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일 이어지는 폭염에 숨 쉬기도 힘든 여름입니다. 잘 지내셨는지 안부를 묻기도 민망해요. 여름의 한가운데서 두 권의 소설을 읽습니다.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과 이서수의 <젊은 근희들의 행진>입니다. 더위와 무기력과 대비되게 두 작가 모두 패기있게 지금의 한국사회를 '리얼'하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8월 11일에는 김기태의 <두 사람의 언터내셔널> 가운데 <세상 모든 바다>, <전조등>,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팍스 아토미카> 4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려구요. tv 연애프로그램 '나는 솔로'를 떠올리게 하는 <롤링 선더 러브>나 전국민이 올인하고 있는 입시제도를 비튼 <보편 교양>도 읽는 맛이 있는데, 제한된 시간에 여러 작품을 언급하긴 어려울 것 같아 4편으로 축소해봤습니다. 4편 위주로 메모 남겨주세요. 그래도 꼭 언급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메모에 써주셔도 됩니다. 메모는 김언희, 김지연, 김지영, 꿈틀이, 무이, 박상례, 수영, 시소님 써주세요.
아이돌 팬문화, 총알배송, 밈, 우울증, 정신과 치료 등 소설의 소재 하나하나가 우리의 일상이라 뜨끔하면서도 나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소설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세계 속에서 살고 있나? 어떤 정신머리로 살아가야 할까? 생각이 많아지고, 기진맥진해질 수도 있지만, 소설가의 논평을 따라 읽어보려 합니다. 쓰는 행위도 읽는 행위도 능동적인 삶의 태도일 테니까요. 여러분의 복잡다단한 생각과 이야기는 줌에서 들어보겠습니다. 8월 11일 월요일 저녁 8시 줌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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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읽기] 11월 10일(월)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2 개강 공지
김윤경~단순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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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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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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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단순삶 | 2025.11.03 | 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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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읽기]10월27일 정세랑의 <이만큼 가까이> 공지
(5)
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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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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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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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목 | 2025.10.20 | 2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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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읽기] 성해나의 <혼모노> 후기
(1)
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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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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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14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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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 2025.10.18 | 14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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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읽기] 10월 13일(월) 성해나의 <혼모노> 공지
(3)
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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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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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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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목 | 2025.10.04 | 4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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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읽기]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3회차 후기
(3)
조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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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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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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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영 | 2025.09.29 | 2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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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읽기]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2회차 후기
(3)
이연정(달똥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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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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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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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정(달똥달) | 2025.09.22 | 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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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읽기]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1회차 후기
(5)
천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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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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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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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유상 | 2025.09.11 | 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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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읽기] 9월 8일(월)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개강 공지
(1)
김윤경~단순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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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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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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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단순삶 | 2025.08.31 | 3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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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 소설 세미나 후기
(4)
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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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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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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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든 | 2025.08.30 | 2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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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읽기]8월25일 이서수의 <젊은 근희의 행진> 공지
(10)
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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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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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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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목 | 2025.08.18 | 3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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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세미나 후기
(3)
천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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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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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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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유상 | 2025.08.14 | 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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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8월 11일 김기태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공지
(5)
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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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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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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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목 | 2025.08.04 | 945 |

<세상 모든 바다>
"하쿠 상은 좋겠다. 좋아하는 거 다 말할 수 있어서." 무슨 이야기인지 되묻자 그는 대답했다.
"내가 걸 그룹 좋아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두 가지로 반응해. 첫째는 '네가 여자가 없으니까 그러지'고, 둘째는 '네가 그러 니까 여자가 없지'야."
그는 범행을 모의하듯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비밀인데. 나도 러블리즈 좋아한다." 그는 지하 노래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위태롭게 내려가며 "러블리즈가 좋다•••••• 러블리즈가 세상을 구한다."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와 나는 다른 사례로 취급되었을까. 그후로 아침에 동료들을 마주치면 종종 "하쿠 상 어젯밤에 뭐했어? 또 걸그룹 영상 봤어?"라고 놀림받곤 했다. "얼마나 덕질을 했으면 한국어를 이렇게 잘해?" 같은 말도 자주 들었다. 동료들의 머릿속에서, 나는 그 기모이한 오타쿠들과 비슷한 존재인 것일까 걱정 됐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고, 만약 그런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이라는 걸 감추고 싶었다.
…
세상 모든 바다는 지지할 수 있는 그룹이다. 거리낌없이 좋아해도 되는 그룹이다. (21쪽)
…
세모바를 좋아하느냐는 영록의 질문은 그래서 어렵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나는 선뜻 대답할 수 있었다. (23쪽)
…
여러 논쟁이 세모바 자체를 초월해버리는 동안, 나는 모든 게 뒤죽박죽으로 느껴질 뿐이어서 의견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내가 의견을 가져야 하는지, 그럴 자격이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29쪽)
…
나의 한국 이름은 이제 존재하지도 않았다. 수년 전에 나는 그 이름을 버렸다. 하지만 일본 이름은 어떤 효력을 가질 수 있을까. 일본인으로서 이 서명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35쪽)
> 무언가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데에도 자격이 있어야 할까…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 바다를 등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반드시 세상 어떤 바다와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 불편한 예감에 시달릴 때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지하 소극장에서 본 오타쿠들이 떠오른다. 그 기모이한 오타쿠들의 열렬한 구호. 가치코이코죠. 진짜 사랑 고백. 좋아 좋아 정말 좋아 역시 좋아… 그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 (37쪽)
> 완벽하고 정의로우며 대의를 추구하는 세모바는 그것을 좋아하는 것에도 자격이 필요할 것 같은 위압감을 주는 게 아닐까… 그냥 이유없이 좋은 근시의 사랑은 오히려 용납되기 어려운 것인가?
* 사회적으로 대단한 일을 하지 않는 삶도 괜찮을텐데.. 어느 날부터인가 “선한 영향력”이라는 명분 하에 너무 정의로운 연예인들을 보며 내 인생이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일반인들의 삶에 “그는 멀리에서 굶고 울고 헤매는 사람들, 부딪히고 무너지고 있를 것들을 잠시 애도했다.(106쪽, 전조등)”처럼 조용한 기도가 존재하는 것만도 다행이지 않을까. 사회적 명분 없이도 이유없이 그냥 좋아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자잘하고 근시안적 사랑과 그렇게 사랑할 자유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것이 아닐지…
한영인 평론가의 비평 올려놓을게요. 줌에서 함께 이야기해봐요.
두사람의 인터네셔널/김기태 /문학동네
P36 백영록이라는 이름의 16세 소년이 사망한 사정에 대해, 군청 앞에서 행인에게 말을 거는 아주머니의 사정에 대해, 그 사정에서 나의 몫에 대해 무언가를 생각해내려 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큼지막한 파도 하나가 방파제게 부딪쳤다. 하얀 물보라가 세차게 튀어올랐다. 얼굴에 와닿는 차가운 물방울의 감각, 실제로 닿았을까 느낌뿐이었을까. 분명한 건 내가 뒷걸음질을 쳤다는 것이다.(세상 모든 바다)
-->세상의 바다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모토의 아이돌 그룹의 팬이었던 ‘하쿠’는 백영록의 기억과 연결된 참사를 겪으며, 불편한 감정을 갖는다. 사회적 참사에 대해 자신의 책임을 묻는 ‘하쿠’는 그저 열혈 팬이었던 그 시절의 “그 근시의 사랑이 아직도 그립다.” 사건을 격고 이제 그렇게 단순할 수가 없게 된 하쿠.
P107 “잠깐.”
그가 엉거주춤 멈춰 “왜?”라고 묻자 그녀는 깜빡한 무엇을 떠올리려는 듯 그를 보다가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작고 예쁜 풍경 속으로 걸어가 그의 아내와 아기의 곁에 앉았다.
(전조등)
--> “잠깐” 거의 완벽한 삶을 살아온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털신으로 대변되는 그가 연루되었지만 시종일관 무시해왔던 어떤 것. ‘세모바’에서 말했던 사회적 책임 같은 것.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P142 “우리는 친한 사이야.”
그 말은 두 사람만의 농담이 되었다. 즉석밥과 계란, 반창고와 감기약, 섬유유연제와 블루투스 스피커 등을 ‘친한 사이’ 해버렸고, ‘도망가면 안 친한 사이’라며 대청소 날을 정해 손가락을 걸었다. 니콜라이는 누구도 근황을 모르는 앙맨에게 ‘맥주 가즈아아앙’으로 끝나는 메시지를 남겼고, 진주는 일년 넘게 업데이트가 없는 힝구의 채널에 ‘힝구야 안녕’으로 시작하는 댓글을 달았다. 둘 다 답장을 받지 못했지만 ‘좋은 친한 사이 시도’였다며 서로 칭찬했다.(두 사람의 인터네셔널)
--> 세모바나 전조등의 질문에 대한 답처럼 느껴진다. 아주 슬픈 답. 이것밖에 없을까? 진주와 니콜라이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소설 밖에 독자에게는 여전히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 작품이다.
차분히 메모할 시간이 없어서 코멘트를 달다말다 했네요. 죄송합니다. 늦어서도 죄송하고 ㅠ
<세상 모든 바다>
(23쪽) 그들은 아름다웠고, 유능했고, 심지어 옳았다.
-> 옳다는 확신이 들 때만큼 용감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용감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따라 세상은 변해가는 게 아닐까…
이제 옳다는 확신의 확고함에 비례해 위험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옳았다’는 세 글자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37쪽) 지금은 펼치지 않고도 떠올릴 수 있는 그 세계지도에서, 세상의 모든 바다는 분명 이어져 있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이 다소 무섭다. 바다를 등지고 아무리 멀리 가도, 반드시 세상 어떤 바다와 다시 마주치게 될 테니까. 그 불편한 예감에 시달릴 때마다 이상하게도 오래전 지하 소극장에서 본 오타쿠들이 떠오른다. 그 기모이한 오타쿠들의 열렬한 구호. 가치코이코죠. 진짜 사랑 고백, 좋아 좋아 정말 좋아 역시 좋아…. 그것도 사랑이라면, 나는 어쩐지 그 근시의 사랑이 조금 그립다.
-> 설명이 쉽지 않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거시적 안목을 가지고 미시적 삶을 잘 살아내고 싶지만, 실상은 조화롭기 보다는 양쪽을 널뛰며 살고 있어서일까?
<전조등>
(90쪽) 그는 “나다운 게 뭔데! 나다운 게 뭐냐고!”라고 소리내보고 큭큭 웃었다. 그것 또한 언젠가 본 드라마 주인공을 흉내낸 것이었으므로 그는 다시 큭큭 웃었다. 그리고 자기다운 게 뭔지 생각하다 자기답게 사는 게 지겨워졌다.
(95쪽) 이토록 좋은 일이 이토록 평범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의심스러웠다.
(100쪽) 그는 그 왼쪽 털 고무실과 오른쪽 전조등의 관계를 이해해보려고 했다.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오른쪽 신발도, 신발의 주인도, 어떤 다른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
차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어디라고 하기도 어려운, 어디와 어디 사이일 뿐인 한밤중의 도로. 일렁이는 나무와 속살거리는 풀벌레들. 그의 재킷을 입고 그의 이름을 발음하는 사람. 아무도 멈추지 않을 곳에서의 아무도 모르는 한 때.
->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의 주인공들과 같은 세상에 살지만 만나지 못하고, 발견되지 못하고, 섞이지 못한다. 짝잃은 털고무신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의 전조등으로 서로의 삶에 잠깐씩 출몰할 뿐.
(107쪽)
당장 해야 할 일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127쪽) 그럼 그들은 아낀 시간으로 무엇을 할까. 마트에 와서 물건을 담는 귀찮은 과정을 생략하고 오직 그 물건들이 주는 행복의 알맹이만을 누리고 있을까. 아니면 그 물건들을 사기 위해 자기처럼 또다른 누군가에게 시간을 팔고 있을까.
(133-4쪽) 자아실현 같은 건 모르겠지만 견딜 만한 일을 하고, 지글지글 보글보글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삶. 가끔은 나란히 누워서 햇볕을 쬘 사람이 있는 삶.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면서도 어두운 골목을 걸어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면 불안해졌다. ..
결석하지 않고 학교도 잘 다녔다. 법을 어긴 적도 없었다. 하루에 삼분의 일에서 이분의 일을 일터에서 성실히 보냈고 공과금도 기한 내에 냈다. 그럼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만큼이라도 산다고 만족해야 할까.
<팍스 아토미카>
(281쪽) 나는 잘 살고 있을까.
-> 이러한 질문 때문에 불안이 생기지만, 이러한 질문 덕에 이만큼이라도 사는 것일까..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쓴 작가 김기태는 단편집들을 배치하고, 제목을 붙이는 과정에서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어가 주는 기운이 다른 소설에도 구석구석 미치면 좋겠단 생각을 해서 제목을 그리 정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뒤죽박죽, 바글바글하고 있는 풍경이 연상됐으면 한다고 국제공항의 출입국장처럼. https://cine21.com/news/view/?mag_id=105493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에는 진주, 니콜라이 두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다. 작가는 그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들의 역사를 이백년 전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1848)에서부터 시작해서 유노윤호가 음악방송에서 최강창민의 생일축하(2011)를 해주는 이야기까지 빼곡한 ‘두 사람의 이야기’ 계보를 만들어준다. 나는 왠지 거기에서부터 뭉클해졌다. 두 사람이 어떤 코뮌으로 살아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평범한 듯, 특별하게 시작한 이야기에서 다정한 시선을 느꼈다. 내가 만들었던 코뮌도 그 뒤에 조합해서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겠단 생각을 해봤던 것 같다. 2011년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진주와 니콜라이의 ‘인터내셔널’은 해외는커녕 경기도 남부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마트 알바를 하고, 영주권 받기에 턱없이 모자란 20대 공장 노동자가 만드는 현실판 인터내셔널이다.
노을 진 방안에 나란히 누워 세상이 남 얘기 같은 순간. 그런 순간이면 예쁘고 멋있는 물건들이 없어도 괜찮고, 자아실현 같은 건 모르겠고, 견딜만한 일을 해도 좋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삶, 나란히 누워서 햇볕을 쬘 사람이 있으면 되는 삶으로도 괜찮은 삶. 비록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을지라도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하는 삶에 대한 두 사람의 이야기에 ‘기립하시오 당신도’라고 니콜라이가 진주에게 이모티콘을 보내듯 작가는 기발한 밈 응원을 보낸다.
무거운 노동가, 브레히트 소설의 한 구절을 유쾌하게 비틀어 보내는 방식 때문에 삶도 다시 그렇게 즐겁게 살아가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둘이 친하게 지내’라는 담임교사의 무심한 예언일지언정 엉뚱하게도 먼 훗날 ‘친한 사이’란 말로 자신들을 규정하면서 실현하는 부분까지 통쾌하고 다정하다.
담임교사의 말이 엉뚱한 예언/예고가 되어 진주와 니콜라이가 그런대로 살아가는 이야기가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라면, <전조등>은 이름조차 없으며, 주의해야할 일들이 적힌 긴 목록을 가지고, 우수한 학점, 스펙, 적절한 동아리 경험 등을 특기로 좋은 회사에 취업해 적당한 시기에 소개팅으로 결혼을 하고, 몇 번의 낙태 끝에 아기를 낳고 살아가는 평범한 생애주기 속의 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그린 단편 소설이다. ‘그는 어떤 것들은 예고될 수 없으며 호명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담대해졌다’(107)는 구절에서처럼 호명되기 전까지는 적당히 뭔가를 숨긴 채, 적당한 자기기만 속에서 말이다. ‘전조등이 깨진 날의 블랙박스와 털이 달린 고무신’이라는 질문만을 강렬하게 남긴 채, 담대하게 폴라로이드 사진 속 장면 같은 그럴 듯한 삶 속에서 매일 다시 들어갈 뿐이다. 주인공의 기만적 행동에 어의없다가도 ‘어떤 것들은 예고될 수 없고, 호명될 뿐이라며 담대해진다’는 구절에서는 무기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이 찬다. 그것 외에는 ‘이토록 좋은 일이 이토록 평범한 방식으로’(95) 끊김 없이 돌아가게 할 언어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김기태의 소설에서는 우리 삶의 피상성, 공허함에 질문하는 소설이란 생각도 했다. <보편 교양>을 읽으면 교사 곽이 ‘노인과 바다’의 한 구절 ‘인간은 파괴될질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머그컵의 구절을 읽으며 파괴는커녕 패배하지도 않은 자기 삶의 사치스러움을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전조등>의 주인공이 담대하게 매 삶의 계기들을 통과한 모습이 겹쳐진다. 다만 <보편 교양>은 교사 곽을 통해 남겨진 질문을 들고 조금 더 들어가는 것 같다. <자본론>을 좋아했던 은재도 곽이 생각하는 만큼 메타인지를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설득으로 옮길 수 있을 만큼의 진심과 순수로 다져진 학생은 아니었고, 곽도 <자본론>을 다 읽지도 않고 수업을 설계했던 것처럼 주변의 찬사만큼의 교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학생의 생기부, 교사 표창에 들어가는 문구에는 어느 정도의 과장이 있을 수 있기에) 그렇다고 진심이 없거나, 실력이 없는 것도 분명 아니지만 다쿠아즈 같이 자신을 파괴시키지 않으면서 패배시킬 수 있는 고급의 맛과 같은 피상적 관계와 교육 현실을 돌아보는 곽. 그럼에도 곽은 ‘나는 자본론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수업을 했다’(177)고 메타인지하고, 자본론의 서문부터 다시 시작할 계획을 세워 본다. 하지만 동시에 졸업사진을 찍자는 세 명의 학생들에게 성인 이후의 삶을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하게 될지 궁금하지만 실례라고 생각하며 묻지 않고 퇴근하는 관계성에는 다시 질문이 생기기도 했다.
강박증적으로 매일의 상황 속에서의 안전 불안을 겪는 <팍스 아토미카>의 ‘나’는 결국 예고되지 않은 비행기 착륙 사고를 겪는다. 그럼에도 모든 것 사이에서 ‘위태로운 우애’를 담아 말한다 ‘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299) 작가는 이 단편 소설을 꼭 맨 마지막에 넣고 싶었다는 인터뷰를 보았는데, 이제 나는 어디로 나아갈지 나의 이야기를 해보라는 질문을 받은 것만 같았다. <전조등>의 주인공이 보인 ‘담대함’이 다른 말로 자기 삶에 대한 ‘위태로운 우애’일 수도 있겠다는 해석도 덧붙이게 되었다.
어떤 결심도 아닌 말, ‘나는 활주로 위에 있다’란 말에 조급하게 뭔가를 결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작가가 발명한 기발한 응원법처럼 ‘기립하시오 당신도’와 같은 응원으로 누군가를 응원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소설, ‘때때로 삶이 형벌처럼 느껴질지라도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던’ 진주와 니콜라이의 ‘친한 사이’같은 우정과 사랑도 상상해보게 한다. 누군가의 무심한 예견에도 예상치 않게 응답할 수 있는 삶의 여유, 예고 없이 호명될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불안할지언정 내 삶에 대한 ‘위태로운 우애’를 잃지 않는 담대한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 소설이었다. 어떤 때는 파괴되고 패배할 수 있기에. 하지만 대체로는 파괴되지 않고 패배하지 않으려고 애쓸 수 있는 삶의 조건, 시좌를 인지하며. 그렇게 메타인지하는 정직한 태도가 평범한 내 삶 안의 모순을 느끼게 하고, 불행을 만드는 일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