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탄천에는 많은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걷는다. 살랑 살랑 잉어들을 감상하며 걷는 사람도 있지만, 팔을 크게 휘두르며 걷는 사람, 속도를 내어 걷는 사람, 경보하는 듯이 걷는 사람,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걷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어폰을 끼고 아무 말도 없이 집중하며 걷는다. 그 들은 걷는 것이 운동인 듯 하다. 연전에 나도 한 동안 탄천을 걸었다. 마눌님이 허리가 나빠졌는데, 걷는 운동을 해야 한단다. 나의 당뇨수치를 걸고 넘어져서 하는 수 없이 ‘함께’ 걸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걸어 드렸다는 표현이 맞을게다. 난 그냥 이유없이 걷는 것이 무언가 어색하다. 아니지, 건강을 위해서 걷는다는 것이 싫다. 목적지를 위하여, 예를 들면 지하철을 타기 위하여 정류장까지 걸어가야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운동하기 위하여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같은 길을 걸어서 되돌아오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다. 자고로 운동이란 축구, 야구, 탁구, 스키, 마라톤 등등 뭔가 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맛이 있어야......         몸과 마음사이   한 동안 주말 축구를 하였다. 어릴 적부터 숨이 차고 헐떡거리며 뛰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아는 사람들끼리 함께 땀 흘리며 호흡을 맞춰 보는 것이 마냥 좋았다. 힘들 때에는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골키퍼를 보면 된다. 몇 년을 그렇게 놀았다. 그런데, 점점 다치는 사람들이 생긴다. 전문적으로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소위 몸이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자기 분수를 넘는 움직임을 하려다가 다치는 것이다. 나도 팔이 부러진 적이 있다....
  탄천에는 많은 사람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걷는다. 살랑 살랑 잉어들을 감상하며 걷는 사람도 있지만, 팔을 크게 휘두르며 걷는 사람, 속도를 내어 걷는 사람, 경보하는 듯이 걷는 사람,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걷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어폰을 끼고 아무 말도 없이 집중하며 걷는다. 그 들은 걷는 것이 운동인 듯 하다. 연전에 나도 한 동안 탄천을 걸었다. 마눌님이 허리가 나빠졌는데, 걷는 운동을 해야 한단다. 나의 당뇨수치를 걸고 넘어져서 하는 수 없이 ‘함께’ 걸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걸어 드렸다는 표현이 맞을게다. 난 그냥 이유없이 걷는 것이 무언가 어색하다. 아니지, 건강을 위해서 걷는다는 것이 싫다. 목적지를 위하여, 예를 들면 지하철을 타기 위하여 정류장까지 걸어가야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운동하기 위하여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같은 길을 걸어서 되돌아오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다. 자고로 운동이란 축구, 야구, 탁구, 스키, 마라톤 등등 뭔가 체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맛이 있어야......         몸과 마음사이   한 동안 주말 축구를 하였다. 어릴 적부터 숨이 차고 헐떡거리며 뛰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아는 사람들끼리 함께 땀 흘리며 호흡을 맞춰 보는 것이 마냥 좋았다. 힘들 때에는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골키퍼를 보면 된다. 몇 년을 그렇게 놀았다. 그런데, 점점 다치는 사람들이 생긴다. 전문적으로 축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어서, 소위 몸이 만들어지지 않았는데 자기 분수를 넘는 움직임을 하려다가 다치는 것이다. 나도 팔이 부러진 적이 있다....
가마솥
2023.10.22 | 조회 657
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새 밀레니엄의 시작인 2000년대는 다른 세상이 열릴 거라 기대했다. 누구나 갖게 된 휴대 전화와 전국 구석구석까지 뻗친 인터넷 덕택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난 세상 밖으로 천천히 한 걸음씩 나오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디지털 세상이 오자 수십만의 동성애자들이 익명에 기대어 온라인 공간에 모여들었다. 거기서 정보를 주고 받고 낯선 이들과 연결을 시도했다. 비록 맨얼굴을 내밀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들의 존재감이 드러나게 되자 거센 역풍이 불었다. 동성애자들의 온라인 거점었던 웹사이트들이 청소년 유해사이트로 지정되는 소위 ‘엑스존사태’가 일어났다.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이반’이나 ‘게이’ 등의 단어도 인터넷 검색 금지어로 지정되었다. 동성애자들이 양지로 나오지 못하도록 정부와 보수세력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음란, 반인륜, AIDS그 자체라고 우겼다. 새 밀레니엄 시대에 동성애자들이 존재가 아닌 사회악이나 질병으로 공식화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일로 인해 난 많이 낙담했다. 권력과 보수 세력들을 더욱 혐오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내게 노답 그 자체였다.     2015년 소위 엑스존 사태 https://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627     이들에게 대항할 힘은 미약했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은 초기 단계였고 소규모 조직에 머물렀다. 참여자를 모으기 어려웠다. 당시 커밍아웃을 한다는 것은 가족과 직장을 잃는...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새 밀레니엄의 시작인 2000년대는 다른 세상이 열릴 거라 기대했다. 누구나 갖게 된 휴대 전화와 전국 구석구석까지 뻗친 인터넷 덕택에 동성애자들에 대한 편견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난 세상 밖으로 천천히 한 걸음씩 나오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 기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디지털 세상이 오자 수십만의 동성애자들이 익명에 기대어 온라인 공간에 모여들었다. 거기서 정보를 주고 받고 낯선 이들과 연결을 시도했다. 비록 맨얼굴을 내밀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들의 존재감이 드러나게 되자 거센 역풍이 불었다. 동성애자들의 온라인 거점었던 웹사이트들이 청소년 유해사이트로 지정되는 소위 ‘엑스존사태’가 일어났다.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이반’이나 ‘게이’ 등의 단어도 인터넷 검색 금지어로 지정되었다. 동성애자들이 양지로 나오지 못하도록 정부와 보수세력이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음란, 반인륜, AIDS그 자체라고 우겼다. 새 밀레니엄 시대에 동성애자들이 존재가 아닌 사회악이나 질병으로 공식화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일로 인해 난 많이 낙담했다. 권력과 보수 세력들을 더욱 혐오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내게 노답 그 자체였다.     2015년 소위 엑스존 사태 https://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7627     이들에게 대항할 힘은 미약했다. 성소수자 인권 운동은 초기 단계였고 소규모 조직에 머물렀다. 참여자를 모으기 어려웠다. 당시 커밍아웃을 한다는 것은 가족과 직장을 잃는...
문탁
2023.10.20 | 조회 696
먼불빛의 웰컴 투 60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나는 원래 체구가 작고 동그란 얼굴 덕에 어려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작년 정년퇴직을 한 이후 일정하게 반복되던 루틴이 사라지자 나는 부쩍 더 늙어보였다. 나름 운동도 하고 바삐 지낸다고 했지만 일 할 때보다 활동량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일 할때만 해도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언닌 아직 너무 젊어 보여, 더 일해야지...” 했는데, 늙음은 마치 나의 정년퇴직을 기다렸다는 듯이 가속적으로 덮쳐 왔다 온 몸으로. 온 몸에서 노화의 징후가 노골적으로 나타나 거울을 보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었다.           머리카락이 늙었다     그 중에서 얼굴의 팔자 주름도, 탄력 떨어진 팔뚝과 뱃살도 아닌 단연코 가슴 아픈 나의 나이듦의 징후는 바로 ‘머리카락’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양치할 때마다 하얀 세면기에는 3초에 하나씩 머리카락이 뚝뚝 떨어진다. 샴푸하면서 샤워기 물 따라 빠져나가 수북히 쌓이는 머리카락을 보며, 이제 내 머리에 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세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우리집은 엄마, 오빠와 그리고 나, 동생까지 숱이 많고 윤기 있는 머리로 늘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있는 숱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인데 그 와중에 새로 자라나는 잔머리까지 많아 늘 삐죽삐죽 삐져나와 곱게 땋아지지 않을 정도로 넘치던 숱. “와! 너 지~인~짜...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나는 원래 체구가 작고 동그란 얼굴 덕에 어려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작년 정년퇴직을 한 이후 일정하게 반복되던 루틴이 사라지자 나는 부쩍 더 늙어보였다. 나름 운동도 하고 바삐 지낸다고 했지만 일 할 때보다 활동량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일 할때만 해도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언닌 아직 너무 젊어 보여, 더 일해야지...” 했는데, 늙음은 마치 나의 정년퇴직을 기다렸다는 듯이 가속적으로 덮쳐 왔다 온 몸으로. 온 몸에서 노화의 징후가 노골적으로 나타나 거울을 보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었다.           머리카락이 늙었다     그 중에서 얼굴의 팔자 주름도, 탄력 떨어진 팔뚝과 뱃살도 아닌 단연코 가슴 아픈 나의 나이듦의 징후는 바로 ‘머리카락’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양치할 때마다 하얀 세면기에는 3초에 하나씩 머리카락이 뚝뚝 떨어진다. 샴푸하면서 샤워기 물 따라 빠져나가 수북히 쌓이는 머리카락을 보며, 이제 내 머리에 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세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우리집은 엄마, 오빠와 그리고 나, 동생까지 숱이 많고 윤기 있는 머리로 늘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있는 숱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인데 그 와중에 새로 자라나는 잔머리까지 많아 늘 삐죽삐죽 삐져나와 곱게 땋아지지 않을 정도로 넘치던 숱. “와! 너 지~인~짜...
먼불빛
2023.10.14 | 조회 725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노동자가 아닌 사장이 되다 ​ 나에게는 함께 일하는 좋은 동료 직원이 있다. 직원은 작년 봄, 목수 일을 배우고 싶다며 대구에서 밀양까지 나를 찾아왔다. 첫 만남 후에 그는 일이 있으면 불러 달라는 연락을 종종 하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생각보다 돈이 안 된다”, “보기처럼 멋있지 않고, 위험하고 힘든 일이다”, “서울에 한 달 다녀와야 할 일이 있다” 등의 핑계를 대며 함께 일하기를 피했다. 일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맡은 일들도 많아지는 상황이었지만 누군가를 고용하여 안정적인 고용을 책임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친동생이나, 동생의 친구들을 잠깐씩 알바로 쓰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 그러다가 그를 불렀다. 전시용 가벽을 만드는 작업이 있었는데, ‘그렇게 해 보고 싶다니 하루 같이 해 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여태껏 같이 일해 본 초보자들 중에 가장 이해도 빠르고, 손재주도 좋았다. 나는 책임감 있게 일을 잘 해내는 것이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일 중독자인 나에게 ‘좋은 동료’의 기준은 열심히 하는 것보다 ‘일을 잘 하는 것’이다. 나를 쏙 빼닮은 사람이 나타났다. 눈치가 빠르고, 성실하고, 끈기도 있고, 악도 있고, 게다가 손재주도 좋은 사람이다. ​ 어느덧 그와...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노동자가 아닌 사장이 되다 ​ 나에게는 함께 일하는 좋은 동료 직원이 있다. 직원은 작년 봄, 목수 일을 배우고 싶다며 대구에서 밀양까지 나를 찾아왔다. 첫 만남 후에 그는 일이 있으면 불러 달라는 연락을 종종 하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생각보다 돈이 안 된다”, “보기처럼 멋있지 않고, 위험하고 힘든 일이다”, “서울에 한 달 다녀와야 할 일이 있다” 등의 핑계를 대며 함께 일하기를 피했다. 일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맡은 일들도 많아지는 상황이었지만 누군가를 고용하여 안정적인 고용을 책임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친동생이나, 동생의 친구들을 잠깐씩 알바로 쓰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 그러다가 그를 불렀다. 전시용 가벽을 만드는 작업이 있었는데, ‘그렇게 해 보고 싶다니 하루 같이 해 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여태껏 같이 일해 본 초보자들 중에 가장 이해도 빠르고, 손재주도 좋았다. 나는 책임감 있게 일을 잘 해내는 것이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일 중독자인 나에게 ‘좋은 동료’의 기준은 열심히 하는 것보다 ‘일을 잘 하는 것’이다. 나를 쏙 빼닮은 사람이 나타났다. 눈치가 빠르고, 성실하고, 끈기도 있고, 악도 있고, 게다가 손재주도 좋은 사람이다. ​ 어느덧 그와...
문탁
2023.10.10 | 조회 831
몸의 일기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에선 누군가와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성향의 친구들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잡지 커버의 “호모”란 단어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데이 서울”이었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변태 성욕자로 등장하는 선정적이고 과장된 기사였지만 난 선데이서울이 고마웠다. 공중파 방송에서도 비슷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보들을 짜깁기한 끝에 종로3가에 남성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극장과 지하 술집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극장에 가기로 결심한 날 내 심장은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날 보고 있을 것 같았다. 매표소를 빙빙 돌다 돌아오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겨우 들어갔다.  구석에서 곁눈질만 하다가 나오곤 했다. 만남의 방식이 낯설었지만 종로라는 공간이 있다는 게 기뻤다.    90년 대 초 동성애자들이 종로에 있는 은밀한 공간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사건을 ‘종로에 데뷔’했다고 표현했다. 데뷔 년도는 상대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정보였다. 이름이나 학교, 직장, 사는 동네 등은 대놓고 묻지 않았다. 웬만큼 친해져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는. 나처럼 갓 데뷔한 20대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백수들도 눈에 띄었고 소수지만 정해진 거처 없이 반노숙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발렌타인 30년산을 파는 지하 술집엔 돈이 꽤 있거나 결혼한 중년들이 드나들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 동성애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했다면 선데이서울의 기사 제목처럼  변태적 욕망을 가진 “호모”일 뿐이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수용인지 체념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무수한 은어들을 발명했다. 자기바하적 언어 없이는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사람들이 술자리를 파하고 돌아갈 무렵 종로는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원에서의 크루징과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지하 술집에서의 유흥이 낯설고 기괴했다. 난 적응하기 어려웠고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종로3가의 대표적인 게이바 "프렌즈"의 천정남님 인터뷰(https://www.sqcf.org/blog/?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Nzt9&bmode=view&idx=3612737&t=board)       종로에서 두번의 연애를 했다.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 사람이 세상의 전부로 여겨졌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상대들은 나와 달랐다. A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연애 경력이 몇 번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자신은 남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달라질 것이라고 울부짖었다. 곧 종로에 발길을 끊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B는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했지만 난 그가 여성과 사귀거나 같이 사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자신을 수용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의 연애는 짧은 인연으로 끝이 났다. 친구를 만들었지만 친밀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한 친구는 나중에 본인이 갓 결혼을 했음을 밝혔다. 그는 나를 포함한 알고 지내던 친구들에게 수첩에 있는 자신의 삐삐 번호를 지우라고 ‘명령’했다. 자신은 다시는 종로에 나올 일이 없으니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과민반응에 화가 났지만 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도 그만큼 가슴 졸이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이 두려워 비밀을 옷섶에 한가득 감추고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달달한 연애가 싹트거나 신뢰에 기반을 둔 우정이 생겨나기 쉽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난 종로를 등질 수 없었다. 종로는 들끓는 에로스와 끈끈한 우정을 기대하며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기대가 번번이 무산되더라도 말이다.       ‘이중생활’로 몸과 마음은 긴장 모드 상태였다. 이 긴장감을 해소할 뚜렷한 해법은 없었지만 종로 밖 세상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드러낼 방법을 찾고 싶었다. 상담을 받기로 했다. 먼저 심리 검사를 받았다. 수 백 개의 검사 문항 중 성지향성을 묻는 질문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고 나서 상담이 시작되었다. 상담사가 나의 성정체성에 관한 결과를 얘기해 주길 기다렸다. 난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결과를 쭉 설명하다 마지막에 주춤했다. 내가 남성성도 강하나 섬세한 면이 있다는 식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불분명하지만 동성애자와 상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건 분명했다. 이 일 이후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는 여성과 성관계를 시도하라는 어이없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서른을 넘기게 되자 종로 밖의 세상은 내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난 소위 결혼적령기가 되었고 아파트 전세를 마련한 상태였다. 직장 생활도 안정기에 접어 들었다. 다들 결혼을 해야 한다고 성화였다. 서른이 넘도록 여자친구 한번 사귀지 않는 나를 걱정하고 손주를 고대하는 어머니를 실망시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가족과 인연이 끊어질 각오로 커밍아웃할 용기는 없었다. 가족들이 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사회적인 낙인 이상의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일기장도 자물쇠가 달린 걸 썼다. 가족들이 방문했다가 우연히라도 들춰 볼까 염려되어서였다.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음에도 가족들에게 뭔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했다. 맘에 1도 없는 선자리에 몇 번이나 나갔다. 당시만 해도 결혼 제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남성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이 있을 거란 오명을 썼다. 그 뿐 아니라  이는 가부장의 위치가 주는 사회적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선 이혼할망정 결혼은 한번 해야 남은 인생이 편하다는 농담까지 있었다. 어쨌든 공개적으로 남성성을 증명한 셈이니까.          난 고등학교 때부터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교련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술자리에서 군대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귀를 막았다. 마초적 남성들을 속으로 비웃었으나 돌이켜 보면 스스로 믿었던 만큼 가부장적 위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대학교 때부터 집안의 호주이자 가장이 되었다. 졸업 후 그간 의무를 다하지 못했단 찜찜함을 털어내고 싶어 집에 돈들어가는 일은 주로 내가 감당했다. 거기엔 능력있는 가장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었다. 나는 또 가족을 갖고 싶었다. 4인 대신 2인의 스위트 홈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림 같은 이층 집은 못짓더라도 서울 한복판에 내 명의의 아파트를 사고 거기에 달콤한 가정을 들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인연이 찾아온다 해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그런 관계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지만 2인가족의 꿈을 놓지 않았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부장적 권위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면서도 그것이 발명해 낸 가족제도 안으로 들어가고픈 욕망이 숨어 있었다. 그게 모순이었지만 에로스적 기운이 넘쳐났던 청년은 주어진 조건에서 무언가를 꿈꾸고 싶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에선 누군가와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성향의 친구들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잡지 커버의 “호모”란 단어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데이 서울”이었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변태 성욕자로 등장하는 선정적이고 과장된 기사였지만 난 선데이서울이 고마웠다. 공중파 방송에서도 비슷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보들을 짜깁기한 끝에 종로3가에 남성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극장과 지하 술집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극장에 가기로 결심한 날 내 심장은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날 보고 있을 것 같았다. 매표소를 빙빙 돌다 돌아오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겨우 들어갔다.  구석에서 곁눈질만 하다가 나오곤 했다. 만남의 방식이 낯설었지만 종로라는 공간이 있다는 게 기뻤다.    90년 대 초 동성애자들이 종로에 있는 은밀한 공간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사건을 ‘종로에 데뷔’했다고 표현했다. 데뷔 년도는 상대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정보였다. 이름이나 학교, 직장, 사는 동네 등은 대놓고 묻지 않았다. 웬만큼 친해져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는. 나처럼 갓 데뷔한 20대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백수들도 눈에 띄었고 소수지만 정해진 거처 없이 반노숙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발렌타인 30년산을 파는 지하 술집엔 돈이 꽤 있거나 결혼한 중년들이 드나들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 동성애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했다면 선데이서울의 기사 제목처럼  변태적 욕망을 가진 “호모”일 뿐이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수용인지 체념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무수한 은어들을 발명했다. 자기바하적 언어 없이는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사람들이 술자리를 파하고 돌아갈 무렵 종로는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원에서의 크루징과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지하 술집에서의 유흥이 낯설고 기괴했다. 난 적응하기 어려웠고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종로3가의 대표적인 게이바 "프렌즈"의 천정남님 인터뷰(https://www.sqcf.org/blog/?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Nzt9&bmode=view&idx=3612737&t=board)       종로에서 두번의 연애를 했다.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 사람이 세상의 전부로 여겨졌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상대들은 나와 달랐다. A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연애 경력이 몇 번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자신은 남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달라질 것이라고 울부짖었다. 곧 종로에 발길을 끊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B는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했지만 난 그가 여성과 사귀거나 같이 사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자신을 수용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의 연애는 짧은 인연으로 끝이 났다. 친구를 만들었지만 친밀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한 친구는 나중에 본인이 갓 결혼을 했음을 밝혔다. 그는 나를 포함한 알고 지내던 친구들에게 수첩에 있는 자신의 삐삐 번호를 지우라고 ‘명령’했다. 자신은 다시는 종로에 나올 일이 없으니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과민반응에 화가 났지만 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도 그만큼 가슴 졸이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이 두려워 비밀을 옷섶에 한가득 감추고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달달한 연애가 싹트거나 신뢰에 기반을 둔 우정이 생겨나기 쉽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난 종로를 등질 수 없었다. 종로는 들끓는 에로스와 끈끈한 우정을 기대하며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기대가 번번이 무산되더라도 말이다.       ‘이중생활’로 몸과 마음은 긴장 모드 상태였다. 이 긴장감을 해소할 뚜렷한 해법은 없었지만 종로 밖 세상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드러낼 방법을 찾고 싶었다. 상담을 받기로 했다. 먼저 심리 검사를 받았다. 수 백 개의 검사 문항 중 성지향성을 묻는 질문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고 나서 상담이 시작되었다. 상담사가 나의 성정체성에 관한 결과를 얘기해 주길 기다렸다. 난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결과를 쭉 설명하다 마지막에 주춤했다. 내가 남성성도 강하나 섬세한 면이 있다는 식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불분명하지만 동성애자와 상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건 분명했다. 이 일 이후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는 여성과 성관계를 시도하라는 어이없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서른을 넘기게 되자 종로 밖의 세상은 내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난 소위 결혼적령기가 되었고 아파트 전세를 마련한 상태였다. 직장 생활도 안정기에 접어 들었다. 다들 결혼을 해야 한다고 성화였다. 서른이 넘도록 여자친구 한번 사귀지 않는 나를 걱정하고 손주를 고대하는 어머니를 실망시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가족과 인연이 끊어질 각오로 커밍아웃할 용기는 없었다. 가족들이 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사회적인 낙인 이상의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일기장도 자물쇠가 달린 걸 썼다. 가족들이 방문했다가 우연히라도 들춰 볼까 염려되어서였다.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음에도 가족들에게 뭔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했다. 맘에 1도 없는 선자리에 몇 번이나 나갔다. 당시만 해도 결혼 제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남성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이 있을 거란 오명을 썼다. 그 뿐 아니라  이는 가부장의 위치가 주는 사회적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선 이혼할망정 결혼은 한번 해야 남은 인생이 편하다는 농담까지 있었다. 어쨌든 공개적으로 남성성을 증명한 셈이니까.          난 고등학교 때부터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교련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술자리에서 군대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귀를 막았다. 마초적 남성들을 속으로 비웃었으나 돌이켜 보면 스스로 믿었던 만큼 가부장적 위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대학교 때부터 집안의 호주이자 가장이 되었다. 졸업 후 그간 의무를 다하지 못했단 찜찜함을 털어내고 싶어 집에 돈들어가는 일은 주로 내가 감당했다. 거기엔 능력있는 가장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었다. 나는 또 가족을 갖고 싶었다. 4인 대신 2인의 스위트 홈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림 같은 이층 집은 못짓더라도 서울 한복판에 내 명의의 아파트를 사고 거기에 달콤한 가정을 들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인연이 찾아온다 해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그런 관계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지만 2인가족의 꿈을 놓지 않았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부장적 권위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면서도 그것이 발명해 낸 가족제도 안으로 들어가고픈 욕망이 숨어 있었다. 그게 모순이었지만 에로스적 기운이 넘쳐났던 청년은 주어진 조건에서 무언가를 꿈꾸고 싶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문탁
2023.10.06 | 조회 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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