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회> 입원기

현민
2024-03-16 00:38
297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입원기

 

볼더링을 하다가 떨어졌다. 다음 날 응급실에서 하루종일 엑스레이를 몇 번 찍은 후 의사로부터 인대 파열과 발목 바깥쪽 뼈가 부러졌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뼈를 재위치하기 위해선 다리에 못을 박는 수술을 해야 했다. 살면서 병원에 가는 일이 잘 없는게 자랑이었는데, 갑작스럽게 입원을 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보험 확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내게 보험은 있냐고 물었다. 최근 나는 독일에서 새 비자를 받았는데, 그때 독일 사보험을 등록해놓았다. 지난 한 해 동안은 한국에서 가장 싼 여행보험을 들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병원에 갈 일이 없었는데, 독일 보험을 들어놓고 사고를 당해서 다행이었다.

 

입원하면 금방 수술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발목이 너무 부으면 수술 후 봉합이 어려워 붓기가 가라 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병원에서 아침 점심 저녁 밤으로 진통제를 받았는데, 살면서 그렇게 많은 약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빈속에 약을 먹어 배가 쓰리면, 그것을 방지하는 약을 먹는 식이었다. 서양 의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체감하며 먹으라는 약을 먹었다.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이름 모르는 주사들을 여러 번 맞으니 몸에 멍 자국이 금방 늘었다. 매일 아침 집단으로 의사 무리가 찾아와 오늘도 수술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했다.

 

예상보다 병원에서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자 나의 나약한 정신력과 타지에서의 한정된 돌봄 자원이 체감됐다. 병원에서 하루를 지내니 집에 너무나 가고 싶어졌다. 가만히 있어야 붓기가 가라 앉는데, 기회만 되면 밖에 나가 담배 한대를 피려고 애를 썼다. 아빠가 입원했을 때가 떠올랐다. 모부의 집은 한 대학병원 근처에 있는데, 사고로 그 병원에 입원했던 아빠가 낮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집에 와 있었다. 그때 나는 아빠가 간호사들을 고생시킨다고 생각했는데 아파보니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와 한집에 같이 사는 플랫메이트이자 남자친구인 니키는 사고가 났을 때도 나와 같이 볼더링을 하고 있었다. 다리가 부러진 줄도 모르고 집에 돌아가서 퉁퉁 붓는 발을 보며 피자를 시켜 먹고, 다음날 차를 빌려 같이 응급실에 갔다. 응급실에는 직계 가족이 아니면 함께 들어올 수 없어서 니키는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다. 내가 ‘의사가 나 뼈 부러졌대 ㅋㅋ..’ 라고 문자를 보냈을 때 그 애는 간호사들이 주는 서류에 무작정 사인하지 말라고 답장했다. 하라는 대는 이유가 있겠지 라고 생각하는 편인 나와 반대로 그 애는 모든 게 믿을만한 정보인지 꼼꼼히 확인했다.

니키는 주로 홈 오피스를 한다. 낮에는 나와 함께 있어주기 위해서 병실에서 일했고, 내가 끔찍한 병원 밥을 먹지 않도록 매 끼니마다 밖에서 밥을 사왔다. 내가 먹는 약의 성분이 허튼 것은 아닐지 인터넷에 하나하나 검색했고, 간호사로부터 마땅한 돌봄을 받지 못했을 때는 대신 화를 냈다.

 

 

끔찍했던 병원 밥

 

아파서 화장실에서 혼자 팬티도 못 내리는 상황에 도움받을 곳이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내 주변 여자들은 모두 내게 위로를 전하는 동시에 니키에게 고마움을 표현했다. 하루는 내가 한국식 죽을 먹고 싶다고 하자 니키가 집에서 죽을 만들어왔는데, 먹으면서 고마움에 눈물이 줄줄 났다. 하지만 동시에 정말 아찔한 기분도 들었다. 얘가 없었다면 이 타지에서 입원 생활을 어떻게 했을지. 애인이 독일인이 아니었다면 외국인으로써 얼마나 또 헤맸을지. 입원 후 독일의 친구들은 내게 위로 문자를 보내주고 병문안을 왔지만(그것만으로도 정말 고마운 일이지만), 하루종일 환자 옆에 붙어 그를 돌보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국에 있는 엄마도, 독일에 있는 이모도 못 오는데 나의 사고로 인해 니키는 돈도 체력도 많이 썼다. 나는 일주일 후 퇴원했지만, 만약 더 큰 사고를 당해서 그보다 오래 입원을 해야 했다면 니키도 벅찰 일이었다.

 

수술 후

 

기다림 끝에 수술을 받았다. 수술 전 긴장되는 마음에 누군가 옆에 있어 주길 바랬는데, 니키는 집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래서 용감한 척 할 수 밖에 없었다. 침대째로 옮겨져 수술 대기실 천장을 보며 묻는 말들에 답을 했다. 나를 수술할 의사들이 내게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고, 산소호흡기를 씌웠다. 숨을 몇번 들이 내쉬면서 마취제 냄새가 역겹다는 생각을 하다가 수술 후 눈을 떴다. 수술실 밖에 있었고, 몇 사람들이 내 생일을 물었다. 침대째로 자꾸 어딘가로 옮겨지는 게 짜증 난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내 병실에 돌아와 있었다. 그곳엔 니키가 있었다.

 

마취가 깨고 난 후, 절단됐다가 봉합된 신체를 느끼기 시작했다. 고통을 느낄 땐 얼굴을 마구 구기며 흐느꼈다. 잠시 고통이 가라앉으면 마취 후유증으로 메스꺼움을 견뎌야 했다. 내가 여러 번 진통제를 요구하자 간호사가 주사를 놓아주며 말한다. Nur vier mal am Tag kann man spritzen. 하루에 네 번만 진통제 줄 수 있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그 말을 듣자 이 고통을 맨몸으로 견뎌야 한다는 사실에 막막해졌다. 몇 시간 뒤 아파서 엉엉 우는 나를 보다 못한 니키가 의사를 직접 찾아가서 진통제가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에 네 번이 무슨 소리냐며 수술 끝난 후니 가장 쎈 걸로 네가 원하는 만큼 줄 수 있다고 했다. 그 간호사는 내가 그날 수술을 받았는지 몰랐던 것 같다. 자주 이런 일이 반복되자, 의료인의 직업적 스트레스가 엄청나다는 걸 알면서도 환자로서 간호사들의 무관심과 불찰에 화가 자주 났다. 간호사들은 자주 내 존재를 잊어버렸고, 내가 무언가를 물어보기 전에 이미 화가 나 있었고, 내가 무언가에 대해 물어보면 다들 잘 모른다고만 답했다.

 

가끔은 병실에 혼자 오랫동안 남겨지면 적막함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가만히 앉아서 책이나 영상을 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병실 안과 문 밖 복도 소리까지만이 내 세상이 된 것 같았다. 병실에서 괴팍해지는 노인들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이유 없이 눈물이 줄줄 났고, 오지 않는 니키가 미워졌다. 사실 니키가 그저 집에서 일한 뒤 내게 가져올 저녁밥을 만들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혼자 그 애를 한참 미워하다가, 이건 뭔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아픈 몸과 함께 나는 금방 위태로워졌다. 니키만이 내 기분과 이 상황에 대한 불만족을 표현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한계가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나름 지내는 동안 집처럼 편히 지내라고 T가 벽에 붙여준 부채와 스카프

 

할머니

 

나는 운이 좋게도 거의 혼자 2인실을 쓰고 있었다. 하루는 새벽에 내 방에 중환자실에서 돌아온 한 할머니가 들어왔다. 할머니는 통증 때문인지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새벽 내내 울었다. 귀마개와 안대를 쓰고 자던 나는 거세지는 할머니의 울음소리에 깨 간호사들을 호출했다. 간호사들은 할머니에게 더 쎈 진통제를 투약했다. 나는 그들에게 상황은 이해하지만, 나도 자야한다고 혹시 남는 다른 방이나 집에 가도 되냐고 물었다. 그들은 남는 방도 없고 새벽엔 모든 환자가 병원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마음대로 이탈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듣고 짜증이 제대로 난 나는 할머니의 살짝 작아진 신음소리를 들으며 어떻게 여기를 탈출할지 시나리오를 짜다가 잠들었다. 간호사가 점심을 가져다줄 때 즈음, 잠에서 깨 옆을 확인하니 그 할머니는 또 수술을 받으러 사라져 있었다.

 

퇴원하는 날 아침, 할머니는 병실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책을 읽다가 가끔 움직임을 멈추고 할머니의 숨 쉬는 소리를 확인했다. 어느 순간 잠에서 깬 할머니는 부시럭 거리더니 몸 곳곳에 붙은 바늘과 줄들을 손으로 빼 던졌다. 피를 뚝뚝 흘리는 할머니를 보며 불안해진 나는 간호사를 호출했다. 늦게 등장한 간호사들은 할머니에게 줄들의 용도를 설명하며 다시 줄과 바늘을 삽입했다. 내가 하지 마시라고 했을 땐 무시하던 할머니는 갑자기 예의 바른 아이처럼 으응 그렇구나 하며 그걸 마치 몰랐던 마냥 다소곳해졌다. 그리고는 간호사들이 없어지자 같은 짓을 반복했다. 간호사들이 피에 젖은 환자복을 다 교체한 한참 후에야 그녀와 나는 둘이 남았다. 할머니는 힘이 있는 목소리로 내게 자꾸 무언가를 물었지만, 그녀의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해 답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 핸드폰을 본 후 딸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 했는데, 딸의 전화번호를 끝까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느새 나는 퇴원을 도우러 온 T와 나갈 채비를 했다. 내 가방은 친구들이 가져다 준 꽃으로 가득 차 있었다. 떠나기 전, 할머니를 위해 튤립 한송이를 그의 자리에 두고 왔다.

 

병원에서 나서 입구 벤치에 앉아 T와 니키의 차를 기다렸다. 그리곤 그 할머니가 거의 죽음에 가까워보였다는 얘기를 나눴다. 문득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적힌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날개 달린 영혼아, 너는 하늘을 춤추었고

새된 비명으로 새벽을 놀래켰지

닻들을 좇고 용감히 바다에 맞서고

다시 바람을 타고 내게 돌아왔지

 

날개를 부러뜨렸구나. 그 날개가 땅에 끌려

모래 위에 너의 흔적을 새겼구나

깃털이 부러지면 너는 날 수가 없지

하지만 죽을 때를 누가 결정한단 말이니?

 

(후략)

 

- 브랜든 비치의 상처받은 갈매기,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 중.

 

퇴원하는 길, T가 메고 있는 나의 퇴원가방

 

그리하여 나는 집에 돌아왔다. 돌아온 날에는 인도인 플랫메이트 난디니가 커리를 만들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음식 먹는 즐거움을 잊고 지냈는데, 매운 커리가 혀에 착 감기면서 몸에 열을 냈다. 먹으며 식탁에 둘러앉아 사람들과 이야기하니 살아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3층 집에서 목발 짚고 살기란 쉽지 않았다. 목발과 함께 계단을 오를 때면 조마조마했다. 한번 이동할 때 두고 온 것은 없는지, 뭐가 필요할지 미래의 욕구를 미리 계산해야 몸이 고생하지 않았다. 나는 살면서 아파본 적이 별로 없다. 감기에 걸려도 하루 이틀이면 낫고, 하룻밤 정도 새도 다음날 별 문제가 없다. 다리가 부러지니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너무 적었고, 혹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고, 누군가의 도움을 자꾸 받아야만 했다. 신체적 한계가 낯선 나는 자주 내가 마음대로 못 움직인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볼더링을 하다 떨어지던 순간에 대해, 그때 안될 걸 알면서 시도한 것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달라지는 게 없었다. 자유롭지 않은 신체를 경험하며 내 성질에 대해서 배우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어려서 그런가 회복력이 좋았다. 병원에서 돌아온 후로 진통제를 끊었다. 물리치료사부터 부러진 발을 앞뒤로 움직이는 걸 연습하는 숙제를 받았는데, 간신히 까딱거리는 걸 친구들에게 선보이면 돌아오는 칭찬이 가득한 저녁을 보내며 지낸다. 독일은 병원에서 퇴원하면 하우스 아츠트Hausarzt라고 불리는 종합의원에서 상태를 체크해야 한다. 어제는 하우스아츠트에 가서 실밥도 뽑았다. 잘려있던 피부가 붙어있었다 . 4월 초에는 발목의 철심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는다. 철심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으면 바로 걸을 수 있다고 한다. 지금은 부러진 왼발에 힘을 실으면 발 전체가 저릿한 통증을 겪는다. 다시 걸음을 연습할 때는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하다.

 

댓글 6
  • 2024-03-16 07:37

    아이고 워째....ㅠㅠㅠㅠㅠㅠ

    볼더링이 뭔지 몰라 검색했어. 암벽타기 같은 거더라구...
    떨어질 수도 있고 사고날 수도 있지만, 엄청 놀라고 힘들었겠다.

    이럴 땐 뜨끈한 국밥 같은 걸 먹어야 하는디... 빵과 햄이라니.... 속상혀...
    버뜨, 남친도 있고, 매운 커리도 있고, 친구도 있으니까....재활 잘하면 되지 않을까?

    잘 먹읍시다!

  • 2024-03-16 08:05

    볼더링 모르는 1인 추가 ㅋ, 병원 생활 과정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 상태에 저절로 공감이 가네, 재활 잘 해서 뼈가 잘 붙고 나면 다 지나간 일이 될거네. 몸 조심 하고 마음도 잘 보살피길~

  • 2024-03-16 11:31

    아이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고생많았어, 현민아!!
    게다가 햄과 빵이라니!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구먼.
    그래도 회복이 빠르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맛난 것 챙겨먹으며 몸도 마음도 잘 추스렸으면 좋겠구나.

  • 2024-03-17 06:45

    나도 볼더링 찾아봤는데 ㅋㅋ
    고생했네 현민 ㅜ
    병원밥은 정말 ㅠㅠ
    그래도 운이 좋았네. 보험도 들고 남친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ㅎ
    씩씩한 현민얼굴 떠오르는데 4월에 철심제거하고 재활 잘 해서 다시 날아다니길 바래요~~^^

  • 2024-03-17 07:10

    입원얘기를 읽을 줄 몰랐네!! 많이 아팠겠다! 우여곡절이 많네.

  • 2024-03-18 18:29

    진짜 글을 읽는데 제 다리가 저릿하네요.. 타국에서 고생이 많아요 ㅠ 한동안 답답하겠지만 금방 뛰어다니길!!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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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2024.05.07 | 조회 201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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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06 | 조회 141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19
아스퍼거는 귀여워
  감자는 정말, 정말정말정말 오줌, 똥을 못 가렸다. 만 3살이 지나, 한국 나이로 5살이 되었는데도, 기저귀를 못 뗐으니 말 다 했지. (네이버에 쳐보니 ‘기저귀를 떼는 시기는 18개월에서 24개월이 적당하다.’라고 쓰여있다) 발육이 남다른 감자에게 맞는 기저귀 사이즈가 더 이상 없어서, 더 큰 기저귀를 찾으려면 성인용으로 가야 할 판이였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어린이집을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일단 벗기고 팬티를 입혀 놓으면 자신도 축축한 것을 알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떼게 된다나? 그 말을 믿고 덜컥 어린이집 적응과 배변 훈련을 동시에 해버리자는 안일한 생각을 해버렸다. 어린이집 적응도 힘든 마당에 배변 훈련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나도 울고, 감자도 울고,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마도) 울었다.       기저귀 벗기 강제집행을 시행한 후, 어린이집에서 하루 평균 2~3번 오줌을 쌌다. 여벌 바지와 팬티를 수도 없이 챙기고, 심지어 바지가 모자라는 날은 친구 것을 빌려 입고 오는 일도 허다했다. 외출 시에는 무조건 화장실만 보이면 억지로 오줌을 뉘었다. 내가 신경 써서 화장실을 보내면 괜찮지만, 조금만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내가 집안일이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실수했다. 외출도 불안하고, 늘 둘 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도 늘상 실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줌은 나았는데, 똥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갈수록 똥 누는 걸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나중에 가서는 변을 5일에서 일주일 정도에 한 번 눴다. 똥은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져서 더 누기 힘든 악순환. 온갖...
  감자는 정말, 정말정말정말 오줌, 똥을 못 가렸다. 만 3살이 지나, 한국 나이로 5살이 되었는데도, 기저귀를 못 뗐으니 말 다 했지. (네이버에 쳐보니 ‘기저귀를 떼는 시기는 18개월에서 24개월이 적당하다.’라고 쓰여있다) 발육이 남다른 감자에게 맞는 기저귀 사이즈가 더 이상 없어서, 더 큰 기저귀를 찾으려면 성인용으로 가야 할 판이였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어린이집을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일단 벗기고 팬티를 입혀 놓으면 자신도 축축한 것을 알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떼게 된다나? 그 말을 믿고 덜컥 어린이집 적응과 배변 훈련을 동시에 해버리자는 안일한 생각을 해버렸다. 어린이집 적응도 힘든 마당에 배변 훈련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나도 울고, 감자도 울고,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마도) 울었다.       기저귀 벗기 강제집행을 시행한 후, 어린이집에서 하루 평균 2~3번 오줌을 쌌다. 여벌 바지와 팬티를 수도 없이 챙기고, 심지어 바지가 모자라는 날은 친구 것을 빌려 입고 오는 일도 허다했다. 외출 시에는 무조건 화장실만 보이면 억지로 오줌을 뉘었다. 내가 신경 써서 화장실을 보내면 괜찮지만, 조금만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내가 집안일이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실수했다. 외출도 불안하고, 늘 둘 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도 늘상 실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줌은 나았는데, 똥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갈수록 똥 누는 걸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나중에 가서는 변을 5일에서 일주일 정도에 한 번 눴다. 똥은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져서 더 누기 힘든 악순환. 온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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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5 | 조회 219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2024년 나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는 토요일 양생프로젝트와 죽음 탐구 세미나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봄에 2주나 결석했다. 2019년 감이당 일성으로 시작해 1년 과정을 6년 동안 공부해오는 동안 결석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주 꼬박꼬박 공부하러 가는 것이 수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수업에 출석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2주 연속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 결정을 내린 사건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선거사무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신앙처럼 지켜온 인문학 수업 출석을 어기게 한 이 사건을 정리하며 나에게 정치적 활동이란 무엇일까 다시 짚어보고 싶다.           나의 첫정당 활동 연대기     내가 처음 정당에 가입한 것은 2012년, 녹색당이었다. 그때 나는 하기 싫은 일에 매여 사는 나의 일상이 싫었다. 그 탓을 이명박 정권 때문이라 생각했나 여하튼 정권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을 만나 매일매일 술을 마시며 정권을 욕했다. 그러나 술 먹고 욕하는 걸로는 불만이 해소되지 않았다. 무언가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2012년 3월, 직장을 그만두고 다르게 살고자 첫 백수 생활에 도전했다. (나의 백수 도전기와 다르게 사는 도전은 나의 연재 글 <1화 금천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참고하시길^^) 그러다 마을에서 만난 녹색당에 가입했다.         녹색당에서 ‘녹색 가치’에 대해 공부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나 핵 발전소와 탈핵 운동에 대해서 그랬다. 밀양 765kV 송전탑 건설과 관련된 투쟁,...
      2024년 나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는 토요일 양생프로젝트와 죽음 탐구 세미나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봄에 2주나 결석했다. 2019년 감이당 일성으로 시작해 1년 과정을 6년 동안 공부해오는 동안 결석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주 꼬박꼬박 공부하러 가는 것이 수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수업에 출석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2주 연속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 결정을 내린 사건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선거사무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신앙처럼 지켜온 인문학 수업 출석을 어기게 한 이 사건을 정리하며 나에게 정치적 활동이란 무엇일까 다시 짚어보고 싶다.           나의 첫정당 활동 연대기     내가 처음 정당에 가입한 것은 2012년, 녹색당이었다. 그때 나는 하기 싫은 일에 매여 사는 나의 일상이 싫었다. 그 탓을 이명박 정권 때문이라 생각했나 여하튼 정권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을 만나 매일매일 술을 마시며 정권을 욕했다. 그러나 술 먹고 욕하는 걸로는 불만이 해소되지 않았다. 무언가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2012년 3월, 직장을 그만두고 다르게 살고자 첫 백수 생활에 도전했다. (나의 백수 도전기와 다르게 사는 도전은 나의 연재 글 <1화 금천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참고하시길^^) 그러다 마을에서 만난 녹색당에 가입했다.         녹색당에서 ‘녹색 가치’에 대해 공부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나 핵 발전소와 탈핵 운동에 대해서 그랬다. 밀양 765kV 송전탑 건설과 관련된 투쟁,...
김윤경~단순삶
2024.04.20 | 조회 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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