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59년생 서른살
(글) 신상열 혹은 가마솥
내 주변의 사람들이 나를 보면 웃을 수 있기를 바라고
고장난 것을 고치거나 완전히 망가뜨리기를 좋아하며
별것 없는데 때를 잘 만나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세대의 일원으로서
은퇴 후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제대로 사는 길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
두번째 은퇴
중소기업 연합회 회장이 “내일 저녁 시간을 비워 달라“고 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략 예상이 된다. 올해, 2020년. 호적나이로 만 60세이다. 이 곳은 경기도와 산업자원부에서 예산을 지원받아서 업무를 처리하는 수탁기관이다. 센터장은 그들의 인사권(?)으로 지명 받은 사람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다. 나도 그랬다. 인사철인데, 자기가 추천했노라고 생색내며 전화하는 놈들이 없다. 연임은 물 건너 간 것이다. 담당 후배에게 어떻게 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은 시쳇말로 ‘가오’ 빠지는 것, 조용히 내가 정리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아랫배에서 무언가가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이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서 들어야 해? 이 놈들이 나를 이렇게 취급하는 거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동지는 어디 가고!’ 등등. 워워워...... 진정하자, 진정해. 예우하며 직접 듣는다고 바뀔 것인가? 어떻게 통지하든, 어떤 이유로든, 계약해지는 누구나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며칠 전 한차례 책상을 가볍게 하였으니 별것 없지만, 마지막으로 컴퓨터 파일들을 정리하고 서랍을 정리했다. A4용지 박스 하나로 충분했다. 시원 섭섭. 딱 그런 기분이다. 돈 버는 일에 내 시간을 저당 잡히지 않아도 되니 “야호! 이제야 해방이다!” 해야 하는데, 가슴 깊은 곳에서 헛헛한 기분이 올라온다. 필요한 사람들은 이미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데도 다시 볼 것 같지 않은 명함철을 버리지 못하고 박스에 담는 나를 발견한다. 뭐, 이 정도는 기념품으로 하지. 혹시 알어? 또 필요하게 될지...... 일일이 악수하며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하였지만, 많은 직원들이 아쉬워하며 배웅 나오는 것을 위안 삼아 사무실을 나섰다. 작은 박스를 들고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나를 졸졸 따라 나오는 몇몇 직원들 모습이, 꼭 ‘유골함’을 따라 가는 장례행렬 같다. 짜식들, 박스나 들어 줄 것이지.
사실 난 이번이 두 번째 은퇴이다. 지금 이곳에서 센터장으로 일하기 전에, 그가 市長인 도시의 산하기관에서 ‘어공(어쩌다 공무원)’으로 8년을 일하고, 2018년 8월에 공식적으로(?) 은퇴하였다. 직장에서는 그를 따라 경기도로 영전해 갈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니 은퇴가 아닌 퇴임이었지만, 우리 집에서는 은퇴이었다. 마눌님의 호출에 따라 식구들이 모두 모여 은퇴를 축하하는 파티를 열어 준 것이다. 은퇴를 주장한 것은 '고맙게도' 마눌님이었다.
2010년부터 그와 함께 일한 ‘어공’의 포지션은 참으로 애매하였다. 원래 사기업에서 그 분야에서 25년을 일한 전문성을 선택하였으니 본연의 업무 처리는 별것 없었다. 문제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기 위하여 정무적인 일을 해야 할 때이다. 이 일은 철저히 Give & Take 논리이었고, 무조건 상대방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성사되는 일이다. 그런 일, 소위 ‘특명’을 받으면 내 안에 우글거리고 있는 새로운 ‘자아’들이 튀어 나왔고, 그 때문에 나 스스로 놀라곤 하였다. 또한 무언가를 창조하는 잠재태로서의 즐거운 ‘애벌레 자아’가 아니라, 전문가와 정치인 사이에서 ‘나’를 선택해야 하는 흔들리는 ‘자아’를 발견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겪는 일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전문성을 갖춘 정치적 역량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마눌님은 ‘당신은 정치인은 절대 못 되니, 그만 두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였다. 소는 누가 키우고? 라며 일축하였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그 스트레스는 달콤한 것의 댓가일지도 모른다. 사실, 주어진 예산을 바르게 집행하는 ‘어공’의 일은 돈을 벌어야 하는 사기업의 스트레스에 비할 바가 못 되고, 시민운동 할 때에는 그렇게 철옹성 같던 행정력이 전화 한 통화로 움직여지는 권력의 맛은 통쾌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두 번 시장선거에서 승리하였고, 나는 네 번이나 연임하여 8년을 그와 함께 하였다.
2018년 12월, 남들처럼 은퇴 기념여행을 떠났다. 해외출장으로는 가보지 않은 곳을 선택했다. 쿠바. 쿠바인들의 삶은 우리네 60년대 사회의 모습이었다. 체 게바라가 살아있으면 달랐을까? 책을 통해서 그려 보았던 쿠바를 현장에서 보니, 사회주의 정치만을 고집하며 사람들을 배고프게 하는 쿠바 정치인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념은 무엇이고, 정치는 무엇이란 말인가? 시선은 차창 밖의 경치를 보고 있지만 이런 저런 생각에 빠지곤 하였다. 문자 한통이 날아 왔다. 경기도에 들어간 후배이다. ㅇㅇ센터장의 자리가 났는데 형님이 제일 적합하다는 것이다. 여행 중이니 나중에 답을 하겠다고 하고는 바로 다음 날 승낙하는 답신을 보냈다. 바로 다음 날! 참나...... 내가 생각해도 찜찜하다. 식구들에게는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했잖어? 하지만, 지난 서너 달 동안 나의 마음은 좀 애매하였다. 다른 사람들의 질문, “요즘 뭐해?”하는 대답으로 “은퇴하고 논다.”고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고, “쉬고 있다.”고 얼버무리고 있던 터이었다. 은퇴? 왠지, 뒷방 늙은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식구들의 바램과는 다르게 나는 은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식구들은 덤덤한데, ‘아버지, 재취업 축하드려요~~~’하는 사위놈의 문자에 기분이 묘했다. 재‘취업’이라......
은퇴하면 귀촌이나 하지
2009년부터 성산동에서 공동육아로 만난 친구들과 반백년 기념으로 ‘은퇴 후 모여살기’를 준비하였다. 그 결과가 평창 방림면에 만든 꽃숲마을이다. 스무 가구를 목표로 출발하여 2017년도 기준으로 16가구가 집을 지었고, 현재는 대부분 세컨드 하우스로 이용하고 있다. 한 날 한 시에 동시에 은퇴하는 것도 아니고, 3가구만이 상주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무언가 함께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원래 계획하였던 ‘은퇴 후 모여 살기’는 요원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센터장의 임기만료가 불 보듯 뻔한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은퇴 후 평창에서의 삶을 어떻게든 그려 보았다. 은퇴하기 몇 년 전부터 책도 보고, 인터넷도 찾아보고, 유투브도 열어 보았다. 주로 귀촌관련 사례들이다. 온라인 수업도 들었다. 그럴수록 평창은, 그 곳에서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에 대하여 심도 있게 논의한 후에 그에 적합한 장소를 구한 것은 아니었다. 멋진 풍광을 자랑하지만, 스콧 니어링처럼 강의하며 메이플 시럽을 만들 수도 없고, TV 속 자연인처럼 채집하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세상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 집과 관련된 안정적인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하여 주말마다 평창에 갔다. 태양광을 설치하고, 데크를 깔고, 나무를 심고, 화단을 만들고, 낮은 울타리를 치고, 경계의 흙이 쏠리지 않게 토낭를 두르고 등등. 언제든 들어와 살 수 있는 공간으로 가꾸었다. 당분간 상주할 수는 없으니, 원격조종이 가능한 IOT도 설치하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었다. 그것은 나의 취미이기도 하였지만, 비용만 지불하면 전화 한 통화로 해결할 수 있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시골 생활에 대비하는 훈련과정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읍내 만물가게에 들어가 작업할 물품들을 고르는데, 사장님이 묻는다. “얼마나 되었우?” “?”. “평창에 집지은 지 얼마나 되었냐구?” “아 예, 한 1년 쫌 넘었습니다.” “흠......보통 3~4년 가요.” “예 ?” “처음에 이사 와서 집 주변도 가꾸고, 큰 개도 키우고 닭도 키우고, 이것저것 심어 보기도 하고..... 한 3년은 그렇게 재미있게 지내요. 그러다가 문득 사람이 그리워지기 시작하면서 한 두 해 더 있다가 결국, 도시로 다시 나가더라고.”
정확했다. 한 3년쯤 지나니, 집주변 공간이 빠르게 정리 정돈이 된다. 그와 비례해서 무언가 계획하고, 연구하고, 필요한 것을 준비하고, 완성된 모습을 그려보며 엔돌핀이 팍팍 도는 그런 감흥이 나지 않는다. 더욱이 나이를 먹었는지, 울타리 작업한다고 바위에 삼십여 개의 앙카볼트 작업을 하였더니 팔꿈치에 골프 엘보우가 왔다. 골프는 안하기로 마음먹고 골프세트를 통째로 친구놈에게 주어 버렸는데, 테니스 엘보우도 아니고 ‘골프’ 엘보우라니...... 그러고 보니, 마당에서 작업 좀 하면 다음 날 아침, 뻑뻑한 손가락 관절들이 모두 ‘나 여기 있오’하고 알린다. 농사? 원래 농사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 말 그대로 귀농(歸農)할 수 있을까 말까 하는 것이지, 도시사람이 은퇴 후 한 번도 안 해본 농사를? 말도 안 되는 소리임을 농사를 지어보지 않고도 알게 되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문제, ‘그럼, 여기서 뭐하고 살지?’하는 질문까지 겹치니 평창 가는 발길이 뜸해진다. 나도 다른 집들처럼 세컨드 하우스로 평창집을 사용하게 되었다. 남 몰래 은퇴를 준비하였다고 자부하였건만, 실행할 수 없으니 전혀 준비하지 않은 것과 같다. ‘남 몰래’ 답답한 상태가 되었다.
어쨌든 집에서 나온다
한 놈은 매일 도서관에 간단다. 또 한 놈은 동네 근처 산인 광교산, 청계산을 매일 올라 다니고. 특이하게도 한 놈은 정장을 입고 작은 방으로 출근을 한단다. 미친 놈. 은퇴를 하였어도 스스로 무언가에 매어 있기를 자초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산이 좋아서 산들을 찾아다니는 사람이면 몰라도, 죽으면 항상 누워있을 산인데, 왜 벌써 못가서 안달인지...... 혀를 끌끌 찼다. 헌데, 정작 나는 점점 소파에 앉아서 TV보는 시간이 늘고 있었다. 손흥민의 게임은 당일도 보고, 재방송도 보고, 하이라이트도 보면, 그의 EPL 모든 경기를 거의 외울 지경이었다. 소파에 앉던 자세도 점점 눕고 있었고, 그 시간에 비례해서 허리도 살살 아파오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마눌님이 “이제 그만 움직여 보시죠?“한다. 센터장을 그만 둔 이후 정말로(!) 은퇴한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삼식(三食)이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지하실에 묶어놓고 있던 자전거를 청소했다. 엉덩이 받침이 있는 자전거 복장에 헬멧, 선글라스까지 챙겨서 쓰고 탄천으로 나갔다. 슬슬 패달을 밟아 보니 바람이 뺨을 살살 스치는 게 상쾌하다. 내친 김에 한강까지 나아갔다. 평일인데도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그룹지어서 씽씽 속도를 내어 다니는 사람들도 있고,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어떤 이는 뽕짝을 틀어 놓고 달렸다. 꼴불견. 성수대교 쪽으로 가다가 너무 무리하나 싶어서, 핸들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맙소사! 죽는 줄 알았다. 멍청한 놈. 생각이 없었다. 탄천은 당연히 하류인 한강 쪽으로 흐른다. 그러니 한강 쪽으로 갈 때에는 완만한 내리막이 계속되어서 룰루랄라 내려갔던 것이다. 그럼, 올라 올 때는? 오후 맞바람까지 불어서 힘들기가 배가(倍加)되었다. 이것도 매일 하기에는 재미없어 보인다. 하기야 매일 자전거 타는 것이나 할 일없이 산에 가는 것이나 ‘집을 나간다’는 측면에서 똑같다. 그런데 가만, 내가 뭘 잘못했나? 왜 은퇴해도 매일 집에서 나가야 하지? 속에서 무언가 부글거린다.
59년생 서른 살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첫 번째 칸에 주저앉았다. 이곳이 우리 집에서 제일 시원하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요즘에 알게 된 사실이다. 이런 저런 생각하기가 좋은 곳이다. 치매가 진행 중이긴 하지만 건강하신 장모님과 태어날 손주 녀석을 돌보면서 이렇게 내 생의 마지막, 노년을 보내는 것인가 하는 상념에 빠졌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전면에 커다란 족자가 걸려 있다. 사실, 족자는 언제나 그 곳에 있었다. 십년 전에 이 집을 지은 기념으로 장인어른이 써주신 것이다. 약간 흘려 쓰셔서 몇 글자는 못 읽는다. 검색해본다.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벽란도판상시(碧瀾渡 板上詩)이다.
登眺江樓日(등조강루일) 강루에 올라서 구경하는 날
奔馳宦路年(분치환로년) 벼슬길에 헤매는 시절이라오
何當伴鷗鷺(하당반구로) 어느 때 갈매기와 무리를 지어
歸釣碧山前(귀조벽산전) 저 산 앞에 돌아가 고기를 낚을꼬.
벽란도(碧瀾渡)에 있는 벽란정(碧瀾亭)에서, 고려말 조선초 격동기의 학자이자 정치인인 권근이 벼슬길의 아슬아슬함을 떠나 초야에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즐기며 살 수 있는 날을 그리며 지은 것이다. 87년 대기업에 들어가 직업을 가진 이래, 사람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고민하고 싸웠다. 직원들 말처럼 ‘바보같이’ 손해도 많이 보았고. 마지막 10년 동안도 ‘어공’으로 보내며, 사방에 널려있는 진흙탕 구덩이들에 용케 빠지지 않을 정도로 행동하였다. 그들과 한배를 타기 싫어 일정한 거리를 두는 방법으로 나를 지켰다. 그러니, 눈 매서운 후배들이 형님으로 예우하면서 뒷방으로 밀어내는 것은 당연지사. 그런데 오늘, 그림으로 걸려 있던 이 족자가 나의 욕망을 꺼내 보여준다. 권근(權近)과는 다르게 나는 벼슬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 동안 어정쩡하게 하루를 보낸 것은, 혹여 ‘그의 대선 캠프에서 불러 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랬다. 지금은 소를 키우지 않아도 되는데, 마음은 짭짤한 권력의 달콤함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은퇴의 변(辯)으로 “앞으로는 선택을 구하는 삶이 아닌, 내가 선택하는 삶으로 살겠다.”며 전직원에게 메일을 보내 놓은 나인데, 부끄러웠다. 어디든 일단 집을 나서는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집안을 뱅뱅 도는 나도 은퇴가 안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래, ‘이제 그만 움직여 보자.’ 앉은 채로 핸드폰을 꺼내서 그와 관련된 밴드를 탈퇴하고, 카톡방을 나오고, 텔레그램 방들을 폭파하고 나서, 관련된 전화번호들을 모두 지웠다. 후 ~~~~
한국 남자의 평균수명으로 80은 산다고 보면, 앞으로 남은 20년을 뭐하고 살까? 늙지 않았다고 혹은 늙지 않겠다고 발버둥 쳐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안다. 지혜로운 60대이라면 여기 저기 좋은 말을 해주고 다니면 좋겠지만 어림도 없다. 하기야, 그 동안 쌓은 알량한 지식과 경험으로 추억을 먹고 사는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 ‘무엇을 하고 살까?’가 아닌, ‘어떻게 살까?’라고 질문해야 죽을 때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일단 오늘 즐거운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기로 하였다. 그 동안 미뤄 놓았던 해보고 싶은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버킷 리스트? 그런 것을 만들고 싶지 않다. 그 것은 목표를 세우고 나의 현재를 미래에 미뤄 놓는 그 동안의 삶과 비슷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도래하는 미래를 지금 여기서 맞이하는, 현재를 살아 보고자 한다. 우선 지난 30년 동안 했던 돈 벌기 위한 공부와는 다른, 사람 사는 공부로 새로운 20년을 시작해 본다.
36년 전 사회 초년생일 때 가졌던 두려움과 기대, 그 상반된 떨림을 살려 내어 ‘59년생’이 아닌 ’서른 살’로 출발 해보자. 20년 뒤에 생(生)을 은퇴할 때에는 한 번의 은퇴로도 만족스러운 삶이었다고 말하는 모습을 그려 본다.
가마솥님의 서른살을 응원합니다~
가마솥님의 글을 읽으니 꼰대와 어른의 차이를 알겠네요 ~ ㅎㅎ
서른살의 공부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우와 가마솥쌤과 함께 공부해보고 싶어요..!!!
가마솥님~~ 사람 사는 공부, 응원합니다~~~
그렇다. 가마솥의 누룽지는 아직 끓고 있다.
한 20년은 더 불을 지펴야 맛 볼수 있는 누룽지.
그 가마솥은 그만큼 단단했다.
가마솥님의 글을 읽는데, 왠지 드라마 인트로가 시작하는 느낌처럼 장면 하나하나가 상상이 되네요^^
앞으로 주인공이 어떤 삶을 펼칠지 기대가됩니다~ㅎ
새로운 공부 20년!! 멋져요~
와~ 60갑자를 돌아오신 ‘59년생 서른살’님의 사주가 매우 궁금해집니다.(루보살~~~제가 운띄웠으니 하반기에 공략!)
가마솥님과 함께 하는 20년 공부. 기대됩니다^^
정말 솔직한 글이네요… .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