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1 에세이 최종본
날마다 커져가는 장일호의 ‘눈사람’
-장일호의 『슬픔의 방문』(낮은산, 2022년)을 읽고
- 소설처럼 또는 소설과 다르게
장일호의 에세이 『슬픔의 방문』(2022년)을 읽고, 김애란의 소설 『달려라, 아비』(2005년)을 다시 읽었다. 『달려라, 아비』는 2000년대 등장한 신인 작가의 ‘시그니처’와 같은 작품집이다. 원룸, 편의점, 포스트잇…… 이전 세대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배경과 소품이 주요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소설 속에서 원룸, 편의점, 포스트잇을 주로 사용하는 인물은 어떤 사람들인가? 취준생, 알바생, 자취생 등등의 1인가구들이다. 원룸처럼 작은 주거공간에서 살고, 아무 때나 ‘떼었다 붙였다’할 수 있는 포스트잇처럼 비정규직 노동을 하며, 편의점 쇼핑으로 생필품을 구입하는 ‘소형’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김애란은 작은 사이즈의 살림을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그만의 위로의 기술을 보여준다. 지금 여기의 자신을 연민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가 새로운 부모를 상상한다. 프로이트가 가족로망스로 설명한 방식인데, 자신을 구원해줄 지체 높고 돈 많은 부모가 나타나리라는 상상이다. 이러한 상상은 현실의 부모에게 복수하는 방식이며, 이에 따른 죄책감으로 현실의 억울함을 감수하게 한다. 김애란의 가족로망스는 약간 다르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이해하기 위한 변명을 상상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전도 효과를 만들어낸다. 아버지는 자신에게 오는 길을 잃어버렸거나, 달리기를 오래 하고 있는 중이라고 상상함으로써,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사랑으로 전도시키고,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사실무근’으로 만들어버린다. 아버지는 명랑하게 달리기중이고, ‘나’와 어머니는 서로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씩씩하게 살아간다. 유머러스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장일호는 아버지의 자살을 김애란과 같은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자기와 같은 멋진 자식을 남겼으니, 아버지는 자기 할 일을 다 마쳤다는 생각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라고. 그러니 애석해할 일이 아니라고. 마치 소설처럼 장일호는 자신의 상처를 기원에서 삭제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 다음은 소설과 같지 않다. 일찍 남편을 잃고 남매를 홀로 키워야 하는 어머니는 소설처럼 유머러스하고 씩씩할 수 없었다. 어린 장일호는 어머니에게 ‘없는 아버지’를 데려오라고 생떼 쓰는 자식이었고, 어머니는 자식을 앞세우고 밀린 월급을 받으러 가서도 내내 허리를 굽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장일호의 『슬픔의 방문』은 김애란 소설의 프리퀄 또는 외전(外傳)이다. 허구의 주인공이 아닌 현실의 인물들은 어떻게 자기 연민 없이 성장하고 생존하는가?
- 읽는 일과 사랑하는 일
나의 엄마는 사남매의 둘째딸이다. 엄마와 엄마 형제들이 낳은 자녀는 나를 포함해서 아홉 명이다. 그중 전문대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아이는 셋뿐이었다. 정규직 역시 세 명뿐이며, 나머지 여섯 명은 불안정 비정규 노동을 전전한다. 1980~1990년대생인 우리는 대학 진학률 80%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나는 세 명에 속하고 나의 남동생은 여섯 명에 속한다. 가까이는 우리의 차이를 숙제처럼 끌어안고 살았다. 내가 만나는 세상의 접점이 넓어질수록 숙제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상업고등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과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의 가정환경은 극과 극이어서 때로 어지러웠다.
(『슬픔의 방문』, 68쪽)
장일호는 부단히 읽는 사람이다. 편모가정, 지하 월세방, 기초수급자라는 현실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글과 행간을 오가며 가난을 구조의 맥락 속에서 읽어내려 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고통을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가난과 고통을 ‘자원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손톱만큼의 운” 덕분에 사창가의 ‘아가씨’와 자신의 직업이 바뀌었을 뿐이고, 동생이 대학을 가지 않고 집안 생계를 책임진 덕분에 자신이 “내 앞가림만 하며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는 진술에서 장일호의 성숙함을 엿볼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역량과 기여도만큼 보상과 인정을 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는 세태와 달리, 장일호는 노력한 만큼 성과가 돌아오지 않는 가난의 생태계를 알고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뭔가를 하려 할 때 대단히 많은 벽에 부딪친다는 점은 가난이 가진 질긴 속성”(74쪽)이라는 것을 이해한 사람의 행보는 달랐다. 장일호는 가진 게 없어서 ‘없는 사람’이 돼버린 사람들의 자리를 자신의 글 속에 만들었다.
김애란의 소설에서는 현실의 중력을 거스르기 위해 ‘스카이콩콩’을 타고 공중부양하거나, 해변에서 불꽃놀이를 한다. 누군가의 부끄러움을 눈감아주기 위해 가로등이 잠깐 꺼졌다 켜지는 순간을 만들어내기도 하는데, 이런 동화적 상상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다. 장일호가 입시를 치르지 않는 ‘다른 고3’이 있다는 사실을 표나게 보여주려 하고,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비정규 노동의 틈새를 전전해 온 30대 중반의 남성은 ‘작은 성공’조차 쉽지 않아” 도박사이트에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버리지 않는 태도에서도 사랑이 느껴진다. 미워하는 일은 쉽다. 이해하지 않으려 눈을 감아버리면 된다. 그러나 사랑은 어렵다. 눈을 감아버리면 안 되고, 보게 된 것을 해석해야 하고, 그렇게 알게 된 것을 무시해버리면 안 된다. 여기서 장일호의 재능이 만들어졌다. 답답함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해와 사랑을 오가는 노동이 장일호에게 관점과 필력을 키워주었다.
- ‘선동적인’ 진정성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굉장한 재능 중 하나다. 꼭 그만큼 삶이 넓고 깊어진다. 싫어하는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 가면서 살고 싶다.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싫어하는 것들이 나를 침범해 올 때 숨거나 도망갈 수 있는 요새를 짓는 기분이 든다. (83~84쪽)
『슬픔의 방문』에는 장일호를 슬프게 했던 사건사고의 목록만큼이나 그가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볼 수 있다. 샤이니의 종현, 고양이 아니, 그의 반려인, 그리고 엄마. 장일호에게 엄마는 “‘가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하게 해준 사람이다. 어린 시절의 성폭력에 대해 “그러고도 다 살아”라는 체념의 태도를 딸에게 보여주는 무기력한 엄마이며, 동시에 기복신앙으로 개신교를 맹신하는 무지한 엄마이기도 하다. 최근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종교단체는 이익집단으로 등장했고,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현직 기자인 장일호에게 추종과 맹신으로 일관된 엄마의 교회생활은 못마땅할 따름이다. 장일호의 가족만이 아니라 이런 불화는 흔하다. 나의 가족이 추잡스런 정치싸움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은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관계를 파탄 낼 수 없기 때문에 대개는 그냥 입을 다문다.
2011년 최저 생계비 취재를 위해 한 달간 서울 달동네에 들어가 살게 된 장일호는 날마다 옆방 노부부의 찬송가를 들으며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세요?”라고 질문했다. 질문의 이면에는 이렇게 살기 어려운데, 감사할 일이 뭐가 있는가? 라는 당돌한 문제제기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장일호는 “교회에서는 내가 평생 들어 보지 못했던 예쁜 말만 해 줘”라는 할머니의 대답에 맥이 풀려버린다. 할머니와 엄마의 삶에는 교회가 아니었다면 견디기 힘들었을 “삶의 비참”이 있고, 대학을 나오고, 정규직 기자가 되고, ‘안온한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자신이 체감할 수 없는 팍팍함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물론 장일호는 할머니와 엄마와 다른 방식으로 “삶의 비참”을 견디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하지만, 엄마의 맹신을 무지로 치부해버렸던 이해에서는 한 발짝 나아가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이해하려 하고,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연쇄들은 한 사람의 성장을 가져오고, 성장의 기록은 장일호의 글을 신뢰하게 되는 설득력을 가져온다. 『슬픔의 방문』에서 느껴지는 그의 ‘정치적 올바름’이 익숙한 슬로건의 반복이 아니라 진정성 있게 다가오는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의 태도로 구체화되는 맥락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이해되고 설득력을 갖는 글을 쓰려면, 왜 그러한 글을 써야 했는지 그 맥락을 설명해줘야 한다. 대충 쓰고, 잘 이해되기를 바라면 안 된다. 이 당연한 이치를 나는 몰랐을까? 장일호의 글쓰기를 일별하며, 나는 그 동안 내가 건성으로 써왔음을 인정했다. 더 자세히 쓰는 것이 더 치열하게 쓰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장일호의 글이 갖는 ‘선동적인’ 매력이 발산된다. 그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에게 동조하게 되고, 그의 태도를 따라하고 싶어진다.
-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우리 사회에는 아이를 낳지 않으면 자녀 양육에 따르는 귀중한 경험의 ‘기회를 놓친다’는 경고 메시지가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인생이 제공하는 모든 경험을 전부 해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경험을 선택하고, 놓친 경험에는 크게 마음 쓰지 않고 넘길 수 있어야 한다.
(216~217쪽)
비교하고 알아보는 과정이 결국은 의료 자원을 낭비하고 정보를 독점하는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에 내 결정에 만족했다. 홀로 고요한 가운데 주변이 부산스러웠다. (233쪽)
비혼주의자였지만 함께 살고 싶은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임신과 출산을 고민하지만 ‘무자녀’를 선택한 장일호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스스로 그 근거를 찾아간다. “당위와 정상에 대한 압력을 거스르고 자기 의지로 살고 싶”다는 판단이 현재의 그에겐 가장 우선시 되는 바람이고, 이 바람에는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자기탐색을 거친 사람의 실제적인 손익계산이 들어있다. 이 계산은 쉽지 않다. 임신, 출산, 양육 비용 대 자기 일을 계속할 수 있을 때 기대되는 효용가치는 대차대조표를 만들기 힘든 영역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생애주기별로 권장되는 라이프스타일을 따라가게 된다. 장일호는 강박적으로 피임을 하면서도 임신이 기다려지기도 하고, 생리가 없어지면 당장 불안해지는 초조함 속에서 무엇이 최선일까 따져본다. 그리고 자신은 아이가 있는 삶을 “그렇게까지는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렇다면 이 조건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 중요한 경험을 선택하고, 놓친 경험을 아쉬워하지 않는 태도이며, 그러한 결정을 누군가에게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 해보는 경험이다.
유방암의 진단과 수술 이후 항암치료의 과정에 있어서도, 장일호는 관행처럼 여겨지는 의료쇼핑을 거부한다. 더 나은 병원, 의료진, 치료법을 비교하고 알아보는 과정이 의료 자원의 낭비이고, 이러한 정보를 독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혜택이 돌아가게 되는 분배의 방식에도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장일호의 선택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정치적’이다. 정상성과 규범이 가하는 압력이 폭력적인 시스템을 굴러가게 하는 동력이라는 것을 드러냄과 동시에 표준적인 선택에서 이탈함으로써 다른 시스템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이러한 전환은 한 사람의 자기 삶에 대한 숙고에서 비롯된다. 장일호는 김애란의 소설 속 문장을 빌어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쓰고 있다. 『슬픔의 방문』은 자기를 돌보고, 사랑하기 위해 부단히 읽고 쓰고 앎과 질문을 넓혀가는 사람의 성장기를 보여준다. 자기 구원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그의 행보는 가족과 이웃을 통과해 눈사람처럼 커져 나에게까지 도달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이 읽을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잘 쓸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똑똑할까? 어떻게 이렇게 정의로울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는 어떻게 이걸 가능하게 했을까? 게다가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니. 나는 그 비밀을 추적하고 싶었다. 가난, 불평등, 부당함, 신념, 열정, 정의로움 같은 말들보다 나에게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던 것은 “내가 가장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결국 나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문장이다. 장일호는 자기 욕망을 들여다보고, 자기 삶을 선택하고 꾸려가는 사람이다. 차곡차곡 자신이 좋아하는 것의 목록을 늘려가고 있다. 다들 좋다고 하지만,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들은 솎아낸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비추어보게 된다. 애먼 데 돈과 시간을 쏟고 안달복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진다. 날마다 커져가는 장일호의 눈사람을 떠올리며, 부러워만 하지 말고 나도 내 눈사람을 만들고 싶다.
올봄 베란다 텃밭에 모종을 심었고, 생애 최초 피아노 교습을 시작했다. 몇 번의 비가 오고 모종과 잡초는 분간할 수 없이 쑥쑥 자라고 있다. 피아노 건반 앞에서 허둥대는 것은 손가락인데, 어깨와 장단지가 욱신거린다. 모종을 심고 3주가 지나는 동안 상추를 두 번 솎아먹었고, 가지, 고추, 방울토마토, 깻잎은 그대로이다. ‘도레도레’를 뚱땅거리는 나에게 선생님은 “피아노는 시간의 예술”이라고 말해줬다. 하루는 24시간, 1시간은 60분이라고 알려주는 시계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 감각이 나에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나에게 맞춤한 이해와 사랑과 질문과 앎의 연쇄를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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