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연대기 #3- 종로에 데뷔하다

문탁
2023-10-06 08:45
364

 

 

 

 

 

해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국을 탈주한 퀴어다.

판에 박힌 일상과 화폐 증식의 압력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 공부를 시작했다.

 

 

 

서울에선 누군가와 연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와 같은 성향의 친구들도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한 잡지 커버의 “호모”란 단어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데이 서울”이었다. 남성 동성애자들이 변태 성욕자로 등장하는 선정적이고 과장된 기사였지만 난 선데이서울이 고마웠다. 공중파 방송에서도 비슷한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정보들을 짜깁기한 끝에 종로3가에 남성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극장과 지하 술집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극장에 가기로 결심한 날 내 심장은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날 보고 있을 것 같았다. 매표소를 빙빙 돌다 돌아오는 일이 몇 번 반복되었다. 식은 땀을 흘리며 겨우 들어갔다.  구석에서 곁눈질만 하다가 나오곤 했다. 만남의 방식이 낯설었지만 종로라는 공간이 있다는 게 기뻤다. 

 

90년 대 초 동성애자들이 종로에 있는 은밀한 공간에 얼굴을 내미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사건을 ‘종로에 데뷔’했다고 표현했다. 데뷔 년도는 상대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정보였다. 이름이나 학교, 직장, 사는 동네 등은 대놓고 묻지 않았다. 웬만큼 친해져 신뢰할 수 있을 때까지는. 나처럼 갓 데뷔한 20대부터 장년층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백수들도 눈에 띄었고 소수지만 정해진 거처 없이 반노숙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발렌타인 30년산을 파는 지하 술집엔 돈이 꽤 있거나 결혼한 중년들이 드나들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 동성애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했다면 선데이서울의 기사 제목처럼  변태적 욕망을 가진 “호모”일 뿐이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수용인지 체념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동성애자들은 자신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무수한 은어들을 발명했다. 자기바하적 언어 없이는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워 보였다. 사람들이 술자리를 파하고 돌아갈 무렵 종로는 깨어나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원에서의 크루징과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지하 술집에서의 유흥이 낯설고 기괴했다. 난 적응하기 어려웠고 적응하고 싶지 않았다. 

 

 

 

종로3가의 대표적인 게이바 "프렌즈"의 천정남님 인터뷰(https://www.sqcf.org/blog/?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Nzt9&bmode=view&idx=3612737&t=board)

 

 

 

종로에서 두번의 연애를 했다.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 사람이 세상의 전부로 여겨졌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상대들은 나와 달랐다. A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연애 경력이 몇 번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술에 취해 자신은 남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달라질 것이라고 울부짖었다. 곧 종로에 발길을 끊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B는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결혼을 할 거라고 했다.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했지만 난 그가 여성과 사귀거나 같이 사는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자신을 수용하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과의 연애는 짧은 인연으로 끝이 났다. 친구를 만들었지만 친밀감을 느끼기 어려웠다. 한 친구는 나중에 본인이 갓 결혼을 했음을 밝혔다. 그는 나를 포함한 알고 지내던 친구들에게 수첩에 있는 자신의 삐삐 번호를 지우라고 ‘명령’했다. 자신은 다시는 종로에 나올 일이 없으니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과민반응에 화가 났지만 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나도 그만큼 가슴 졸이며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이 두려워 비밀을 옷섶에 한가득 감추고 나온 사람들 사이에서 달달한 연애가 싹트거나 신뢰에 기반을 둔 우정이 생겨나기 쉽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난 종로를 등질 수 없었다. 종로는 들끓는 에로스와 끈끈한 우정을 기대하며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기대가 번번이 무산되더라도 말이다.  

 

 

‘이중생활’로 몸과 마음은 긴장 모드 상태였다. 이 긴장감을 해소할 뚜렷한 해법은 없었지만 종로 밖 세상에서 나를 조금이라도 드러낼 방법을 찾고 싶었다. 상담을 받기로 했다. 먼저 심리 검사를 받았다. 수 백 개의 검사 문항 중 성지향성을 묻는 질문이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고 나서 상담이 시작되었다. 상담사가 나의 성정체성에 관한 결과를 얘기해 주길 기다렸다. 난 고백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결과를 쭉 설명하다 마지막에 주춤했다. 내가 남성성도 강하나 섬세한 면이 있다는 식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불분명하지만 동성애자와 상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건 분명했다. 이 일 이후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는 여성과 성관계를 시도하라는 어이없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모욕적으로 느껴졌다.  나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서른을 넘기게 되자 종로 밖의 세상은 내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난 소위 결혼적령기가 되었고 아파트 전세를 마련한 상태였다. 직장 생활도 안정기에 접어 들었다. 다들 결혼을 해야 한다고 성화였다. 서른이 넘도록 여자친구 한번 사귀지 않는 나를 걱정하고 손주를 고대하는 어머니를 실망시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가족과 인연이 끊어질 각오로 커밍아웃할 용기는 없었다. 가족들이 나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것은 사회적인 낙인 이상의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일기장도 자물쇠가 달린 걸 썼다. 가족들이 방문했다가 우연히라도 들춰 볼까 염려되어서였다.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음에도 가족들에게 뭔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줘야 했다. 맘에 1도 없는 선자리에 몇 번이나 나갔다. 당시만 해도 결혼 제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남성은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이 있을 거란 오명을 썼다. 그 뿐 아니라  이는 가부장의 위치가 주는 사회적 특권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선 이혼할망정 결혼은 한번 해야 남은 인생이 편하다는 농담까지 있었다. 어쨌든 공개적으로 남성성을 증명한 셈이니까. 

 

 

 

 

난 고등학교 때부터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해 불편함을 느꼈다. 교련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술자리에서 군대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귀를 막았다. 마초적 남성들을 속으로 비웃었으나 돌이켜 보면 스스로 믿었던 만큼 가부장적 위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대학교 때부터 집안의 호주이자 가장이 되었다. 졸업 후 그간 의무를 다하지 못했단 찜찜함을 털어내고 싶어 집에 돈들어가는 일은 주로 내가 감당했다. 거기엔 능력있는 가장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숨어 있었다. 나는 또 가족을 갖고 싶었다. 4인 대신 2인의 스위트 홈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림 같은 이층 집은 못짓더라도 서울 한복판에 내 명의의 아파트를 사고 거기에 달콤한 가정을 들이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인연이 찾아온다 해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그런 관계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지만 2인가족의 꿈을 놓지 않았다.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가부장적 권위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면서도 그것이 발명해 낸 가족제도 안으로 들어가고픈 욕망이 숨어 있었다. 그게 모순이었지만 에로스적 기운이 넘쳐났던 청년은 주어진 조건에서 무언가를 꿈꾸고 싶었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다는 기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댓글 1
  • 2023-10-06 09:47

    저는 쌤 글이 항상 차분하고 따뜻해서 좋아요! 쌤이 스스로 발명해나가는 세상을 응원합니다~~ 이번주에는 차분히 줌에 들어갈거에요 오랫만에 봬요~^^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나와 당신의 책임   10년 전,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 쓰인 멋진 슬로건들을 생각하고 있자면, 만든 이를 찾아가 박수를 쳐 주고 싶어지곤 한다.전기를 소비하는 곳에는 책임이 있다. 전기를 생산하고 송전하는 곳의 고통에 대한 책임이다. 그 책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슬로건이 있었다 .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또,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였던 송전탑 반대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데에 기여했던 슬로건도 있다.   "우리 모두가 밀양이다"   누군가가 당사자이고, 누군가는 당사자가 아니라고 규정할 수 없게 되어 버린 에너지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 냈다.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말이다. 이 슬로건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운이 좋게도 끝없이 확장되는 사회 운동을 경험했다. 설령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밀양이 아니더라도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운동이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밀양은 졌다. 높이 100m짜리 송전탑은 어디를 가도 피할 수 없다. 밭일을 할 때도, 병원을 가기 위해 마을 길을 걸을 때도, 캄캄한 밤 안방 창문에서도 쇳덩어리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낮 쇳덩어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저 철탑에는 핵 발전소에서 만들어진 전기가 흐른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다고 상상해 보아도, 마주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송전탑에는 돈으로 갈기갈기 찢긴 마을 공동체의 상처가 묻어 있다. 38만 명의 경찰이 투입되어 사람을 짓밟았던 폭력의 상처, 함께 싸우다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 2014년, 2차...
남어진
2024.05.10 | 조회 175
일상명상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덕밍 아웃, 그 후   지난 글에서 호기롭게 덕밍 아웃을 했지만 명상에 빠져든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던 것은 아니다. 명상에 빠진 것은 결과지 이유는 아니니까. 하여 명상이 처음부터 함께 있으면 편안하고 좋은 친구와 같다고 했지만 정작 누군가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다면 제대로 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 그냥 좋으니까 좋았다는 식의 동어 반복을 되풀이하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우리가 무언가에 꽂힐 때 그 이유를 다 알아서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어떤 것에 마음이 불꽃처럼 호응할 때 그저 속절없이 빠져드는 게 아닐까. 처음엔 빠져든 이유를 잘 모르는 터라 경우에 따라 ‘입덕 부정기’를 겪기도 하면서 말이다. 대개는 빠져든 다음에야 그 이유를, 스스로가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발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이유 덕분에 다시 그 대상을 더 깊이 애정하게 되는, 다이내믹한 순환이야말로 덕질의 진정한 묘미가 아닐지.     나도 명상의 경험이 쌓이면서 이른바 덕질의 묘미를 맛보고 있다. 명상이 뭔지도 모르고 매달리듯 빠져들었다가 이제야 차츰 명상이 뭔지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명상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나 많은 쓸데없는 생각들에, 그렇거나 많이 휘둘리고 있는 줄 몰랐다. 그 때문에 명상을 통해 처음 경험했던 침묵과 평온이 그토록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는지도. 만약 명상이 아니었다면 일 년 365일, 꺼지지 않는 텔레비전처럼 소란스런 정신적 수다 때문에 괴롭다는 걸 영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 순전한 무지에서 벗어난 순간, 마치 세상의 비밀을 다...
오영
2024.05.09 | 조회 163
K장녀_돌봄을 말하다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언젠가 엄마의 구술 생애사를 써볼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엄마의 삶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손녀딸이 인터뷰를 시작하긴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진행을 못해서 좀 아쉽다. 이렇게 빨리 엄마가 기억을 잃고 이야기를 못하게 될 줄 그때는 몰랐다.       산업화세대 워킹맘   10년 전쯤 아버지가 대장암 재발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계실 때 엄마는 병원간호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혈관이 잘 안 나오는 아버지에게 혈관 주사를 놓으려면 꽤나 힘이 들었는데 엄마가 곧잘 혈관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1935년생인 엄마는 간호사이자 조산사였다. 엄마가 간호사 면허번호를 말하면(0000번 대) 간호사들(면허번호 000000번 대)은 깜짝 놀라며 ‘선배님’이라 불렀다. 엄마는 은근히 그걸 즐기는 듯했다. 대학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하던 엄마는 결혼하면서 그만두었고, 시골학교 교사인 아빠의 고향에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도왔다고 했다.   엄마는 의대에 가고 싶었다. 중학생 때 친엄마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새엄마가 들어오셨는데 엄마가 의대 가는 걸 반대해서 간호학교에 갔다. 동생인 삼촌 두 분은 의사다. 엄마 세대, 즉 산업화 세대에 많은 딸들은 아들들을 위해서 진학을 포기하고 산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남동생을 위해 희생한 누나들.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딸이었기 때문에 원하는 의대에 갈 수 없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엄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내 또래는 대부분 형제가 4~5명 정도 된다. 유독 우리집은 형제가 오빠와...
인디언
2024.05.07 | 조회 308
기린의 걷다보면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지난 1월에 마포 난지생명길 1코스를 걸었다. 쓰레기산이었던 난지도 공원을 숲으로 만든 이야기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를 읽고 찾아가 본 둘레길이었다. 그 때 노을 공원에 자리한 ‘나무자람터’에서 키운 묘목을 공원의 경사지에 심는 자원봉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숲과 숲을 개미집처럼 이어주는 ‘1천명의 나무 심는 개미들’ 활동이었다. 언젠가는 직접 나무를 심어보고 싶어서 활동 신청을 했고 905번 개미로 신청되었다는 연락도 받았다. 무리개미, 개별개미, 수시개미 등으로 분류해서 가능한 날짜에 신청하라고 매달 초에 문자로 공지가 왔다. 5월 공지에서 토요일 오후 2시 개별개미 활동 신청을 받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 세미나 방학이라 5월 4일 토요일 활동에 참가 신청을 했다.    토요일 오후에 난지공원을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헤맬 것을 예상하고 일찌감치 나섰다. 9호선 당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0분이면 충분하다는 네이버 지도의 안내를 믿었다. 당산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시간이 12시 반, 근데 버스 정류장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난지 공원 주변으로 상암 올림픽 경기장, 하늘 공원, 노을 공원까지 여러 행사들이 연이어 열리는 모양이었다. 겨우 버스를 탔는데 30분이면 된다던 거리가 한 시간이 넘게 걸리도록 막혔다. 집합 장소에 도착하니 2시 10분이 지나있었다.      회사에서 신청해서 왔다는 일가족 세 명, 개별로 신청한 네 명, 교회청년회 봉사활동으로 참가했다는 청년들 다수가 오늘의 참가자였다. 나처럼 개별로 왔다는 분은 노을 공원에 이렇게 아카시아가 많은 줄 몰랐다고 감탄을 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던 나도 그제야...
기린
2024.05.06 | 조회 180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재개발 구역의 고양이들 | 2편           동물의 의례   초코는 지붕 위에 앉아 있었다. 불러도 가까이 오지 않고 햇볕을 쬐다 일어나더니 한쪽 다리를 절룩이며 걸었다. 왼쪽 뒷다리는 굽어 있었고 굽은 다리로 바닥을 간신히 딛고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는 다친 다리를 허공에 들고 걸었다.   초코는 골절된 다리로도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다른 고양이들과 잘 어울렸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좀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초코를 치료하기 위해 포획틀을 설치했지만, 초코 대신 엉뚱한 고양이가 들어왔다. 봉봉오리님은 포획틀에 갖힌 초코의 단짝 고양이 카레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말 속 터지는 희극'이라고 했다. 『지구에 살 자격』에는 <멀리서 보면 비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사람들은 재개발구역에서 돌봄하는 것이 무조건 슬플 것이라 생각한다. 멀리서 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이들이 마냥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재개발구역이 조금 이상한 곳이라 그럴지도 모르다. 나는 그곳에서 평소보다 훨씬 많이 웃는다. 그들이 서로를 돌본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내염을 오래 앓아 밥을 먹을 때 힘들어하는 카레의 곁에는 늘 먼저 음식을 양보하는 초코가 있다. 둘은 추운 날 하나의 겨울 집에 들어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다. 몸이 관통 당하는 큰 부상을 입었던 8개월의 오잉이는, 피를 흘리며 몸을 숨겼던 일주일 간의 시간 동안, 혀가 닿지 않는 그의 상처를 핥아준 형제들이 있었다. 『지구에 살 자격』, 145쪽   밥그릇...
경덕
2024.05.01 | 조회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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