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 (정임합목형) 무진장 실험

musa
2023-10-31 21:02
405

 

(정임합목형) 무진장 실험

 

2023.10.31. 정화편

Designed by Cho-hui

 

 

 

 

 

(앞으로 꽃길만 걷고 싶은) 백수 꿈나무

살림의료사회적협동조합 조합원, 희망법/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한국성폭력상담소 후원회원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던 임수를 꼬드겨 '쫌 다른 가족-되기' 실험 중

소박하게 꾸린 정임합목 양생하우스에서 앎과 삶에 관해 질문하며 살고 있다.

 

 

2024 제주 일년살이

 

추석 연휴에 임수와 제주 여행을 다녀왔다. 조천 바닷가 부근 한 곳에만 오래 머물렀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햇살 가득한 바닷가 산책을 하고 요가를 했다. 충분히 쉬면서 (읽어야할 책 말고) 읽고 싶었던 책을 읽었다. 설렁설렁 동네길을 걷고 동네 이모네집(옥이이모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짐은 단출했다. 캐리어 두 개와 간단한 음식만으로 보름을 사는데 크게 불편함은 없었다. 한림 <달리책방>에 가보기도 했다. 이곳에서 올 3월 문탁샘(<이반일리치 강의>)과 기린샘(<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의 북토크가 열렸었다. 쥔장분들(달리님, 어리님)은 명절 첫 손님이라며 반갑게 맞아주셨고 대화는 1박 2일 동안 종횡무진 이어졌다. 루틴 보살의 사주토크, 북토크 뒷이야기, 책이야기, 나무이야기를 하며 일상을 나누었고, 맛집에서의 저녁 식사, 해장국, 느지리오름 아침 산책, 커피까지 더할나위 없는 시간이었다. 섬에서 명절을 보내는 이들을 위한 <무조리실>의 제주토박이 명절정찬도 감사한 식사였다. 이뿐이랴. 함덕 서우봉에서 바라본 슈퍼문, 붉은오름 정상에서 마주한 오름군 파노라마, 친구들이 소개해 준 사라봉, 별도봉의 산책길도 참 예뻤다. 바로 이 별도봉 산책길에서 작당모의가 시작되었다. 제주도립미술관 국제특별전 전시 주제(이주하는 인간, Homo migratio)마저 우리의 등을 떠밀었다. 그동안의 제주 여행은 '또 와야지'하는 막연한 제주앓이로 끝났었는데, 이번 여행은 '2024 제주 일년살이!!'라는 야심찬 계획으로 이어졌다.

매일 아침 숙소 앞 바닷가 산책을 했다. 임수가 많이 좋아했다.

 

우리의 소원은 토일~​

 

올 3월 2일로 기억한다. 백수가 된 지 1일째 되는 날이었다. 새벽 산책을 다녀와서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각자 출근복(임수)과 일상복(정화)으로 갈아입었다. 그 순간 망연자실해하던 임수의 표정이 떠오른다. 그 표정에는 아마도 '정화가 진짜 퇴직을 하긴 했구나. 나만 출근을 해야하는구나. 흑ㅜㅜ' 같은 심정이 담겨있지 않았을까. 퇴직 이후 한동안은 표정관리를 했다. 내딴에는 임수가 부러워하지 않도록 조심한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왜 아니겠는가? 나 역시 직장인이었을 때 소원은 통일, 아니 토일(토요일, 일요일)이었으니 말이다.

제주에서 1년을 살기 위해서는, 우선 임수가 지금 다니는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 퇴직 후 둘이 함께 공부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대략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할까? 정임합목 양생하우스를 꾸릴 당시만 해도 임수의 이른 퇴직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번내쓴'을 전제로 한다면 내가 그동안 저축한 돈은 넉넉하지는 않더라도 크게 부족하지도 않았다. 내친김에 은퇴 후 예상되는 한 달 생활비를 헤아려 보았다. 역시 지금 가진 자산만으로 우리 둘이 함께 생활하기에는 조금 부족했다. 정임합목 톡방 공지사항에도 내역을 올려놓았다. 분명 임수도 보았을텐데 이틀동안 이렇다할 언급이 없었다. 사흘이 지나고나서야 임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살짝 현타가 왔다고. 퇴직하고픈 마음이 앞서 전후 사정에 대해서는 세심하게 들여다보지 못했는데, 객관적 수치로 정리된 표를 보고 있자니 자신이 신세를 지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고. 미안한 맘도 들었다고 했다. 정화가 직장생활하는 내내 아껴 모은 돈인데... 혼자 쓰면 좀 더 여유있게 쓸 수 있을텐데...라며.

 

 

2023 백수 오딧세이​

 

많은 것이 불투명했던 직장 신입 시절. 그래도 2023년에 꼭 퇴직하겠다는 결심 하나만큼은 명확했다. 내가 쓰는 아이디나 메일 주소에 '2023'이 붙어있는 이유다. D-5000부터 디데이 카운트를 했던 것 같다. 신입 때는 월급의 50%를 저축하기도 힘에 부쳤지만,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연봉이 오르면서부터는 월급의 70% 이상을 저축할 수 있었다. 백수생활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모았고 마침내 올해 퇴직할 수 있었다. 반면 임수는 대학원을 마친 후 직장생활을 한지 이제 9년. 임수 역시 누구보다 아끼며 저축했지만, 재직기간이 길지 않다보니 우리 둘의 저축액에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몇년 전 집을 사느라 대부분 지출했고, 대출도 받았다. 그래도 우리 성실한 임수는 내년 8월이면 남아있는 대출금을 다 갚는다.

현상분석을 끝내고보니 '2024 제주 일년살이'의 꿈은 조금 멀어져 있었다. 열망에 취한 나머지 우리 둘다 현실감이 떨어져 있었나보다.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임수의 퇴직을 위해서는 세 가지 선결 과제가 있었다. 우선, 백수 두 마리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돈이고, 다음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나 불안감을 줄이는 것,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미안해하거나 상처를 주지 않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둘다 물욕이 강하지 않다. 유행에 둔감하며, 편하고 부담없는 물건을 좋아하는 실용파다. 일년 전 이사오면서 인테리어도 최소한만했다. 떡하니 멀쩡하게 붙어있는 타일을 오래됐다는 이유만으로 뜯어낼 수는 없었다. 썩지도 않을 폐기물들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중력에 못이겨 떨어질 때까지는 쓰기로 했다. 신기하게 각자 쓰던 전자제품도 냉장고 빼고는 겹치지 않아서 버리거나 교체하지 않고 합방이 가능했다. 예를 들어 정화에게는 통돌이 세탁기가, 임수에게는 건조기가 있는 식이었다. 새 물건에 대한 욕망이 별로 없다는 것, 돈을 벌어서 얻고 싶은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은 이른 퇴직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욕망과 함수관계이니 욕망을 줄이면 필요한 돈의 양 역시 줄어들 것이다.

우리집엔 그 흔한 꽃병 하나가 없다. 잼병이다.

 

(정임합목형) 무진장 실험

 

두번째와 세번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부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정임합목 공동퇴직을 위한 프로젝트. 이름하야 '(정임합목형) 무진장*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 무진장이란 문탁네트워크에서 실험 중인 비자본주의적 공동생활기금으로 자본주의체제를 심화시키는 사적 소유를 흔들기 위해 2016년 11월(정식출범 2017년 4월) 문탁회원 24명이 각 50만원씩을 추렴하여 조직했다.(<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 122-123)

정임합목 양생하우스를 꾸리고 살림을 합치면서 기존에 쓰던 전자제품을 자연스레 합방시킨 것처럼 자산을 넘어 마음까지 합방하는 퍼포먼스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있는만큼 내놓고 함께 쓰려면 마음의 부담을 덜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놓는 마음도 쓰는 마음도 모두 신뢰와 우정을 바탕으로해야 지속가능하다. 이역시 그간 문탁에서 공부하면서 배운 증여와 순환의 정신이면서 정임합목이 함께 살며 터득한 돌봄의 기술이기도 하다.

내년 8월 임수가 대출을 다 갚는 시점으로부터 3년을 기산하기로 했다. 그 3년 동안은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아놓은 저축금으로 생활비를 쓰고, 임수의 월급은 최소한의 용돈과 공부비용을 제외하고는 저축을 하기로 했다. 목표금액을 모으는 것보다 막연한 불안함과 미안함을 없애기 위한 퍼포먼스의 의미가 더 강하다. 믿는 구석이 있기도 하다. 임수야말로 '70% 저축'에 최적화된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왜냐고? 임수에게는 저축을 방해하는 이른바 '저축 5적'이 없으니까. 1) 식사 후 마시는 커피습관이 없다. 2) 쇼핑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아~ 입을 옷이 없어"라는 말은 사실 "아~ 신상이 없어"라는 말이라던데, 임수의 옷장에는 정말 입을 옷이 없다. 진짜 없다.ㅎㅎ(11월 9일 주워가게를 노려봐야겠다!!) 3) 점심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닌다. 4) SNS를 별로 하지 않는다. 5) 무엇보다 저축의 목적(이른 퇴직!!)이 확고하다.

 

 

3년동안 우리는 함께 생활비 가계부를 쓰면서 소비패턴을 체크해나갈 것이고, 더불어 공부와 대화를 통해 마음의 상태도 살필 것이다. 그 과정이 녹록치는 않겠지만, "돈도 섞고 마음도 섞으면서 함께 의지하면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 131) 문탁 공동체 무진장의 앞선 발걸음에 기대며 가보기로 했다.

결국 '2024 제주 일년살이'의 꿈은 장렬히 전사했지만, 대신 (정임합목형) 무진장 실험을 낳았다. 실험을 마칠즈음이면, '2027 제주 일년살이' 혹은 다른 무엇으로 변용되어 다시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3년후쯤 정임합목 구성원은 전원 퇴직한다. 우리는 3년이라는 완충의 시간, 중간 지대를 건너며 잊지 않기 위해 애쓸 것이다. 돈은 욕망과 함수관계에 있다는 것, 불안함과 두려움의 대상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드문 변수이며, 보통은 욕망으로 인해 생기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 무엇보다 마음을 모으기로한 우리의 고민과 선택의 무게를 말이다.

 

댓글 12
  • 2023-10-31 22:33

    와앙~~~무진장이 정임들에게 이렇게 영감과 실험을 주다니요~~완전감동동~😍

    • 2023-11-01 10:34

      무진장을 소개해주시고 통찰을 주신 나은영 작가님~ 스페셜 땡스^^
      <나는 공동체로 출근한다> 두번째 읽으니 글이 더 더 좋네요^^

  • 2023-11-01 08:04

    늘 현실감각이 떨어져서 퇴직하기위한 선결과제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있었어요. 퇴직은 하고싶은데 선의를 받아드릴 마음도 온전하지 않다는 점을 이번 일로 알게되었습니다~미안함을 넘어 이상한 자존심마져도 함께 풀어야하는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함께 먹고산다는건 돈만이 아니고 마음도 함께 섞여야한다는 생각이 절실해졌어요~!
    중간지대 퍼포먼스에 의미를 부여해준 정화에게도, 영감을 준 무진장에도 감사를 표합니다 ~😍

  • 2023-11-01 09:24

    그대들, 진짜 힙하다!!
    완죤 리스펙^^

    글구 내가 뭐라도 보탤게. 임수옷장 채우기? 꽃병 나눠주기? 언젠가 제주일년살이에 보태기?(이건 사적 야심이 들어가있음..ㅋㅋ)

  • 2023-11-01 09:40

    와~ 멋집니다!
    그런데 비급하나 더 알려드려요.
    무진장 만이 아니라 연대기금, 길위기금, 문탁의 회계 거의 모든 곳에서 서로의 돈을 섞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오셔서 자세히 보시면 더 많은 영감을 얻으실 듯.^^
    그러니.. 간혹 공부방에도 왕림해 주시옵기를..ㅎㅎㅎ

  • 2023-11-01 09:51

    와~~~~~
    두분 넘 멋져요!!

  • 2023-11-01 10:41

    정임합이 목이 되어가네요! 진짜 멋져부러~~~~^^

  • 2023-11-01 11:04

    두 분 넘 멋지네요! 제주도 응원합니다(사심가득?)!!
    D-5000 이라니. . 대단하십니다!

  • 2023-11-01 13:47

    무진장에서 오히려 배우러 가야 될 거 같아요. 응원합니다^^

  • 2023-11-01 14:31

    그렇게 체계적으로다가 난잡해질 수 있는 두분의 우정이 너무 부럽네요~ 저도 응원 보냅니다^^

  • 2023-11-02 14:09

    진짜 대단하네요^^ 2027년 제주 일년 살이 화이팅!

  • 2023-11-05 17:33

    그야말로 긴장감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이야기네요~
    읽으면서 응원도 하게 되고 기대도 하게 됩니다!
    멋져요~~~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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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어진
2024.05.10 | 조회 130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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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
2024.05.09 | 조회 120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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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2024.05.07 | 조회 258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160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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