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회) 머리카락 소동과 나이듦

먼불빛
2023-10-14 10:28
399

 

 

 

(글)먼불빛

문탁에서 2016년부터 공부해왔다.

2021년 양생프로젝트 공부하다가 책에 심하게 멀미를 겪었다.

원래 뭐든지 좀 늦되다. 멀티는 더더욱 안된다.

 

 

 

나는 원래 체구가 작고 동그란 얼굴 덕에 어려보인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나 작년 정년퇴직을 한 이후 일정하게 반복되던 루틴이 사라지자 나는 부쩍 더 늙어보였다. 나름 운동도 하고 바삐 지낸다고 했지만 일 할 때보다 활동량이 줄어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일 할때만 해도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언닌 아직 너무 젊어 보여, 더 일해야지...” 했는데, 늙음은 마치 나의 정년퇴직을 기다렸다는 듯이 가속적으로 덮쳐 왔다 온 몸으로. 온 몸에서 노화의 징후가 노골적으로 나타나 거울을 보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었다.

 

 

 

 

 

머리카락이 늙었다

 

 

그 중에서 얼굴의 팔자 주름도, 탄력 떨어진 팔뚝과 뱃살도 아닌 단연코 가슴 아픈 나의 나이듦의 징후는 바로 ‘머리카락’이었다. 아침 저녁으로 양치할 때마다 하얀 세면기에는 3초에 하나씩 머리카락이 뚝뚝 떨어진다. 샴푸하면서 샤워기 물 따라 빠져나가 수북히 쌓이는 머리카락을 보며, 이제 내 머리에 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세보는 일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우리집은 엄마, 오빠와 그리고 나, 동생까지 숱이 많고 윤기 있는 머리로 늘 주변의 부러움을 샀다. 있는 숱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인데 그 와중에 새로 자라나는 잔머리까지 많아 늘 삐죽삐죽 삐져나와 곱게 땋아지지 않을 정도로 넘치던 숱. “와! 너 지~인~짜 머리숱 많다”며 아이들도 놀라고, 미용실 원장님도 놀라 탄성을 지르던 탄력있고 윤기 넘치던 까만 머리. 엄청난 스트레스로 원형 탈모가 생겼어도 높은 회복력으로 원상복구되던 머리. 그 머리가 세월에 닳고 닳아 다 사라지고, 가늘고 탄력없는 센 머리카락이 되어버렸다. 한 때 건강과 젊음의 지표였던 머리카락이 이제 늙음의 지표가 되어버렸다.

 

 

그런 까닭에 내게는 이 머리카락의 늙음은 설상가상에 속하는 일,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이리저리 인터넷을 폭풍 검색하여 가늘어진 머리카락을 보호한다는 이태리제 샴푸를 플랙스했고, 탈모 방지와, 머리카락을 보호하는 각종의 관리 기술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탈모라던가 가늘어진 머리, 허옇게 세는 머리는 병도 아니요, 관리 부족도 아니요, 그저 모두 늙음, 나이듦, 노화라는 단어로 수렴되었다. 그러니 머리카락을 심을 일도, 돈들여 두피 케어를 받을 일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물론 돈 좀 들이면 지금 보다 나으려나?.. 그런다고 왕년의 머리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결국 나는, ‘염색은 하지 않는다’, ‘샴푸는 저자극성, 약산성을 쓴다’, ‘린스나 트리트먼트도 하지 않는다’, ‘부드러운 솔빗으로 살살 빗어준다’...같은 뻔한 결론을 정리하면서 머리카락 노화 대응에 시들해지고 말았다. 이제 새로운 결심을 위해, 혹은 팍팍함에 지쳐 ‘에라 기분 전환이나 하자’며 미용실로 달려 갈 낭만이나 호기는 부리지 못하겠구나 생각하니 뭔가 마음이 메말라지는 듯했다. 그리고 왜 그렇게들 한사코 뽀글파마들만 하시는지 의아했던 것들이 가슴에 팍팍 와닿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 순간이 내 차례까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시간은 나의 착각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공평하게도 말이다.

 

 

머리카락 참극

 

그러다 사단이 났다.

정년퇴직 후 생계형 취업에 성공하여 첫 출근을 준비하던 올해 어느 날 아침, 조금 이른 시간에 샴푸와 샤워를 하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린 후, 나는 오랫만에 잘 쓰지 않던 롤빗을 잡았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뒤통수와 정수리께 폭 가라앉은 머리카락들을 좀 살려봐야지... 하는 욕망에 이놈의 얇디얇은 머리카락을 롤빗에 찬찬히 자~알 말은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아뿔싸 너무나 잘 말은 탓에 머리카락이 롤빗에서 풀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러다 큰 일 나겠다 싶어 머리카락을 살살 달래어가며 빼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정수리에 롤빗을 얹은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1시간 동안 실삔으로 빗에 돌돌 말려 있는 머리카락을 빼보고, 트리트먼트도 해보고, 빗살을 가위로 잘라내며 엉킨 머리를 풀어내기 위해 온갖 실갱이를 다 해보았지만, 머리밑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고개도 아프고, 분명 슬픈데 내 꼴은 너무 우스꽝스러웠다. 시트콤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 않은가. 최악은 롤빗에 엉킨 머리를 가위로 싹뚝 잘라내는 일, 생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미용실이 문만 열었어도 보자기로 머리를 싸매고 쫓아갔을지도 모른다. 머리카락만 온전히 사수할 수 있다면 부끄러움 따위가 문제랴. 그러나 야속하게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다. 결국 출근 마지 노선의 알람이 울리자, 다급해진 나는 눈물을 머금고 롤빗과 함께 엉켜있는 머리를 가위로 싹뚝 잘라냈다. 젠장! 뭉툭하게 짤린 머리를 허겁지겁 감추고 쓰린 속마음을 다스릴 시간도 없이 뛰쳐나갔다. 아, 오늘의 이 불행은 그놈의 싸구려 빗 때문인가, 내 얇은 머리카락 때문인가, 아니면 도움의 손길을 찾을 수 없는 독거의 고독한 참상인가!

 

나이듦도 서글픈데, 머리카락 절단났네

 

다이소빗 싸서썼네, 롤말다가 사단났네

 

한올한올 소듕한데, 수백가닥 절단났네

 

애통하다 머리카락, 원통하다 머리카락

 

웃어야 할까나 울어야 할까나

 

위 두어렁셩 다링디리.... 얄라리 얄라...ㅠㅠ

 

 

퇴근 후 나는 욕실 앞에 한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욕실 바닥에는 검은 머리가 뒤엉킨 채 패대기쳐져 있는 빗,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들, 가위에 잘려 사방으로 튕겨져 나간 빗살들이 아침의 사투가 얼마나 처참했는지 비디오 장면처럼 펼쳐져 있었다. 그깟 머리카락이 뭐라고 그리 오랫동안 실갱이하며 시간을 허비했는지, 어이없고 슬프고 창피하면서도 쓸쓸한 마음을 쓸어내려 보지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괜히 싸구려 다이소 롤빗 탓을 하며 욕실 바닥을 정리한다. 아, 품위없는 나이듦이여. 우아하게 늙을 수는 없는 거니?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토록 슬프고, 때로 추접스럽고, 비참해질 수 있는 그런 것이구나. 

 

 

주름살 기여분

 

충격이 조금 누그러진 어느 날 나는 딸에게 “글쎄.. 이런 일이 있었단다...세상에...블라블라블라...휴..죽는 줄 알았다...나 덕분에 3분 지각했잖아, 첫 출근에..”하며 그날의 참상이 담긴 사진을 날렸다. 딸은 당장 내게, “헉...엄청 잘려나갔네..머리 괜찮아?” 하더니 “그러게 내가 그놈의 다이소 빗 버리라고 했잖아...엄마!!! 어휴, 안돼겠다. 내가 당장 D사의 에어랩을 사줄게. 엄마, 그걸로 머리도 말리고 손질도 해, 롤빗 없어도 돼. 아주 좋아~~”. 딸은 성격대로 위로와 빈축과 대안까지 원스톱으로 내놓았다. “아니 괜찮아, 이번에 롤빗 좋은 걸로 샀어..그 비싼걸...뭐하러 그런데 돈을 쓰니?.. 사지마!” 했더니 “안그래도 어버이날 선물 뭐할까 했는데, 그걸로 하지 뭐” 하면서 보기에도 품위 있어 보이는 D사의 그것을 어느날 사위와 함께 사왔다. 물론 내 얼굴에 생긴 번뇌의 팔자 주름 기여분을 따져 보자면 딸 몫이 50%(?)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러니 받아도 돼.

 

처음엔 얼떨떨 했다. ‘저걸 내가 쓸 수 있을까?’ ‘자주 쓸까?’ 싶었다. 그런데 써보니 신기하게도 절로 머리카락을 롤에 말아주면서 컬이 살아나 없던 숱도 생긴 것처럼 머리가 풍성해졌다. 일순간 잘려나간 머리카락의 비통함과, 세월 앞에 장사 없다며 늙음에 한탄하던 쓸쓸함이 사라지는 듯 했다. ‘신기한 기술일세...’ 이제 머리숱과 탄력있는 머리카락 대신 값비싼 D사의 최신 제품이 부러움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게는 이게 보톡스 같고, 상하안검 수술 같은 것이랄까? 하하. 제품 덕인지, 효심 덕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울의 나락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머리카락 소동극을 겪으며 늙음 주변에서 얼쩡거리기만 했던 나는 왠지 이제 한가운데로 쑥 들어온 느낌이다. 생각해보면 노화란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일이고, 나이듦의 지혜란 몸과 마음의 협응을 천천히 조율해 가는 일일 것이다. 분명 어느날 갑자기가 아닐진데, 어느날 갑자기 배신처럼 느끼며 맞게 된다. 그리고는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는 몸에 대해 분노한다. 아주 단순한 동작으로 몇초만에 해결될 일이 그놈의 몸과 마음이 어그러지면서 느려지는가 하면 엎지르고, 떨어뜨리고, 삐긋거리고 한탄하면서 비로소 늙음과 마주서게 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노화를 받아들이는 일은 절대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나는 애써 생각해본다. 그래도 이만한 게 어디야. 운이 좋았어. 60이란 나이를 온갖 위기를 넘겨가며 살아왔잖아. 머리카락 소동 덕에 한 고비 얼렁뚱땅 넘긴건지도 몰라. 다행이다 생각하며 늙어가지 뭐. 아직은 하고 싶은 일도 있고, 해야 할 일도 있고. 행운이지 이만하면. 딸 덕에 D사의 제품도 가졌고, 까짓 화장으로 주름이 지워지지 않으면 어때? 난 늙었잖아. 그럴 나이잖아. 안그래? 하하 하하하....

D사의 제품으로 조금은 풍성해진 머리카락을 좌우로 흔들며 거울을 본다. 양손바닥으로 볼을 탁탁 두둘기며 속삭인다. ‘됐어, 괜찮아 좋아!’

댓글 5
  • 2023-10-15 04:11

    ㅋㅋㅋ 웃으며 읽었어요~

  • 2023-10-16 09:11

    웃프다는게 이런거군요 ㅋㅠ
    저도 풍성하고 윤기나던 머리카락이 다 어디로간건지
    아마 세월따라 날아갔나봅니다 ㅎㅎ

  • 2023-10-16 19:13

    '생각해보니 노화란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일이고, 나이듦이란 몸과 마음의 협응을 천천히 조율해가는 일일 것이다. 분명 어느날 갑자기가 아닐진데, 어느날 갑자기 배신처럼 느끼며 맞게된다' 저는 노화와 나이듦을 비교한 이 부분이 좋았어요. 저는 아직 실감은 안나지만... 저도 어느날 갑자기 맞이하게 될까요.? ㅎ

  • 2023-10-25 13:25

    영업 성공하셨어요!! 저희도 D사 A제품 구매하렵니다ㅎㅎㅎ

  • 2023-10-25 20:53

    ㅋㅋㅋㅋ 😆 샘, 구루프 만 머리하고 공부하러 오시길~

기린의 걷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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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퍼거는 귀여워
  그 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감자가 한 50일쯤이었을까.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뽀시래기 시절,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감자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 앉아 다리 위에 아이를 끼워놓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른 아이는 나른하게 누워있고,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 그때 감자는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등줄기부터 짜르르 행복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감자를 낳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회복이 늦어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었고,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처음 눈이 서로 딱 마주친 그때. 나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그날부터 감자 입덕기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생각한다. “호옥시... 우리 아이가 천재?” 누구나 에겐 판단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아이만 보이는 시절이 있었더랬다. 첫 뒤집기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다 싶다. 태어나서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꼬물거리고, 울고, 웃었다. 그때는 손가락만 쥐었다 펴도 대단해 보인다. 그런 아이가 뒤집기라니!! 혼자서 뒤집다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아이가 뒤집었어요.” 동네방네 플래카드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1~2개월이 뭐라고, 인터넷에는 질문들이 가득하다. ‘6개월이 지났는데…. 우리 아이 왜 뒤집기를 안 할까요’부터 ‘6개월인데 벌써 일어나 앉았어요’까지....
  그 날은 평범한 오후였다. 감자가 한 50일쯤이었을까. 분유 냄새가 폴폴 나는 뽀시래기 시절, 남편은 출근하고 나는 감자랑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에 앉아 다리 위에 아이를 끼워놓고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었다. 배부른 아이는 나른하게 누워있고, 모처럼의 평화로운 분위기. 그때 감자는 내 눈을 정확하게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등줄기부터 짜르르 행복감이 느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감자를 낳고 밤낮으로 잠도 못 자고, 회복이 늦어서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했던 나날들이었다. 내 배에서 나왔지만,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났고, 나중에는 정신이 없었고, 씻지도 먹지도 못해 사랑스러움을 느낄 새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처음 눈이 서로 딱 마주친 그때. 나는 속절없이 사랑에 빠졌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라니. 그날부터 감자 입덕기가 시작되었다.    아이가 어렸을 때는 생각한다. “호옥시... 우리 아이가 천재?” 누구나 에겐 판단력을 상실하고, 자신의 아이만 보이는 시절이 있었더랬다. 첫 뒤집기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다 싶다. 태어나서 한 줌밖에 안 되어 보이는 아이가, 조금씩 자라고, 꼬물거리고, 울고, 웃었다. 그때는 손가락만 쥐었다 펴도 대단해 보인다. 그런 아이가 뒤집기라니!! 혼자서 뒤집다니!! 놀랄 노자가 아닐 수가 없다. “우리가 아이가 뒤집었어요.” 동네방네 플래카드라도 붙이고 싶은 심정.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1~2개월이 뭐라고, 인터넷에는 질문들이 가득하다. ‘6개월이 지났는데…. 우리 아이 왜 뒤집기를 안 할까요’부터 ‘6개월인데 벌써 일어나 앉았어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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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5 | 조회 217
가마솥의 59년생 서른살
     동창회 모임은 딱 한군데 나간다. 고등학교 3학년 반모임이다. 사회에 첫발을 디딜 즈음에 시작한 모임이니 얼추 한 사십년은 되었다. 모이면 하등 의미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학교 다닐 때 성적, 물론 충격적인 점수를 받았던 수학점수 등으로 이야기를 출발해서 세계 평화를 논하고 손주들 자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마무리 시간이 된다. 요즘은 내게 은퇴후 생활에 대해서 묻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10여년 전 고기리 우리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내가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고 또 평창 집을 가꾸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두었거나 은퇴한 지 서너 해가 되었는데, 미리 생각했던 전원주택 혹은 텃밭정도 가꾸는 시골살이를 이런 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고 꿈만 꾸고 있는 녀석들이다. 한 녀석이 대뜸 목소리 톤을 높인다. “니들, 농사 지어봤냐? 니들처럼 시골 출신이면서 공부 잘 해서 손에 흙 묻히지 않은 놈들이 꼭 귀농한다고 설치더라. 난 농사라면 징글징글해서 때려 죽여도 안한다. 그 돈으로 그냥 사먹는 게 훨씬 싸다!” 녀석 참, 성질 급한 것은 여전하다. 내가 겪은 경험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회사 대리 시절에 직속 과장이었던 선배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당시 사장은 좀 괴팍한 사람이었는데, 학벌도 좋고 인품도 바른 그 선배를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심하게 대했다. 임원회의 때마다 업무 성과를 핑계로 그 선배에게 이야기하는 톤은 옆자리의 우리들도 견디기 어려운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 내곤 하였다. 급기야 그 선배가 원형 탈모 증세를...
     동창회 모임은 딱 한군데 나간다. 고등학교 3학년 반모임이다. 사회에 첫발을 디딜 즈음에 시작한 모임이니 얼추 한 사십년은 되었다. 모이면 하등 의미없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학교 다닐 때 성적, 물론 충격적인 점수를 받았던 수학점수 등으로 이야기를 출발해서 세계 평화를 논하고 손주들 자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마무리 시간이 된다. 요즘은 내게 은퇴후 생활에 대해서 묻는 친구들이 더러 있다. 10여년 전 고기리 우리집에 놀러 온 친구들은 내가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고 또 평창 집을 가꾸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은퇴를 앞두었거나 은퇴한 지 서너 해가 되었는데, 미리 생각했던 전원주택 혹은 텃밭정도 가꾸는 시골살이를 이런 저런 이유로 실행하지 못하고 꿈만 꾸고 있는 녀석들이다. 한 녀석이 대뜸 목소리 톤을 높인다. “니들, 농사 지어봤냐? 니들처럼 시골 출신이면서 공부 잘 해서 손에 흙 묻히지 않은 놈들이 꼭 귀농한다고 설치더라. 난 농사라면 징글징글해서 때려 죽여도 안한다. 그 돈으로 그냥 사먹는 게 훨씬 싸다!” 녀석 참, 성질 급한 것은 여전하다. 내가 겪은 경험을 그에게 이야기했다.        내가 회사 대리 시절에 직속 과장이었던 선배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당시 사장은 좀 괴팍한 사람이었는데, 학벌도 좋고 인품도 바른 그 선배를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심하게 대했다. 임원회의 때마다 업무 성과를 핑계로 그 선배에게 이야기하는 톤은 옆자리의 우리들도 견디기 어려운 모욕적인 언사를 쏟아 내곤 하였다. 급기야 그 선배가 원형 탈모 증세를...
가마솥
2024.05.25 | 조회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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