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회> 오래 보아야 예쁘다

루틴
2023-11-30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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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壬) 루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대학원에서 10년을 세포만 쳐다보며 지냈다.

졸업 후 방황하다가 문탁에서 정화(丁) 무사와 사주명리를 만나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 나 역시 궁금하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 

 

1. 오래된 장식품

 

우리 집 책장은 책으로 가득 차있지만 항상 한켠에는 여유 공간이 있다. 여행에서 가져온 작은 소품들, 엽서들을 전시한다. 12월이 되면 어김없이 작은 트리, 루돌프인형, 희미한 조명들까지 그 공간을 채운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임을 알 수 있다. 정화의 감성으로 한껏 포근해진 공간을 임수는 감사히 즐긴다.

 

정화는 어릴 적부터 크리스마스트리 주변의 따뜻한 빛이 좋았다고 한다. 모태신앙의 영향인데 개종의 과정 중에 있는 지금도 정화는 자신만의 리츄얼로 12월이 되면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꺼내서 책장의 한켠을 꾸민다. 그 장식품 안에는 1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물건들이 있다. 모두 빛에 바래지도 않았고 깔끔하다. 정화가 말하기 전까지 그렇게 오래된 줄 몰랐을 정도였다.

 

올해도 어김없이 책장 한켠을 채운 크리스마스 트리와 그 친구들

 

우리 집에는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물론 큰집으로 이사 오면서 새로운 가구들도 많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임수도 물욕이 많지 않기도 하고 새로운 걸 잘 사질 않으니 오래된 물건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정화와 임수의 물건상태는 사뭇 다르다. 정화의 물건들은 트렌디하지는 않지만 제 역할을 다한다. 깔끔하고 정돈되어있으며 심지어 사랑을 받는 듯 은은한 광택이 돈다.

 

2. 정화의 생활명품

 

11월 25일 토요일자 경향신문에 미니멀리즘과 관련된 칼럼이 하나 실렸다. 이 칼럼에서 다룬 <단순한 열망>에서는 상업적 미니멀리즘 트렌드의 한 갈래로 ‘이케아 미니멀리즘’을 소개한다. 일반적으로 미니멀리즘은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처럼 여겨져 왔는데 가성비 좋기로 유명한 이케아와는 언뜻 매치되지 않아 보였다. 이케아 미니멀리즘이란 한번 쓰고 버려도 상관없는 값싼 물건들을 사는 ‘가성비’ 좋은 소비를 일컫는 말이다. 물건의 의미를 상실한 채 언제든 대체가능한 물건을 소비하는 현상은 값싼 노동력과 환경오염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주변 물건과 좋은 관계 맺기에 대해서 사유한다.

 

 미니멀한 환상

 

임수는 물욕이 없고 대체로 가성비 좋은 물건을 구매하는 편인데, 이러한 소비성향이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와 가까워 보여 나름 자부심을 느껴왔지만, 사실 물건과의 관계맺기를 포기해 버리는 이케아 미니멀리즘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었다. 물건과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은 물건을 험하게 쓰는 태도와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그에 비해 정화는 일상을 풍요롭게 하는 물건을 종종 사는 편이다. 양쪽 날이 분리되는 가위, 초경량 휴대용 독서대, 크기를 반으로 줄인 종이티슈, 발목을 조이지 않는 방한양말 등등. 임수가 생각하지도 못한 생활 속 불편한 점을 찾아내서 일상을 좀 더 윤택하게 하는 물건들이 많다. 보통 이런 생활물품을 소비하다보면 물건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고 자본주의에 이끌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사는 경우가 허다한데, 정화는 좀 달랐다. 자신의 생활에 꼭 맞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물건을 잘 찾는 안목이 있었다. 가히 정화의 ‘생활명품’들이었다(<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중)

 

윤광준의 생활명품 101선

 

정화의 생활명품은 쓰는 사람과 물건의 TPO(Time, Place, Occasion)가 적절하다. 쓰는 사람의 입장만이 아니라 그 물건이 제 역할을 하도록 돕는다. 쓰고 난 뒤 정리는 물론이고, 망가져있으면 방치하지 않고 보수하고, 떠나보내야 할 때는 감사함을 표시한다. 새로운 물건으로 대체되어도 옛날 물건과의 추억을 종종 떠올리기도 한다. 정화는 값에 상관없이 자신의 삶 속에서 함께하는 물건들을 참 소중히 여긴다. 정화에게 물건은 한번 쓰고 버려도 상관없는 언제든 교체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정화와 함께하는 물건들은 자연스레 생활명품 반열에 오른다.

 

정화의 생활명품들

 

물건에게도 예를 다한다고 생각을 하니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보이던 정화의 태도가 물건과 소통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임수는 사람들을 부품처럼 취급하는 자본주의 실상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 정작 물건은 함부로 쓴다. 인간중심적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임수는 오래된 물건이지만 엣지있게 잘 사용하고 싶은 로망이 있다. 어느 도시의 오래된 건물이나 물건에 빛이 날 때 왠지 모를 따뜻함을 느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귀찮아서 대충 쓰게 되거나 또는 안 쓰고 말지가 된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소비하는 즐거움마저 잃게 된다.

 

3. 전전긍긍이 아닌 건건함으로

 

물건에도 예를 다하는 정화의 비결은 뭘까? 유독 정화의 물건에서 광이 나는 이유가 따로 있을까? 자신이 머무는 공간을 느낌 있게 바꾸는 일은 단순히 감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옆에서 차근히 지켜보니 감성을 넘어 성실함이 동반된다. 정화는 물건을 보좌하듯이 바삐 움직인다. 때가 되면 꺼내서 닦고, 사용할 때도 햇빛에 바래지 않게 위치를 조절하고, 혹시나 망가진 부분이 있으면 수리한다. 계절 물건은 방치하지 않고 깨끗하게 닦아서 먼지가 앉지 않게 잘 보관해둔다. 그러면 다음해에 그 물건이 같은 자리를 또 채운다.

 

크리스마스 장식품뿐 아니라 계절별 이불과 옷, 선풍기, 온열기, 자동차, 하루하루 사용한 물건들 모두 감사히 사용하고 제 위치에 정돈해놓는다. 한번은 브리타 정수기통 아래가 조금 깨져서 울퉁불퉁해졌었다. 정화는 싱크대 상판이 긁히지 않고 깨진 부위가 더 커지지 않도록 정수기통의 위치를 실리콘 받침대 위로 정한 후 임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의 말도 남긴다. 하지만 임수의 스케일에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다. 정화와 임수는 물건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어긋남이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밑바닥이 거친 브리타 정수기통을 싱크대 상판에 함부로 두는 순간 정화의 잔소리가 날아온다. 한소리 들은 임수는 괜히 심통이 난다.  

 

임수도 정화가 잘 관리한 물건과 공간을 쓸 때는 기분이 참 좋다. 하지만 자신도 지켜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귀찮고 답답해진다. 그런 정화에게 "이런 거 다 지키고 살면 치매 걸린다"고 훈수를 둔 적도 있다. 집에서 조차 살얼음 걷듯 전전긍긍하는 모습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임수에게는 상기를 계속 시켜도 놓치는 것들이 정화에게는 몸속 어딘가에 자동키가 켜지듯이 스텝바이스텝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구삼효, 군자가 종일토록 그침 없이 힘쓰며 저녁이 되어도 두려운 듯이 하면 위태로우나 허물이 없다.” <내 인생의 주역 1.중천건, 전전긍긍이 아니라 종일건건>

 

청소를 한번 할라 치면 임수는 물을 사방 군데 다 튀겨가며 그동안 미뤄놨던 청소란 청소를 다하고 지쳐서는 다른 일들은 뒷전이다. 반면 정화는 소리 없이 사부작 사부작 일을 한다. 임수입장에서는“청소 했었어?”이럴 정도로 소소하게 그리고 꾸준히 한다. 소소하다는 건 청소를 한 번에 끝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늘은 변기, 내일은 욕조 이렇게 나눠서 한다. 근데 하루하루가 쌓이다 보니 정화의 손길이 닿지 않는 물건과 공간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에서 윤이 나는 굉장히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된다.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초반에 많이 싸웠던 이유 중에 하나였다. 한번 할 때 끝장을 보는 임수와 달리 조금씩 건건히 하는 정화, 사주를 공부한 뒤 임수는 변명을 해보기도 했다. 정화는 안정적인 기운을 타고났으니 주변 환경이 안정적이어서 건건하게 일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임수는 불안정한 기운을 타고났으니 물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한다고 말이다. 

 

정화는 좋아하는 걸 오래 즐기기 위해서 한 번에 에너지를 쏟지 않고 매사를 건건하게 수행한다. 그래야 내일도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항상 꾸준하다. 그런 모습이 때로는 부럽기도 하고 불만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가 주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 그 태도는 비난과 싸움의 대상에서 벗어난다.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상대의 모습을 인정하고 나와 달라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을 내볼 수도 있다. 임수가 하나부터 열까지 정화가 요구하는 말을 다 들을 수는 없어도 노력은 해볼 수 있다. 에너지를 한곳에만 잔뜩 쏟는 방식을 고쳐보기도 하고, 좀처럼 하기 싫은 마음이 올라와도 다독여 볼 수 도 있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자주 비추며, 정말 하기 싫을 때는 양해를 구해보는 노력을 해본다. 그래도 싸우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지만^^;;

 

4. 마치며

 

이번 연재가 정화와 임수의 좌충우돌 가족-되기 임수편 마지막 글이다. 가까운 사람의 좋은 점을 발견하는 건 상대의 역할 같기도 하다. 처음부터 좋게 보이지 않는다. 나와 다르고 어색하고 이해가 안갈 때가 많다. 그래서 자주 싸운다. 하지만 상대방의 행동이 나를 망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믿음만 있다면 귀를 기울여보자. 그러다 보면 이해가 가기도 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다보니 티격태격했지만 4년의 세월을 무탈하게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댓글 6
  • 2023-12-01 09:32

    아니 제 방한양말이 왜 저기에 있는 건가요? 매우 민망하네요^^;;
    제가 그런 사람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는데 잊고 지냈던 마음을, 별것도 아닌 제 물건을 예쁘게 보아준 임수에게 고맙습니다.
    임수편 마지막 연재글 잘 읽었습니다. 일년동안 너무 고생많았어요^^

    • 2023-12-01 14:34

      글구 저 양말은 다리가 잘 붓는 당뇨질환자용 양말인데, 발목부분이 낙낙하고 재질이 도톰해서 저는 방한용 양말로 신고 있어요.
      크리스마스 산타 양말로도 활용 가능합니다.

  • 2023-12-01 13:08

    생활명품! 끌리는 용어예요^^
    저도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그간 연재하느라 임수 수고 많았어요!!

  • 2023-12-01 13:46

    다른 점이 많은 임수와 정화, 둘이 맨날 싸운다고 쓰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를 살피는 모습이 참 따뜻하고 세심하군요!

  • 2023-12-01 14:05

    그래서 우리 임수님이 어쩌다 정화님 이야기할 때면
    눈 속에 하트도 있고 별도 있고 양말도 있었군요. ^^

    사부작거리며 서로를 위해 마음 쓰는
    정임합목하우스 포에버~~~🙏

  • 2023-12-01 16:09

    루틴, 애쓰셨습니다~~ 차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시간들이 쌓여가고 있군요^^ 알흠답습니다그려~~~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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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
00:32 | 조회 62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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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147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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