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가마솥
2023-12-15 21:37
338

“삼살제왕이 이 땅에 내려 오실 제, ...(중략)..... 계백장군 백살신, 관우장군 백살신.....”

나의 할머니는 우리들 생일이 되면, 하얀 백설기 시루떡 앞에서 아래 아(·)자가 나오는 옛 한글로 쓰여 있는 백살기를 읽으신다. 대략 삼십여 분이 걸린다. 어릴 적에는 그 것이 마냥 싫었다. 어서 저 따뜻한 떡을 먹어야 하는데, 할머니 고사(?) 때문에 군침만 삼키고 있으니......

그러다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이다. 나에게 백설기 떡은 그저 그런 떡이 되었는데, 내 생일날 할머니가 그 백살기를 읽으신다. 연신 손을 비비고 머리를 조아리며 읽으시는 뒷모습에서 보며, ‘나는 커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귀신이 있어서 나를 돌보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할머니의 정성이 나의 마음에 들어 온 것이다.

 

 형제들만의 제사.

 

    우리 집은 이제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하였다. 제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큰 형님 댁에서 기제사(忌祭祀)로 일 년에 네 번, 조부모와 부모님의 제사를 지내다가, 어느 해인가 두 분이 성당에 나가신 뒤로는 연미사로 대체하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렇게 하신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무언가 섭섭하기도 또 죄스럽기도 하였다. 특히 성당에 나가지 않는 나로서는 신부님의 말씀에 앉았다가 일어 섰다를 반복하며 정해진 댓구를 따라해야 하는 미사는 매우 껄끄러웠다.

큰 형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큰 형수님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해 제사 날에, 우리는(우리집과 작은 형님네) 큰 형님네 아파트 문 앞에서 저녁이 다 될 때까지 기다린 적도 있었다. 큰 형님네는 그 날이 제사 날인 것을 까먹은 것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내는 제사이니, 항상 공기가 무겁고 답답한 날이었다. 그 날은 아이들도 숨죽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두 해, 연미사를 나가지 않았다. 당신도 동생들을 부르지 않으니 제사 날에 연미사라도 지내는 것인지 지내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기일(忌日)이 되면 항상 우울하였다. 어느 해인가 마눌님이 “섭섭하면 우리가 지내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한다. ‘그래, 삼형제 중에 누구라도 지내면 되지, 꼭 큰 형님이 지내야 할 이유는 없잖아?’ 큰 형님 댁은 딸만 둘을 두었고, 나는 아들이 있으니 길게 보면 우리 집이 나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막내인 내가 제사를 지내겠다고 두 형님께 말씀드렸다. 내가 처갓집에서 배운 전통방식으로 격식을 차려서, 그렇게 몇 해 동안 우리 집에서 제사를 지냈다. 어느 해부터 작은 형님이 나섰다. 제사를 지내러 동생 집에 오시는 것이 부담이 되셨나 보다. 당신은 아들만 둘이 있으므로 제사가 끊길 염려가 적다는 이유를 들어 당신 집으로 제사를 옮겼다. 진즉에 그럴 일이지. 아들이 이제야 생겼나? 다만, 할머니와 할아버지 제사를 할머니 기일로 합제(合際)하였다. 할아버지는 뵌 적도 없지만 할머니는 내가 고1 때까지 함께 사셨으니 형제들끼리 회상할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해를 지냈다.

 

     그런데, 기일이 되면 큰 형님, 작은형님 내외 그리고 우리 집 내외만 참석하는 일이 잦아 졌다. 우리 집 아이들도 평일에 시간을 내어서 작은 형님 댁, 세종까지 가기 힘든 일이었고, 작은 집 조카들도 독립하여 서울과 헬싱키에 살고 있으니 제사에 못 오는 것이었다. 그것참! 제사에 모여 부모가 알고 있는 조상님들의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데, 아이들이 없으니 ‘의식’만 남은 제사가 되었다. 작은 형님이 동탄으로 이사를 왔지만, 우리 형제들만 참석하기는 매 마찬가지였다.

 

      작은 형님이 은퇴하여 형수님과 함께 성당에 나가시는데, 늦게나마 성당에 나가시는 게 아주 ‘좋다’며 나에게도 권한다. 불길한(?) 예상은 항상 적중한다. 작년에, 어머니 기일 때가 되자 형님이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낸다. 우리 형제만 모이는 제사는 의미가 없으니, 기제사를 없애고 모두 연미사로 돌리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다. 짐작하였기에 놀랍지는 않았지만, 내가 아직 무언가 정리되지 않는 상태였다. 먼저 느낌적으로 어머니 아버지께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제사보다도 어려운 것은 산소이다. 어머니는 안성 공원묘원에 계셔서 연간 관리비만 끊기지 않으면 되지만, 고향 땅,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산소를 관리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몇 해라도 가보았지만 형님네들은 전혀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으니, 우리 대(代)에서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윤달이 길게 들어 있던 그 해에, 모두 파묘(破墓)하여 화장한 후, 어머니 묘소 옆에 가족묘원을 만들어 안치하였다. 형님들과, 제사를 없애고 연미사를 하는 대신에 어머니 기일이 든 주말에 그 가족묘원에 가서 시제(時祭)처럼 합제를 지내는 것으로 의견을 맞췄다. 다른 집들은 어떻게 하나?

 

 

     친구들 얘기를 들어 보았다. 장남이 아닌 친구들은 큰 집에 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장남인 친구들은 다양한 방식을 지내고 있었다. 전통 방식 그대로 제사를 지내는 사람도 있고, 형제들이 모여서 1박 2일로 고향 주변을 여행하며 산소에 가기도 하고, 어떤 집은 콘도에 모여서 손주들이 돌아 가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기억하는 이야기 방식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 어떤 집은 참석하는 사람 수대로 새뱃돈처럼 용돈을 주는 집도 있다. 어떤 형식으로든 추모하고 있지만, 모두들 부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는 언제부터 생겼을까?

 

 

   우리나라는 고려 말부터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 민간에 널리 장려되었다. 초기의 제사는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벼슬이 높을수록 더 윗대 조상까지 제사를 지냈다. 조선 초기에는 1품 이상은 3대 증조(曾祖)까지, 7품 이상은 2대 조부(祖父), 일반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냈다.

 

조선 중기인 17세기 전반까지는, 돌아가신 어버이나 조상의 제사는 아들뿐만 아니라 딸도 지낼 수 있었으며, 사위가 지낼 수도 있었다. 또한 외손자도 지낼 수도 있었다. 예컨대 율곡 이이(李珥)의 외가는 3대째 아들이 없어서 그 외손들이 외조부모의 제사를 맡기도 하였다. 제사를 전담하는 사람은 상속에서 우선권이 주어졌다. 이는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에게 권리·권한을 준다는 뜻이었다. 제사와 상속권에는 아들과 딸(또는 사위)의 구별이나 차별이 없었고, 친손과 외손의 구별하지도 않았다.

 

17세기 후반부터 제사에서 남녀의 차별이 생겨났다. 남자 집안 중심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제사에서 소외된 사위나 외손은 차츰 제사에 빠지는 일이 잦아지며, 제사는 남자, 그것도 장남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장남이 제사를 독점하는 것은 상속에서 상속 지분을 독점하게 된다는 뜻과 같다. 또한 이것은 제사의 모든 준비는 며느리 몫으로 남게 됨을 말하는 것이며, 여자들 입장에서는 남의 집 제사 준비를 하게 되는 폐단이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조선 말기에 오면 제사는 완전히 대중화되고, 그 절차가 복잡해진다. 이는 대부분의 백성이 양반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 인구의 1%에 지나지 않던 양반이 철종 때 이르러서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되었고, 특히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모두가 성씨(姓氏)를 가지게 되면서, 그 동안 양반의 문화를 부러워하던 일반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제사를 지내게 된다. 그 것도 4대인 고조(高祖)까지 지냈으며, 송나라의 학자, 주희의 『가례』를 1759년에 8권 3책으로 묶어 간행한 예서인 『家禮』에 집착하면서 절차는 까다로워지고 제상의 음식은 복잡하게 되었다.

 

1969년 정부가 「가정의례준칙」을 제정해 제사는 2대조까지로 하고, 성묘는 제수를 마련하지 않거나 간소하게 한다고 공표했으나, 지금까지도 고조부까지 4대봉사(四代奉祀)를 하는 집안이 더러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에게 제사는 예전만큼의 흐름이 유지되고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요즘 제사는......

 

     최근 성균관의례정립위원회가 지난 10월 30일 발표한 '제례 문화 관련 국민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앞으로 제사를 지낼 계획이 없다'는 응답률이 55.9%로 집계됐다. 반면 '계획이 있다'는 답변은 44.1%였다. '현재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응답률은 62.2%으로 나왔다.

      제사를 지내는 가장 큰 이유로 배운 것처럼 '조상을 기리기 위해서'라고 답한 비율은 39.6%로 가장 높게 나왔고, '부모님이 지내고 있어서'는 27.2%로 2위, '가족과 교류를 위해서'는 16.6%로 3위였다.

      반면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는 '종교적 이유나 신념 때문'이란 응답이 34.6%로 가장 높았다. '가족들이 모이는데 제약이 있어서'라는 이유와 '제사 과정에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 요소가 있다고 느껴서'는 각각 13.7%와 12.5%로 2,3위를 차지했다.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응답자 중, 제사를 '간소화거나 가족 모임 같은 형태로 대체하겠다'는 응답이 41%로 가장 많았다. '시대 변화로 더는 제사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응답자와 '종교적 이유나 신념 때문'이란 응답자가 각각 27.8%와 13.7%로 그 뒤를 이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엄마 아빠 결혼 기념일이어서 케잌을 사가지고 집에 온 줄 알았더니, 그냥 녀석의 조카 하빈이가 보고 싶어서 왔다며 딸네 부부가 집에 왔다. 오랜만에 식구들이 다 모여서 ‘엄마표’ 맛난 점심을 먹고 케잌을 잘랐다. 딸, 아들, 사위에게 “너희들은 엄마/아빠 제사를 어떻게 지낼래?”하고 질문을 던졌다. ‘(아빠가 왜 또) 뜬금포?’하는 표정들이다. 먼저 은퇴 후 글쓰기를 소개하였다. 이어서 조상의 넋을 기리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후손들이 마음을 다해 예를 올리는 전통문화라는 교과서 같은 제사의 의미를 상기시키고, 제사의 유래와 녀석들이 잘 알고 있는 우리 집 제사 이력을 발제형식으로 발표하고 토론을 제안하였다.

 

    아들은 제사를 지내겠다고 한다. 그 동안 제사에서 느낀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니었고, 제사는 우리 전통문화중 하나인데, 자기 아들/하빈이에게 그 뜻을 전한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녀석은 아마도 외할아버지나 내가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는 모습에서, 나의 할머니의 백살기 속에서 내가 느낀 그 무언가를 보았을 지도 모른다. 감성적인 아들놈의 의견에 따르면 나는 죽어서 다행히(!) 젯밥을 얻어 먹을 수 있을 듯하다. 문제는 매사 깐깐한(?) 딸내미인데, 녀석은 문화인류학 전공자답게 의식과 의례의 중간쯤 되는 ‘리추얼(Ritual)’인 우리네 가정제사는 재고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토론을 달군다.

 

     나는 제사의 의미는 씨족사회에서 공동체 결속의 의미가 있었다고 이야기를 꺼낸다. 예를 들면 조부모 제사를 지낸다고 하면, 아버지 항렬과 사촌들까지 모두 모여서 지내니, 그 기회에 서로 가족의 정서를 나누는 자리로써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과거의 조상과 현재의 친척들을 아우르는 공동체 속에서 나의 존재를 자리매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물론 요즘처럼 그 것을 제사에서(특히 기제사에서) 유지하기가 힘들기는 하지만, 힘들다고 없애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일상적인 삶 속에서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자칫 잊히기 쉬운 나의 시원(始原)을 반복적으로 되돌아보고, 내가 나아갈 곳을 바라다보는 것도 의미있지 않을까?

 

     아이들은 가족의 공동체성을 기르는 방식으로는 함께 놀러 가도 되는 등 많은 재미있는 방법이 있다. 평소에 서로 교류하고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제사라는 어려운 제도를 ‘가족 공동체성’을 위하여 유지하는 것보다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살아 생전에 뵙지도 않아서 아무런 정서도 없는 분들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별다른 공감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힘든 것은 현실적인 문제이고. 하기야 많아 보아야 두 명인 자식들이 조상들의 제사를 일일이 챙기기도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가정이 줄어들고 있으니 제사 준비는 앞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도 나름대로 제사의 의미에 대해서 공감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무작정 없애고 싶지는 않은 듯하다. 다만, 정해진 기일(忌日), 갖춰야 하는 음식, 절차 등 그 형식에 있어서는 개선이 필요하다는 곳까지 결론에 다다랐다. 조상을 기리는 것은 기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문득 문득 어떤 계기에서 생각 날 때 기릴 수 있는 것이고, 마찬가지로 후손들에게 조상의 내력을 말해 주는 것도 꼭 기일에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방법이 인정되어야 할 듯하다. 그렇게 진행되려면 당사자인 내가 먼저 제안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해서 한 줌 재로써 가족묘원에 묻고, 기일에는 형편이 되는대로 하는데, 당일 아침 식사 자리에서 꽃 한 송이 올려놓아 그 날을 기억해 주어도 감사한다고 정리했다. “당신, 많이 변했네요!” 마눌님이 칭찬인지 힐난인지 모를 멘트를 날린다. 속으로 응답한다. ‘문탁 글쓰기 덕분이죠. 네네.’

 

 

     나의 처가는 금성 나씨 계은공파 종손(宗孫)집이어서 현조(玄祖)까지 5대봉사(五代奉祀)를 한다. 결혼 후 처갓집 제사에 참여하기 시작한 첫 해에는 거의 격 달로 기제사가 있었던 듯하였다. 그 전에는 매달 있었다고 했다. 매번 제사 때마다 종부(宗婦)이신 장모님의 강력한 주장으로 그 횟수가 점점 줄었는데, 마지막에는 일 년에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는 두 번, 산소에 가는 시제는 한 번으로 제사를 줄였다. 방안에서 지내는 제사는 장인의 부모님 합제와 조부에서 현조까지의 합제 두 번이다. 장인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돌아가신 장인의 일기에서 당신의 고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가슴 찌릿한 한 문장을 남겼다.

 

     “조상들에게는 법도가 아닌 줄 알지만, 살아 있는 집사람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종손(宗孫)의 자격을 물려받은 유일한 아들, 처조카 녀석은 제사에 대해서 별 다른 생각이 없는 듯하다. 아직 장가들지 않아서, 아니면 모든 제사 준비를 엄마와 고모가 다 해주어서 그럴 지도 모른다. 그도 언젠가 결정해야 할 날이 오겠지.

 

그의 몫으로 남긴다.

댓글 4
  • 2023-12-19 14:16

    기제사는 저희집도 비슷하게 서사가 흘러가네요. 시제는 저희는 봄에 동구능부터 합니다 돈은 문체부에서 지원받아서 ㅎㅎㅎ 저는 제사문화와 세시풍속을 즐기는 편이라서 힘들지만 심리적 부담없이 하는데(집에서 손하나 까딱안하는 남편도 부담감 없이 즐김ㅋㅋㅋ) 명절 차례는 어떻게 하시나요? 아 그러고보니 남편은 밤치고 지방쓰고 병풍치는 일은 하네요^^

    • 2023-12-21 17:22

      저는 처가에 식구가 없어서 처가에 갑니다. 장모님을 모신 이후로는 우리 집에서 명절을 지내고요.

  • 2023-12-19 20:24

    시댁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제사를 합쳐서 1년에 한 번 제사를 지냅니다. 제사 날짜도 형제들 모이기 쉬운 8월 둘째주 토요일, 이렇게 정합니다.
    친정집에서도 오랫동안 따로 지내던 할머니 제사와 할아버지 제사를 어머니 돌아가신 뒤에 합쳐서 한번 지내자고 했습니다.
    저희 형제는 어릴 적 할머니 할아버지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던 터라 아직은 제사를 올립니다.
    올해 어머니 돌아가시고 첫 기제사를 지냈는데, 역시 모두가 모이기 쉬운 일요일을 잡아 제사를 지냈습니다.
    날짜도 양력으로 했고요. 제가 적극적으로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옛 법도대로 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함께 나누며 어머니를 애도하고, 아직도 남은 상실감을 보듬는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 2023-12-21 17:26

      맞아요. 정서를 함께한 조상님들의 제사를 지내는 집이 꽤 있더군요.
      다만, 기제사 날짜를 지키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워요. 성균관에서도 기제사가 아니면 안된다는 입장에서 후퇴하는 듯합니다.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남어진
2024.05.10 | 조회 156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오영
2024.05.09 | 조회 145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인디언
2024.05.07 | 조회 277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168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35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