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몸으로 살아가기 / 노을

문탁
2023-12-04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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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몸은 흐른다 _노년과 장애

 

요즘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학생들과 ‘장애를 만드는 사회구조’라는 주제로 사람들이 이동할 때 겪는 불편함에 대해 설문조사를 하고 있다. ‘평균’이라는 몸을 기준으로 사회가 암묵적으로 지정한 특정한 속도에 대해서 질문하는 조사이다. 예를 들면 횡단보도를 건널 때의 신호 변경이 자신의 보폭에 적당하지, 지하철이나 버스 승차시의 단차에서는 어떤지 등을 묻는다. 한 번은 동네 공원에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고 계신 노인 분들에게 질문을 했을 때였다. 80대의 한 할머니께서는 우리의 질문을 듣고는 ‘횡단보도 신호가 너무 빨리 바뀐다’, ‘안내판의 글자들은 너무 작아서 보기가 힘들다’고 맞장구를 치셨다. 또 이런 조사를 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하시며, 사탕까지 주고 가셨다.

 

설문조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쉽게 특정 연령층의 사람들로부터 ‘무릎이 아파서 오래 걷기 힘들다, 핸드폰 글자가 잘 보이지 않는다, 잘 안 들린다’라는 말을 듣는다. 나는 이것이 각자의 생애주기에 따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몸의 변화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장애와 무관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나이를 먹으면 시력도 저하되고, 귀도 어두워지고, 무릎도 아프게 된다. 말하자면 누구나 장애를 갖게 되기 마련인 것이다. 하지만 ‘평균 몸의 속도’를 기준으로 구축된 사회에서는 노년층이 스스로를 ‘정상신체’에서 배제된 몸으로 살게 만든다. 나이 듦은 우리 모두가 맞이할 존재 상태이다. 우리의 질문만으로도 ‘고맙다’고 하신 할머니의 말씀은 노년의 존재 상태가 어떻게 배제되고, 비가시화 되었는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노년의 존재 상태는 장애와도 교차한다. ‘전국장애인투쟁보고서_버스를타자’(2002) 다큐를 본 적이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지하철 탑승 시위 당시, 역사의 스피커에서는 ‘현재 장애인들의 집단 승하차로 인해 열차가 지연되어 선량한 시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울려 퍼졌다. ‘선량한 시민’이라 칭해진 한 시민은 장애인들을 향해 ‘왜 시민들을 괴롭히냐!’며 힐난한다. ‘선량한 시민’ 대 장애인 시위는 2023년 지금까지도 주입되는 인식 틀이다. 올 봄에 읽었던 김도현의 <장애학의 도전>은 사회적 모델론자들의 장애학 이론을 소개하면서 장애의 역사, 연대의 철학, 노동권 쟁점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었다. 장애를 치료나 치유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아닌, ‘장애를 만드는 사회’에 초점을 두고 서술한다. 근대 이후 형성된 ‘에이블리즘(ableism)’에 따라 ‘손상’을 ‘장애’로 규정한 일, 그렇게 ‘장애의 몸’에 대한 배제와 차별이 전면적으로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내가 스스로 장애와 비장애의 이분법적 형식의 틀을 깨고, 다양한 ‘장애’ 스펙트럼 선상에 놓인 몸들의 존재 상태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자기 몸의 장애를 인식할 때는 지하철과 버스, 보행로, 가게 앞의 수많은 단차를 마주할 때이고, 맹인이 장애를 인식할 때에는 점자로 된 정보가 없을 때이며, 농인이 장애를 인식할 때에는 수어라는 언어를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없을 때이다. 또, 무릎 관절이 아픈 노인들이 횡단보도를 주어진 시간 내에 건너야 할 때, 시력 저하로 작은 글씨를 읽을 수 없는 노인들도 장애를 경험한다.

 

몸은 무시간성 속에 놓인 고정된 입자가 아니다. 각자의 생애주기에 따라 존재 상태가 변화한다. 올해 일흔이 되신 나의 아버지는 1톤 화물 트럭을 운전하신다. 그리고 3년에 한 번씩 운전적성검사를 받으신다. 재작년에는 백내장 수술을 하지 않으면 운전을 할 수 없는 시력이 나와 수술을 받으셨다. 그 해에는 뇌경색도 경미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올 여름, ‘돌발성 난청’으로 아버지는 또 한 번 위기를 겪으셨다. 오른쪽 귀의 회복 가능성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아빠는 곧 죽음을 앞에 둔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곤 하셨다. 하지만 동시에 굉장히 꾸준히 걷기 운동과 식이조절도 철저히 하신다. 매일 건강 관련 유투브도 보신다. 다행히도 이후 난청이 사라져 지금은 다시 운전을 하시지만, 언젠가는 운전을 못하게 되실 거다. 아버지에게 운전적성검사는 이 사회가 자신의 상품성을 판가름하는 고통스런 검문대다. 그런 운전적성검사와 관련된 기사들을 찾아보니, 고령자의 차 사고 수치를 통계 내린 자료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고령화 사회에 65세 이상의 감각 손상에 따른 사고는 느는데, 운전면허소지 비율은 높기에 75세 이상의 경우는 적성검사 주기를 1년 단위로 단축하고, 자진해서 운전면허를 반납하게 해야 한다는 말들이었다. 일종의 ‘권고퇴직’과도 같은 기사들이었다. 차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노년층을 향한 금지와 배제의 언어는 가득한데, 대책이나 대안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트럭운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노년층이 스스로 면허를 반납하게 하려면 그들에게 적절한 인센티브가 필요하다. 하지만 현재는 지자체마다 다르게 시행하며, 있더라도 지역화폐로 약 10-15만원을 지급하는 정도라서 생계를 위해 운전대를 잡는 노년층은 구조적으로 운전을 그만두기 어렵다고 한다. 아버지의 근심은 운전 노동자에 대한 사회의 대책 없는 권고와 배제의 말들을 통해서도 다시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

 

근대 이후, 노동은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노년의 몸, 장애를 가진 몸은 생산성도 없고, 위험 요소까지 크다. 전장연이 만들고, 서울시가 2020년에 도입한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권리중심 공공일자리)는 노동을 상품이 아닌 하나의 권리로 주장하는 이론적 기반 위에서 만들어진 제도이다. 장애를 이유로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중증장애인들이 1년 계약직으로 일주일에 15-20시간씩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할 수 있게 지원하는 사업이다. 그들은 문화예술, 장애인식개선, 권익옹호행위 등을 하면서 급여를 받는다. 하지만 현재 권리중심 일자리는 폐지될 예정이다. 여기에 종사하는 많은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 갑작스런 해고위기에 처했다. 나는 곧 폐지될 예정인 이 제도가 상품화 된 노동의 한계를 뛰어넘어, 노년의 노동에도 적용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안무가 고권금 씨는 ‘버티는 몸(sustaining flow)’이란 주제로 노들야학에서 중증장애인과 함께 ‘나는 나를 기대한다’라는 군무 공연을 열었다. 군무는 전체가 동시에 같은 춤동작을 하는 무용이지만, 그녀는 하나의 무용을 개인의 시차에 따라 춘다는 개념의 ‘시차군무’를 고안하였다. 다른 시간성을 표현하는 몸들이 동시에 펼치는 군무 공연이 그렇게 열렸다. 노년의 몸도 다른 시간성을 표현한다. 그들을 배제하지 않는 사회 구조에서만이 가능해지는 ‘시차군무’의 무대가 계속 나타나길 바란다. 각기 다른 속도로 흐르는 몸들이 하나의 군무를 춘다.

 

 

2. 이것도 제 몸입니다 _장애와 퀴어

 

장애를 가진 몸은 한편 ‘퀴어’하다. ‘별난, 이상한’이란 영어 단어의 뜻을 가진 퀴어(queer)는 ‘이성애 정상성’에 맞서는 개념으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그 단어를 장애의 몸과 교차해서 쓴 경우를 알게 되었다. 일라이 클레어는 자신의 퀴어성을 처음 경험했던 때가 자신의 섹슈얼리티나 젠더가 아닌 자신의 장애를 통해 처음 느꼈다고 고백했다. ‘손목이 괴상한 각도로 뒤틀리고, 옹이 진 근육들이 미세하게 떨리고 느리게 움직이는 그녀의 몸’을 보고는 그녀의 친구들이 ‘말도 안 되게 퀴어해’라고 말했을 때다. 그때 그녀는 자신의 장애를 퀴어보다 더 퀴어한 일로 겪었다고 한다.

 

나는 이성애자이다. 그렇기에 ‘이성애 정상성’에 맞서는 개념으로 쓰이는 ‘퀴어’라는 개념으로 내 존재 상태를 깊이 사유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일라이 클레어의 사유는 내 몸을 ‘퀴어함’이란 렌즈로 보도록 안내했다. 재생산이 불가한 여성의 몸은 퀴어하다. 나는 결혼했었다. 결혼한 나에게 사회는 재생산의 기대를 갖는다. 여성의 몸, 결혼, 재생산성은 정상 가족의 이상을 실현시키는 핵심적인 장치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재생산이 쉽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오랜 기간 ‘난임 상태’로 있었다. 난임의 원인은 질경련으로 이성애의 삽입섹스가 어렵게 했다. 이를 난임상담센터에서는 성기능 장애라고 명명하였다. 이성애의 정상섹스가 불가한(성기능 장애)가 있는 몸은 퀴어하다. 연애부터 결혼생활까지 18년. 긴 시간동안 나름의 방식으로 지켜온 부부애, 동료애를 끝내고 이혼을 하는 과정에서도 결혼생활이 끝나게 된 일부 책임이 재생산이 어려운 내 몸의 장애 때문임을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었다. 퀴어한 내 몸의 존재 상태를 나조차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정상성의 기준에 맞는 몸의 존재 상태는 과연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계속 몸은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면서 흐른다. 그런 점에서 모든 몸들은 각자 퀴어하다. 성(sex)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고정된 ‘성(sex)’이 아니라 심리, 사회적 현상이자, 성적 욕망으로 유동하는 ‘성(sexuality)’가 있을 뿐이다. 이성애 정상성에 맞서는 섹슈얼리티가 있고, 휠체어를 탄 몸의 섹슈얼리티가 있다. 또 자식 없이 사는 부부의 섹슈얼리티가 있고, 자녀를 낳고도, 동거 파트너로 살아가는 섹슈얼리티가 있다. 다양한 성적 지향의 만남과 결혼 생활이 있다. 모두 퀴어한 몸으로 퀴어한 사랑을 하고, 퀴어한 시간을 보낸다.

 

‘퀴어함’으로 내 몸의 사태를 설명하기 전까지 나는 꽤 오래 우울한 마음 상태로 지냈다. 10대에 겪어야 했던 성폭력의 기억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온 이후, 나에게 성은 우울과 공포의 대상이었고, 몸을 경직시켰다. 나에게 내 몸과 성은 수치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20대에는 종교적 순결 이데올로기에 강렬하게 사로잡혔다. 신성한 생명을 낳는 수단으로서 성을 인식했다. 신성한 수단이 된 몸은 욕망의 실존적 주체가 되지 못하고, 결혼 전까지 지켜지고 보호되어야 할 대상이 되었다. 30대에 시작한 결혼 생활은 재생산이 불가능해진 내 몸을 의료적 치료의 대상으로만 바라봤던 시기였다. 재생산이 불가능한 몸을 가능상태로 만들기 위해 산부인과 및 난임센터를 옮겨 다녔고, 난임 및 만성 우울과 관련된 상담 치료를 받았다. 문제로 정의된 내 몸을 주체적으로 해석하지 못한 채 의료 기관에 맡길 뿐이었다. 그리고 40대. 질경련을 어느 정도 치료했음에도 막을 수 없었던 이혼까지 하게 되자, 나는 내 삶에서 일어난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식욕도 전혀 없었고, 살아가야 할 이유도 찾기 어려웠다. 한두 달 사이에 10킬로그램에 가깝게 체중이 빠졌다. 평생 쏟아야 할 울음, 눈물을 다 쏟은 것 같았다. 홀로 괴성을 터트렸고, 자기 파괴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알고 있는 개념 체계로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사태에 봉착했을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식과 개념, 철학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지식과 철학을 바탕으로 내 삶의 발명의 순간을 만드는 것이 도약이자 이행이며, 혁명임을 <부분과 전체>(하이젠베르크, 서커스)를 통해서 경험했었다. 마크 플랑크가 열복사 스펙트럼을 해석하고자 했을 때 도저히 기존의 고전물리학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되자, 양자역학이란 새로운 이론을 창안하게 되었다. 하나의 인식론적 이행이자, 패러다임의 전환이었고, 과학혁명이었다. 나에게 문탁에서의 공부와 글쓰기는 언어화 할 수 없었던 사태 앞에서 개념과 이론을 장착해 이행의 목적지를 설정하고, 경로를 찾아가며 수행하는 경험이었다. 이번 여름 서평쓰기 시간에 <은유로서의 질병>을 통해 난임의 시간을 해석해보려고 시도했던 일이 그랬고, 지금은 장애로 이름 지어졌던 내 몸의 상태를 ‘퀴어함’이란 개념으로 글쓰기하면서 그렇다. 여전히 때때로 과거의 어떤 기억에 사로잡혀 무기력해질 때가 있기도 하지만, 이것도 내 몸이고, 이런 삶도 이 세계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올 한해 서로 의지하면서 공부하는 가운데 천천히 알아갈 수 있었다.

 

또 ‘퀴어한 신체들’을 만난 경험들도 빼놓을 수 없다. 퀴어 퍼레이드, 장애인야학 등의 현장 경험은 이후 읽은 텍스트들과 공명하면서 경험의 시간을 연장시켰다. 성소수자들의 몸과 나의 퀴어한 몸이 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장애해방운동 최전선의 장애인들이 자신의 몸, 그 자체로 차별와 혐오의 벽을 부수는 다큐나 책을 보면서도 내 몸으로 살아갈 때 가졌던 수치심에서 벗어나는 기쁨이 차오르기도 했다. 내가 감당하면서도, 의존할 수 있는 세계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자신의 몸으로 살아간다 _장애의 역사를 쓴다

 

“혁명이란 그저 한 사회의 우두머리를 바꾸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사회의 문제설정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가령, 우리 사회의 문젯거리로 여겨진 장애인, 동성애자, 이주민들이 나서서, 오히려 문제는 자신들을 문제시하는 사회적 의식과 질서에 있음을 확인시키며, ‘정상’이란 무엇인지, ‘국경’이란 무엇인지, ‘성(sexuality)이란 무엇인지 다시 정의하는 과정이 사회를 바꾸는 혁명이다. 장애인운동 조직이 혁명의 시작을 외치는 것은 쌩뚱맞은 게 아니다.”(존 맥나이트)

 

중증 뇌병변 장애인 이규식씨는 자신의 몸으로 살 수 있는 세계를 구성하는 최전선의 투쟁에 앞장서서 살아온 사람이다. 양방향 엘리베이터 설치, 장애차별철폐를 위한 각종 법 제정, 탈시설 운동 등 세상의 변화를 자기 몸으로 싸우면서 만든 사람들 중의 한 명이다. 또, 일상생활에서도 이규식씨는 휠체어에 의탁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몸에 맞게 고치기에 전문가이고, 여행, 바다 수영, 다이빙 등 원하는 바를 적극적 추진한다. 자기의 몸을 지하철 선로에, 버스 바닥에 눕히기도 하고, 제주도 해수욕장 계단 앞에, 감옥 운동장 턱 앞에, 좁은 배의 문 앞에 두고는 계속해서 자기 몸으로 질문하고 싸우며 변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올해는 자서전을 쓰셨다. 언어장애로 생각과 감정을 언어화하는데 어려웠음에도 자신의 음성을 글로 옮겨서 작성해줄 수 있는 동료들과 함께 자기 장애의 역사(『이규식의 세상 속으로』 후마니타스)를 쓰신 것이다.

 

농인의 자녀로 자란 코다인 이길보라씨는 <반짝이는 박수소리>라는 다큐를 찍어 자기 가족의 삶을 보여주었다. 입말보다 손말로 옹알이를 먼저 배우는 등 농인 문화 속에서 자란 이길보라씨는 농인을 의사소통이 안 되는 장애인으로 인식하는 외부의 동정 어린 시선과 달리 그녀가 본 엄마, 아빠의 삶은 그 자체로 온전하고, 단단했다고 말했다. 또, 다시 태어나도 수어를 사용하는 자랑스러운 농인으로 살겠다는 아빠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 역시 다시 태어나도 불구의 역사 속에서 아버지의 딸인 코다로 살고 싶다고 담담하게 고백하기도 한다.

 

<장애학의 도전>을 중심으로 에세이를 준비하면서 노년의 존재방식을 개인의 고유한 생애주기에 걸친 변화로 생각해보게 되었다. 근본적으로 몸은 고정된 입자가 아닌데 입자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와 인식 체계를 비틀어 보게 되었다. 몸과 시간에 대한 사유는 내 몸에 시기별로 새겨진 비정상성, 장애의 역사를 ‘퀴어함’이란 단어로 정리해보게 하였다. 그리고 전장연의 전사 이규식, 코다인 이길보라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장애는 사회가 규정한 것일 뿐, 각자의 욕망과 감각을 중심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자기 몸으로 삶을 단단하게 영위하는 사람들.

 

나의 삶에 닥친 난임과 긴 우울증, 이혼이라는 일련의 사건들이 없었다면 어쩌면 여전히 난 난임 치료와 아이를 낳는 일에만 집중해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내 고통의 무게가 너무 커서 자기연민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타인의 아픔에도 결국 깊이 공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유한 자기 몸의 상태는 소외시킨 채 정상성에서 빗겨난 몸뚱이를 붙들고 저주하며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난임과 우울증을 극복 대상으로 볼 뿐 주체로서의 몸에 대해 사유할 시도를 못했을 것이다. 난임, 장애, 이혼과 관련된 사태들은 고통스런 삶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다. 그런 삶의 경로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전환도 없었을 것이다. 내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몰랐던 때에 만난 <나이듦과 자기서사>세미나는 나의 삶을 긍정하면서 살아가도록 이끌어 준 장이었다. 장애, 퀴어, 노년의 삶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과정, 나의 삶을 관통해서 글쓰기를 시도를 했던 시간은 긍정할 수 없었던 몸으로서의 나를 세상에 새롭게 뿌리내리게 한 시간이기도 했다.

 

 

 

 

 

<장애학의 도전>에는 ‘뿌리내리기’(rooting)과 ‘옮기기(shifting)’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자기 중심을 잃지 않고 뿌리내리면서, 타자의 삶에 접속하는 몸들의 연대에 대한 설명이었다. 지난 글쓰기 시간은 그렇게 뿌리내리고, 옮겨가는 시간이었다. 나를 둘러싼 몸들의 지평 위에서 나라는 몸을 명확하게 보는 일, 동시에 나의 몸을 관통해서 다른 몸으로 횡단하여 그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시간. 이렇듯 내 몸의 역사를 새롭게 언어화하는 일은 마치 내가 나의 미래를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똑같은 경로를 선택하고, 글쓰기로 반복 수행하면서 차이를 만드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글쓰기로 차이를 만들어가는 일이 곧 자기 삶의 이행이며, 혁명의 순간이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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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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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
2024.05.10 | 조회 160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오영
2024.05.09 | 조회 146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인디언
2024.05.07 | 조회 285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170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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