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길 산책하기
1.쉴 곳을 찾아서
‘어디나 숨을 곳은 있다. 그런 은신처를 찾아내면 괴로울 때에도 ’있기‘를 계속할 수 있다. 은신처가 우리의 ’있기‘를 지탱하는 것이다’ (「매일 의존하며 살아갑니다」. 도하타 가히토. 290쪽)
퇴근길 집에 들어가기 전 산책을 했다. 집 근처 성당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짧게는 30분, 어느 날은 1시간가량 성당 근처를 걸었다. 성당 근처는 낮은 산이 있는 공원과 산책로, 전원주택 단지로 이루어져 있다. 전원주택 단지는 조그만 카페 거리와도 이어져 있다. 산책을 하는 시간은 퇴근 후 대략 4시 반에서 여섯 시 정도까지의 시간, 저녁 시간 전이었다. 처음부터 성당 근처를 산책하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다. 2~3주 전부터 끊었던 담배를 간간히 피우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가기 전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시작했고 인적이 드물어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을 그런 장소가 필요했다. 성당 근처 공터가 적절해 보였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행인이 있긴 하지만 주차된 차를 가림막 삼으면 그럭저럭 눈에 띄지는 않을 것 같았다. 공터 벽 맞은편으로 피었는 가을 꽃들과 푸른 가을 하늘을 보고 있으면 혼자만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그 잠깐의 시간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성당 근처 공터는 나에게 지난 몇 주간 은신처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지난 몇 주 그런 시간들을 간간히 가지면서 ‘그냥 혼자 가만히 앉아 있었던 시간이 나에게 별로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산책을 하고 나서 혹은 산책 후에 담배를 피울 수 있을 것 같아 주차를 하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2. 나에게 주는 시간
‘사색적 삶의 형식은 ’머뭇거림, 느긋함, 수줍음, 기다림, 자제‘처럼 후기 하이데거가 ’오직 일만 하는 어리석음‘에 맞세운 존재 양식과도 동일한 것이다.’ (「시간의 향기」, 한병철, 150쪽)
학교와 집, 그리고 가끔이긴 하지만 교사 모임, 문탁에서의 글쓰기 모임까지. 일상은 바쁘게 돌아갔다. 그 바쁨 속에서 나는 내 앞에 주어졌다고 생각한 길을 정신없이 따라갔다. ‘나는 그래도 나름 충분히 많이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어느 날 새벽 내가 본 남편의 비밀스러운 문자는 나로 하여금 ‘멈춰서게’ 했다. 나는 ‘멈춰서야’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떻게 해야하지? 나는 어떻게 살고 있었던 걸까? 갑자기 내가 그동안 너무 ‘바쁘게만’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혹은 피곤하다는 이유로 혹은 나는 이런저런 모임을 하니 ‘이걸로 충분하다’는 이유로 나는 ‘단순히 꽉 찬 것’을 ‘충만함’으로 혼동 (「시간의 향기」, 한병철, 32쪽)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나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진 시간이. 서툴지만 뭔가를 머뭇거리며 ‘생각’해볼 시간이. 퇴근 후 잠깐의 산책 시간이 나에게 여유를 조금 가져다주었다. 마음만 먹으면 낼 수 있었던 시간-비록 그 시간이 아주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이었는데 나는 그동안 ‘바빠서 산책할 시간이 없다’고만 이야기했다.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걸까?
3. 산책하며 느꼈던 것
내가 산책을 한 시간은 저녁이 어스름하게 다가오기 전의 시간이었다. 어떤 날은 걷고 있다가 평편한 공원 뒤로 붉은 노을이 넓게 퍼지는 것을 보기도 했고, 어느 날은 카페 거리에 전등이 하나 둘 켜지는 것을 보기도 했다. 저녁 시간 전이어서인지 공원과 주택 단지 산책로에는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목줄에 묶인 개를 데리고 걸었다. 이 시간대에 산책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들의 모습이 여유롭고 잔잔해보였다. 공원 뒤쪽으로 자리 잡은 산은 이제 붉거나 노랗게 물든 낙엽들이 많이 보였고 약간 쌀쌀한 날씨는 나로 하여금 덩달아 차분해지게 하는 감성을 안겨주었다. 나는 내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 가을을 여느 다른 계절들보다 매력적으로 느끼고 있구나 생각했다. 어느 날은 노을도 지고 어둑어둑해질 무렵, 바람결에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와 새 소리가 들려왔다. 늘 자동차 소리, TV소리와 같은 인공적인 소리에 둘러싸여 있다보니 오랜만에 들어보는 느낌이었다. 공원 옆쪽으로 조그맣게 자리잡은 카페 거리에서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낙엽을 밟아보며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저렇게 뭐든 해보게 하고 싶을 때가 있었지.’ 엄마와 아이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카페 거리 주차장에서 한 남자가 담배를 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요즘은 길거리에서 담배 피우는 모습을 잘 볼 수 없는데 ‘남자’여서 조금 더 당당한걸까 생각했다. 나는 외진 공터에서 담배를 피울 때도 인기척이 나면 ‘그 사람이 나를 못 보았으면’ 하는데, ‘내가 여자여서 과도하게 의식하는 걸까’ 생각했다. 사실 내가 담배를 피운다한들 아무도 뭐라고는 못하겠지만.
겸목샘이 무념무상으로 걸어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냥 걸었다. 아주 천천히. 푸른 하늘도 올려다보고, 떨어진 낙엽도 줍고, 카페도 기웃기웃 거려보면서. 가만히 앉아 꽃도 보면서.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겐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냥 ‘머뭇거림’의 시간, ‘알 수 없음’의 시간을 내 안에서 가져보려고 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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