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네에서 살고 산책을 한다는 것.

비료자
2023-11-04 15:17
346

                                                                이 동네에서 살고, 산책을 한다는 것.

 


//지난번 4차시의 과제로 ‘설계자의 목소리’ 라는 호수공원 산책기를 썼는데 그 글이 느낌이 전해지지 않는 ‘경탄’에 그친다는 평이 있어서 이번에 다시 썼습니다. 그 '간극'이 우리가 글을 쓰며 줄여가야 할 지점인 것 같다고 조언을 듣고 썼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 흑백 텔레비전을 봤는데 제목을 잊은 뮤지컬에 소녀가 등장해 이렇게 노래하고 춤을 췄다. “나의 소원은 방 한 칸. 찬 이슬을 막아주는, 따슨 손 따슨 발 아~아~ 그 얼마나 좋을까. 산더미같은 장작불을 피워 놓고…” 지금도 그 장면, 멜로디와 가사가 생생하니,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화면에 몰입을 했을 것이다. 그 표정을 본 큰오빠가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네가 바라는 게 저거지? 게을러 빠진 게 딱 너 같구나” 나는 무안하여 그런 소원을 품는 게 나쁜 거, 과분한 것인 줄 알았다. 온 집안 식구가 방 두 칸에 몰려 살던 현실에서 물론 과분했지만, 그래도 계속 그 소원을 품고 살았다. 저렇게 빈정대는 오빠들이 없는 나만의 방, 냉정하고 무심한 부모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따뜻한 방, 예쁜 것들이 있는, 나를 배려한 공간을 소원했다.

 

모두 가난하고 없는 시절이었지만 특히 없었던 건 먹고 사는 이외의 것들, ‘무용하나 아름다운 것들’ 이었다. 안락한 의자와 예쁜 테이블, 재미있는 책들이 가득한 방, 맛있는 간식과 커피, 포근한 침대, 꽃과 나무들, 친구와 한없이 수다를 떨 수 있는 아름다운 조경, 그 일부가 되고 싶은 풍경 등 나 혼자, 또는 친구들과 사치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한 뼘의 여유공간도, 배려도 없이 사람들이 바글대는 서울 변두리 난민촌에서 나는 그런 소망을 품은 채 가끔 ‘다방’에서 ‘레지’들의 눈총을 받으며, 퀴퀴한 냄새를 참으며 연인을 만났고, 친구와 수다를 떨었다. 아주 가끔은 막 생긴 종로나 광화문의 카페, 경복궁이나 덕수궁, 삼청공원, 혹은 멀리 강촌까지도 갔었지만 일상의 공간은 아니었다. 나의 소원 방 한 칸, 이 갖고 싶어 결혼을 했지만 그땐 나 자신도 정확한 내 소원을 몰랐다. 나의 소원은 방 한 칸, 이 아니라 나만의 방 한 칸이었는데… 그러니 결혼 말고 아파트 전세로 독립해 사는 게 답이었던 거다. 하지만 그 시대의 누가 그걸 깨달았으랴. 결혼하니 부모님, 형제들은 없지만 나만의 방 한 칸은 안 나왔다. 아이를 낳고, 시댁식구들 들락거리며 인구밀도는 오히려 높아지고, 시간은 그걸 깨닫지도 못할 만큼 바쁘게 돌아갔다. 어쩌다 집 밖에서 찾는 공간은 집 앞의 손바닥만한 어린이 놀이터(벤치가 두개나 있었다), 혹은 사람들이 바글대는 삼겹살집, 맥줏집, 분식집이 고작이었고 그땐 분위기 좋은 카페, 라는 것도 드물었으며 그럴 시간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자라고, 이사를 여러 번 다니기도 했지만 시간도 돈도 늘 부족해서 ‘나를 위한 공간’을 찾을 여유가 없었다. 남편 명의로 집을 사도 안정감이 없었고 내 명의로 집을 사도 언제고 떠날 공간 같았다. ‘평생 살 내 집’이란 자본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얼간이의 소박한, 구태의연한 야심이라니까 살고 있는 집의 시세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팔아야 할 시점, 사야 할 시점을 고민해야 했다. 그래서 가구를 최소한 장만했고 언제든 버리고 떠나도 괜찮을 싸구려만 사서 대충 놓고 살았다. 하지만 부동산의 흐름에 걱정만 했지 자본도, 시간도, 야심찬 결심으로 일을 벌리고 볼 배짱도 없는 나는 집을 사야할 때 팔고 팔아야 할 때 사는 엇박을 반복했다. 게다가 남편은 그런 집을 담보로 대출을 일으키는 재주 밖에는 없었으니 몇 번의 엇박과 짐작조차 못할 빚더미로 집 안에 앉아 있어도, 집 밖에 나가 걸어도 불안했다. 빚의 규모를 짐작 못하는 이유는 남편이 폭발 직전까지 내막을 불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이는 들어가고, 낙관과 비관을 쓸모없이 오가며 그저 심신이 불안에 몰리니까 입면환각과 출면환각을 경험하게 됐다. 잠이 들면 내 영혼이 몸 밖으로 나와 방안을 헤매거나 (입면환각) 존재감이 분명한, 죽은 악령의 사악함이 숨을 눌렀다. (출면환각) 결국 방 두개의 좁은 집, 월세를 사는 무주택자로 결론이 났는데 그러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언제 다 갚을지는 몰라도 빚의 규모가 파악이 됐고, 남편은 더 이상 빚을 얻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제 내가 일하고 또 일하면 되는 것이다. 출면환각은 사라지고 입면환각은 강화됐다. 아주 피곤한 날이면 내 혼이랄까? 정신이랄까, 이것이 차츰 방 밖으로, 집 밖으로, 동네를, 거리를 헤매고 날아다녔다. 나는 도시를 그렇게 산책했다. 일년에 서너번이지만 나에겐 이것이 진짜 ‘산책’ 이었다.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래도 거기는 나에게 운이 들은 집이다. 거기 살면서 대충의 빚을 갚았고, 아이들을 결혼시켰고, 남편은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고, 평생 나와 얽혔던 시댁과의 질긴 인연을 끝냈다. 이것만 해도 황송한데 나 혼자 이리저리 뛰던 그 와중에, 투석과 수술을 받은 남편이 큰 일을 해 냈다. 어느 날, 늘 그랬 듯 10시 넘어 집에 들어가니 남편이 싱글벙글 웃으며 “나 오늘만큼은 당신한테 칭찬받을 일을 했어. 내가 큰 일을 했다구!” 라고 말했다. 뭐가? 남편은 그동안 임대주택 아파트 신청을 계속 했으며 드디어 당첨이 되었다는 거다. “거기는 지금 이 집하고 비슷한 크기야” 그 말에 집을 둘러보니 에구.. 이 손바닥에서 저 손바닥으로 가는 셈인데 다만 이사 갈 걱정 안 해도 되는 모양이다 하고 말았다. 받은 날 거기로 이사를 가면 되겠네.

 

그런 ‘거기’가 지금 사는 곳이다. 빌라와는 견줄 수 없이 반듯한 아파트 단지 관리실에서 열쇠를 받아 현관 문을 열어 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한다. 집은 2층 서향. 늦은 가을 해가 찬란한 베란다 넓은 창에는 나뭇잎들이 가득하여 온통 노랗거나 붉은 가을 빛인데 바로 아래가 개울로 이어지는 산책로라서 눈부시게 파랗고 넓은 하늘이 가득 펼쳐졌다. 첫 눈에 반했고, 이 집에 맞춰 붙박이 가구들을 주문했다. 나는 드디어 내 집을, 내 방을 갖게 된 것이다!!! 평생 물에 뜬 풀처럼 가느다란 뿌리를 있는 힘껏 내밀어 흔들리며 어디든 무엇이든 잡으려고 애쓰던 불안의 시간은 드디어 끝났다. 나는 집 값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아도, 평생 그렇게 살아도 되는 것이다!!! 서쪽으로 난 베란다는 늦잠을 자고 일어나 커피를 마시기 딱 좋은 시간에 해가 든다. 내려다보면 나무와 풀, 산책길이 보인다. 아파트 후문 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현관을 나서 아파트를 끼고 돌아 산책길에 접어든다. 하천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바로 커다란 나무들이 아치를 그리는 수원 둘레길이 나온다. 달큰한 공기가 가득한, 풀과 나무가 우거진 개천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원천 호수 공원 초입이다. 커다란 소나무들이 한쪽에 길게 군락을 이루며 따라온다. 저수지 시절부터 있던 소나무들 가운데 크고 잘생긴 소나무들을 골라 옮겨 심으며 군락을 만든 듯. 이 공원의 조경은 걸을 때마다 디자인을 누가 했을까 궁금해진다. 어디를 봐도 눕거나, 앉거나, 서서 걷기 좋은 공간들이 편안하고 부드럽게 이어진다. 호수를 둘러싼 빌딩들과 조경의 경계가 느껴지지 않게 연결되며 자연스러워 몇 십년 전만 해도 오리배와 모터보트가 떠 다니던 촌구석 저수지였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여긴 처음부터 이렇게 사람과 도시와 자연이 어울리는 공원이었고, 앞으로도 이 사람들, 이 건물들이 영원할 것 같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이 공간에 나도 있는듯 없는듯 흐르며 존재해도 된다. 호수 여기 저기에 잔디와 작은 규모의 화단들, 몇몇이 모여 앉을 만한 평상들, 혼자 혹은 여럿이 앉기 좋은 의자들이 풍경과 어우러지며 나무처럼, 풀처럼 놓여있다.

 

이 공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정경은 세 군데에서 보인다. 다른 때도 좋지만, 오전 10시까지 제일 좋은 곳은, 초입에서 제일 높은 경사로를 택해 차도를 건너면 나오는 엘리웨이 상가의 옥상이다. 3층 옥상조경은 호수공원이 보이는 쪽의 바닥을 50센티미터 정도 높이고 기르기 쉬운, 잡풀처럼 보이는 긴 풀들과 그리 귀하게 보이지 않는 나무 몇 그루를 심어 조성했다. 가운데 공터에는 야외 테이블 세트 열개 정도를 놓았는데, 언제 가더라도 거의 사람이 없다. 여기 앉아 풀과 나무들 너머 호수를 바라보며 아침 커피를 마시는 조용한 기쁨. 오후에 좋은 곳은, 여기서 호수 산책로로 내려가 20분쯤 걸으면 닿는 수원 컨벤션 센터다. 자기 돈을 들여 이런 공간을 만들라면 누가 만들겠는가. 컨벤션 센터는 늘 한적하고 반듯하고 쾌적하다. 3층 건물 벽에 놓인 의자를 들어 호수 쪽으로 난 베란다 공간에 놓고 앉으면 오후의 호수는 차분하고 소박하며 우아한 모습을 하고 있다. 거기서 다시 호숫가를 따라 돌면 광교 푸른숲 도서관과 갈림길이 나오는데, 바로 그 지점에 테이블 세트가 놓여있다. 호수 전체를 볼 수 있는, 늘 바람이 부는 그곳은 해 질 무렵이 가장 아름답다. 진홍빛 커다란 해가 주변을 군청색으로 물들다가 떨어지는데, 금방 어두워진다. 혼자 걷는 산책은 뭘 보든, 어디 머물든, 어떤 속도로 걷든 내 마음이다. 나는 여기서 안전하게 사람이나 사물과 거리를 유지하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을 잊는다. 결국 모두는 사라지고 이곳은 폐허가 될 것이며 사람들마다 다른 시간과 사연들이 있겠지만 알고 싶지 않다. 그저 혼자 있는 이 순간이 자유롭고 한숨이 나오도록 행복하다. 겨우 세상에서 내 공간이 확보된 이 곳이 이리도 좋으니, 나는 죽어 이곳의 지박령이 되는 걸까.

 

하지만 해 지고 어두워지도록 앉아 느끼는 기쁨은 그런 집착이 아니다. 오영수의 단편 갯마을에서, 홀어미로 해순이를 기른 엄마가 해순을 그리도 원하던 성구에게 시집 보내고 “너 때문에 십년 넘게 고향 땅을 못 밟았다” 며 홀가분하게 제주로 떠난다. 일제시대가 배경으로, 모녀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인데… 세상의 권세를 모두 가진 건륭제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애를 태우던 향비. 건륭제의 모후는 황제가 사냥을 나간 사이, 아들의 사랑을 받아주던지, 아니면 독을 먹으라고 향비에게 내밀었더니 그녀는 아주 기쁘게 그걸 먹고 죽었다는 일설이 있다. 만화 ‘치키타 구구’ 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심장에서 흐르는 전류 같은 것을 먹고 사는 요괴 오르그가 나온다. 그 오르그의 말이, 죽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삶에 아쉬움 없이, 남은 사람들에 대한 걱정도 흐릿해지며 다만 만나서 감사하고 행복했다는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깊이 공감했다. 대개 어떻게 살았든 태어나길 잘했다, 하며 죽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다시 태어나고 싶어 윤회, 라는 것을 거듭하지 않을까? 나는 만화가의 말을 믿고, 소설이나 야사 속에 등장하는 그들의 마음과 같고 싶다. 나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더 크고, 더 아름답고, 상상할 수 없이 근사하게! 그러니 다음의 길은 이보다 더 나아가는 멋진 길이 되지 않을까? 언젠가 입면환각에서 봤던대로 짙푸른 숲을 지나 넓은 초원을 넘어 하얀 구름이 걸린 산꼭대기로 날아가던 그 멋진 경험이 내 다음의 여정이라고 믿는다. 그 입면환각을 마지막으로, 불면증은 남았지만 환각은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그게 내 미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난 지금이 너무 좋지만, 그러기에 다음의 여정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 지박령으로 묶이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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