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회> 옛길을 함께 걷다

기린
2024-03-05 23:18
337

경강선을 타고 여주역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세 번 째로 여강길을 걷게 되었는데, 제일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여강은 여주지역에서 부르는 남한강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남한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여주 지역을 이은 여강길은 현재 총 11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인 옛나루터길은 물길을 따라가며 옛 나루터를 통과하는 18키로 정도 되는 길이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는 혼자 걸었는데, 이번에는 친구와 함께 걷게 되었다. 긴 코스이기도 하지만 외진 곳도 있어서 같이 걸을 친구가 있어서 든든했다. 여주 터미널까지 걸어와서 점심을 해결하고 영월루로 향해서 길을 나섰다.

 

 

영월루에 올라서 보면 아래로 남한강과 여주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강 건너 편으로 천년고찰 신륵사도 보였다. 여강길 4코스를 걸을 때는 신륵사에서 출발했다. 대부분의 사찰이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는데, 신륵사는 강줄기와 너른 모랫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절 이름의 유래로 고려시대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니 천년이 넘은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의 수피에 푸른 이끼가 뒤덮여 있었다. 평일(월요일) 오후 한가롭게 경내를 거니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보였다. 친구가 그걸 보다가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운전해서 오면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신륵사까지 말이야. 근데 고작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 대놓고 시간을 보냈다니까.

 

자식 셋을 연이어 키워내느라 고단하던 어느 날의 순간, 집을 벗어나 바람 쐬러 나올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단다. 아름다운 풍광에 깃든 여유가 좁은 차안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던 옹색한 순간을 환기시켰던 모양이다. 오래된 것들은 시간을 되돌려놓은 효과가 있나보다.

 

 

오랜 만에 맑은 날씨였다. 파란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따라 강기슭으로 접어들었다. 부라우 나루터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나루터가 있는 기슭에서 강 건너 강천면의 한 마을을 연결하는 나루터였다는 내용이었다. 나루주변의 바위들이 붉어서 붉은 바우라는 명칭이 변해서 부라우 나루터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붉은 바위는 안 보였다. 대신 커다란 너럭바위가 평평하니 넉넉하게 드러나 있었다. 친구는 나루터가 번성하던 때에는 이 바위 가까이까지 물이 찼을 거라고 했다. 나룻배가 접안하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쉽사리 가늠되지 않았다. 너럭바위에는 오후의 햇살이 푸짐했다. 우리는 잠시 바위에 드러누웠다. 늦겨울 햇빛에 달궈진 바위의 온도가 깜빡 졸기 딱 좋았다. 혼자 왔을 때는 멀찌감치 보고 지나쳤는데, 친구랑 함께 오니 이런 호기도 누린다.

 

 

 

 

 

 

 

 

 

 

 

 

 

 

 

 

 

 

 

 

 

 

 

 

 

 

 

 

 

 

여강길 1코스는 여주역에서 출발해서 도리마을까지 18키로가 넘는 길인데, 옛 여강의 나루터들을 따라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옛 여강에는 총 18개의 나루터가 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세 곳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 길에는 아홉구비를 가파르게 돌면서 걷는 오솔길도 있는데 이름이 ‘아홉사리 과거길’이란다. 경상도 충청도 쪽에서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 걸었던 길로 전해지는데, 강을 타고 오는 배삯을 아끼려는 이들이 낸 길이다. 굽이굽이 아홉구비를 돌아 쉬어가기 맞춤인 나루터에는 커다란 느티나무 그늘도 있다. 우만리 나루터도 그중 하나였다. 나루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느티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했다. 수령이 4백년을 넘겼다고 한다. 한양으로 오르내리던 수많은 발길들이 다져놓은 길 위의 쉼터 아래서 다시 한번 오래된 것들을 우러러 보았다.

 

 

 

 

 오래된 나무는 언제 봐도 그 위용이 당당하다. 지난번에는 늦가을 물든 느티나무 잎들이 바람을 타는 소리에 홀려 오래오래 서 있었다. 이번에는 한 겨울을 통과하느라 오롯이 드러난 나뭇가지들의 굴곡이 눈에 들어왔다. 4백년의 시간이 새겨진 굴곡이었다. 일본 큐수 남단 야쿠시마 깊은 숲에는 7천2백년을 넘긴 조몬스기라는 나무가 살고 있다고 한다. 야마오 산세이의 『어제를 향해 걷다』를 읽다가 알게 된 나무다. 저자가 1977년에 야쿠시마로 삶터를 옮긴 것도 이 나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느티나무의 굴곡을 따라가며 그 섬의 나무는 도대체 어느 만큼일까 상상해보았다. 언젠가는 꼭 한번 보고 싶은 나무, 딱딱한 껍질에 손을 대면 성스러운 기운이 스며든다는 그 나무를 떠올려 보았다.

 

이번 걷기는 우만리 나루터지점에서 코스를 벗어났다. 1코스 종점인 도리마을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기 때문이다. 나루터에서 마을로 접어들었는데, 낡은 집터 앞에 몇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여주역으로 가는 마을버스 정류장을 물었다. 한 분이 마침 가는 길이니 태워주겠다고 했다. 여강길 1코스를 걸으면서 충만해졌던 마음에 화룡점정의 응대였다. 그 분이 아니었더라면 돌아올 시간이 하염없이 늦어질 수도 있었는데 운수 오진 날이었다.

 

여강길 1코스를 함께 걸은 친구는 올해 새로운 변화를 앞두고 있다. 더 늦기 전에 고향 근처로 삶터를 옮기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자주 못 볼 테니 그전에 한 번 걷자고 약속한 끝에 함께 여강길을 걸었다. 야마오 산세이처럼 오래된 나무의 부름을 받은 건 아니지만, 친구도 나이 들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꿈을 오래 간직해 왔다. 꿈을 향해 새로운 도전에 나서는 친구를 응원했다. 도시를 떠나 “회귀하면서 동시에 천천히 자라는”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살았던 야마오 산세이의 글을 선물로 전하면서.

 

댓글 7
  • 2024-03-06 09:55

    여행을 다녀온지 오래되었는데, 기린님의 글을 읽으니 여주 강가를 따라 같이 걷고 있는 기분이 드네요.
    맑고 푸르른 하늘과 아름드리 성스러운 느티나무 잘 보고 갑니다.

  • 2024-03-06 14:23

    뭔가 몽환적인 느낌입니다. 그리워하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말입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탓에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말이 멀게만 느껴지는 저에게는요.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멋지네요.
    도시를 떠나 "회귀하면서 동시에 천천히 자라는”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살았던 야마오 산세이의 글도, 그를 선물로 전하는 기린샘의 마음도 잠시 그려봅니다~

  • 2024-03-06 14:53

    친구와 함께 걷기!
    든든하고 여유로운 여정이네요.
    호기롭게 바위에 누운 두분을 떠올리니, 저도 친구와 걷고 싶어지네요.
    우리도 곧 걸어봐요~

  • 2024-03-07 09:23

    와, 느티나무 멋집니다!! 뭔가 웅장하고 신령스런 느낌이...
    답사 좀 다닐 때 신륵사도 여주나루터도 간 적이 있는데, (너럭바위도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며 둘러 본 것 같아요.)
    버스 타고 가서 포인트만 보고 온 답사와 구석구석 눈길이 머물고 마음이 머무는 기린님의 걷기는 확실히 품격이 다르군요.

  • 2024-03-07 09:38

    우만리 나루터 느티나무 위와 아래 모두 그대가 찍은겨?
    뭔가 아래는 어디서 이미지를 가지고 온 것 처럼 근사한디유

    글구 아무래도 조몬삼나무 보러 가는 일정 하나 만들어야겠네요.
    여름에? ㅋㅋㅋ

  • 2024-03-13 15:35

    문득 떠오른 저의 버킷리스트는 기림샘과 같이 걷기, 기린샘 글에 등장하기..ㅋㅋ
    (여권사진 잘 나왔기를 바라면서..^^)

  • 2024-03-13 17:34

    흙도 풀리고 강물도 풀리고 하늘도 풀리고 내 마음도 풀리고.... 그리고 다리도 풀리고
    다음부터는 걸은 후에 술 먹읍시다. 걷기 전에 한잔하니 두 다리가 풀려서 힘들었어요.ㅋㅋㅋ
    저 따스한 너럭바위 위에서의 한숨 잠이 생기를 다시 일으켜 주었지만요^^
    강 이쪽에서 바라보는 신륵사는 신륵사 경내를 돌 때 만큼이나 마음을 내려앉게 하더이다.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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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2024.05.07 | 조회 185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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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5.06 | 조회 137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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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
2024.05.01 | 조회 218
아스퍼거는 귀여워
  감자는 정말, 정말정말정말 오줌, 똥을 못 가렸다. 만 3살이 지나, 한국 나이로 5살이 되었는데도, 기저귀를 못 뗐으니 말 다 했지. (네이버에 쳐보니 ‘기저귀를 떼는 시기는 18개월에서 24개월이 적당하다.’라고 쓰여있다) 발육이 남다른 감자에게 맞는 기저귀 사이즈가 더 이상 없어서, 더 큰 기저귀를 찾으려면 성인용으로 가야 할 판이였다. 이걸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어린이집을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말하길 일단 벗기고 팬티를 입혀 놓으면 자신도 축축한 것을 알게 되어서 자연스럽게 떼게 된다나? 그 말을 믿고 덜컥 어린이집 적응과 배변 훈련을 동시에 해버리자는 안일한 생각을 해버렸다. 어린이집 적응도 힘든 마당에 배변 훈련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 나도 울고, 감자도 울고,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마도) 울었다.       기저귀 벗기 강제집행을 시행한 후, 어린이집에서 하루 평균 2~3번 오줌을 쌌다. 여벌 바지와 팬티를 수도 없이 챙기고, 심지어 바지가 모자라는 날은 친구 것을 빌려 입고 오는 일도 허다했다. 외출 시에는 무조건 화장실만 보이면 억지로 오줌을 뉘었다. 내가 신경 써서 화장실을 보내면 괜찮지만, 조금만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있거나, 내가 집안일이라도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실수했다. 외출도 불안하고, 늘 둘 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도 늘상 실수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오줌은 나았는데, 똥 문제는 정말 심각했다. 갈수록 똥 누는 걸 너무 무서워한 나머지, 나중에 가서는 변을 5일에서 일주일 정도에 한 번 눴다. 똥은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져서 더 누기 힘든 악순환. 온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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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2024.04.25 | 조회 218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2024년 나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는 토요일 양생프로젝트와 죽음 탐구 세미나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봄에 2주나 결석했다. 2019년 감이당 일성으로 시작해 1년 과정을 6년 동안 공부해오는 동안 결석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주 꼬박꼬박 공부하러 가는 것이 수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수업에 출석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2주 연속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 결정을 내린 사건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선거사무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신앙처럼 지켜온 인문학 수업 출석을 어기게 한 이 사건을 정리하며 나에게 정치적 활동이란 무엇일까 다시 짚어보고 싶다.           나의 첫정당 활동 연대기     내가 처음 정당에 가입한 것은 2012년, 녹색당이었다. 그때 나는 하기 싫은 일에 매여 사는 나의 일상이 싫었다. 그 탓을 이명박 정권 때문이라 생각했나 여하튼 정권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을 만나 매일매일 술을 마시며 정권을 욕했다. 그러나 술 먹고 욕하는 걸로는 불만이 해소되지 않았다. 무언가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2012년 3월, 직장을 그만두고 다르게 살고자 첫 백수 생활에 도전했다. (나의 백수 도전기와 다르게 사는 도전은 나의 연재 글 <1화 금천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참고하시길^^) 그러다 마을에서 만난 녹색당에 가입했다.         녹색당에서 ‘녹색 가치’에 대해 공부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나 핵 발전소와 탈핵 운동에 대해서 그랬다. 밀양 765kV 송전탑 건설과 관련된 투쟁,...
      2024년 나의 중요한 일정 중 하나는 토요일 양생프로젝트와 죽음 탐구 세미나에서 공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봄에 2주나 결석했다. 2019년 감이당 일성으로 시작해 1년 과정을 6년 동안 공부해오는 동안 결석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매주 꼬박꼬박 공부하러 가는 것이 수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수업에 출석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 2주 연속 빠지게 된 것이다. 그런 결정을 내린 사건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 선거사무원으로 참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신앙처럼 지켜온 인문학 수업 출석을 어기게 한 이 사건을 정리하며 나에게 정치적 활동이란 무엇일까 다시 짚어보고 싶다.           나의 첫정당 활동 연대기     내가 처음 정당에 가입한 것은 2012년, 녹색당이었다. 그때 나는 하기 싫은 일에 매여 사는 나의 일상이 싫었다. 그 탓을 이명박 정권 때문이라 생각했나 여하튼 정권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을 만나 매일매일 술을 마시며 정권을 욕했다. 그러나 술 먹고 욕하는 걸로는 불만이 해소되지 않았다. 무언가 새로운 탈출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2012년 3월, 직장을 그만두고 다르게 살고자 첫 백수 생활에 도전했다. (나의 백수 도전기와 다르게 사는 도전은 나의 연재 글 <1화 금천에서 다시 시작하기>를 참고하시길^^) 그러다 마을에서 만난 녹색당에 가입했다.         녹색당에서 ‘녹색 가치’에 대해 공부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나 핵 발전소와 탈핵 운동에 대해서 그랬다. 밀양 765kV 송전탑 건설과 관련된 투쟁,...
김윤경~단순삶
2024.04.20 | 조회 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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