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탐구세미나] 7회차 질문 올려주세요

요요
2024-04-26 16:45
86

일주일 동안 일산 아버지 집에 있다가 오늘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집에 와서 전화기를 확인하니 세바람님이 지난 시간 후기가 아직 안올라온 상황을 걱정하는 톡을 보냈습니다. 

비슷한 시간대에 세미나 톡방에 인디언샘이 "불교용어 미치겠네요"라는 메시지를 올린 걸 확인합니다.

두 메시지 모두 내일 세미나와 관련된 사안입니다.(어쩌지? 잠시 초조한 기분에 휩싸입니다.^^)

앗, 인디언샘의 톡에 송지샘이 "저두요, 흑흑"이라는 답을 올립니다. 

이럴 수가! '불교와 죽음'을 읽기 전에는 '힌두교와 죽음'보다 쉽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음..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걸 해야겠다 생각하고 텍스트에 등장하는 빨리어를 뽑고, 한자어 대조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한자어로 된 불교용어도 낯설겠지만, 그래도 빨리어보다는 접근하기 쉽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세바람님으로부터도 "오늘 야근이어서 석공님께 후기 부탁드렸다"는 문자가 왔습니다.(고맙습니다!) 

하하하 이렇게 톡방에서부터 내일 세미나를 준비하는 기운이 무르익고 있네요.

 

샘들, 드디어 내일 이 책을 마칩니다. 6장과 7장에 대한 질문 올려주셔요~

 

*헷갈리실까봐 알려드려요. 힌두교의 경전인 <베다> <우파니샤드> 등이 산스크리트어로 암송되어 전해졌고, 초기불교의 경전인 <니까야>는 빨리어로 암송되어 전해졌기 때문에 '불교와 죽음'에는 빨리어로 된 개념어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그러나 후대 대승불교의 경전이나 논서의 언어는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불교 개념어들은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가 혼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령 우리가 읽는 텍스트에서도 그런 예가 있는데요. 담마는 빨리어, 다르마는 산스크리트어고, 깜마는 빨리어, 까르마는 산스크리트어입니다. 닙바나/ 니르바나(열반), 칸다/ 스칸다(오온) 등도 그러합니다.

 

댓글 11
  • 2024-04-26 22:04

    아 저는 내일 일찍 나가는 관계로 지금 올립니다.
    마지막은 질문이든 메모든 해야겠다는 마음으로..일주일을 보냈습니다. ㅎㅎ

    이 책을 읽는 내내 참 재미없고 난해하고 그랬는데, 마지막에 이렇게 반전 매력을 드러낼 줄 몰랐네요. <불교와 죽음> 끝부분과 <결론> 부분은 정말 좋았습니다. 읽는 내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달까요. ^^ <결론>을 읽는 동안 양자역학이 계속 떠올랐어요. (양자역학을 아주 쪼금 배워놓고 너무 떠들어대서 첨 듣는 분들은 전공할 줄 알겠어요. ㅎㅎ) 저는 정보이론이 아주 마음에 드는데요. 예전에 감이당에서 곰샘이 자신이 한 말이 우주에 떠다니니 아무 말이나 막 하지 말란 취지로 말씀을 하셨던 거 같아요. 그땐 그게 정말일까 반신반의했지만 이젠 정말 그럴 거 같아요. 양자역학과 정보이론을 떠오르게 한 문구들은요~

    334쪽) 이미 죽은 사람과 감각 및 개념작용의 소멸을 획득한 비구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한편으로 물리적, 문자적, 정신적 기능과 다른 한편으로 ‘아유(활력)’ 및 ‘우수마(열기) 사이에 존재한다. 후자가 존속할 때 전자는 소멸된다. 이는 마치 별 자체가 오래전에 폭발하여 사라져 버렸는데도 별빛은 우주여행을 계속하여 우리의 망막에 전해져서 별이 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과 같다.

    358~359쪽) 첫째는 당신의 손을 잡고 그것을 바라봄으로써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우주의 시간 규모에서) 멀지 않은 과거에, 그 손 안의 대부분의 원자들은 어떤 멀리 있는 별의 심층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당신은 글자 그대로 별의 자식, 우주의 자식이다.
    그러나 그러한 원소들은 붕괴하는 별들의 극도의 압축과 폭발이 없이는 퍼뜨려질 수 없다. 원소들은 그러한 방식으로 융합되고 그러고 나서 흩어져서 새로운 에너지의 구조를 위해 쓸모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별들의 죽음(더 무거운 원소들을 형성하기 위한 압축, 새로운 에너지 구조를 위해 그러한 원소들을 흩뿌리는 폭발) 없이는, 살아 있는 유기체도 구성될 수 없고, 행성도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373쪽) 나는 내 존재의 45년 동안 나를 구성하는 모든 원자, 모든 분자들이 그 위치를 바꾸거나 춤추며 사라져서 다른 존재의 일부가 되었다고 가정한다. 새로운 분자들이 풀과 동물의 몸으로부터 잠시 동안 나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햇빛 한 줄기 속의 날벌레들처럼 가볍고 공기같은 이러한 맴돌이 속에서 나의 기억들이 지속된다.

    379쪽) 사지, 해면질의 뇌, 끝없이 일하는 심장
    어떤 부분도 꼭 같은 부분을 유지하지 않는다.
    시내처럼, 그것들은 머물렀다 조용히 떠난다.

    380쪽) 춤의 주님은 제일가는 춤꾼이다. 그분은 동시에 완전히 고요하며 영속적으로 움직인다. 그는 춤의 한가운데 있으며, 동시에 춤의 모든 부분에서 활동한다. ... 모든 창조물은 영원한 기쁨 안에서 춤춘다. (이 부분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도 생각나게 하네요.)

    그리고 다음 글은 제가 2022년 양자역학에 심취해 있을 때 주역 계사전과 양자역학을 제 마음대로 착종(錯綜)시킨 내용입니다. (4학기 렉쳐 발표안)

    剛柔相摩, 八卦相蕩 (강유상마, 팔괘상탕 : 강한것과 부드러운 것이 서로 마찰하고, 팔괘가 서로 그네를 타듯 오락하락한다. <상전1장>)
    剛柔相推而生變化 (강유상추이생변화 : 강유가 서로 밀어 변화가 생긴다. <상전2장>)
    나는 양자역학을 처음 접하면서 원자핵 주위에 전자가 돌고 있다는 그 모형에 마음을 빼앗겼다. 러더퍼드와 보어의 모형은 태양을 중심으로 행성들이 돌고 있는 태양계와 유사해 보인다. 이 우주의 기초를 이루는 원자들의 움직임이 태양계와 비슷하다는 그것이 우주의 일자(一者)법칙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이 세상은 모두 원자로 되어있다고 한다. (리처드 파인만) 이 세상을 채우고 있는 원자들의 밀고 당김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그렇게 그네처럼 왔다 갔다 하면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일어난다. 원자의 움직임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원자는 양전하를 띤 양성자핵과 음전하를 띠고 있는 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들은 서로 얽혀서 공간에 늘어서 있다. 전자들 사이에는 전자기력이 있어 서로 밀어내기도 하고 당기기도 한다. 각 원자는 에너지 준위에 따라 에너지가 흡수·방출되며 그 궤도가 달라진다. 원자를 이루는 원소들의 움직임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걸 설명하고 싶지만 내 능력 밖의 일임을 자료를 찾으면 찾을수록 절감하게 됐다.^^::)
    원자는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를 선호하는데 그것은 전자가 바닥 상태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가장 안정된 상태이다. 아마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려고 원자들은 서로 밀고 당기면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원자의 에너지 준위에 따른 이러한 변화가 강하고 단단한 것들(剛)과 부드럽고 연약한 것들(柔) 사이의 밀고 당김(相推)에서 변화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고 느껴졌다. 원자들의 만남인 분자들은 서로 마찰(相摩)하며 그네 타듯 위아래로 들끓는 모습(相蕩)이 이 우주의 현상들이라고 생각한다.

    一陰一陽之謂道 (일음일양지위도 : 한번은 음이 되고 한번은 양이 되는 끊임없는 변화를 도라 한다. <상전5장>)
    一闔一闢謂之變 往來不窮謂之通 (일합일벽위지변 왕래불궁위지통 : 열렸다가 닫혔다가 하는 것을 변화라 한다. 그것이 왔다갔다 하면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을 통이라 한다. <상전11장>)
    원자들은 서로 밀고 당김을 하는 사이에 서로를 관측한다. 각자의 상태는 모두 똑같을 수 없다. (파울리의 배타원리) 각자 상대의 상태를 관측하여 각자의 자리를 찾아가는 흐름의 과정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때 그 영향을 교란이라고 하고, 파동의 결이 어긋났다고도 한다. 그런 교란을 ‘결어긋남’(Decoherence:안톤 차일링거)이라 부른다.
    양자역학이 처음 대두될 때 물질이 입자일까, 파동일까의 문제는 물리학자들을 혼란 시키는 문제였다. 물질은 입자·파동 둘 다라고 한다. 흐름 속에서 파동으로 흐르고 있다가 측정되면 결이 어긋나 입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결어긋남은 무엇을 뜻할까?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물질은 서로를 끊임없이 측정하고 그 측정은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측정(관측)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다. 이 우주 전체라는 말이다.
    이는 시점의 문제이기도 하다. 돌고 있는 원자의 모형은 우리가 밖에서 이 둘을 보고 있는 시점이다. 그러나 내가 양전하 위에 서서 보고 있다면 내 주위를 음전하가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는 관측자가 객관적으로 관측 대상을 관찰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 둘은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무수한 원자들의 운동은 추탕(推蕩)하며 일어나고, 현상들이 열렸다 닫혔다 하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데이비드 봄) 그렇게 끊임없는 변화가 생성되면서 모든 것은 통(通)하는 것이다. 그 통함은 우리가 모두 어딘가에는 이어져 있다는 것은 아닐까. 결국 끊임없는 변화로 통하고 그 변통(變通)이 ‘도’(道)라 여겨진다. 이것이 결어긋남이 말해주는 진실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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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저는 문탁샘에게 강의를 들은 카이에 소바주 시리즈를 좋아하는데요. 그중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다음 문장입니다.

    “이런 ‘대칭성의 윤리’나 그를 통해 발생하는 조심성이라는 감각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에 어떤 형태로든 ‘전체성의 사고’가 작동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지구상에서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거나, 인간의 사고는 가장 가치 있고 틀림없다는 식의 오만한 생각이 어느 틈에 싹틀 정도로, 인간은 불완전한 생물이기 때문이죠. 모든 존재가 반짝이는 가느다란 실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스피리트 세계의 사고방식이었는데, 그곳에서는 분명히 신화를 통해 그런 ‘전체성’에 대한 감각이 구석구석까지 살아 있었습니다.” (『신의발명』/나카자와 신이치/동아시아/204쪽)

    저는 반짝이는 가느다란 실이 양자의 움직임의 춤과 같다고 여겨집니다. 이 지구상의 존재들만 그렇게 연결된 줄 생각했는데, 아주 오래오래 전 별의 폭발로 우리가 생겨났다고 하니 이미 폭발하여 죽어버린 별과도 연결되어 있는 것이네요. 정말 전 우주는 반짝이는 가느다란 실로 연결되어 있고 그 실에는 정보가 들어 있고, 나의 말은 정말 우주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별의 죽음으로 우리가 생겨나듯, 우리의 죽음으로 실들의 연결이 이어지니 이 우주의 헤프닝에 우주의 일원으로서 기꺼이 참여해야겠단 생각도 이 책을 다 읽고 들었습니다.

  • 2024-04-27 00:52

    불교가 마지막 장인데.. 난이도로 장을 배치한 게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

    불교에서는 모든 실체적인 것을 부정하고 '연속성'만을 강조하는 거 같습니다.
    P313 '결국 불교는 실체가 없는 직접적이고 즉자적인 연속성을 긍정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선택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하는데요,
    아트만과 같은 불멸의 영혼은 부정하고 '연속성'을 강조하는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힌두교에서 얘기하는 불멸의 영혼은 있되 매번 새 몸(지바)으로 태어나는 것과
    불교에서 의식의 전이(? p309~310)을 통해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이 그닥 차이가 없어 보이거든요.
    (불교의 '무아' 가 아트만도 부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무아'라고 하면 '에고'를 없애는 것 정도로 막연히 알았었네요. )

    P323~327 에서 불교의 죽음에 대한 명상이 일본에서 어떻게 강화 되었는지를 서술합니다.
    카미카제, 할복까지 언급되어 있는데요, 이 부분을 보면 삶에 대한 무상함의 인식이 죽음에 대한 찬양으로까지 너무 나간거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죽음에 대한 미학적 접근이 일본 선종만의 특징인지, 아니면 불교 전반의 특성인지 궁금해졌습니다.

  • 2024-04-27 09:49

    불교의 죽음 편은, 저자의 해석대로 불교의 사상들을 이해하는 것이 더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먼저 고미숙샘의 숫다니파타 강의를 찾아서 듣고 책을 읽어보니 어렴풋하게나마 이해를 할 것 같았습니다. 불교를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이 계속 생겨납니다.

    1. 329쪽
    "...변화에도 끝이 있다. ...불교의 목적은 담마, 즉 적절한 안내 혹은 길을 제공하는데 있다. 이 담마는 카르마의 특정한 현현이 변화의 흐름 안에서 행동할 수 있게 한다. 그럼으로써 그 카르마의 특정 현현을 변화가 끝나는 상태로 데리고 가려는 것이다."
    330쪽
    "비구들이여, 사원소 즉 흙과 물과 불과 공기 중의 어디에도 없는 그런 상태가 존재한다. (중략)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그 둘다 없고 달과 태양도 없는 그런 곳에 존재하는 상태가 있다....나는 어떤 재생도 존재하지 않음을 선언한다. 생명의 전이란 없다.지속이란 없다. 떨어짐도 없고 일어남도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고정된 무엇이 아니다. 그렇다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것에도 기초하지 않는다. 그것은 참으로 둑카의 소멸일 뿐이다"
    이런 상태가 바로 닙바나(니르바다) 이다."빈나나의 소멸과 탄하의 파괴를 통해 자유를 획득한 자에게 마음의 자유는 등불이 꺼지는 것과 같다"
    '비상태의 상태, 어떤 종류의 상호작용도 없는 상태'

    이 구절을 보면서 그러면 니르바나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단지 둑카의 소멸? ( 내가 고통의 끝을 보지 못해 단지라는 말이 서슴치 않게 나오는구나도 느낍니다. 그럼에도 궁금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는' 이 깨달음은 어떤 경지에 가야 이룰 수 있는 깨달음일까? 그래서 저자는 '사실 어는 누구도 이런 니르바나의 상태에 '들어갈'수는 없다"고 했을까요?

    2. 349쪽
    "그러므로 불교도에 있어 죽음은 오직 모든 것이 덧없다고 하는 인식이 실제적이고 절대적이 될때 끝이 나는 그런 하나의 과도기 혹은 전이로 간주될 따름이다.이 때 테라바다 불교도와 미하야나불교도는 무엇이 고인의 덧없는 삶의 과정으로 하여금 죽음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지 그 점에서는 크게 다르다. 그러나 양자 모두 [모든 구성요소는 무상하고, 형상을 가진 모든 것에는 소멸이 있으며, 평정의 상태야말로 행복이다] 라는 사실에 동의한다.(중략) 350쪽 불교는 힌두 종교의 전통이 은유의 방식으로 전개된 것임을 보여 준다.(중략)붓다는 [본생담]이야기에서 희생 제의의 효험을 비웃는다. 그 대신 희생 제의가 지녓던 사회적 기능은 불교에서 다나로 탈바꿈하여 등장한다.(중략) 원래는 희생이라는 범주를 통해 죽음의 의미와 의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고대적 설명 체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제 불교에 이르러 희생의 범주는 쇠퇴하고 말았다"

    -테라바다 불교도와 미하야나불교도는 무엇이 고인의 덧없는 삶의 과정으로 하여금 죽음을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지 그 점에서는 크게 다르다. -뭐가 다른지 궁금해집니다.(책에 나와 있는데 기억이 안나는 것일까요?^^)

    3.372쪽
    "생명에게, 생명을 위한 양보하는 생명의 '교환방식'이라는 토대가 아니라면 우리는 전혀 살아갈 수 없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죽음없이는 삶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종교와 과학 모두의 통찰이 생겨나고, 차례로 죽음에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당신이 죽음을 가지는 곳에서 당신은 생명의 가능성을 가진다"

    381쪽 ~382쪽
    " 우리는 희생이라는 개념 혹은 사실을 위기의 순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하느님이 금지한다. 우리는 죽음과 그 필연성에 대한 진리가 죽음의 때를 온화하게 만들기 위한 주장으로도 제시될 수 있다고 가정해서도 안된다. 죽음은 죽인다. 그리고 슬픔은 그것을 안다.(중략)우리는 어떤 다른 조건으로도 생명을 얻고 살아갈 수 없으며, 죽음 없이는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감사하면서 죽음을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타자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주장할 수 있다.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것은 우주의 사건의 지평선 위의 가장 먼 신호로부터 엔트로피와 죽음에 굴복하는 가장 가까운 사랑하는 자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존재하는 조건이다. 죽음이라는 필요조건을 의식적으로 구하고, 그것을 희생이라고, 곧 생명이 가능해지고 지켜질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인간의 고통이고 특권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희생과 우정을 주제로 "죽음에 대한 종교적 관점과 세속적 관점이 중요한 점에서 일치한다"는 점을 논한다고 했는데 결론 장은 이 주제에 대한 저자의 답인것 같네요. 저는 아직 어떤 점에서 일치하는지 정리가 될듯 말, 마지막 세미나를 하면서 정리가 될까요? 샘들은 어떻게 정리하셨는지요?

  • 2024-04-27 09:57

    저자가 서론에서 밝힌 종교의 죽음 탐구 의미를 결론에서 정리하고 있네요.
    어제 김영샘 강의에서 에고의 죽음 뒤에 있는 불멸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납니다.
    내가 어떻게 세상과, 우주와 하나가 될 것인지는 여전히 숙제입니다만...
    좀 더 큰 시각으로 삶과 죽음을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명을 내버리면서 총체적인 세계를 획득하는 인간의 능력이다. 그것은 곧 또다른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양도하고 또 다른 부분을 위해 자신의 부분을 양도할 줄 아는 인간의 인식능력이다.... 종교가 죽음의 본질과 의미를 탐구해 왔던 가장 오래된 범주가 바로 이런 ‘희생’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삶을 위해 현세의 삶을 버린다는 의미에서의 단순한 삶의 양도가 아니다. 그 희생은 오히려 삶의 가능성을 실현가능하게 만드는 ‘삶을 위한 삶의 양도’이다. ... 종교는 희생이라는 주제를 통해 무질서와 죽음의 본질을 탐구해왔던 것이다.(84)

    죽음은 죽인다. 그리고 슬픔은 그것을 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희생의 이러한 의미와 이러한 실천을 스스로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시대와 모든 문화에서 인류의 진보이며 기적이다. 우리 자신의 경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산 제사로 삼음으로써 그것을 특별하고 뚜렷하게 만들 수 있다... 죽음이라는 필요조건을 의식적으로 구하고, 그것을 희생이라고, 곧 생명이 가능해지고 지켜질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인간의 고통인 동시에 인간의 특권이다.(382)

  • 2024-04-27 09:59

    *363쪽, ‘아이들아, 침팬지를 보렴.....우리가 갈라져나온 것이 기쁘구나. 우리가 계속 버티고 있었다면...’

    →죽음에 대해서 생각할 때, ‘계속 버티고 있었다면’ 이 문구가 자꾸 생각납니다. 발생과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유전 정보에서의 근소한 돌연변이들은 세대들의 계승 속에서 나타나므로 진화 없이는 어떤 생명 발생도 있을 수 없다는 필자의 말입니다. 생명이 계속 발생하려면 죽음은 필연적이란 말로 나 이전에 계속된 죽음이 없었다면 나도 있을 수 없다는 뜻일 겁니다. 내가 계속 버티고 있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382쪽, ‘죽음이라는 필요조건을 의식적으로 구하고, 그것을 희생이라고, 곧 생명이 가능해지고 지켜질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라고 단언하는 것은 인간의 고통인 동시에 인간의 특권이다’ 385쪽, ‘그 모든 것은 희생의 더 깊은 목적과 결말이며 죽음 이외의 조건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전체 우주의 가치와 진가를 확인하고, 죽음이 새로운 생명의 기회와 새로운 신기원임을 단언한다. 그러한 까닭에 우리는 우주가 우리가 가진 유일한 것인 양 우주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버려야 한다.’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고통인 동시에 특권’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우주를 사랑해야하며 동시에 기꺼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너무 가슴을 먹먹하게 합니다.

    *387쪽 인용문은 카를로 카레토(카톨릭 신부, 이탈리아 작가)의 말이며, 388쪽 인용문은 드 샤르댕(카톨릭 신부, 프랑스 관념주의 철학자)의 말입니다. 여기에 더해 존 바우커(영국 성공회 신부, 종교학자)는 387쪽에서 ‘우리는 우주를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주는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우리의 사멸할 몸을 근거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도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해 놓으니 참 허탈하다고 할까요... 책 전체의 내용들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살짝 고민스럽습니다. 주체를 우주에서 별안간 하느님으로 이동하니 어리둥절합니다. 지난 시간에 문탁샘께서 ‘바가와드 기타 강의’의 작가의 시선이 너무 비판적이어서 허무하다고 했는데, 이 책의 저자는 그 반대입니다. 존 바우커는 참 믿음이 좋은 분이었나 봅니다...

  • 2024-04-27 11:02

    1. 나는 이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늘 하던대로 메모를 해가면서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그만두었다. 둑카로부터 시작해서,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를 빠르게 언급하고, 다음에는 오온과 오온의 해체를 이야기하고, 그렇다고 해체가 절멸은 아니라고, 부처님은 결코 단멸론을 지지한 적은 없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상주론과 단멸론 사이의 중도로서 십이연기설을 길~~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뒷부분에선 엔트로피 법칙 너머 궁극의 니르바나꺼정.
    불교의 죽음을 알기 위해서는 불교의 거의 모든 개념과 논쟁의 역사를 알아야 할 것 같은 이 기분... 그런데 그건 불가능하지 않나? 어떤 점에서는 그 하나 하나를 다 알지 않더라도 스토리텔링 속에서 불교에서의 죽음, 즉 오온의 해체와 카르마의 지속을 설명하는 방식이 신선하기도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고 내가 이것을 적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2. 윤회를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윤회는 늘 뜨거운 감자같다. (오죽하면 부처님이 존재론과 관련된 형이상학적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으셨을까)언젠가 내가 읽었던 책에서도 윤회는 실천적 맥락에서 요청된 것일 뿐 (선업을 쌓아라, 착하게 살아라~~)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논의를 피할 수 있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이 문제에 대한 개인적 진전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생명과 지속성, 그리고 윤회의 문제. 난 불교의 지혜가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그런 것일텐데) 늘 너무 어렵거나(개념) 너무 쉽거나(법문), 이렇게 전달되고 있다는 인상이 있다. 동양고전도 마찬가지겠지만. 서양철학과의 횡단이 필요한 이유일수도. “죽음, 지속, 윤회, 생명”이라는 주제로 일단 베르그송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요요님께 질문 - ‘마라나삿띠(mindfulness of death)’ 가 불교경전에 그리고 불자들의 실천에 실제로 많은가요, 그리고 32단계로 이루어졌다는 ‘mindfulness of the body’는 우리가 아는 것인가요? 아니면 무엇인가요? (p321~323)

    4. 일본의 선불교와 무사도를 ‘죽음의 미학’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인도 여성의 순장처럼 일본 무사의 할복 혹은 순장도 철학적이거나 미학적인게 아니라 정치적인 거 아닌가?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으로 보인다. (p324)

    5. 결론이, 나에게는 허무했다.

    저자는 서론에서 종교는, 흔히 말해지듯 죽음의 공포에 대한 대응(보상)으로 생긴 게 아니고, 오히려 종교의 본질은 희생과 우정이라고 말했다. 나는 이 사이에 엄청난 논리적 비약이 있다고 느꼈다.
    결론에 와서 저자는 종교적 탐구와 과학적 탐구가 수렴한다고 말하면서 희생을 “생명에게, 생명을 위해 양보하는 생명의 ‘교환방식’”(p372)이라고 비종교적으로 정의하는 것 같다. 음..흠..
    나에게 희생은 당연히 원시종교의 희생제의를 떠올리는 것이다. 기독교가 예수를 인간전체의 보편적 희생으로서 바치면서 예수를 통해 대속되었다는 것, 힌두교의 많은 민중들이 여전히 희생제의(제사)를 통해 죽음과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 이 정도는 종교와 희생이라는 주제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슬람도 그런가? 불교도 그런가? 난 아닌 것 같다. 그러다가 갑자기 결론에서 과학을 끌어오면서 희생의 개념을 너무 확장하는 것 아닌가? 난 좀 맥이 빠지는 느낌이다.

  • 2024-04-27 11:49

    '불교와 죽음' 파트도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더군요 (여느때처럼 머리나 마음으로 읽은게 아니라 눈으로만 읽었습니다ㅠ)
    죽음에 대해 여러가지로 관심이 생겨 시작한 세미나인데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죽음과 점점 멀어지는 느낌...
    이렇게 죽음을 어렵게 알아가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몰라서 올리는 질문보다(뭘 좀 알아야 질문이라는게 생기는 거니) 질문을 위한 질문을 고민하며 문탁 홈페이지를 들어왔다가
    서해님의 <좋은 시체가 되고 싶어>란 글을 발견했습니다.
    그동안 읽은 책들보다 마음에 와 닿고, 공감이 가고, 죽음에 대해 좀 더 생각할 거리를 줘서 잠시나마 마음의 긴장이 풀렸습니다. 서해님 감사~
    오늘 오전에 요가를 잠깐 하는 동안 불교에서 나오는 고행, 무상, 니르바나에 대한 생각이 스쳤는데,
    얄팍한 제 생각에 일반인이 과연 가능한 경지인가... 현실적으로 나 혼자만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불가한 걸 가르치고 배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질문을 안할 수는 없으니^^;
    p365~ 종교와 열역학 법칙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엔트로피와 네겐트로피를 우리 삶과 어떻게 연관지어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2024-04-27 12:32

    1. 불교와 죽음편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무아임에도 불구하고 연속성이 어떻게 담보될 수 있는가라는, 여전히 뜨거운 쟁점에 대해 잘 정리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니까야>를 인용한 부분에 비해 <청정도론>에 기초해서 설명한 부분들은 복잡하고 어려웠습니다.^^

    2. 불교와 죽음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저는 일본불교와 관련한 부분에서는 헉!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무사도와 죽음의 미학, 그리고 가미카제까지. 이것을 선종과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게 타당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3. 그리고 결론에서는 죽음과 희생이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이슬람과 불교에 대해서는 건너뛰고 넘어간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이 문제는 역시 우리 세미나에서 이야기해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2024-04-27 12:37

    불교와 죽음을 저자가 설명한 순서에 따라 제목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세미나 시간에 간단하게 개념 중심으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1. 불교의 역사
    - 테라바다(상좌부) 불교
    - 마하야나(대승) 불교

    2. 붓다의 깨달음
    - 고행을 버리고 선정(jhana)으로 깨달음을 얻음
    - 초전법륜: 중도와 사성제

    3. 붓다의 가르침
    - 제행무상
    - 제법무아
    - 적정열반
    * 아트만을 안다고 해서 둑카가 사라지지 않는다.

    4. 인간이란 오온의 결합체다
    - 오온이란? 색, 수, 상, 행, 식
    - nama-rupa(名色)
    - 푸드갈라 혹은 푸갈라
    - 불교의 세계: 욕계, 색계, 무색계

    5. 괴로움을 만드는 것은 색이 아니라 갈애와 취착이다
    - 무명-행-식-명색-육입-촉-수-애(tanha)-취(upadana)-유-생-노사

    6. 죽음은 오온의 해체
    - 단멸론
    - 상주론
    - 붓다는 단멸론도 상주론도 아닌 중도를 제시. 중도는 연기다.
    - 불교는 까르마-삼사라에 대해 인도철학과는 다른 이론을 제시했다. 까르마를 멈추는 것은 중도의 수행=팔정도

    7. 아트만이 없다면(무아라면) 어떻게 결과의 연속성이 담보되는가?
    - 단일하고 지속적인 경험의 주체가 없더라도 연속성은 가능하다는 것이 연기의 원리
    - ‘나’는 개념적 명칭이며 호칭에 불과하다.

    8. 연속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 vinnana(識)
    - <청정도론>에서는 재생연결식(patisandhi-vinnana)-바왕가(bhavanga)의 흐름으로 설명
    - ‘독자부’는 푸갈라라는 윤회의 주체로 설명
    - 유식학에서는 알라야식(alaya-vinnana)으로 설명

    9. 열반은 번뇌의 소멸
    - 유여열반
    - 무여열반
    - 멸진정에 든 사람은 호흡은 멈추지만 죽은 사람과 달리 생명이 유지되고 체온이 있다.

    10. 테라바다불교의 죽음에 대한 명상
    - <청정도론>의 죽음에 대한 명상
    - 몸에 대한 마음챙김(32가지, 머리털, 몸털, 손발톱, 이빨, 살갗, 살, 힘줄, 뼈, 골수, 콩팥, 염통, 간, 근막, 지라, 허파, 창자, 장간막, 위속의 음식, 똥, 뇌, 담즙, 가래, 고름, 피, 땀, 굳기름, 눈물, 피부의 기름기, 침, 콧물, 관절활액, 오줌)), 부정관(10가지, 부푼것, 검푸른 것, 문드러진 것, 끊어진 것, 뜯어먹힌 것, 흩어져 있는 것, 난도질당하여 뿔뿔이 흩어진 것, 피가 흐르는 것, 벌레가 버글거리는 것, 해골이 된 것)

    11. 대승불교의 죽음
    - 보살은 자비심으로 무여열반에 들지 않고 재생을 계속하는 존재
    - 아미타불 신앙의 경우 박티를 요청한다.(염불)
    - <티벳사자의 서>, 사자의 영혼을 돕는 기존의 전통과 결합

  • 2024-04-27 12:41

    P. 313, 10
    요컨대 불교도들은 지바를 지지하지 않았으며, 아트만의 지지는 더더욱 문제가 되지 않았다.

    불교도들이 지바와 아트만을 지지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부르는 영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무엇이라 불렀나요 ?

  • 2024-04-27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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