애써 위안했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과, 성공, 능력, 인정, 승진과 같은 것들이 더이상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타인이 정한 기준과 평가에 맞춰서 살아왔던 내가, 이제는 내 인생의 주체로 살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인생의 방향은커녕 난 ‘내가 어떤...
      1. 나의 방황이 시작되다   2020년 여름이 찾아올 무렵, 나는 번아웃에 빠졌다. 2007년 입사 이후 처음 느껴보는 것이었다. 회사는 그동안의 내 삶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을 완벽하게 끝내고 느낄 수 있는 그 뿌듯함이 내가 일을 열심히 하도록 하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자발적인 야근도 모자라 집에 가서도 다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해오곤 했다. 일이 아무리 많이 쌓여 있어도 재미있기만 했고, 하나씩 업무를 완수할 때마다 느끼는 성취감은 달콤했으며, 직장동료들로부터 나의 업무능력을 인정받기라도 하면 난 지칠 줄 모르고 더 열심히 일에 매달렸다. 이렇게 누구보다도 업무에 대한 열정이 넘쳤던, 회사 내 대표적인 워커홀릭이었던 내가 어느 순간 일에 대해 흥미를 잃었다. 업무를 처리하면서 느꼈던 보람은 점점 줄어들었고, 그에 비례하게 조직에 대해 내가 느끼는 회의감은 점차 커져 갔다.         조직생활에 대해 회의감이 든다는 것은 나의 지난 삶을 부정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그렇게 바보같이 일만 열심히 했을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조직에 충성한 것일까? 지금까지의 삶은 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온 것이라 애써 위안했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과, 성공, 능력, 인정, 승진과 같은 것들이 더이상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타인이 정한 기준과 평가에 맞춰서 살아왔던 내가, 이제는 내 인생의 주체로 살아가고 싶어졌다. 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아내는 것은 나에게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인생의 방향은커녕 난 ‘내가 어떤...
문탁 2023.12.04 조회 33
인문약방 에세이
    1.과학적 세계관으로 삶을 해석하기   이 소설은,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 중 하나이다. 테드 창은 쓰는 작품 마다 SF계의 유명한 상은 다 휩쓸어 버리는, 현존하는 최고의 SF 소설가로 평가 받는 작가이다. 그가 쓰는 글은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이 정교하게 잘 짜여진 세계관 안에서 펼쳐져,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선 작가가 연결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에 대해 ‘자유롭게’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하드 SF’ 소설 중에서도 더욱 하드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대중 친화적인 익숙한 장르적 요소 또한 갖춰 SF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감정 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 공감도 녹여 넣는, 넘사벽 소설가이다.   나 역시 이 여덟 개의 소설 중 어느 것도 만만한 것이 없었다. 좀 익숙한 소재이다 싶으면 상상만으론 따라가기 어려운 설정이 나오고, 그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선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가 결합된 단계들이 필요해 나무위키와 유투브의 영상들을 PC창에 여러 개를 띄어두고서 책을 읽어야 했다.   그의 소설은 SF 장르이지만 판타지 요소가 첨가되어 있거나, 판타지 장르다 싶으면 SF적 요소를 덧붙여 전개한 것들이 나와서 상상력과 과학적 논리가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의 공통된 주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포함한) 우주는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주는 기계와도 같은 것이라 과학을 통해 그것을 탐구하면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에...
    1.과학적 세계관으로 삶을 해석하기   이 소설은,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된 여덟 편의 소설 중 하나이다. 테드 창은 쓰는 작품 마다 SF계의 유명한 상은 다 휩쓸어 버리는, 현존하는 최고의 SF 소설가로 평가 받는 작가이다. 그가 쓰는 글은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이 정교하게 잘 짜여진 세계관 안에서 펼쳐져,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선 작가가 연결하고 있는 과학적 지식에 대해 ‘자유롭게’ 사고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하드 SF’ 소설 중에서도 더욱 하드하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대중 친화적인 익숙한 장르적 요소 또한 갖춰 SF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도 감정 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 공감도 녹여 넣는, 넘사벽 소설가이다.   나 역시 이 여덟 개의 소설 중 어느 것도 만만한 것이 없었다. 좀 익숙한 소재이다 싶으면 상상만으론 따라가기 어려운 설정이 나오고, 그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선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가 결합된 단계들이 필요해 나무위키와 유투브의 영상들을 PC창에 여러 개를 띄어두고서 책을 읽어야 했다.   그의 소설은 SF 장르이지만 판타지 요소가 첨가되어 있거나, 판타지 장르다 싶으면 SF적 요소를 덧붙여 전개한 것들이 나와서 상상력과 과학적 논리가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의 공통된 주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포함한) 우주는 논리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주는 기계와도 같은 것이라 과학을 통해 그것을 탐구하면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소설에...
문탁 2023.12.04 조회 45
인문약방 에세이
        “우주는 다른 말로 바꾸면 시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은 둘이 아니다. 시간은 공간의 다른 펼침이다. 그리고 그 시공간이 변화해 가는 리듬을 자연이라 한다. 스스로 그러함이란 변화의 ‘차서’(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를 뜻한다. 차서를 어길 때 우리는 부자연스럽다고 느낀다(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지난 2년 간의 세미나가 마무리되고 있다. 세미나의 제목대로 나는 공부를 통해 50대와 노년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찾고 싶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책들이 많았지만 영감을 준 저자들도 꽤 있었다. 디디에 에리봉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연구하고 기술해야 하는지에 관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파커 파머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온전한 나”를 수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데비라 리비나 폴 칼라니티처럼 당당하고 의연하게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작가들의 용기를 본받고 싶기도 했다. 세미나 공부가 나를 탐구하는 데 귀중한 시발점이 되었다.    난 공부를 통해 소명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세상에 이로운 그런 무언가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없던 소명이 짠 하고 갑자기 나타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세미나에서 읽었던 많은 책들의 공통된 테마였던 몸과 일상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 몸을 어떻게 쓰고 일상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쉰을 넘긴 내 몸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풀타임에 주말 알바까지 견디어 냈던 청년기의 강단은 오간데 없다. 이제 서너 시간 일하면 왼쪽 어깨에 통증이 오고 드러눕고 싶다. 한쪽 귀의 청력 상실로 누가 왼쪽에서 말을 건네면 되물어야 할 때가 많다. 앞으로 내 몸은 가속도가 붙어 정상성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될 것이다.    난 내 몸을 수치들과 동일시했다. 나이, 몸무게, 혈압, 콜레스테롤 등의 숫자와 앓고 있는 질병이 내 몸을 설명하는 언어였다. 또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이해했다. 건강 검진 결과상의 수치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따로 관리하면(‘관리 받으면’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된다고 생각했다. 사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난 예순까진 전일제 노동을 너끈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몸에 대해 무지했고 일상에 대한 상상력도 빈곤했다. 돈 버는 노동과 그것을 잊게 해주는 여가 말고, 일상을 세심하게 설계해 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 형편상 돈 버는 게 중요했고 젊은 신체였기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내 몸은 노동에 적합한 신체로 길들여졌다. 적어도 8시간은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몸의 동작과 동선도 화폐의 증식을 위한 공간에 최적화되었을 것이다. 내 몸에 이상이 생기고 일에서 번아웃을 경험할 때까지 몸과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다.          소외된 몸, 문제적 몸   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건 내 신체의 이곳 저곳이 고장나기 시작하면서다. 약 7년 전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오른쪽 귀에서 회오리 바람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멈추지 않았다. 난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찾았고 MRI 촬영을 했다. 다음엔 신경과 전문의와 미팅이 이어졌다. 모두들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의사들은 서로를 추천하기만할 뿐 소통하지 않았다. 아무도 청력 손실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난 당시 역류성 식도염도 앓고 있었다. 가슴에서 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가정의학 전문의는 약을 처방하였다. 한 달이 지나도 증상 개선은 없었고 변비 등의 부작용만 겪었다. 음식과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할 것 같아 얘기를 꺼냈는데 의사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약을 바꿔보자는 얘기만 하였다. 난 분과화된 의료시스템의 한계를 경험했다. 슬프게도 의사들은 내 몸에 대해 잘 몰랐다.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어 보였다. 내가 내 몸에 대해 무지한 채로 살아왔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청력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식도염에 대해서는 원인을 알아보기로 했다. 난 그날그날 먹은 음식들을 기록하는 일지를 썼다. 여러 자료를 찾아본 결과 나의 식습관에 답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빈 속에 뜨거운 커피를 몇 잔씩 들이키는 습관이 있었다. 오후에도 늘 커피를 마셔야 했다. 모닝 커피를 카페인이 없는 걸로 바꿨다. 저녁 식사 후 TV를 보며 즐겨먹었던 초콜릿이나 감자칩도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음식들을 줄이거나 끊으려 노력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지금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지만, 난 횟수나 양을 현격하게 줄였다. 그 덕분인지 식습관을 바꾼 지1년 후 즈음엔 위산 역류가 거의 사라졌다. 역류성 식도염은 단지 음식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내 몸이 커피와 초콜릿, 감자칩 등에 길들여지게 된 데 원인이 있었다. 일상, 특히 일에서 내 몸이 소외되어 있었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음식이라는 손쉬운 보상이 필요했다. 습관을 바꾸어 병이 좋아진 경험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몸에 대해 공부를 하겠다거나 일상의 활동과 리듬을 점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특정 질병에 걸리면 내 몸과 질병에 대한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내 몸에 지독히 들러붙은 습관들을 하나씩 점검할 좋은 기회였는데도 말이다. 내 몸은 소외된 채 문제로 남았다.      자연의 리듬과 차서   고미숙은 일상의 활동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관한 힌트를 우주(또는 자연)의 리듬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동양 우주론에서는 인간의 몸이 “우주적 질료들의 재배치”를 통해 구성되었다 본다.  우리의 몸을 지수화풍 (불교) 또는 목화토금수 (음양오행론)라는 자연적 질료들의 조합으로 이해한 것이다. 저자는 이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사용한 은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초신성의 폭발로 탄소, 산소, 질소 등이 탄생했고, 이는 인간이라는 생명이 탄생하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가 되었다고 가정한다. 죽은 후 우리 몸이 바람과 공기, 물로 흩어지게 된다는 사실 또한 몸이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조합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몸을 우주의 축소판, 즉 소우주로 보는 동양사상에서는 삶의 이치를 자연의 순환에서 찾았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또는 우주적) 리듬에 따라 사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삶이다.  지구에 춘하추동이라는 사계절이 있듯이 우리의 몸에는 이에 대응하는 생로병사라는 리듬이 있다.  봄은 생동하는 에너지가 비전을 낳게 하고(목) 여름은 불과 같은 맹렬함을 발휘하게 한다(화). 가을은 튼실한 열매를 맺는데 주력하는 때이고(금) 겨울은 삶에 대한 성찰이 이뤄지는 계절이다(수).  우리의 전체 인생 뿐 아니라 하루의 일상에도 목화토금수라는 변전하는 오행의 리듬이 적용된다.    나는 생애 주기에서 가을의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다. 부산하게 움직이며 활동했던 여름은 이제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제 열매를 거둘 때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조건과 나의 무지  때문에 자본이 심어준 욕망을 추종했다. 나의 여름은 뚜렷한 방향이 없었다. 수확의 시기인 50대에 내가 어떤 열매를 거둘지, 아니면 특별한 열매가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의 일상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몸도 시공간도 달라진 50대 일상의 차서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는 봄여름의 속도나 활동들과는 달라야 한다. 나의 일상을 살피고 차서에 맞는 활동들을 탐색할 시점이다.          미국의 여성 작가 르 귄은 일상적 활동들을 어떻게 구성하고 해석할 것인지를 날카롭게 통찰한다. 그녀의  생활 에세이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서 르 귄은 일과 여가의 이분법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버드 대학 동창회에서 그녀와 동기들을 대상으로 보낸 설문 조사가 그 계기였다. 그 설문에는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설문지를 만들었던 사람은 통상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여가를 규정했다. 설문에서 제시된 여가의 예는  TV시청, 골프, 보드게임, 독서, 그림 그리기, 글쓰기 등이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은 노동이고 자발적으로 하는 오락이나 의미 있는 일은 여가라는 통념적 이분법에 기초한 것이었다. 르귄은 본인의 인생에서 여가(spare) 시간은 따로 없었다고 말한다. 평생 프리랜서 작가로 살았던 그녀에게 글쓰는 일은 자발적으로 하는 분주한 노동이고, 여행이나 독서 뿐 아니라 장보기, 낮잠 자기, 고양이와 놀고 소통하는 것도 일상을 꽉 채우는(occupied) 활동이다. 그녀의 통찰 덕분에 난 노동과 여가라는 이분법로 구분될 수 없는 소중한 일상적 활동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연결과 교감 – 목수벌과 저녁 밥상   일상을 재구성 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자연의 리듬에 어긋나 살았던 몸이 신호를 보냈기 떄문이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나는 일종의 번아웃을 겪었다. 당시 나는 산책을 하기로 했다. 숨쉴 수 있는 시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근 후,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동네의 산책길이나 근처 공원들을 걸었다. 지금 직장을 얻기 몇 년 전 나는 오래된 나무, 수많은 네 발 동물들, 다양한 종의 새와 벌 등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네로 이사한 상태였다. 걷기는 그간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초봄이 되면 난 꿀벌이나 목수벌이 나타나길 기다린다. 이들을 처음 목격하는 날에 내 가슴은 뭉클하고 벅차 오른다. 운수대통한 날이다. 벌들마다 선호하는 꽃들이 있다. 클로버, 이름 없는 들꽃, 호박꽃, 화려한 장미 중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각기 다른 종류의 벌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게 된다. 여름 초저녁엔 앞마당에 앉아 반딧불이를 관찰한다. 일 분 동안 시야에 들어오는 반딧불이가 몇 마리인지 센 다음 이를 기록해 둔다. 이를 열 번 정도 반복한다. 며칠 동안 과업을 수행하고 숫자를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같은 도시에 사는 과학자에게 보낸다. 난 반딧불이들, 과학자, 그리고 이에 참가하는 (누구인지 잘은 모르지만) 이웃들과 연결되었다고 느낀다.  이 활동들로 인해 몸이 금방 좋아지지는 않았다. 대신 난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과 조금씩 연결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는 내가 생명체들과 네트워크를 맺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들과 감응할 수 있는 신체를 가졌다는 게 감사했다. 난 주위에 생태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크고 작은 모임들이 조직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야생화 모임, 새 관찰 모임, 나무 돌보기 모임 등. 내 몸과 일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생명체들과 그리고 타자들과 보다 긴밀히 연결되고 싶었다. 가능한 한 노동을 줄이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활동으로 일상을 채워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이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욕망은 낯선 것이었다. 계속 확장하고 싶은 기분 좋은 욕망이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연결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나와 파트너는 둘 다 일을 하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저녁을 한다 (내가 더 자주하긴 하지만^^). 지금의 저녁 메뉴 루틴이 정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고 이를 조율하면서 여러 메뉴가 탄생했다. 나와 상대의 다른 입맛을 절충하여 밥을 하는 것은 처음엔 피곤한 작업이었지만 이제 소중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2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파트너 어머니와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녀는 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 나와 달리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한다. 음식이 조금이라도 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금새 포크를 내려 놓을 만큼 까다롭다. 난 세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 메뉴를 정하고 장보고 요리를 한다. 시간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다. 이는 요리에 소질도 없고 이제 귀찮아 하는 80대의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돌봄이다. 같이 밥 먹고 대화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다. 생명체들과 교감하는 것, 밥을 하고 같이 먹는 것, 이는 모두 르 귄의 말대로 통상적 노동도 여가 활동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 일상의 활동들이다. 거기에는 연결과 교감이 있다.      낯선 욕망, 새로운 실험   내가 회사일을 하면서 매일 산책하고 저녁을 해 먹고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건 코로나 이후 근무 형태가 변해 재택 근무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 나는 번아웃을 겪은 후 상사와 면담을 하여 근무시간을 줄였다(당연히 급여가 줄었다). 그리고 휴가를 최대한 다 썼다. 2년동안 세미나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에세이 기간엔 동료들이 얼굴보기 힘들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휴가를 자주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최근 몇 년 간 노동 이외의 활동을 내 시공간에 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롭고 유연한 직장 분위기의 덕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노동 위주의 일상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계속 틈새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제 틈새를 찾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연결과 교감을 위한 삶의 영역을 점차 넓히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게 50대의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의 주 내용은 일상의 차서를 자연의 리듬에 맞추고 생명체와 타자들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활동을 모색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자기 소외적 노동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걷고, 운동하고, 생명체들과 소통하고, 밥하고, 먹고, 돌보고, 공부하는 일을 말한다. 40대의 일상과 비교해 보면 이는 매우 낯선 욕망들이다. 따라서 내 몸은 이러한 일상을 다소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적응하는 데 시간도 소요될 것이다.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갈등 상황도 생겨날 것이다.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이 낯선 욕망을 따를 여러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느껴진다. 새로운 시공간의 차서에 조응하는 일상의 실험이 기대된다.     
        “우주는 다른 말로 바꾸면 시공간이다. 시간과 공간은 둘이 아니다. 시간은 공간의 다른 펼침이다. 그리고 그 시공간이 변화해 가는 리듬을 자연이라 한다. 스스로 그러함이란 변화의 ‘차서’(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를 뜻한다. 차서를 어길 때 우리는 부자연스럽다고 느낀다(고미숙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지난 2년 간의 세미나가 마무리되고 있다. 세미나의 제목대로 나는 공부를 통해 50대와 노년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찾고 싶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책들이 많았지만 영감을 준 저자들도 꽤 있었다. 디디에 에리봉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연구하고 기술해야 하는지에 관한 모델을 보여 주었다. 파커 파머는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보고 “온전한 나”를 수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데비라 리비나 폴 칼라니티처럼 당당하고 의연하게 삶과 죽음을 대하는 작가들의 용기를 본받고 싶기도 했다. 세미나 공부가 나를 탐구하는 데 귀중한 시발점이 되었다.    난 공부를 통해 소명까진 아니더라도 그래도 세상에 이로운 그런 무언가를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없던 소명이 짠 하고 갑자기 나타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세미나에서 읽었던 많은 책들의 공통된 테마였던 몸과 일상에 좀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 몸을 어떻게 쓰고 일상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쉰을 넘긴 내 몸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풀타임에 주말 알바까지 견디어 냈던 청년기의 강단은 오간데 없다. 이제 서너 시간 일하면 왼쪽 어깨에 통증이 오고 드러눕고 싶다. 한쪽 귀의 청력 상실로 누가 왼쪽에서 말을 건네면 되물어야 할 때가 많다. 앞으로 내 몸은 가속도가 붙어 정상성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될 것이다.    난 내 몸을 수치들과 동일시했다. 나이, 몸무게, 혈압, 콜레스테롤 등의 숫자와 앓고 있는 질병이 내 몸을 설명하는 언어였다. 또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이해했다. 건강 검진 결과상의 수치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따로 관리하면(‘관리 받으면’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된다고 생각했다. 사십 대 초반까지만 해도 난 예순까진 전일제 노동을 너끈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몸에 대해 무지했고 일상에 대한 상상력도 빈곤했다. 돈 버는 노동과 그것을 잊게 해주는 여가 말고, 일상을 세심하게 설계해 보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 형편상 돈 버는 게 중요했고 젊은 신체였기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내 몸은 노동에 적합한 신체로 길들여졌다. 적어도 8시간은 집중해서 일할 수 있는 몸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몸의 동작과 동선도 화폐의 증식을 위한 공간에 최적화되었을 것이다. 내 몸에 이상이 생기고 일에서 번아웃을 경험할 때까지 몸과 일상의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성찰하지 못했다.          소외된 몸, 문제적 몸   몸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건 내 신체의 이곳 저곳이 고장나기 시작하면서다. 약 7년 전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오른쪽 귀에서 회오리 바람 소리 같은 게 들렸다. 멈추지 않았다. 난 오른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비인후과 전문의를 찾았고 MRI 촬영을 했다. 다음엔 신경과 전문의와 미팅이 이어졌다. 모두들 이상이 없다고 하였다. 의사들은 서로를 추천하기만할 뿐 소통하지 않았다. 아무도 청력 손실의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난 당시 역류성 식도염도 앓고 있었다. 가슴에서 타는 듯한 작열감이 느껴졌다. 가정의학 전문의는 약을 처방하였다. 한 달이 지나도 증상 개선은 없었고 변비 등의 부작용만 겪었다. 음식과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할 것 같아 얘기를 꺼냈는데 의사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약을 바꿔보자는 얘기만 하였다. 난 분과화된 의료시스템의 한계를 경험했다. 슬프게도 의사들은 내 몸에 대해 잘 몰랐다.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어 보였다. 내가 내 몸에 대해 무지한 채로 살아왔던 건 말할 것도 없다.    청력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식도염에 대해서는 원인을 알아보기로 했다. 난 그날그날 먹은 음식들을 기록하는 일지를 썼다. 여러 자료를 찾아본 결과 나의 식습관에 답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빈 속에 뜨거운 커피를 몇 잔씩 들이키는 습관이 있었다. 오후에도 늘 커피를 마셔야 했다. 모닝 커피를 카페인이 없는 걸로 바꿨다. 저녁 식사 후 TV를 보며 즐겨먹었던 초콜릿이나 감자칩도 범인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음식들을 줄이거나 끊으려 노력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지금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지만, 난 횟수나 양을 현격하게 줄였다. 그 덕분인지 식습관을 바꾼 지1년 후 즈음엔 위산 역류가 거의 사라졌다. 역류성 식도염은 단지 음식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내 몸이 커피와 초콜릿, 감자칩 등에 길들여지게 된 데 원인이 있었다. 일상, 특히 일에서 내 몸이 소외되어 있었고 거기서 오는 스트레스는 음식이라는 손쉬운 보상이 필요했다. 습관을 바꾸어 병이 좋아진 경험을 했다. 그럼에도 나는 몸에 대해 공부를 하겠다거나 일상의 활동과 리듬을 점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특정 질병에 걸리면 내 몸과 질병에 대한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었다. 내 몸에 지독히 들러붙은 습관들을 하나씩 점검할 좋은 기회였는데도 말이다. 내 몸은 소외된 채 문제로 남았다.      자연의 리듬과 차서   고미숙은 일상의 활동을 어떻게 구성할지에 관한 힌트를 우주(또는 자연)의 리듬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동양 우주론에서는 인간의 몸이 “우주적 질료들의 재배치”를 통해 구성되었다 본다.  우리의 몸을 지수화풍 (불교) 또는 목화토금수 (음양오행론)라는 자연적 질료들의 조합으로 이해한 것이다. 저자는 이는 그럴 듯하게 포장하기 위해 사용한 은유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과학자들은 초신성의 폭발로 탄소, 산소, 질소 등이 탄생했고, 이는 인간이라는 생명이 탄생하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가 되었다고 가정한다. 죽은 후 우리 몸이 바람과 공기, 물로 흩어지게 된다는 사실 또한 몸이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의 조합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몸을 우주의 축소판, 즉 소우주로 보는 동양사상에서는 삶의 이치를 자연의 순환에서 찾았다.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또는 우주적) 리듬에 따라 사는 게 가장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삶이다.  지구에 춘하추동이라는 사계절이 있듯이 우리의 몸에는 이에 대응하는 생로병사라는 리듬이 있다.  봄은 생동하는 에너지가 비전을 낳게 하고(목) 여름은 불과 같은 맹렬함을 발휘하게 한다(화). 가을은 튼실한 열매를 맺는데 주력하는 때이고(금) 겨울은 삶에 대한 성찰이 이뤄지는 계절이다(수).  우리의 전체 인생 뿐 아니라 하루의 일상에도 목화토금수라는 변전하는 오행의 리듬이 적용된다.    나는 생애 주기에서 가을의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다. 부산하게 움직이며 활동했던 여름은 이제 뒤안길로 사라졌고 이제 열매를 거둘 때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조건과 나의 무지  때문에 자본이 심어준 욕망을 추종했다. 나의 여름은 뚜렷한 방향이 없었다. 수확의 시기인 50대에 내가 어떤 열매를 거둘지, 아니면 특별한 열매가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의 일상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몸도 시공간도 달라진 50대 일상의 차서 (“시간적 순서와 공간적 질서”)는 봄여름의 속도나 활동들과는 달라야 한다. 나의 일상을 살피고 차서에 맞는 활동들을 탐색할 시점이다.          미국의 여성 작가 르 귄은 일상적 활동들을 어떻게 구성하고 해석할 것인지를 날카롭게 통찰한다. 그녀의  생활 에세이집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에서 르 귄은 일과 여가의 이분법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하버드 대학 동창회에서 그녀와 동기들을 대상으로 보낸 설문 조사가 그 계기였다. 그 설문에는 여가 시간에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설문지를 만들었던 사람은 통상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여가를 규정했다. 설문에서 제시된 여가의 예는  TV시청, 골프, 보드게임, 독서, 그림 그리기, 글쓰기 등이었다. 이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은 노동이고 자발적으로 하는 오락이나 의미 있는 일은 여가라는 통념적 이분법에 기초한 것이었다. 르귄은 본인의 인생에서 여가(spare) 시간은 따로 없었다고 말한다. 평생 프리랜서 작가로 살았던 그녀에게 글쓰는 일은 자발적으로 하는 분주한 노동이고, 여행이나 독서 뿐 아니라 장보기, 낮잠 자기, 고양이와 놀고 소통하는 것도 일상을 꽉 채우는(occupied) 활동이다. 그녀의 통찰 덕분에 난 노동과 여가라는 이분법로 구분될 수 없는 소중한 일상적 활동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연결과 교감 – 목수벌과 저녁 밥상   일상을 재구성 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한 것은 자연의 리듬에 어긋나 살았던 몸이 신호를 보냈기 떄문이었다. 코로나가 터지기 직전 나는 일종의 번아웃을 겪었다. 당시 나는 산책을 하기로 했다. 숨쉴 수 있는 시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퇴근 후,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동네의 산책길이나 근처 공원들을 걸었다. 지금 직장을 얻기 몇 년 전 나는 오래된 나무, 수많은 네 발 동물들, 다양한 종의 새와 벌 등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동네로 이사한 상태였다. 걷기는 그간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초봄이 되면 난 꿀벌이나 목수벌이 나타나길 기다린다. 이들을 처음 목격하는 날에 내 가슴은 뭉클하고 벅차 오른다. 운수대통한 날이다. 벌들마다 선호하는 꽃들이 있다. 클로버, 이름 없는 들꽃, 호박꽃, 화려한 장미 중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각기 다른 종류의 벌들을 손님으로 맞이하게 된다. 여름 초저녁엔 앞마당에 앉아 반딧불이를 관찰한다. 일 분 동안 시야에 들어오는 반딧불이가 몇 마리인지 센 다음 이를 기록해 둔다. 이를 열 번 정도 반복한다. 며칠 동안 과업을 수행하고 숫자를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같은 도시에 사는 과학자에게 보낸다. 난 반딧불이들, 과학자, 그리고 이에 참가하는 (누구인지 잘은 모르지만) 이웃들과 연결되었다고 느낀다.  이 활동들로 인해 몸이 금방 좋아지지는 않았다. 대신 난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과 조금씩 연결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는 내가 생명체들과 네트워크를 맺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들과 감응할 수 있는 신체를 가졌다는 게 감사했다. 난 주위에 생태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크고 작은 모임들이 조직되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야생화 모임, 새 관찰 모임, 나무 돌보기 모임 등. 내 몸과 일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생명체들과 그리고 타자들과 보다 긴밀히 연결되고 싶었다. 가능한 한 노동을 줄이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활동으로 일상을 채워가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이전의 나를 생각해보면 이러한 욕망은 낯선 것이었다. 계속 확장하고 싶은 기분 좋은 욕망이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의 연결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나와 파트너는 둘 다 일을 하기 때문에 돌아가면서 저녁을 한다 (내가 더 자주하긴 하지만^^). 지금의 저녁 메뉴 루틴이 정해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고 이를 조율하면서 여러 메뉴가 탄생했다. 나와 상대의 다른 입맛을 절충하여 밥을 하는 것은 처음엔 피곤한 작업이었지만 이제 소중한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2년 전부터는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파트너 어머니와 같이 저녁을 먹게 되었다. 그녀는 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 나와 달리 육식 위주의 식사를 한다. 음식이 조금이라도 본인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 금새 포크를 내려 놓을 만큼 까다롭다. 난 세 사람의 취향을 고려해 메뉴를 정하고 장보고 요리를 한다. 시간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다. 이는 요리에 소질도 없고 이제 귀찮아 하는 80대의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돌봄이다. 같이 밥 먹고 대화하면서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고 있다. 생명체들과 교감하는 것, 밥을 하고 같이 먹는 것, 이는 모두 르 귄의 말대로 통상적 노동도 여가 활동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를 소외시키지 않는 일상의 활동들이다. 거기에는 연결과 교감이 있다.      낯선 욕망, 새로운 실험   내가 회사일을 하면서 매일 산책하고 저녁을 해 먹고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있었던 건 코로나 이후 근무 형태가 변해 재택 근무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또 나는 번아웃을 겪은 후 상사와 면담을 하여 근무시간을 줄였다(당연히 급여가 줄었다). 그리고 휴가를 최대한 다 썼다. 2년동안 세미나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에세이 기간엔 동료들이 얼굴보기 힘들다는 말을 했을 정도로 휴가를 자주 썼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최근 몇 년 간 노동 이외의 활동을 내 시공간에 들일 수 있었던 것은 자유롭고 유연한 직장 분위기의 덕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노동 위주의 일상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계속 틈새를 찾았기 때문이다.     이제 틈새를 찾는 데서 한 걸음 나아가 연결과 교감을 위한 삶의 영역을 점차 넓히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그게 50대의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이자 메시지이다.  그 메시지의 주 내용은 일상의 차서를 자연의 리듬에 맞추고 생명체와 타자들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활동을 모색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자기 소외적 노동의 비중을 대폭 줄이고 걷고, 운동하고, 생명체들과 소통하고, 밥하고, 먹고, 돌보고, 공부하는 일을 말한다. 40대의 일상과 비교해 보면 이는 매우 낯선 욕망들이다. 따라서 내 몸은 이러한 일상을 다소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적응하는 데 시간도 소요될 것이다.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갈등 상황도 생겨날 것이다. 두렵기도 하지만 지금이 낯선 욕망을 따를 여러 조건이 무르익었다고 느껴진다. 새로운 시공간의 차서에 조응하는 일상의 실험이 기대된다.     
문탁 2023.11.28 조회 52
인문약방 에세이
        최근 엄마는 아빠와 함께 여동생의 교회에 출석하기로 했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은 이제껏 종교를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갑작스런 결정에 나는 아무 의견도 내지 못했지만, 잔상이 내내 떠올랐다.   나는 여동생의 교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동생은 결혼 후 미얀마 선교 중이다. 벌써 9년이 되어간다. 선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여동생의 교회 교리에 의아한 지점이 있었다. 하와가 선악과를 필연적으로 먹었어야 했다거나 중국과 미국의 각주가 독립 분리해서 하나의 국가를 만들 게 될 거라는 설교 등. 그 교회의 목사님의 성경 해석은 너무 편파적이라는 인상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여동생이 그렇게 오래 믿고 있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다.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던 건, 부모님의 마음속에 죽음을 해석하는 문제, 신체적으로 약해지는 노년을 신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으며 ‘알 수 없다’는 것. 아마도 그 ‘알 수 없음’이 부모님에게 ‘텅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부모님의 종교에 대한 변화된 생각은 나의 종교도 떠올리게 했다. 나도 이제 중년에 들어섰다. 나이듦에서 어떤 종교관을 가지느냐는 어떤 인생의 지도를 가지고 있느냐와 같다. 죽음과 늙어감 속에 자잘한 선택의 문제는 어떤 종교관을 가졌느냐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에세이를 통해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강박증이 만든 텅 빈 공간   한때 교회를 다녔었다. 나에게도...
        최근 엄마는 아빠와 함께 여동생의 교회에 출석하기로 했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은 이제껏 종교를 가지고 계시지 않았다. 갑작스런 결정에 나는 아무 의견도 내지 못했지만, 잔상이 내내 떠올랐다.   나는 여동생의 교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동생은 결혼 후 미얀마 선교 중이다. 벌써 9년이 되어간다. 선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여동생의 교회 교리에 의아한 지점이 있었다. 하와가 선악과를 필연적으로 먹었어야 했다거나 중국과 미국의 각주가 독립 분리해서 하나의 국가를 만들 게 될 거라는 설교 등. 그 교회의 목사님의 성경 해석은 너무 편파적이라는 인상이다. 하지만 부모님은 여동생이 그렇게 오래 믿고 있다면, 이유가 있을 거라고 했다.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던 건, 부모님의 마음속에 죽음을 해석하는 문제, 신체적으로 약해지는 노년을 신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지만, 그 뒤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으며 ‘알 수 없다’는 것. 아마도 그 ‘알 수 없음’이 부모님에게 ‘텅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건 아닐까.   부모님의 종교에 대한 변화된 생각은 나의 종교도 떠올리게 했다. 나도 이제 중년에 들어섰다. 나이듦에서 어떤 종교관을 가지느냐는 어떤 인생의 지도를 가지고 있느냐와 같다. 죽음과 늙어감 속에 자잘한 선택의 문제는 어떤 종교관을 가졌느냐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에세이를 통해 한 번 정리해보고자 한다.           강박증이 만든 텅 빈 공간   한때 교회를 다녔었다. 나에게도...
문탁 2023.11.28 조회 91
인문약방 에세이
      1.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이다. 전사들도 늙는다. 나약한 이들도 늙는다. 사실상 개연성으로 따지면 전사들보다 더 많은 나약한 이들이 늙어가게 된다. 노년은 건강하고, 강인하고, 거칠고, 용감무쌍하고, 병들고, 허약하고, 겁이 많고, 무능한 사람들 모두의 것이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23쪽)   누구나 다 늙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지내다 어느 날 문득 몸도 마음도 생각처럼 안 따라주는 늙어감을 실감하는 날이 있다. 사회 문화적으로 노인, 노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저항하고 자연스럽게 늙어가야지 하는 마음 준비를 무색하게 문득 찾아오는 늙음에 대한 표식은 낯설고 당혹스럽다.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대어 있는 늙은 이, 노인, 노년의 인식을 고스란히 받게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실감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은 우울함까지 동반한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각나지 않는 단어로 흐름이 뚝 끊기거나 산으로 가는 경험을 자주 한다. 출근해야 하는데 버스 카드가 안 보이면 그때부턴 멘붕이다. 마을버스 배차 시간이 20분이어서 1~2분 차이로 버스를 놓치면 20분이 날아간다. 단서를 찾기 위해 되돌려 보는, 퇴근 후 일상에서 깜깜하게 증발해 버린 기억 앞에 치매 초기 증상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따라온다. 늙어 가는 중임이 불쑥불쑥 경험되는, 이제 시작이다 싶은 자각은 애틋하다.   태어나고 나이 들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다 아는 사실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슬며시 늙는 게 어때서 하는 저항감도...
      1.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   “노년은 누구든 거기까지 이르는 자의 것이다. 전사들도 늙는다. 나약한 이들도 늙는다. 사실상 개연성으로 따지면 전사들보다 더 많은 나약한 이들이 늙어가게 된다. 노년은 건강하고, 강인하고, 거칠고, 용감무쌍하고, 병들고, 허약하고, 겁이 많고, 무능한 사람들 모두의 것이다.” (남겨둘 시간이 없답니다. 23쪽)   누구나 다 늙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지내다 어느 날 문득 몸도 마음도 생각처럼 안 따라주는 늙어감을 실감하는 날이 있다. 사회 문화적으로 노인, 노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저항하고 자연스럽게 늙어가야지 하는 마음 준비를 무색하게 문득 찾아오는 늙음에 대한 표식은 낯설고 당혹스럽다.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대어 있는 늙은 이, 노인, 노년의 인식을 고스란히 받게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실감하는, 썩 유쾌하지 않은 경험은 우울함까지 동반한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생각나지 않는 단어로 흐름이 뚝 끊기거나 산으로 가는 경험을 자주 한다. 출근해야 하는데 버스 카드가 안 보이면 그때부턴 멘붕이다. 마을버스 배차 시간이 20분이어서 1~2분 차이로 버스를 놓치면 20분이 날아간다. 단서를 찾기 위해 되돌려 보는, 퇴근 후 일상에서 깜깜하게 증발해 버린 기억 앞에 치매 초기 증상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따라온다. 늙어 가는 중임이 불쑥불쑥 경험되는, 이제 시작이다 싶은 자각은 애틋하다.   태어나고 나이 들고 늙고 병들어 죽는다는 다 아는 사실이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슬며시 늙는 게 어때서 하는 저항감도...
문탁 2023.11.28 조회 141
인문약방 에세이
    1. a=a, b=b   초등학교 수학시간에 우리는 ‘등식의 성질’에 관해 배운다. 주어진 등식에 있어서 좌변과 우변 양쪽에 사칙연산을 똑같이 수행해도 등식은 성립한다는 성질이다. 덧셈을 예로 들면 a=b라 전제할 때 a+c=b+c가 성립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눗셈의 연산을 수행하려들면 예외사항을 가르쳐준다. 0으로는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임의의 수로 나누어도 등식은 보장하지만 0은 빼고 하란다. 이렇게 금지된 0을 고등과정에서는 ‘불능’이라는 낙인을 찍어 판단을 보류시킨다. 덕분에 우리는 고민 없이 이 단순한 등식의 성질을 기반으로한 쪽이 0인 방정식도 장착하고 미적분(f’(x)=0)도 장착하며 나아가 더 복잡하고 섬세한 기술을 장착해서 무엇이든 증명하고 안전하게 답에 도달한다. 이런 답들은 절대 섞이지 않는다. 도착지는 a이거나 b이지 a이면서 b일수는 없다.   이렇게 안전한 수학체계의 존재를 확신한 수학자가 있었다. 수학적 체계를 엄격하고 세심 히 설계하면 그 체계 내에서는 절대 모순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힐베르트,   그는 1930년, 세상 모든 수학자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수학은 완전한가”. 즉 수학은 세상의 모든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 가이고 두 번째 “수학은 일관된가” 로 수학적 체계 내에서 수학은 모순을 발생시키지 않는 가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 “수학은 결정가능한가”는 주어진 어떤 명제가 자명한 공리를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가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1931년, 쿠르트 괴델의 < 불완전성정리 >를 통해 아님이 증명되었다. 그는 증명도...
    1. a=a, b=b   초등학교 수학시간에 우리는 ‘등식의 성질’에 관해 배운다. 주어진 등식에 있어서 좌변과 우변 양쪽에 사칙연산을 똑같이 수행해도 등식은 성립한다는 성질이다. 덧셈을 예로 들면 a=b라 전제할 때 a+c=b+c가 성립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눗셈의 연산을 수행하려들면 예외사항을 가르쳐준다. 0으로는 나눌 수 없다고 한다. 임의의 수로 나누어도 등식은 보장하지만 0은 빼고 하란다. 이렇게 금지된 0을 고등과정에서는 ‘불능’이라는 낙인을 찍어 판단을 보류시킨다. 덕분에 우리는 고민 없이 이 단순한 등식의 성질을 기반으로한 쪽이 0인 방정식도 장착하고 미적분(f’(x)=0)도 장착하며 나아가 더 복잡하고 섬세한 기술을 장착해서 무엇이든 증명하고 안전하게 답에 도달한다. 이런 답들은 절대 섞이지 않는다. 도착지는 a이거나 b이지 a이면서 b일수는 없다.   이렇게 안전한 수학체계의 존재를 확신한 수학자가 있었다. 수학적 체계를 엄격하고 세심 히 설계하면 그 체계 내에서는 절대 모순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힐베르트,   그는 1930년, 세상 모든 수학자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수학은 완전한가”. 즉 수학은 세상의 모든 참인 명제를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는 가이고 두 번째 “수학은 일관된가” 로 수학적 체계 내에서 수학은 모순을 발생시키지 않는 가이며 마지막으로 세 번째 “수학은 결정가능한가”는 주어진 어떤 명제가 자명한 공리를 따르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가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은 1931년, 쿠르트 괴델의 < 불완전성정리 >를 통해 아님이 증명되었다. 그는 증명도...
문탁 2023.11.28 조회 32
문탁의 나이듦 리뷰
*이 글은 <녹색평론> 182호 (2023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여기에 다시 게재합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각자도사 사회>(송병기, 어크로스, 2023)-               9년 전 혼자 살던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넘어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아, 계속 혼자 사시게 하는 건 위험하구나. 결국 난 어머니와 살림을 합쳤다. 다소간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편이 맘이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깨달았다. 아, 망했구나. 그러니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은 MZ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같은 소위 베이비붐 세대들에게도 부모 돌봄이 닥치면, ‘이생망’ 소리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나온다. 왜 우리는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서는 자기 삶을 망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야 하나? 왜 우리는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고 오래 사느니 그냥 빨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의료인류학자인 저자는 바로 그런 현실을 낳고 있는 우리 사회의 나이듦과 질병, 죽음의 맥락을 세심하게 들춰낸다.     1. 왜 노인은 애물단지가 되었을까?   책의 앞부분, 아주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나온다. 서울 한 요양원의 오후 4시, 팥죽이 간식으로 제공되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가장 먼저 거실에 도착해서 신속하게 음식을 먹고 자리를 떴다. 저자는 그분을 좇아가서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할머니가 팥죽을 좋아한 게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을. 할머니는 매번 간식으로 나오는 팥죽을 먹는게 고역인 분이다. 그런데도 “일하는 분들과 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이 글은 <녹색평론> 182호 (2023 여름)에 실린 글입니다. 여기에 다시 게재합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각자도사 사회>(송병기, 어크로스, 2023)-               9년 전 혼자 살던 어머니가 화장실에서 넘어져 응급실에 실려 갔다. 아, 계속 혼자 사시게 하는 건 위험하구나. 결국 난 어머니와 살림을 합쳤다. 다소간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눈앞에서 보고 있는 편이 맘이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깨달았다. 아, 망했구나. 그러니까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은 MZ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같은 소위 베이비붐 세대들에게도 부모 돌봄이 닥치면, ‘이생망’ 소리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나온다. 왜 우리는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서는 자기 삶을 망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야 하나? 왜 우리는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고 오래 사느니 그냥 빨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의료인류학자인 저자는 바로 그런 현실을 낳고 있는 우리 사회의 나이듦과 질병, 죽음의 맥락을 세심하게 들춰낸다.     1. 왜 노인은 애물단지가 되었을까?   책의 앞부분, 아주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나온다. 서울 한 요양원의 오후 4시, 팥죽이 간식으로 제공되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 한 분이 가장 먼저 거실에 도착해서 신속하게 음식을 먹고 자리를 떴다. 저자는 그분을 좇아가서 대화를 시작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할머니가 팥죽을 좋아한 게 아니라 그 반대라는 것을. 할머니는 매번 간식으로 나오는 팥죽을 먹는게 고역인 분이다. 그런데도 “일하는 분들과 딸에게 짐이 되지 않기...
문탁 2023.11.23 조회 165
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 생활에서 성정체성으로 인해 무시 당하거나 차별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양한 배경의 소수자들이 정착하는 대도시들에서만 살았고, 내가 이주한 이후  동성애자의 법적 권리가 빠른 속도로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적인 영역에서는 성지향성으로 인한 차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법과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었다. 일터와 학교에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명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일자리에 지원하는 과정에서도 성지향성 뿐 아니라 나이, 출신국, 시민권 여부를 밝히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퀴어 공동체에서 나의 인종, 국적, 이민자로서의 지위 등이  쉽게 수용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남들과 ‘다름’으로 인해 배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묘한 배제를 경험했다. 당시 게이 남성들은  LGBT 포털 사이트나 온라인 데이트 서비스를 통해 친구를 만들거나  데이트 상대를 만났다. 난 연애 상대를 찾는 상당수의 게시물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 글들은 본인이 찾는 이상적 상대의 조건들을 열거한 후, 마지막에 “흑인과 동양인은 제외”라는 문구로 마무리 되어 있었다. 이 끝 문장의 모든 글자들은 대문자로 강조되어 있었다. 왜 카스트로에서 흑인들을 보기 어려운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어떤 이는 내게 시민권자인지 물었다. 만일 시민권이 없다면 골치 아프니 친구나 연애 상대에서 제외시키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나의 피부색과 이방인으로서의 위치로 인한 배제를 경험하면서 내상을 입었다. 머리 속에선 내가 아니라 수면 아래에서 작동하는 공동체 내 소수자 소외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우선 상대의 무지와 배려심 부족에 화가 났다. 실망스러웠다. 특정하기 힘든 감정이 일어났다. 당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수치심이었다. 난 차별이나 부당한 대우에 대해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나의 성정체성을 애써 감추지 않아도 되는 샌프란 시스코가 여전히 좋았다. 어딜 가든 세상은 완벽할 수 없으니 어쩌다 겪는 부당함을 어느 정도 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신 내가 소수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상황을 가능한 최선을 다해 피하고 싶었다. 이러한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게이 공동체에서 소수자인 내가, 집단 내 주류의 문화와 생활 방식에 동화되고 싶은 욕망을 갖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미디어와 책으로 접한 미국의 퀴어 공동체는 연대, 상호 부조, 성적인 자유, 저항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이상적인 것이었다. 2000년 대 후반 이후 내가 목격한 것은 이와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조망할 수 있는 넓은 집, 안정적 관계를 맺고 있는 파트너, 성공적인 커리어, 식스팩이 선명한 근육질의 몸 등을 욕망했다. 중산층 출신의 젊은 백인들, 그 중에서도 전문직이나 안정적 직장을 가진 이들이 접근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성취했거나 바라는 이들은 동성애자 인권에 민감하고 진보 정치를 옹호하는 이들과 동일한 사람들이었다. 남성 동성애자들의 욕망이 주류 이성애자들과 별 차이가 없어진 것은, 동성애자 인권의 향상과 신자유주의의 영향력 확산 등 사회 경제적 조건에 일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난 퀴어 공동체 내 이런 주류 문화가 불편했다. 소비주의적 욕망이 과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찾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 또한 거기에 합류하고 싶었다.  양쪽 발이 안되면 한 발이라도 걸치고 싶었다.    당시 나는 중산층 게이 시민이 되기엔 자격 미달이었다. ‘표준’(?) 신체에 비해 왜소한 몸, 한국식 억양이 들어간 영어, 미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스펙, (초기) 임시 영주권자로서의 지위. 난 가능한 것들은 노력으로 극복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안정적 일자리를 얻을 방법을 모색했다. 미국 사회에서 통할 수 있는사회 문화적 자본이 부족한 상태라 힘에 부쳤다. 공부에 관심이 없었음에도 학교를 다녔고 일터에서도 인정받기 위해 애썼다. 나의 한국식 액센트가 의사소통에 별 지장을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교정하려 했다. 어수룩한 이민자로 보일까 염려되어서였다.        왼쪽은 실화를 바탕으로 동성애자의 인권에 대해 환기했던 영화 <필라델피아> (1994), 오른쪽은 두 커플의 남성이 서로 사랑해서 원래의 부인과 이혼하고 동성결혼하여 제2의 인생을 사는 내용이 담긴,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 그런데 둘 다 주인공 직업이 변호사이다. 그리고 모두 백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2인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이를 평생 유지하고 싶었다.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관계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한 사람에게 헌신하는 관계가 여러 다양한 관계 형태 중 하나일 뿐이라고 받아들였다 (퀴어 공동체에는 아직 법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다양한 관계들이 존재한다) . 주위의 친구들도 결혼으로 맺어지지 않은 관계들을 쿨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법적으로 인정 받은 커플이나 장기간의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보다 ‘도덕적’이라고 여긴다. 나 또한 이러한 암묵적인 도덕 규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 깊이 생각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나의   소수자로서의 조건들에 대해 강한 수치심을 내가 느꼈다는 것이다. 왜 그동안 이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했을까. 수치심을 인정하면 내가 초라하고 가치 없는 존재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류의 가치관과 생활 양식에 한편으로는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난 그것들을 욕망했다. 소수자 공동체 내에서 다시금 소수자가 되도록 하는 나의 정체성들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감추려 했다. 실제로는 내 배경에 부끄러움을 느낀 셈이다. 수치심을 인정하지 못해서 생긴 모순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이성애 규범이 성소수자에게 미치는 잔인함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지만 제2언어 구사자, 이민자, 시간제 노동자 등이 겪는 (나도 일부 경험한) 차별이나 어려움들엔 고개를 돌리거나 무감각해졌다. 게이 공동체 내부의 주류적 규범과 생활방식이 그 안의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 했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한 방어책이었다. 결국 나 또한 퀴어 공동체의 정상성 규범이 강화되는 데 기여한 셈이다.        김조광수 감독의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미국 생활에서 성정체성으로 인해 무시 당하거나 차별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다양한 배경의 소수자들이 정착하는 대도시들에서만 살았고, 내가 이주한 이후  동성애자의 법적 권리가 빠른 속도로 향상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공적인 영역에서는 성지향성으로 인한 차별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는 법과 시스템이 잘 마련되어 있었다. 일터와 학교에서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명시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일자리에 지원하는 과정에서도 성지향성 뿐 아니라 나이, 출신국, 시민권 여부를 밝히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일을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퀴어 공동체에서 나의 인종, 국적, 이민자로서의 지위 등이  쉽게 수용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남들과 ‘다름’으로 인해 배제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미묘한 배제를 경험했다. 당시 게이 남성들은  LGBT 포털 사이트나 온라인 데이트 서비스를 통해 친구를 만들거나  데이트 상대를 만났다. 난 연애 상대를 찾는 상당수의 게시물들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 글들은 본인이 찾는 이상적 상대의 조건들을 열거한 후, 마지막에 “흑인과 동양인은 제외”라는 문구로 마무리 되어 있었다. 이 끝 문장의 모든 글자들은 대문자로 강조되어 있었다. 왜 카스트로에서 흑인들을 보기 어려운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어떤 이는 내게 시민권자인지 물었다. 만일 시민권이 없다면 골치 아프니 친구나 연애 상대에서 제외시키겠다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나의 피부색과 이방인으로서의 위치로 인한 배제를 경험하면서 내상을 입었다. 머리 속에선 내가 아니라 수면 아래에서 작동하는 공동체 내 소수자 소외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다. 우선 상대의 무지와 배려심 부족에 화가 났다. 실망스러웠다. 특정하기 힘든 감정이 일어났다. 당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은 수치심이었다. 난 차별이나 부당한 대우에 대해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나의 성정체성을 애써 감추지 않아도 되는 샌프란 시스코가 여전히 좋았다. 어딜 가든 세상은 완벽할 수 없으니 어쩌다 겪는 부당함을 어느 정도 안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신 내가 소수자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상황을 가능한 최선을 다해 피하고 싶었다. 이러한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게이 공동체에서 소수자인 내가, 집단 내 주류의 문화와 생활 방식에 동화되고 싶은 욕망을 갖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미디어와 책으로 접한 미국의 퀴어 공동체는 연대, 상호 부조, 성적인 자유, 저항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이상적인 것이었다. 2000년 대 후반 이후 내가 목격한 것은 이와는 차이가 있었다. 당시 많은 이들이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조망할 수 있는 넓은 집, 안정적 관계를 맺고 있는 파트너, 성공적인 커리어, 식스팩이 선명한 근육질의 몸 등을 욕망했다. 중산층 출신의 젊은 백인들, 그 중에서도 전문직이나 안정적 직장을 가진 이들이 접근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성취했거나 바라는 이들은 동성애자 인권에 민감하고 진보 정치를 옹호하는 이들과 동일한 사람들이었다. 남성 동성애자들의 욕망이 주류 이성애자들과 별 차이가 없어진 것은, 동성애자 인권의 향상과 신자유주의의 영향력 확산 등 사회 경제적 조건에 일부 원인이 있을 것이다. 난 퀴어 공동체 내 이런 주류 문화가 불편했다. 소비주의적 욕망이 과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찾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 또한 거기에 합류하고 싶었다.  양쪽 발이 안되면 한 발이라도 걸치고 싶었다.    당시 나는 중산층 게이 시민이 되기엔 자격 미달이었다. ‘표준’(?) 신체에 비해 왜소한 몸, 한국식 억양이 들어간 영어, 미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스펙, (초기) 임시 영주권자로서의 지위. 난 가능한 것들은 노력으로 극복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드러내지 않으려 애썼다. 안정적 일자리를 얻을 방법을 모색했다. 미국 사회에서 통할 수 있는사회 문화적 자본이 부족한 상태라 힘에 부쳤다. 공부에 관심이 없었음에도 학교를 다녔고 일터에서도 인정받기 위해 애썼다. 나의 한국식 액센트가 의사소통에 별 지장을 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교정하려 했다. 어수룩한 이민자로 보일까 염려되어서였다.        왼쪽은 실화를 바탕으로 동성애자의 인권에 대해 환기했던 영화 <필라델피아> (1994), 오른쪽은 두 커플의 남성이 서로 사랑해서 원래의 부인과 이혼하고 동성결혼하여 제2의 인생을 사는 내용이 담긴,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 그런데 둘 다 주인공 직업이 변호사이다. 그리고 모두 백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2인가족을 만들고 싶었다. 이를 평생 유지하고 싶었다.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관계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머리로는 한 사람에게 헌신하는 관계가 여러 다양한 관계 형태 중 하나일 뿐이라고 받아들였다 (퀴어 공동체에는 아직 법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다양한 관계들이 존재한다) . 주위의 친구들도 결혼으로 맺어지지 않은 관계들을 쿨하게 받아들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법적으로 인정 받은 커플이나 장기간의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보다 ‘도덕적’이라고 여긴다. 나 또한 이러한 암묵적인 도덕 규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 글을 쓰면서 그동안 깊이 생각하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과  마주해야 했다. 나의   소수자로서의 조건들에 대해 강한 수치심을 내가 느꼈다는 것이다. 왜 그동안 이를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했을까. 수치심을 인정하면 내가 초라하고 가치 없는 존재가 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류의 가치관과 생활 양식에 한편으로는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난 그것들을 욕망했다. 소수자 공동체 내에서 다시금 소수자가 되도록 하는 나의 정체성들을 과도하게 의식하고 감추려 했다. 실제로는 내 배경에 부끄러움을 느낀 셈이다. 수치심을 인정하지 못해서 생긴 모순으로 인해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이성애 규범이 성소수자에게 미치는 잔인함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지만 제2언어 구사자, 이민자, 시간제 노동자 등이 겪는 (나도 일부 경험한) 차별이나 어려움들엔 고개를 돌리거나 무감각해졌다. 게이 공동체 내부의 주류적 규범과 생활방식이 그 안의 소수자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 했다. 수치심을 느끼지 않기 위한 방어책이었다. 결국 나 또한 퀴어 공동체의 정상성 규범이 강화되는 데 기여한 셈이다.        김조광수 감독의 영화 <메이드 인 루프탑>                            
문탁 2023.11.22 조회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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