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삶은 처분될 수 없다

경덕
2023-11-23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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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덕

새벽이생추어리 보듬이(2022. 7~).

난잡한 공부가 체질이라 여러 세미나와 워크숍을 유랑한다.

 

 

 

 

삶은 처분될 수 없다
 
 
 
9월 26일 저녁, 활동가 S는 어느 동물권 단톡방에 이런 메세지를 남겼다. 
 
"살처분 관련해서 뭔가를 하고 싶어요."
 
강원 화천군 양돈농장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이 발생한 다음 날이었다. 그날 언론에는 100건에 가까운 기사가 쏟아졌다.
 
'강원 화천서 야생맷돼지 ASF 발생…농장 주변 차단방역 총력'(데일리안)
'강원 화천 양돈장서 ASF 발생…긴급 살처분 실시'(농민신문)
'강원 화천서 아프리카돼지열병 발생…1500여마리 살처분'(news1).
 
 
언론에서 전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해당 정밀검사에선 하남면 원천리에 소재한 A 발생농장(사육규모 1569마리) 21마리의 검사 시료 중 4마리에서 양성 개체가 발견됐다...(농민신문). 중수본은 “ASF가 확산하지 않도록 관계기관과 지자체는 신속한 살처분, 정밀검사, 집중소독 등 방역 조치에 총력을 기울여달라”며 “양돈농가는 농장 내·외부 소독, 방역복 착용 등 기본적인 방역수칙을 준수해 줄 것”을 당부했다.(데일리안)"
 
방역 당국이 가장 먼저 언급한 지시사항은 '신속한 살처분'이었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한 첫 번째 지침이 신속한 '죽임'와 '처분'인 것이다. S는 이어서 말했다.
 
"(살처분 관련) 여러 소식으로 조급한 마음이 드는데 집회든 아웃리치든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같이 계획하고 싶으신 분 있으신가요?"
 
그리고 활동가 H가 응답했다.
 
"저요!! 뭔가 할 수 있으면 참여할 마음 있어요!"
 
 
 
삶은 처분될 수 없다
 
활동가들은 살처분을 공론화하기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살처분에 대해 공부하고, 그 시스템 자체를 문제시하며 반대 운동을 기획하는 모임이었다. 
 
"9월 26일, 강원도 화천 지역에 발생한 돼지열병으로 1500명의 돼지가 살처분 당해 땅에 묻혔습니다. ‘축산동물’로 분류되는 동물들은 전염병에 걸릴 시, 인간에게 직접적인 전염 가능성이 없더라도 살처분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발생지 근거리에 있으면 예비 숙주로 판단되어 죽임당하는 '예방적 살처분'을 실시합니다. '예방적 살처분'의 거리범위가 축소되면서 살처분되는 동물의 명수는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이는 여전히 철저한 경제논리에 입각하고 있습니다. 동물권의 시각으로, 살처분이라는 시스템 자체를 문제시하고 공론화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자 합니다."
 
먼저 공부 모임이 시작되었다. 관련 다큐와 논문, 책,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작성한 <아프리카돼지열병 긴급행동지침[SOP]>, 시행령, 방역노동자 실태조사 등의 자료를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는 노션에 기록해서 참여하지 못한 사람도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공부가 진행되면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도 이어졌다. 인간은 병에 걸렸다고 죽이지 않는데, 왜 동물은 죽여야 될까? 왜 어떤 존재는 죽이고 어떤 존재는 죽임을 당할까? 감염 여부로 살처분의 타당성을 결정해도 괜찮을까? 동물에게 백신을 맞혀서 철저하게 관리하면 괜찮을까? 동물보호의 기준이 쾌고감수능력으로 충분할까? 그것과 상관없이 존엄을 이야기할 수 없나? '가축화'자체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지 않나? 공급 과잉으로 가축 동물을 죽이는 경우는? 병 걸렸다고 도태시키는 문제는? 농장동물, 실험동물, 반려동물, 야생동물의 안락사 문제는? 이 모든 것이 거대한 동물착취 산업 전반의 문제라면? 살처분을 담당하는 공무원의 고통은 어떻게 다뤄져야 할까? 동물권과 노동자 인권을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까? 우리의 목소리가 잘 전해지려면 어떤 정치가 필요할까? 선거방식을 바꾸야 할까? 단계적 변화를 위해 중간 목표를 정하는 게 좋을까? 중간 목표로 배제되는 동물들은 어떡하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려면 어떤 액션이 필요할까?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충분할까? 예술적 퍼포먼스는 어떨까?
 
그리고 10월 20일. 또 다른 전염병과 살처분 소식이 들려왔다. 
 
 
[살처분 반대 모임 인스타그램]
 
 
"최근 아시아 지역에서 급속도로 확산하고 있는 럼피스킨병은 제1종 가축전염병으로 소나 물소 피부에 혹 덩어리가 생기는 악성 피부병이지만 사람에게는 감염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병에 걸린 소는 고열과 눈, 코에서 분비물이 많아지고 피부 등에 많은 작은 혹 덩어리가 생겨 생산성 저하, 유량 감소, 불임, 가죽 손실 등을 유발한다. (...) 주변 방역대(10㎞)에는 180여 농가, 7800여 마리의 소가 사육되고 있어 지역 축산 농가는 비상이 걸린 상태다. 시는 곧바로 해당 농장 출입을 통제하고 해당 농가 전체 소에 대해 살처분 전문 업체를 불러 살처분에 들어갈 예정이다." - '[단독] 국내 최초 럼피스킨병 발생... 축산 농가 비상'(충청투데이)
 
활동가들은 공부모임과 더불어 <살처분 반대 액션 - "삶은 처분될 수 없다">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현재 소 농가에서는 ‘럼피스킨’이라는 전염병이 돌고 있습니다. 국가는 이번에도 살처분이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우리는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도태의 대상이 되고 죽음이 묵인되는 구조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소들이 땅에 묻힐 때 ‘한우와 원유 수급 영향’을 염려하는 구조가 폭력적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처분반대모임에서는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함께 액션을 계획하였습니다. 11월 11일 토요일 오후 2시,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는 살처분되는 모습을 재현하며 살처분이 틀렸음을 알리고자 합니다. 다양한 역할로 참여하실 수 있으니 함께 해요!"
 
액션을 함께할 참여자도 모집했다. 살처분 당하는 동물, 방역복 입은 인간, 기록 활동가, 피켓 드는 사람, 사운드 담당 등의 역할이 필요했다. 
 
프로젝트가 한창 진행되는 중에도 나는 선뜻 참여하지 못 한 채 망설였다. 여러 사안들과 복잡하게 맞물려 있는 살처분 문제가 너무 거대해 보였고, 공부 모임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분명하게 답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축산업을 '근절'하는 게 가능할까? '반대'를 외친다고 나아질까? 그러다 스스로에게 이런 의문이 들었다. 확실한 답이 있을 때만 행동할 수 있을까?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져야만 함께할 수 있나? 뭐라도 하는 중에 대안이 만들어지는 거 아닐까?
 
그렇게 머뭇거리는데 단톡방에 퍼포머가 부족하다는 메세지가 올라왔다. 그때서야 나는 뭐라도 해보자는 마음으로 피살처분 역할로 퍼포먼스에 참여했다. 퍼포머로 신청한 사람들은 리허설을 위해 미리 연습실에 모였다. 우리는 퍼포먼스를 기획한 활동가들과 세부적인 연출을 함께 고민하며 리허설까지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2023년 11월 11일. 우리는 서울역 앞에서 다시 모였다.
 
 
[살처분 반대 모임 인스타그램]
 
 
 
살처분 반대 액션
 
2023년 11월 11일. 토요일 오후 2시. 서울역 앞.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전염병 발병으로 인해 반경 500m이내 즉각 살처분, 3km이내 예방적 살처분을 시행합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Due to the epidemic, immediate culling is carried out within a 500m. Preventive culling is carried out within a 3km. Please cooperate for everyone's safety."
 
방역복 입은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동물들을 강제로 끌고 온다. 비닐이 덮여진 구덩이에 동물들을 묻는다. 동물들이 쓰러지고 널부러진다. 고통스러운 몸부림, 비명소리가 이어진다. 방역복 입은 사람들이 비닐로 동물들을 덮는다. 그리고 그 위에 흙을 쏟는다.
 
"정부는 현재 전염병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경제적 손실이 없도록 살처분 보상금을 지급하는 등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The government is now effectively controlling the epidemic. We will do our best, such as paying compensation for the culling so that there is no economic loss to our people."
 
 
 
 
사회자 : 9월 20일, 이탈리아 경찰이 생추어리에 침입해, 그 곳의 거주민은 돼지들을 살해했습니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병하여 ‘살처분’을 시행한 것입니다. 현재 소 농가에서는 ‘럼피스킨병’이라는 전염병이 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번에도 살처분이라는 방법을 택했으며, ‘한우와 원유 수급 영향’을 염려합니다. 몇 일 전, AI, 즉 조류인플루엔자가 발생했고, 국가는 수많은 조류들을 살처분했습니다. 살처분은 육상동물부터 수생동물까지, 축산동물부터 수산동물, 실험동물, 야생동물, 동물원에 감금당한 동물들까지, 모든 비인간동물을 대상으로 시행됩니다. 생매장(매몰), 가스 살해, 독살, 폭행으로 인한 살해, 전기 도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시행됩니다.
 
 

[다 같이 구호]

 
인간이 아니라서 / 죽였다
약하다고 / 죽였다
아프다고 / 죽였다
병에 걸렸다고 / 죽였다
장애가 있다고 / 죽였다
자본을 아끼려고 / 죽였다
생명을 도구화하는 시스템이 / 죽였다
죽음이 이윤이 되는 구조가 / 죽였다
살해를 외주화하며 / 죽였다
비국민과 용역에게 떠넘기며 / 죽였다
우리가 살아갈 땅도 / 죽였다
 
 
 

 

 

 

[성명서 낭독]

 

국가의 살처분에 대한 살처분 반대 모임의 입장입니다.

 

하나, 우리는 병의 특징, 질병의 인간종에게의 전염 여부, 질병의 치사율, 비인간동물 당사자의 질병 감염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살처분에 반대합니다. ‘예방적’ 살처분이어서, ‘과도한’ 대처이기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병에 걸린 존재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건강하지 않은 존재도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쾌고감수능력과 무관하게, 비인간동물과 인간동물, 모든 동물에 대한 착취에 반대합니다. 고통을 느끼는 지 여부도 인간중심적인 시각으로 임의적으로 판단한 것이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고 죽이거나 착취해도 되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떠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에 부합하는 존재는 ‘보호’하고, 부합하지 않는 존재는 배제하는 권력을 경계합니다. 타자의 고통도 자의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기에, 죽는게 낫다고 판단하는 권력을 경계합니다.

 

하나, 살처분이 폐지되기 위해서는 동물산업이 철폐돼야 합니다. 축산업, 어업, 동물실험을 시행하는 산업, 야생동물 납치 살해 및 거래 산업, 비인간동물 전시 및 감금 산업 등을 비롯한 동물산업의 철폐 없는 살처분 폐지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속 가능한 축산업, 어업, 동물실험, 동물원 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동물복지 농장, 동물산업의 존속을 위한 백신 등은, 인간의 자본 축적을 위해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는 전제 아래에서의 ‘대안’입니다. 인간이 비인간동물을 착취하는 이상, 동물복지는 없습니다. 살처분의 폐지는, 비인간동물을 착취하는 구조를 유지하는 "동물복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살처분을 "동물복지"의 문제로 바라보는 프레임을 전환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 우리는 살처분이 일어나도록 하는 착취적이고 위계적인 구조를 무너뜨리고자 합니다. 살처분을 시행하는 주체는 공무원에서 비국민 노동자와 용역으로 바뀌었습니다. 내몰려있는 비인간동물을 살해하는 것에 반대하듯, 내몰려 있는 이들에게 살해를 외주 주는 구조에 반대합니다. 살처분은, 축산업 등 동물산업의 피해를 줄이려고 개인의 재산을 국가가 처분하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인간과 비인간에 대한 구분이, 가축과 가축이 아닌 동물에 대한 구분이 위계를 만듭니다. 현재의 ‘가축’은 인간에 의해 강제로 개변된, 취약하고 장애화된 신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축'을, 건강하지 못하다는 근거로, 질병에 감염됐다는 이유로 죽입니다. 농장동물의 재생산 능력이나 장애가 있는 동물들이나 생산력이 떨어지는 동물에 대한,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 존재에 대한 ‘선제적 도태’도 살처분입니다. 출생부터 질병의 감염, 살처분까지,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자본주의 논리대로 굴러갑니다. 감염된 사체와 폐기물을 값싸게 처리하기 위해, 사료로 만들거나 땅으로, 수로로 버립니다. 그 경로로 또 다른 동물들이 감염되게 되고, 그들은 다시 살처분됩니다.

 

하나, 우리는 누군가의 몸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구조에 반대합니다. 사유재산의 가치가 떨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 살처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취지 자체가 불평등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국가는 특정 비인간동물을 '가축'으로, '가축'을 '식량'으로, ‘식량’을 사유재산으로 여기며, 공급가격을 조정합니다. 비인간동물, 그리고 식량은 사유재산이어서는 안 됩니다.어떤 존재가 어떤 존재를 죽여도 되는 대상으로 정하는 사회에 저항하고자 합니다. 동물착취가 자본주의내에서 산업으로 번역되는 한 살처분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살처분이 존재하는 이유는, 생명을 도구화하고 피해자의 피해가 가해자에게 이득이 되는 구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도태의 대상이 되고, 죽음이 묵인되는 구조가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불가피하다'는 말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살처분반대모임은 인간을 위해, 경제성을 위해 비인간 동물을 죽여도 된다는, 비인간동물을 '처분'할 자격이 인간동물에게 있다는 전제 자체를 재고하기를 촉구합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11월 11일
살처분반대모임.

 

 

 
 
그리고 연대발언이 이어졌다. 나도 준비한 발언문을 낭독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살처분 반대 액션에서 살처분 당하는 동물로 참여한 인간 동물입니다. 저는 조금 전에 방역복 입은 인간에게 끌려가서 비닐이 덮여진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제 몸 위로 흙이 마구 쏟아졌고 저는 숨이 막혀 고통 속에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저는 오늘 액션을 통해 땅 속에 묻힌 동물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 곳은 실제 살처분 현장이 아니라 집회 신고를 마친 서울역 광장이고, 저는 대한민국 사회 안에서 보호 받고 있는 인간 시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치면 치료를 받을 것이고, 죽으면 애도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저는 그들의 죽음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럼피스킨 병으로 이미 살처분되었거나 살처분 예정인 동물이 총 5766명이라고 합니다. 왜 누군가의 죽음은 애도되지 못하고 처분되어야 할까요? 왜 누군가의 죽음은 부고란에 이름이 실리지 못하고 5766이라는 익명의 숫자로 처리되어야 할까요? 왜 누군가의 질병은 끝까지 치료하려 하지 않을까요. 왜 누군가는 '예방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고 살해되어야 할까요. 왜 그들의 죽음은 기억되지 않고 땅 속에 파묻힐까요. 
 
저는 그들의 죽음이 나의 생존과 분리될 수 없기에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동물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몸부림치며 저항하는 모습을 봅니다. 이 세상에 죽여도 되는 동물은 없기에, 땅 속에 처분된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저는 가축 동물들의 살처분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조건을 함께 만들어가기 위해, 여러분의 관심과 행동을 촉구합니다."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같이
 
<살처분 반대 액션>을 마치고 우리들은 소품으로 활용한 흙을 조금씩 나누어 가져갔다. 누구는 화분에 뭘 심어보겠다고 했고, 누구는 퍼포먼스를 다시 한다면 그때 가져올 거라고 했다. 나도 포대 하나에 흙을 가득 담아 집으로 가져왔다. 누굴 죽이는 흙이 아니라, 살리는 흙으로 다시 쓰고 싶어서. 쓰러진 몸 위로 쏟아진 흙을 기억하며, 지속적인 관심과 행동을 스스로에게 촉구하고 싶어서.
 
'뭐가 될진 모르겠지만, 같이' 무언가를 시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어서. 머뭇거리고, 망설일지라도.
 
 
 
 
 
 
** 퍼포먼스 사진은 살처분 반대 모임 참여자가 함께 기록하였습니다. 
 
 <살처분 반대 액션> 퍼포먼스 영상 
댓글 6
  • 2023-11-23 10:08

    머뭇거리고, 망설일지라도
    경덕님이 걷는 그 길을 응원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2023-11-23 11:50

    경덕님 몸 위에 쏟아졌던 그 흙이 다른 생명을 살리는 흙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됩니다.

    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알전구에 똥칠한 벽에 피 튀길 새도 없이/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넘기를 할 새도 없이/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리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내 입안의 살을 물어뜯을 새도 없이/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 새도 없이/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을 새도 없이/포승줄도 수갑도 없이(김혜순, '피어라 돼지' 일부 인용)

  • 2023-11-23 17:06

    뭘 하기엔 너무 거대하고 복잡해서 엄두가 나지 않는데, 그래도 뭘 하는 사람들이 있네.

  • 2023-11-23 17:29

    쌤이 던진 많은 질문들에 머뭇머뭇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3-11-23 21:13

    망설이며 머뭇거리면서도 경덕님이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과 같이 걷는 그 길, 저두 응원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 2023-11-24 14:13

    불가피함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라는 점, 모든 발언문들이 언제나 우리의 전제를 재고하고 촉구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 깊이 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조치나 정답이나 반성이 아니라 머뭇거림과 고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지난 4월 13일과 14일 낮 최고 기온이 27.3℃와 29.4℃였다. 아직은 이른 봄인데, 기온은 한여름이다. 작년보다도 더 빠르게 더워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햇빛의 강도가 작년과 또 다르게 더 강렬했다. (올해는 새로운 패턴이 생긴 것도 같다. 너무 일찍 더워졌다가 또 급하게 온도가 내려가 평년보다 더 쌀쌀해진 느낌이다) 그런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는 나는 겁이 났다. 정말 지구가 불타오르는 것 아닐까 해서다.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아이들이 엄청 더워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괜스레 미안해지고 안쓰러웠다. 기후변화가 시작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고, 이제 기후위기라고 한다. 이런 지구를 물려주는 어른으로서 나는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번 어린이날 행사에 참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하며 또다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친구야 노~올자     2024년 5월 5일 제102회 어린이날, 우리 동네에서는 제17회 금천어린이큰잔치 ‘친구야 노~올자’ 행사가 열렸다. 이 행사는 2007년부터 시작된 마을 행사이다. 우리구는 1995년 구로구에서 분구된 후 ‘금천구’라는 정체성을 찾는데 시간이 좀 걸린 것 같다. 그래서 어린이날 행사도 한동안 없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은 신도림 가로공원에서 열리는 어린이날 행사까지 다녀와야 했단다. 그런 상황을 보고 ‘나서는 어른들’이 있었다. 우리 동네 어린이들도 우리 동네에서 놀게 하자고. 그런 어른들의 제안으로 2007년 처음 금천구에도 어린이날 행사가 생긴 것이다. 전교조, 노동조합, 청년회, 진보정당 등 지역의 여러 단체가 첫 행사를 준비했다. 처음 열린 행사에서는 이주노동자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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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단순삶
2024.05.20 | 조회 161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남어진
2024.05.10 | 조회 203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오영
2024.05.09 | 조회 191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인디언
2024.05.07 | 조회 355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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