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형 약사의 양생법
P형의 일상
요즘 유행하는 MBTI 유형에는 판단형(J)인지 인식형(P)인지를 구분하는 항목이 있다.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잡아 그에 맞는 계획을 세우는 유형이 판단형, J(judging)이다. 반면 인식형, P(perceiving)는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융통성을 살리는 것을 좋아한다. 이 중 어떤 양식을 더 선호하느냐에 따라 J형 또는 P형으로 구분하게 된다. 간단히 계획성의 유무로 말하기도 한다. 이 중 무엇이 좋고 나쁘고는 없다. 보통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 두 특징이 어느 정도 섞여 있을 것이다. 나는 P형 특징이 많이 우세한 편이다. 나의 일상을 돌아보니 P형 특징 중 어떤 지점은 양생에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정해져 있는 게 답답하고 그 룰을 지키는 데서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다. 뭐든 내켜야 하는 습성이 강하다. P형은 최대한 정보를 모아 인식한 뒤 행동하려 하기 때문에 미리 계획하지 않는 편이다. 딱! 나다! 남들 눈에는 게을러 보일 수 있지만 솔직히 그렇지는 않다. 어찌 보면 더 완벽하게 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만족할 때까지 정보를 모으며 일을 미루다 보니 시간에 쫓기게 될 때가 많다. 그렇게 되면 일이 즐겁지 않고 스트레스풀해진다. 문제는 한꺼번에 에너지를 몰아서 써야 하기 때문에 과로하기 쉽고 건강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젊었을 때는 어찌어찌 넘어갔지만, 중년의 나이에는 이런 형태의 일상은 바로 몸에 타격을 준다. 최근 바빠지면서 지병인 천식이 잘 조절되지 않았다. 기침하면서 밤중에 일어나기 일쑤였다. 면역력이 약해져서 기관지에 세균성 염증이 생긴 것이다. 할 수 없이 항생제 처방을 받아서 복용했다. 하지만 항생제는 근본적인 치유법이 아니다. 몸의 면역력을 올리고 컨디션을 좋게 할 운동이 내 일상에 더 필요하다. 그리고 잘 쉬어야 한다. 이 사실을 약사인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상담 온 사람들에게 항상 강조하던 말들이 아닌가. 언행일치가 안 되는 내 일상을 돌아보면 마음에 찔리고 쑥스럽기만 하다. 일하는 방식에도, 일상생활에도 조금이라도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일상에 개입하기
공동체에서 일 년에 한 번 사주 명리를 가르치고 있다. 강좌에서 나는 스스로 자기 사주를 해석하라는 것, 그래야 그 해석을 바탕으로 자신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운명에 개입하는 것은 일상에 개입하는 방식으로밖에 가능하지 않다는 말도 덧붙인다. 약국에 온 사람들에게도 강의를 듣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쉽게 얘기했지만 일상에 개입하는 일은 몹시 어렵다. P형인 나의 일상에 나는 어떻게 개입하는 게 좋을까? 구체적으로 고민을 했다.
우선 가장 문제가 되는 ‘시간에 쫓기는 일상’을 먼저 조절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간은 J형 쪽으로 움직여서 일상에 규칙성과 계획성을 조금이라도 도입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 시작한 약차 사업 때문에 늘어난 일의 양을 줄여 보기로 했다. 작년 연말, 인문약방의 올해 활동과 공부 계획을 짜는 자리에서 친구들과 이 문제에 관해서 얘기를 했다. 함께 논의한 끝에 약국은 주 3일만 열기로 했다. 주 3일이어도 예약제로 상담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밀도는 줄지 않을 것이다. 약차 사업의 업무들도 적극적으로 친구들과 더 나눴다. 하고 싶은 공부는 많지만 좀 줄였다. 올해는 조금 남은 주역 공부를 마치고, 읽지 못하고 미뤄놨던 식물에 대한 책을 가볍게 공부하려고 한다.
새해 들어 위클리 스케줄러를 구입했다. 그동안은 할 일들을 잘 쓰지도 않는 다이어리에 적어 논다든지, 포스트잇에 적어서 여기저기 붙여 놨다. 그러다 보니 통일감이 없고 메모도 잃어버리기도 해 놓치게 되는 일이 가끔 있었다. 주 단위로 할 일을 적고 언제까지 마무리 지어야 할지가 한눈에 보이니 훨씬 수월해졌다. 사실 난 다이어리나 스케줄러를 싫어하는 편이다. 다이어리 꾸미기를 하는 사람들이 좀 이해가 안 간다. 그럴 시간에 다른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요즘 위클리 스케줄러의 위력을 느끼고 있다. 일에 덜 쫓기게 됐다고 할까? 도장 깨듯이 완료한 일들을 한줄 한줄 긋고 있으면 약간의 쾌감마저 든다.
그리고 새해 운동 계획도 세웠다. 바로 걷기다. 사실 걷기는 오랜 기간 동안 내 운동법이었다. 하루 만 보 걷기를 집착적으로 한 적도 있었다. 집착적으로 뭔가를 하면 오래가지 못하는 경험을 많이 했다. 그런 걷기가 아니었으면 했다. 약국 일을 하면서는 불가능할 때가 많다. P형에게는 딱 정해진 수치보다는 느슨한 목표가 좋은 것 같다. 한 달 정도 된 시점에서 평균 하루 7천 보를 넘게 걸었다. 이 정도면 양호하다. 무조건 하루 7천 보 이상이 아니라 평균으로 목표를 세웠다. 조건을 허락하면 만 보건 이만 보건 더 걸으면 된다. 걷는 것은 잠을 잘 자는 것만큼이나 갱년기에 부족하기 쉬운 ‘음’을 보충해 준다. 몸의 순환 또한 좋게 해준다. 천식인 나에게는 호흡곤란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심장을 뛰게 하고 폐호흡도 활성화한다.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산책하러 나가려 노력 중이다. 30분에서 1시간 정도 산책을 하고 와서 다시 일을 시작한다. 여기에 출퇴근 걷기를 보태고 있다.
리추얼, 함께 하는 반복
실은 나답지 않게 작년에 나름 꾸준히 한 운동이 있다. 요가이다. 작년 1월 몇몇 친구들과 제주도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그 친구가 요가에 조예가 깊다는 걸 알게 됐다. 인터넷으로 하는 요가 모임이 만들어졌다. 아침 6시 반부터 한 시간 동안 요가를 했다. 여름에 발가락 골절로 약 3개월간 요가를 쉬었다. 아침 일찍 하는 요가가 취침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나에게는 좀 부담이어서 복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좀 있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계속 요가를 하면서 나의 복귀를 응원했다. 덕분에 다시 요가에 합류했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요가가 일상에 안착하면서 어떤 안정감이 생겼다. 요가를 하기 위해서는 일찍 잘 수밖에 없었고 과로나 공부로 빠지게 될 때는 일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무엇보다 꾸준함이 생겼다. 올해 들어 생긴 나의 변화도 요가의 꾸준함이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싶다. 친구의 꾸준함에 묻어간 꾸준함! 함께 요가를 하고 있는 친구들에게 고맙다.
최근에 읽고 있는 책, 『리추얼의 종말』(2021, 김영사)에서 작가 한병철은 리추얼(ritual)과 루틴(routine)을 구분한다. “리추얼은 협화음을 내고 공통의 리듬을 탈 능력이 있는 공명(共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공명에는 타자의 차원이 깃들어 있다.” 작가는 그렇기에 리추얼의 반복은 특별하지 않으면서도 집약성을 발휘하고 삶을 안정화한다고 말한다. 혼자서 하는 루틴은 공명이 없기에 공허함과 우울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허한 루틴에서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자극과 체험을 더 많이 소비하게 된다. 최근 자기 계발 방법들이 넘쳐나는 이유가 이것에 있지 않을까?
친구들과 함께한 요가는 내게는 루틴이 아니라 리추얼이 된 것 같다. 요가를 하며 공통의 리듬을 탄 시간은 흩어지지 않았고 하나의 건축물이 된 느낌이다. 우리는 ‘함께’ 그 시간에 머물렀기 때문일 것이다. 걷기도 일도 리추얼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친구들과 함께 반복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